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역 주변 명소
1.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
2.구성공원
3.영주동반구정
4.구학공원
5.제민루
6.삼판서고택
7.영주리석불입상
8.영주동석조여래입상
9.휴천리지석 및 입석
1.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경북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이다. 2018년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었다. 철도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는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로서,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으로서 보존과 활용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영주365시장, 옛영주역터 유적비도 가까이 있다.
영주역에서 2.6km(큰길) 2.3km(가까운길) 택시 4,200원
2.구성공원
영주시는 북으로 충북 단양, 동으로 봉화에 닿아있고 서로 문경, 예천과 접해있다.영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절이 많이 들어섰다. 영주에는 부석사, 소수서원, 희방사 등 태백산 정기가 가득 담긴 문화유산이 많아서 답사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편이다. 구성공원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영주2동 옛 산성 터에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구성산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 1,281척, 높이 9척이며 성 안에 우물이 있고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오르면 영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정상에는 가학루란 누각이 있다. 가학루는 관아의 외문루로 영주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1923년 이곳으로 옮겼다. 현판은 김규진의 작품이고, 뒷면은 영주 출신 강벽원의 작품이다. 그외 옛 명사들의 시판도 걸려 있다. 가학루에 오르면 북쪽으로 소백산 연화봉이, 남쪽으로는 학가산이, 동쪽으로는 문수산과 일월산이 바라보인다.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에서 1.2km 택시 3,300원
3.영주동반구정
반구정은 1392년에 고려말 괴산군수, 김해부사 등을 지낸 사복재 권정(1353∼1411)이 고려의 멸망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정자이다. 반구정이란 고려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안동 임하면 도목촌 북쪽 지어실(현 예안면 기사리)에 세웠으나, 후손들이 1720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평소에는 마루를 개방하지 않고 있지만, 들어 열 수 있는 문을 두어 개방시에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도록 마무리하였다. 반구정은 전체적으로 18세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구성공원 안에 있다.
4.구학공원
구학공원은 시가지 중심에 위치해 서천둔치 운동코스 4km와 연결되어 숲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많은 시민들이 운동과 여가를 즐긴다. 삼판서고택과 제민루가 있는 역사문화공간에 조성된 도심 속 산림휴양형 힐링공간이다.
5.제민루
삼판서고택 근처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고려 공민왕 때는 학교였다. 그러다가 허물어진 건물을 조선시대에 복원하여 지방의원으로 사용했다.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나오는 한약재를 이 건물에 보관하고 마을 주민들을 치료해주던 제민루는 조선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공립 지방의원인 셈이다.
구성공원에서 제민루 1km. 구학공원 안에 삼판서고택과 가까이 있다.
6.삼판서고택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의 생가로 불리는 이곳은 조선시대 세 명의 판서가 살던 곳이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살던 집인데, 그는 고려말 형부상서라는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형조판서다. 그후 정운경의 사위 황유정이 공조판서에 오르고, 또한 황유정의 딸의 아들 김담이 조선시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로인하여 세 명의 판서를 탄생시킨 뜻깊은 고택이어서 삼판서고택이라 이름 지었다. 정도전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말년에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여기 내려와서 지냈다. 현재 모습은 2008년 복원된 것이다. 영주 대홍수로 1961년 허물어진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복원시켰다.
제민루에서 삼판서고택 27m. 구학공원 안에 제민루와 가까이 있다.
7.영주리석불입상
영주 도서관 안에 있는 보물 제60호의 석불상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 작품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호각 안에서 보호되고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있는 불상으로, 머리가 없어지고 손은 손상을 입은 상태이다. 넓은 어깨와 양감있는 신체에서는 강건함과 탄력성이 느껴진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팔이 잘려나갔다. 양 어깨를 가리며 입은 옷은 배까지 U자형의 주름을 만들며 흐르다가 양 다리에서는 2개의 동심타원형으로 이어진다. 이런 표현은 영주석교리석불입상 등 통일신라시대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왼팔을 돌아 내려간 옷자락은 입체감과 유연함이 있어 훌륭한 조각솜씨를 나타내고 있다.
영주세무서 안에 있다.
8.영주동석조여래입상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은 남북국 시대 신라의 불상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116호 영주석교리석불상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불상은 발견 당시 목에는 금이 가고 발목 아래는 땅에 묻혀 불완전한 상태였으나 현재는 보수정비를 통해 양감이 강조된 발과 유려하게 흘러내린 옷자락 등 생동감 있는 세부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세련된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은 둥글고 우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몸에 꼭 붙은 오른팔이나 쳐진 어깨 등에서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양감있는 다리에서 생동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옷깃은 굵은 선으로 둥글게 표현하였다. 특히 양 다리에서는 각각 동심타원형의 주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동심타원형의 주름이 삼국시대 작품인 장창곡불보다는 형식적이면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보물 제71호)보다는 덜 형식적인 점을 볼 때, 만들어진 시대는 통일신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다소 이완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면도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긴장감 넘치고 우아하며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겠다.
삼판서고택에서 206m. 아이신나실내놀이터 옆에 있다.
9.휴천리지석 및 입석
지석묘와 입석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중에서도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과 기념물로 알려져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 형태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에서 발견된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부구조가 어떠한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입석은 다른 말로는 선돌이라고 부르며, 땅 위에 한 개 또는 몇 개의 큰 돌기둥을 세운 형태를 하고 있는데, 당시 부족간의 경계표시 또는 기념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추측된다. 이와 같이 고인돌과 선돌이 있다는 것은 이곳 일대에 과거 오래 전부터 우리의 먼 조상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특히 고인돌과 선돌이 함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예에 속한다.
영주동석조여래입상에서 594m. 영주우체국 건너편 현대카센터 근처 큰도로변에 있다.
영주역까지는 1.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