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변색렌즈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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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활동을 한다면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외선이다. 자외선은 파장이 400nm보다 짧은 빛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졌기 때문에 인체에 자극을 준다. 여름에 밖에 나갈 때 자외선을 막아주는 선크림을 꼭 챙겨야 하는 이유다.
▲ 광변색 렌즈가 적용된 선글라스 (출처: 위키커먼스)
자외선은 피부와 함께 눈에도 영향을 끼친다. 광각막염처럼 각막에 화상을 입히기도 하고, 황반변성을 유발하거나 백내장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각막에 흡수된 자외선이 염증 발병 위험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외선이 눈에 나쁘지만 선글라스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안경을 쓰는 사람이 그렇다. 안경과 선글라스를 함께 가지고 다니며 번갈아 쓰는 건 꽤 귀찮은 일인 탓이다.
그렇다면 안경 하나로 선글라스와 일반 안경 역할을 동시에 할 수는 없을까? 그런 수요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렌즈가 바로 변색 렌즈다. 햇빛이 밝은 곳에선 색이 어두워지고 햇빛이 없는 곳에선 다시 투명해진다. 빛에 반응해 색이 변하는 특징 때문에 감광 렌즈나 광변색 렌즈 또는 조광 렌즈라고 불리기도 한다.
변색 렌즈,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 핵실험 관계자용 안구보호 고글 (출처: 미국 로스 알라모스 국립 연구소)
사용하는 사람이 적어서 최신 기술처럼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변색 렌즈는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냉전 시대 전반기(1947~1968)에 핵무기 사용을 염두에 두고 개발이 시작됐다고 한다. 핵폭발 시 발생하는 강력한 빛으로부터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기능성 안경 렌즈가 필요했는데, 핵폭발로 인한 밝은 빛에 노출됐을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핵폭발로부터 눈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쓰지는 못했지만 이때 시작한 연구를 바탕으로 변색 렌즈가 나왔다. 1964년 미국 유리 제조사 코닝(Corning Glass Works)에서 최초로 개발한 유리 변색 렌즈다. 이후 1970년 독일 렌즈 제조사 자이스(Zeiss Group), 1978년 영국 유리 제조사 챈스 필킹톤(Chance Pilkington)에서도 유리 변색 렌즈를 개발하면서 서로 경쟁하게 된다.
앞다퉈 개발하긴 했지만 이 기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유리 변색 렌즈는 염화은(AgCl)처럼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할로겐화은(AgX)을 섞어서 만든다. 이 원소에 자외선이 닿으면 화학 반응을 일으켜 유리가 검게 변하게 된다. 변하는 것은 좋은데 변할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더군다나 유리라서 가격이 비싸고 무겁기까지 했다. 안경 렌즈는 도수에 맞게 오목하거나 볼록하게 만드는 데 각 부분의 두께에 따라 색이 달라져서 원하는 효과를 얻기도 어려웠다.
▲ 아메리칸 옵티컬의 선글라스 (출처: 위키커먼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플라스틱 변색 렌즈다. 1981년 미국 아메리칸 옵티컬(American Optical)에서 출시한 포토라이트 변색 렌즈가 첫 제품이다. 기대와 달리 이 제품은 실패했지만 여러 렌즈 제조사가 경쟁적으로 플라스틱 변색 렌즈를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 1991년 트랜지션스 옵티컬(Transitions Optical)에서 출시한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변색 렌즈가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변색 렌즈, 어떤 원리로 변하는 걸까?
이쯤에서 생기는 궁금증이 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색이 변하는 렌즈를 만들 수 있는 걸까?
유리 변색 렌즈는 앞서 말한 할로겐화은이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염화은(AgCl)이 빛을 받으면 광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자외선이 화학 결합을 끊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은 이온이 염소 이온에서 전자를 하나 넘겨받으면서 은 원소(금속 은)로 변하고 이렇게 은 원소로 변하면서 색이 검게 바뀐다(염소 대신 브롬이나 요오드가 있을 경우엔 갈색). 이 과정에서 자외선이 차단되고 빛 투과율은 떨어지게 된다.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hv는 빛을 뜻한다.).
예전에 사진이나 영화를 찍을 때 썼던 필름에 바르던 감광제가 바로 염화은이다. 빛을 받으면 검게 변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었다. 다만 변색 렌즈는 검게 변하는 걸로 끝나면 안 된다. 다시 투명하게 돌아와야 하는데, 어려울 것 같은 이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반대로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도움을 받는 것이 촉매로 첨가된 구리이온(Cu+)이다. 혼자 남은 염소는 자외선이 사라지면 구리 이온에서 전자를 빼앗아 다시 염소 이온으로 돌아간다. 전자를 7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 더 가져와서 안정된 8개를 만들려고 하는 염소 원자의 본능 때문이다. 이때 전자를 잃은 구리 이온(Cu2+)이 은 원소에게서 전자를 뺏어와서 은 원소를 은 이온으로 돌리면 다시 염소 이온과 은 이온이 결합해 염화은 상태로 돌아간다.
여기서 핵심은 유리에 섞인 상태이기에, 구리 이온 말고는 은 원소가 생기고 남은 염소 원소가 화학 반응을 일으킬 다른 이온이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구리에 전자를 잃은 은과 구리에 전자를 얻은 염소가 다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염화은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자외선 때문에 잠시 이혼했다가 구리가 중재를 해서 재결합했다고 해야 할까.
플라스틱 변색 렌즈는 염화은 대신 다른 광변색 염료를 사용한다. 피리도벤자옥사진(Pyridobenzoxazines)이나 나프토피란(naphthopyrans) , 스피로옥사진(Spiro-Oxazine) 같은 물질이다. 이 물질들은 자외선을 받으면 분자 구조가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자외선을 차단한다. 반대로 자외선이 사라지면 원래 구조로 돌아온다.
여름 휴가용 선글라스를 찾는 그대에게
초기 플라스틱 변색 렌즈는 플라스틱 소재에 광변색 물질을 섞었다. 이 때문에 두꺼운 렌즈는 유리 변색 렌즈처럼 색이 불균형하게 나타나는 문제가 있었다. 현재는 광변색 물질을 플라스틱 렌즈 표면에 코팅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렌즈 위에 광변색 물질 코팅을 하고 그 위에 보호 코팅, 흠집 방지 코팅을 하는 형태다.
현재 판매되는 변색 렌즈는 변색에 걸리는 시간도 짧아졌다. 옛날 렌즈는 검게 변하는 데 10여 분, 색이 빠지는 데 30분 정도 걸렸다면 요즘 변색 렌즈는 착색에는 30초 이내, 탈색에는 6분 이내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안경알이 아니라 코팅층만 색이 변하면 되기에 그만큼 빨라질 수 있었다. 여전히 핵폭발 속에서 눈을 보호하지는 못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문제없이 쓸 수 있는 수준이다.
▲ 오토바이 헬멧 바이저에 적용된 변색 플라스틱 렌즈 (출처: 쇼에이)
변색 렌즈를 찾는 사람은 안경과 선글라스를 겸용하고 싶거나, 빛에 약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자전거를 타거나 레저,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이 찾는다. 자동차 내부처럼 자외선이 차단된 상태에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자외선뿐 만 아니라 가시광선에 반응해 색이 변하는 변색 렌즈도 나왔다.
다만 어두운 터널 등에 진입했을 때 선글라스를 계속 착용하고 있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아직 운전자에게 권하지는 않는다. 또한 3~4년 정도의 사용 수명이 있으며, 온도와 자외선 수치에 반응하기 때문에 여름보다 겨울에 더 진하게 색이 변하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편리한 점이 있는 만큼, 다음에 안경 렌즈를 바꿀 일이 있다면 변색 렌즈를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