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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역사는 다시 한번 증명했다: 털빠진 봉황은 정말 닭보다 못하다는 것을
상원원년(760년) 칠월, 오랫동안 흥경궁(興慶宮)에 거주해오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가 태극궁(太極宮)으로 놀러갔을 때, 돌연 500명의 부대가 돌아가는 길을 막는다. 사병들은 칼과 검을 꺼내들었고, 빛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우두머리는 태상황(太上皇)에게 태극궁으로 옮겨서 거주할 것을 '요청'하였다. 확실히 이건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
이전에 두 차례의 정변을 일으키고, 혈우성풍 속에 살아온 태상황은 이때 등에서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린 당현종은 타협을 선택한다. 한번 여행한 것이 이사가 되어버렸다. 이들 병졸들의 '호송'하에 전혀 원하지 않게 그는 태극궁의 감로전(甘露殿)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왔던 옥진공주(玉眞公主), 진현례(陳玄禮)와 고력사(高力士)등이 심복이 차례로 그의 곁을 떠난다. 이제 태상황의 곁에는 완전히 낯선 얼굴들 뿐이었다.
아들 당숙종(唐肅宗)이 자신의 곁으로 모셔와서 '세심하게 보살피고 난' 후에 당현종은 우울함으로 병이 든다. 보응원년(762년) 사월 초닷새, 이 태상황은 태극궁 신룡전(神龍殿)에서 붕어한다.
다음 해 삼월, 당현종의 시신을 실은 영거(靈車)가 동쪽으로 가서, 동주(同州) 봉선현(奉先縣, 지금의 섬서성 포성) 경내의 금속산(金粟山)으로 간다. 거기의 능묘는 주인을 가디리고 있었다. 이 능묘가 바로 당나라때 관중십팔릉(關中十八陵)중 가장 동쪽에 있는 황제릉인 태릉(泰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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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천상황(逼遷上皇)"사건은 비록 환관 이보국(李輔國)이 스스로 나서서 벌인 일이긴 하지만, 사학계는 보편적으로 핍궁의 배후에는 당숙종 이형(李亨)의 묵인이 있었다고 본다. 이들 당현종, 당숙종 부자간의 은원은 유래가 깊다.
당숙종이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당현종은 이미 죽일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
당예종(唐睿宗)연간, 태자(太子) 이융기와 고모 태평공주(太平公主)와의 싸움은 이미 치열해졌다. 그때 마침 태자비 양씨(楊氏)가 임신을 한다. 이융기는 고모가 암중으로 나쁜 짓을 벌일까봐 우려하여 그는 심복 장열(張說)을 불러 대책을 논의한다. "태평공주는 내가 아이를 갖는 것을 원치 않을텐데, 너는 무슨 방법이 없느냐?" 그러나 장열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 아무런 아이디어도 내지 못했다. 이융기는 생각을 바꾸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먼저 낙태시키면 어덜까? 그러면 태평공주가 나의 약점을 어떻게 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악독한 사람의 사고방식은 왕왕 일반 사람과 다른 법이다.
낙태약을 닳이고 있을 때, 이융기는 연기를 마셨고, 황홀한 도중에 꿈에서 신인(神人)이 약탕기를 둘러싸고 도는 것을 보았다. 연속 세번이나 약탕기를 엎어버린다. 꿈에서 깬 후에 장열은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낙태시키는 일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구하는 꿈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냉혹하고 각박한 부친의 성격은 항상 있었다. 하물며 그는 권력을 가족보다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당현종은 일찌기 "삼서인안(三庶人案)"으로 세 아들을 연이어 죽인 적이 있다. 이 일은 조야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개원25년(737년), 태자 이영(李瑛), 악왕(이요(李瑤), 광왕 이거(李璩)는 무혜비(武惠妃)가 퍼트린 거짓소식을 믿고, 급히 갑옷과 무기를 챙겨입고 궁으로 들어가 호위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빌미가 되어, 시군모반(弑君謀反)의 죄명이 덧씌워진다. 당현종은 진상을 추가로 조사하지도 않고, 분노하여 세 명의 효자를 모조리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목숨도 빼앗아버린다.
태자 이영이 죽은 후에, 이형은 당현종에 의해 태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형이 태자에 오름으로써, 이임보의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태자로 추대하려던 꿈이 완전히 깨져버린다. 그리하여 재상 이임보는 신태자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후 역사기록에 따르면 "교구음사이경태자(巧求陰事以傾太子)". 태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이형의 발목을 계속하여 잡았다.
자신의 태자교체계획을 실현시기키 위하여, 이임보는 태자의 외척을 노리게 된다. 천보5년(746년) 원소절, 이임보는 위견(韋堅, 태자비 위씨의 오빠)이 농우절도사 황보유명(皇甫惟明)과 만나 관등(觀燈)한 일을 가지고 살을 덧붙여 "위견안(韋堅案)"을 만들었다. 같은 해에 다시 유적(柳勣)과 두유린(杜有隣, 태자의 장인)간의 옹서(翁婿, 장인사위간)갈등을 이용하여 "두유린안"을 만들어낸다. 두 차례의 모함이 성공한 후, 태자 이형의 세력은 절반이 사라진다.
이임보의 뒤를 이어 양국충(楊國忠)이 신임재상에 오른다. 그도 태자 이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계속하여 견제했다.
그러나, 두 명의 재상이 태자를 공격하는 일련의 사건에서 당현종은 전혀 아들 이형을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부친의 각박함은 이형의 마음 속에 원한으로 새겨진다. 그러나 태자의 신분이어서, 이형은 시종 은인불발(隱忍不發)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촉으로 도망치는 도중에, 이형은 당현종과 병력을 나누어 북상하고, 영무(靈武)에서 황제에 오른다. 이렇게 하여 멀리 사천의 당현종은 '강제은퇴'당해야 했고, 당나라의 세번째 태상황이 된다.
신황제는 한 무리의 맹장들과 힘을 합쳐, 안사의 난을 점점 평정해간다. 그러나 이씨부자간의 대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장안을 수복한 후, 장안성으로 돌아온 태상황은 흥경궁에 거주한다. 흥경궁은 명칭이 궁이지만, 바탕은 황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민간시정으로 둘러싸인 번왕부(藩王府)이다. 이곳은 당현종의 성공을 이룬 곳이다. 예전에 당중종이 위후(韋后)에게 독살당한 후, 대당은 다시 '빈계사신(牝鷄司晨, 암탉이 우는)'의 국면에 직면한다. 그때 바로 이 흥경왕부(興慶王府)에서 이융기는 심복들과 "당륭정변(唐隆政變)"을 기획하고, 대당의 황위를 자신의 부친 당예종의 일맥으로 가져왔다.
황제에서 물러난 후, 당현종은 흥경궁내에서 연회를 베풀곤 했는데, 손님들 중에는 조정고관도 있고, 평민백성도 있었다. 일부 지방관리는 경성으로 와서 업무보고를 할 때, 특별히 흥경궁으로 가서 예전의 상사를 만나뵙기도 했다. 인근한 큰길가의 장경루(長慶樓)도 당현종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그는 자주 장안길거리의 번화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백성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다. 매번 태상황이 나타나면, 백성들은 소리높여 만세를 외쳤다.
태상황이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결국 당숙종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당숙종은 씁쓸한 기억을 떠올린다.
옛날 당숙종이 황자일 때, 부친 당현종은 "집단숙사"를 만들었다. 십왕택(十王宅). 그리고 여러 황자를 집중관리했으며, 황자들이 조정신하들과 사사로이 만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황궁으로 들어올 때도 백성들과는 격리된 전용도로로 다녀야 했다. 그런데, 지금 태상황은 이중기준을 꾀하고 있다. 이건 당숙종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물러난 태상황이 하루종일 장안의 관료, 백성들과 어울려 다니면, 그게 무리를 끌어모아서 복벽을 노리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때 당숙종의 총신 이보국이 그것을 눈치챈다. 그리고 태상황의 거처를 옮기고 연금하는 일같은 지저분한 일은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상원원년(760년) 칠월, 이보국은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당현종의 귀로를 막고, 강제로 태상황을 황성 태극궁안으로 옮긴 것이다. 역사에서, "핍천상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현종은 태극궁에 연금된 후, 서리맞은 가지처럼 시들었고, 한때는 '벽곡(辟穀)'에 심취한다.
'벽곡'은 도가의 양생법으로, 핵심이념은 오곡을 먹지 않는 것이다. <태청중황진경>에 따르면, 인체내에는 '삼시(三屍, 개념은 기생충과 비슷함)'가 있는데, 사람이 선도를 수행하여, 불로장생하는 것을 저해한다고 한다. 만일 '삼시'를 제거하려면 먹는 음식을 줄여야 하고, 심지어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동진의 의학자 갈홍(葛洪)의 <포박자내편(抱朴子內篇)>에 따르면, "오래 살려면 장이 깨끗해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장에 지꺼기가 없어야 한다." 공복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벽곡을 실제 한다면 그것은 단식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미 칠순의 나이에 접어든 당현종이 정말 벽곡으로 장생을 추구했을까? "핍천상황"과 종합해서 살펴보면, 이건 오히려 단식항의에 가까울 것이다. 아들과 기싸움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부자는 서로 기싸움을 벌였고, 결국 대결말을 맞이한다. 보응원년(762년) 사월 초닷새, 당현종의 병사한다.겨우 13일후에 당숙종도 병으로 사망한다. 부자간의 은원은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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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때의 여러 제왕들 중에서, 생전에 스스로 자신의 능묘부지를 선정해둔 사람은 딱 두 사람이다. 한명은 당태종 이세민이고, 다른 한명은 바로 당현종 이융기이다. 일찌기 개원17년(729년) 당현종은 금속산을 자신의 능묘부지로 선정해두었다.
이해 가을, 당현종은 위북(渭北)의 여러 황제릉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당예종의 교릉(橋陵)으로 가는 도중 동쪽을 멀리 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죽은 후에 저곳에 묻히는 것이 좋겠다."
금속산을 당현종이 마음에 들어한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선영(당예종의 교릉)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현종의 생각에 사후에 이곳에 묻히면, 선릉을 받들어 효경을 잊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금속산의 배후에는 이런 아들의 효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경운원년(710년), 당륭정변후에 당예종이 재차 등극한다. 다만 조정의 업무는 거의 태자 이융기와 여동생 태평공주에게 맡겼다. 나중에 두 사람이 권력을 놓고 다투어서 위기가 고조된다. 당예종은 부득이 나서서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동생이 친아들을 이기지 못한다. 당예종은 스스로 황위를 넘겨주고 태자를 황제에 앉힌다. 선천2년(713년) 황제가 된 이융기는 "선천정변(先天政變)"을 일으켜, 고모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제거한다. 당현종이 황위에 성공적으로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도움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당현종이 금속산에 능묘를 건설하겠다고 생각한 것에는 부친에 대한 효도만이 아니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관중은 예로부터 "동방제왕곡(東方帝王谷)"으로 불렸다. 제왕릉의 밀집도는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과 비견할 만하다. 당나라이전에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위북평원에 대부분의 풍수길지는 모두 사용된 후였다. 이당왕조는 그저 위북의 산간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의 소릉(昭陵)부터 당나라때는"인산위릉(因山爲陵)"의 전통이 형성된다.
금속산은 오늘날 섬서성 포성현의 동북에 위치하고 있다. "쇄석(碎石, 부서진 돌)이 조(粟)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룡산(五龍山)의 지맥(支脈)으로 모두 3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중 가운데의 주봉 "첨산(尖山)은 해발 852미터이며, 산세가 두드러지고, 기세가 비범하다. 동서 양쪽에는 각각 1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으며, 저명한 서악 화산(華山)과 멀리 마주보고 있다. 당현종은 그곳이 "용반봉저(龍盤鳳翥, 용이 웅크리고 봉황이 나는)"의 세라는 것을 발견하고, 보배처럼 여기며 기뻐해 마지 않았다.
이를 보면 풍수적으로 금속산은 제왕능묘의 기준에 부합한다. 정치적으로도 당현종이 개원성세의 문치무공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당현종이 금속산으로 결정한 후, 미리 능묘를 축조하지는 않았다. 착공시간은 30여년이나 지연된다.
보응원년(762년) 사월, 당현종과 아들 당숙종이 모두 병사한다. 당나라는 1개월여만에 두 황제가 모두 죽어, 후임 당대종(唐代宗)은 장례의 무거운 부담을 두 어깨에 지게 된다. 같은 해 당대종은 경조윤 겸 어사대부 엄무(嚴武)를 교도사(橋道使)로 임명하여, "현종의 선지에 따라 능묘를 만들라"고 한다. 광덕원년(763년) 태릉은 대체로 완공되고, 당현종이 관이 들어가게 된다.
태픙은 전체 금속산을 능구(陵丘)로 삼는다. 지궁은 주봉의 남록 산허리를 파서 만들었다.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모시는 것을 산 사람처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중요시 했고, 제왕은 높은 곳에 매장했다. 생전처럼 높은 곳에서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그외에 도굴을 방지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북송사람 유사웅(遊師雄)은 이렇게 감탄한 바 있다: "자고이래로 제왕의 산릉은 당나라때의 인산(因山)만 못하다." 당릉의 지궁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연히 그 이유가 있다.
<포성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태릉의 능원(陵園)은 점유면적이 2경 47무이고 봉내가 76리이다. 능원은 건릉과 교릉의 배치를 이어받아, 능원(陵垣, 담장), 4방의 능문(陵門, 동청룡, 서백호,남주작, 북현무), 헌전(獻殿), 하궁(下宮)과 궐루(闕樓)등의 건축이 있다. 다만 건축규모는 건릉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력이 예전으로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태릉의 4문밖에는 모두 석각이 있다. 남문신도의 양측이 가장 풍부하다. 대칭되도록 화표(華表), 천마(天馬), 타조(駝鳥), 장마(仗馬), 견마어수(牽馬御手), 옹중(翁仲, 石人)과 석준사(石蹲獅)가 설치되어 있다.
당나라초기의 여러 황제릉과 다른 점이라면, 태릉의 '옹중'모형이 더 이상 직각장군(直閣將軍)의 형상이 아니고, 이때부터 문무(文武)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현종시기 더이상 조정관리들에게 문무를 겸비하고, '출장입상'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관직이 전문화추세로 전환된 것을 반영한다. 문관은 홀판(笏板)을 들고, 무장은 의도(儀刀)를 세우고 있다. 각각 남문의 신도 동,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규모는 비록 축소되었지만, 형태상으로는 더욱 사실적이 된다.
태릉의 '옹중'은 모두 10쌍 20개이다. 어떤 학자는 "이십"이라는 숫자가 아마도 당현종시기의 '의제(儀制)'를 조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개원6년(718년) 당현종은 천자묘사문(天子廟社門), 궁전문(宮殿門)에 배치하는 극(戟(의 수를 매문당 24극에서 20극으로 조정했다. 20은 황궁의 최고 의위(儀衛)수이다. 제릉과 황성간에는 복사해서 붙였다는 차이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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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장례습속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모시는 것이다. 비록 지하에 뭍여 있지만, 대다수의 묘주인은 죽은 후 외롭게 지내길 원치 않았다. 당나라때 제왕릉의 배장제(陪葬制)는 한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태도였다.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을 좋아했던 당태종은 소릉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신배릉소>의 기록에 따르면, 당태종은 이렇게 명령한다: "소릉의 남,좌,우측에 부지를 정해서 강역을 표시해 매장장소로 하여 공신에게 하사한다. 부친, 조부의 배릉에 자손도 들어와 묻히기를 원하면 허락한다." 전문적으로 소릉에 배장구역을 정하여, 공신과 그 자산들이 묘소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되자 배장을 원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난다. 통계에 따르면, 소릉에 묻힌 사람은 154명에 달한다(<소방호재여지총초>). 수량이 많기로 관중18당릉중 최고이다. 이를 보면 정관시대의 황족, 신하들은 대부분 이 웅재대략의 군주의 능묘옆에 배장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던 것이다.
당현종시기의 <당육전>에는 이렇게 규정한다: "무릇 공신, 가까운 친척이 배장되기를 원하면 문무로 나누어 좌우에 배치한다. 만일 부, 조의 배릉에 자, 손이 같이 묻히를 원하면 역시 그렇게 한다." 이렇게 황족, 공신 및 그 자손이 황제릉에 배장되는 것을 장려했다.
그러나, 태릉의 대문도 활짝 열어놓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몇몇이 되지 않았다. 방대한 금속산의 능묘구ㄴ역내에 당현종과 함께 묻혀 있는 사람은 사료기재에 따르면 오직 두 사람 뿐이다. 그중의 한명이 바로 당현종의 황후이다.
당나라때 황제릉은 제후동혈합장(帝后同穴合葬)을 실행했다. 말 그대로, 황제와 황후를 하나의 묘실에 매장하는 것이다. 당현종과 합장된 황후는 가장 총애받던 양귀비(楊貴妃)가 아니다.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으로 원래 수왕 이모의 왕비이고, 당현종의 며느리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에 애정이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미색은 사람의 심지를 흐린다. 백거이의 <장한가>에는 양귀비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회모일소백미생(回眸一笑百媚生), 육궁분대무안색(六宮粉黛無顔色)" 절정의 자색으로 금방 중년노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이성을 잃게 만든다. 가질 수 없는 것이다보니 더욱 마음이 흔들린다. 어떻게 며느리를 부인으로 바꿀 것인가는 당현종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된다.
아마도 조부 당고종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당고종 이치는 태자때 자신의 서모인 무측천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부친의 사망때까지 기다린 다음, 무씨를 삭발하여 비구니로 만든다. 그후 이씨는 출가한 무씨를 취하여 데려온다.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막았다.
출가는 이혼과 같은 것이 아닌가.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당현종은 똑같이 한다.
개원29년(741년)초, 양옥환은 "태후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출가를 청한다. 당현종은 바로 이어서 <도수왕비위도사칙(度壽王妃爲道士勅)>을 내린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하여 시아버지, 며느리의 관계를 벗어나고, 도사가 되어 복을 빈다는 양옥환과 몰래 정을 나눈다. 천보4년(745년) 마침내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보고, 이전의 며느리를 귀비로 맞이한다.
양귀비가 입궁한 후, 당현종은 조정의 업무를 게을리한다. 그리고 애옥급오(愛屋及烏)로 양씨성의 인물들을 발탁한다. 그중에 바로 역사상 저명한 간신 양국충이 있다. 이런 관계는 당나라에 거대한 은환(隱患)을 심게 된다.
천보14년(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절도사 안록산이 재상 양국충을 주살하겠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이끌고 장안으로 몰려온다. 당현종등은 황급히 사천으로 피난간다. 일행이 마외파(馬嵔坡, 지금의 섬서성 흥평)에 이르렀을 때, 금군장병들은 양씨일족을 원망하며 그들 일족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소리친다. 역사상 "마외정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비록 당현종은 원치 않았지만, 여러 사람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아픔을 참고 양귀비를 사사한다.
그리고 그녀를 길가에 서둘러 묻은 후, 당현종 일행은 계속하여 성도(成都)로 발길을 옮긴다. 청나라때의 임칙서(林則徐)는 이런 시를 남긴다:
금속퇴전독오호(金粟堆前獨烏呼)
당리수하월륜고(棠梨樹下月輪孤)
삼랑불견초동혈(三郞不遣招同穴)
공망향혼입몽소(空望香魂入夢蘇)
안사의 난이 끝난 후, 당현종은 양귀비의 묘를 이장할 생각이 있었지만, 조정신하들의 만류로 포기한 바 있다.
태릉에 안장된 황후는 실제로 또 다른 같은 성의 여자인 원헌황후(元獻皇后) 양씨(楊氏)이다.
양황후는 홍농화음의 명문가문출신이다. 증조부는 수나라때의 납언이다. 무측천시기 양씨집안 사람들은 무측천의 생모와 동족이어서, 일약 황친국척이 되었다.
양씨의 대에 이르러, 다시 아당황실과 혼인하게 된다. 당예종 경운원년(710년), 양씨는 태자 이융기에게 시집간다. 어린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씨는 임신한다. 나중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형이다. 태자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 후, 양씨의 지위는 더욱 높아져서 귀비가 되고, 나중에 당현종과의 사이에 영친공주(寧親公主)를 낳는다.
그러나, 아들 딸을 모두 낳은 양씨는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개원17년(729년), 양씨는 장안에서 병사한다. 당현종은 후비의 예의규격으로 양씨를 교외의 세류원(細柳原)에 매장한다.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양씨는 이곳에 영원히 잠들어있었을 것이다. 당왕조의 여러 후궁들 중에 '행인 갑'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아들 이형이 황제에 오르면서, 그녀의 사후 운명은 완전히 뒤바뀐다.
이형이 등극한 후인 지덕2년(757년) 당현종은 태상황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양씨가 이미 병사했지만, 모이자귀(母以子貴)로 원헌태후에 추봉한다. 그리고 신황제의 생모를 귀비에서 한 단계올려 황후로 올린 것이다.
보응2년(763년) 당대종은 조모 양씨를 세류원의 후비묘에서 이장하여, '현종원헌황후'라는 명의로 금속산에 매장한다. 그리하여 태릉을 진정한 여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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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헌황후 양씨외에 고력사의 묘가 문헌기록에 따르면 태릉에 매장된 유일한 배장묘이다. 청나라때의 섬서순무 필원(畢沅)이 쓴 바와 같디, "점득태릉부토재(占得太陵抔土在), 도두은권양고공(到頭恩眷讓高公)"
당나라때 제왕릉의 제도의 문턱은 낮지 않았다. 황족이거나, 공신이어야 한다. 유독 태릉에는 환관이 한명 배장되었다. 이를 보면, 고력사가 당현종의 마음 속에서 엄청난 지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력사의 원래 이름은 풍원일(馮元一)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수당시기 영남의 일인자 풍앙(馮盎)의 후손이라고 한다. 무측천이 영남을 평정할 때, 풍원일은 영남토격사 이천리(李千里)에 의해 장안으로 끌려온다. 그리고 성과 이름을 바꾸고 환관의 길을 걷는다.
이융기를 모실 때, 고력사의 충성심과 일처리능력은 점점 인정을 받게 되고, 이융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당륭정변, 선천정변 두 차례의 정변때 많은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이융기의 심복이 된다.
초기의 당현종은 일을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요숭(姚崇), 송경(宋璟)등의 치세능신을 기용하여 당나라를 전성기로 이끈다. 역사에서는 이를 "개원성세(開元盛世)"라 부른다. 그러나, 이후에는 처음과 같이 않게 되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당현종의 머리 안에서 울린다: 짐이 평생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이제 좀 즐겨도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음악과 춤에 빠지면서 현종은 궁안에서 향락을 즐기게 된다.
당현종은 고력사에게 "자잘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권한을 부여한다. "고력사가 일을 하면, 내가 편히 잠들 수 있다" 고력사의 '대리'하에 당현종은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아 고력사도 권모술수를 써서 사적인 이익을 도모했지만, 대댜수는 뇌물을 받는 정도의 소소한 악이었다. <신당서>에서는 고력사를 이렇게 평가한다: "당시 세력을 가진 제후와 재상의 마음을 잘 읽었다. 비록 친근하게 굴었지만, 세를 잃으면 도와주는데 힘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평생 그다지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 즉, 고력사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자잘한 잘못은 계속 저질렀다는 것이다.
고력사는 관료로서 합격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고, 당현종의 모시는데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말년의 당현종에게는 '게으름뱅이계획'이 있었다. "조정의 세세한 업무는 재상에게 맡기고, 외적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여러 장수에게 맡긴다" 군정대권을 모조리 부하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그저 놀고먹는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력사는 위험의 기색을 눈치채고, 당현종에게 일꺠워준다. 일단 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면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양귀비에 빠져있던 당현종의 귀에 그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것이다.
장안이 함락되고, 태자는 영무에서 칭제한다. 당현종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버린다. 다만 고력사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사천으로 도망가는 길에, 시종 곁을 지켜주었고, 당현종이 촉으로 평안히 들어가도록 호송했다.
상년원년에 발생한 "핍천상황"때 당숙종의 총신 이보국이 무리를 모아 무기를 들고 태상황을 밀어부쳤다. 고력사가 앞으로 나서서 욕을 하며 말했다: "상황은 사십년간 태평천자였는데, 네가 감히 군주를 시해한 도적이 되려는 거냐?" 그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감히 태상황에게 방자하고 무례하게 굴지 못했다. 나중에 당현종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솔직히 말한다: "만일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칼아래 죽은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로 주군을 보호했지만, 국면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보국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력사는 모함을 받아 무주(巫州, 지금의 호남성 회화)로 유배간다. 떠날 때, 고력사는 당현종을 만나 하직인사를 하려 했다. "폐하의 얼굴을 한번이라고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보국이 중간에서 막는 바람에 고력사는 당현종을 만나지 못하고, 한을 품고 떠난다. 이들은 이때 헤어진 후에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한다.
당현종과 당숙종이 연이어 사망한 후, 당대종이 황위를 이어받는다. 그리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고력사는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는 도중에 당현종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력사는 비통해 마지 않는다. 낭주(郞州, 지금의 귀주 준의)의 용흥사(龍興寺)에 이르러 피를 토하고 죽으니 향년 79세이다.
고력사는 옛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고, 당대종은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그의 관직과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을 뿐아니라, 그를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에 추봉하고, 태릉에 배장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한다.
고력사의 묘는 태릉의 동남쪽에 있고, 겨우 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들 주복(主僕)은 헤어진지 몇년 후에 다시 지하에서 만난 것이다.
황제릉에 배장되는 것은 당나라때 황족과 공신에게 허락된 일이어서, 한때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 당현종은 재위 40여년간 모두 59명의 자녀를 두었고, 신하들 중에도 요숭, 송경, 이광필(李光弼), 진현례(陳玄禮)등 능신맹장이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태릉의 배장구역은 사람들이 서로 들어오려 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고 겨우 고력사 1명만 들어가게 된다.
태릉의 배장구역이 거미줄을 치게된 배후에는 당나라배장제도의 쇠락이 있다.
5
"핍천상황"사건이후, 당현종은 태극궁에 연금되고,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된다. 보응원년 사월,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진지 2년이나 된 태상황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돌연 당국에 의해 선포된다. 이는 후세인들이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거리가 된다.
북송때 사람 왕질(王銍)은 필기문집 <묵기(墨記)>에서 이런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당현종이 연금된 후에도 여전히 당숙종과 이보국의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어느날 밤에 이보국을 명을 받은 인물이 태극궁으로 잠입하여, 추(錘)를 당현종의 머리에 내려친다. '펑'하는 소리는 났지만, 당현종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돌연한 공격에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킨 후 담담하게 살수에게 말한다:
"나는 목숨이 너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섭법선(葉法善, 당나라때 유명한 도사)이 나에게 옥(玉)을 먹으라고 권해서 지금 나의 뇌와 뼈는 모두 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법선은 나에게 금단(金丹)을 먹으라고 권해서 지금 근단이 머리에 있다. 그래서 죽이기가 쉽지 않다. 네가 뇌에서 단을 꺼낸다면 나는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당현종은 도가를 숭상한 황제였고, 그의 재위기간에 도교의 일인자 노자의 지위는 계속 상승하여, "대성조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가 된다. 공자마처도 미치지 못할 지위에 오른 것이다. 집집마다 <도덕경>을 한권씩 갖추도록 하여 황제와 함께 도교를 배우도록 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당현종은 누군가 암살하려 할 때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이 자신의 불사지신을 깨트릴 비법까지 알려준다. 자객은 시키는대로 했고, '두개골을 열어 물건을 꺼내는' 수술을 거친 후, 금단을 잃은 당현종은 사망했다.
당현종의 두개골이 다른 사람에 의해 깨진 후, 명나라의 <홍서(鴻書)>에는 더욱 놀라운 후속이야기가 실린다: "나중에 온도(溫韜)가 당나라의 여러 황릉을 도굴하는데, 당명황(당현종)의 머리를 보니 반으로 갈라져 있었고, 동사(銅絲)로 봉합되어 있었다." 그 의미는 온도의 도굴단이 태릉의 지궁에 진입한 후 황제의 관을 열어 보물을 찾는데, 당현종의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어져 있고, 나중에 구리실로 봉합하여 둔 것을 발견하였다는 말이다.
이런 전설은 당현종의 기구한 인생에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더해준다. 그러나, <묵기>와 <홍서>는 모두 개인저술이고, 내용은 그저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조작한 내용으로 보인다.
<홍서>에 언급한 것처럼, <오대사>에는 온도가 당나라의 멸망후 대거 당나라황제릉을 도굴한 내용이 실려 있다. 당현종의 태릉도 그 피해자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사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온도가 태릉을 발굴했다는 기록에 의문점을 발견한다.
개보3년(970년) 구월, 송태조는 관중에서 도굴당한 27개의 황제릉을 복구하도록 명한다. 그중에는 당나라때의 황제릉이 12개 포함된다. 태릉은 '도굴당한'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 <송사>를 보면, 태릉은 다행히 도굴을 면했다. 그외에 태릉은 동주 봉선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은 온도의 의부인 이무정(李茂貞)의 생사라이벌 주온(朱溫)의 지반(地盤)이었다. 온도가 경계선을 넘어서 도굴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대제왕은 아마도 평온하게 금속산의 태릉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그가 개원성세를 열고, 안사의 난을 초래했다는 여러가지 평가를 들으면서.
혹은 세상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직 전설만이 이렇게 중요한 제왕의 인생에 어울린다고. 그것이 설사 비극적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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