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직 정년후에 고향의 곡성의 '고달초등학교'에서
그러니,나의 이야기는 5 십 여 년 전의 나의 젊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시공(時空)을 거슬리어, 젊은 시절로 돌려 놓으니,나는 청춘이다.
청춘은 꿈이 있고, 나이도 젊고,건강하고,얼마나 즐거운 시절이겠는가?
현직에 있을때,어떤 상사분이 '젊음은 자산(資産)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나도 그 때가 4 십대의 나이 였으니, 남은 자산이 많은거나 다름이 없다.
그 분의 그 말씀을 나이가 먹어 가니, 이제사 겨우 이해가 간다.
나는 호남선의 완행열차를 무임승차로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에 들어가고자 노력을 한 결과
서울의 명문대 안암동의 k 대 였으나, 낙방을 하고 그 이듬해 서울의 다른 k 대에 합격하여
대학생활을 겨우 2 년 정도 하니, 시골의 노부모님이 모든 살림을 정리 하시고, 서울로 상경 하셨다.
이제는 가족 모두가 서울특별시 시민이 되는 것이다. 비록 마포구 도화동의 산8 번지의 꼭대기에
정착을 하였지만 ......
나는 이제 대학생의 꿈 많은 학생이 아니다. 당장 노부모님을 모셔야할 가장(家長)의 위치로
전락을 하여 ,둘째누나가 어떻게 하여 인쇄소의 '문선공'(文選工)의 견습공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인쇄소의 아는분을 통하여 대학까지 다녔으니,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이 아닌, 속성으로 글자를
선별하여 일을 할 수 있는 숙련공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여 주었다.
그곳이 서울시청이 있는 삼성인쇄소이다
그래서 3개 월 인가 약 5개 월 정도에 수습을 하여, 서대문에 있는'동아출판사'에 준 숙련된 기술자로
취직을 하게 된다. 처음 받아 보는 월급이다.
그래서 나이 많으신 노부모님을 부양을 하면서, 나의 길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고민하고 하여
인천교대 초등교육과정을 힘들게 들어가서 연수를 하여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얻게 되어 앞으로
경기도의 서해안의 섬으로 가서 나의 젊음을 바칠려고 하였다.
그때 시험을 준비하는데, 인쇄소에서 벌어 논 돈으로 내가 시험을 볼 때까지 생계를 유지하여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시험준비를 위하여 12 월 달인가? 1월달에 시험이 있는데,약 6~7개월간의
시험 준비 기간으로 생각이 든다. 추운겨울에 마포꼭대기의 방은 찬바람이 씽씽 불고 , 연탄불로 겨우
난방과 취사를 하면서 ,온돌이 따뜻한 아랫목을 피하여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날리는 겨울에 그 시험
준비를 하기 위하여 윗목에 있는 책상에서 사생결단을 하면서, 시험 공부에 매진 하였다.
어머니는 그 해 겨울철에 먹을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시골에 가서 시골의 쌀과 배추등을 몽땅 힘들게
가지고 오셔서 그런지,시름시름 아프기 시작 하신다. 드디어 온 몸을 움직이지 못 하시고 아랫목에
누워 계시게 되어, 그 이듬해 2 월달에 저 세상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병원에 한 번 못 모시고 , 무슨병인지도 모르고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그 처럼 자식을 위하여 노구의
몸으로 최선을 다 하였건만 ......
나는 나의 갈길을 이제야 찾았구나, 인천교대의 초등교사 과정을 마치고 ,이제는 꿈에 그리는 초등학교의
교단에 서서 내 젊음을 바칠수 있는 조건이 되었구나, 하고 안도의 쉼을 쉬게 되었지만...
그러나, 나의 꿈대로 이세상은 되지를 않는다. 어느 경기도 어느 서해안의 섬마을의 선생의 발령은
아애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늘도 너무 무심하다.
그렇게 하여 고향에서 올라오신 부모님을 부양하면서 자식 노릇을 할려고 해 보았건만,어머니는 시험공부
중에 작고 하시고,홀로 계시는 아버지하고 둘이서 같이 지내게 된다.
나는 이렇게 하여 꿈에 그리던 서해안의 '섬마을선생님'은 뒤로 하고, 다시 도서관을 찾아 오랜동안
공무원 시험준비로 ,서울시 공직의 길을 걸으며, 정년까지 가게 되며, 퇴직 후에 다시 나의 초등학교
교단에 서게 되는 꿈을 이룬다.
첫댓글 그때 꿈이 이루어지셨으면
유행가에 나오는
그야말로 섬마을선생님으로
인기만점이셨겠지요.
그래도 공무원으로서 보람있게 사시다 정년을 맞이하셨고
퇴직후 선생님이 되셨으니
참 잘 살아오신 인생입니다.
노후도 살아오신 세월만큼
행운이 가득한 삶되시길 빕니다.
베리꽃 방장님 ....
감사합니다 착한 섬마을 섬색시나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교육중에도 여자분들이 가까히 할려고 하데요
교사나 공부원이나 나의 천직으로....
다시 가도 이길을 가겠습니다
곡성 고달초등학교~
엎디면 코닿을 이웃 동네라
친근감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근무하시는지요?
배고프던 시절에 상경해
젊은시절 고생하며 이루어 낸 일들에
큰 자부심이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섬마을 선생님의 꿈을 이루지 못하셔서
아쉬움도 남으신거구요.
저도 만장봉님의 글을 읽으면서
섬마을 선생님 노랫말이 떠올랐습니다.ㅎㅎ
참 성실하게 살아오신 만장봉님은
지금도 한치 흐트러짐 없이 사실거 같아요.
2004년도에 서울시를 끝으로 ,고향의 곡성의 고달초등학교에서 계약제로 3개월 하였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7십대를 넘어 왔는데요
곡성 고달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겨울철에 남원으로 컴을 배우려
다녔던 추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젊었을때 추억으로 이러한 삶을 그려보면 ,다소 위안도 되구요
추억의 나래를 더듬어보고 즐거움으로 지낸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보면서 지금은 없는
하늘가신 큰오빠 생각에
눈시울 적십니다
독학 하시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섬마을 선생님 꿈을
이루지 못하셔도 시청공무원이
더욱 위대하십니다
존경 스럽습니다
고운밤 되십시요 ^^
감사합니다
저번의 댓글에 섬마을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셔서
이번에 그 사연을 그려보았습니다
큰 오빠가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공무원도 교사도 나의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했습니다
다시가도 이 길을 ....
선배님의 그파란꿈이 어머니 돌아가시고 결국에 아버님 모시려고 공무원이 되셨던 걸 알게되네요
지존 방장님 ...
감사합니다 섬마을 선생님은 수포로 돌아가고 ...
서울시 공직으로 ....
천직으로 알고 정년까지 잘 지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을 참 열심히 살아오신 당신께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형편이 어려우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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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온것 같습니다
이제는 고향에 주는 자연산천에서 공기를 마시고
고향의 아늑한 품에서 조용히 보내고 싶습니다.
생활하기는 불편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생 참 많이 하셨네요
그와중에 어머님도 하늘나라 가시구요
교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공직생활은
무사히 마치고 은퇴하셨군요
감사합니다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친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