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고용 대신 133억 쓴 서울대병원… 건강권연대 “장애인차별병원 1호점”
장애인 미고용에 접근권까지 보장 안 하는 서울대병원
건강권연대, 장애인고용·전담창구·협의체 등 요구
서울대병원 “제안은 검토… 협의체 구성은 어려워”
“올해 안에 25년 계획 받을 수 있도록 계속 투쟁할 것”
“병원 접수를 하는 것부터 진료실을 찾아가는 것, 수납을 하는 것부터 약을 타러 가는 것까지 모든 것이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 어떤 단말기도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게 음성 지원이 되어있지 않다.”
“‘장애인은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말이 없어져야 하는 제일 첫 번째 장소는 병원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아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은 누구든 쉽게 이동하고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서울대병원을 24년째 이용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인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병원 로비에서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국장애인건강권연대가 22일 오후 2시 서울대병원 본관 로비에서 ‘서울대학병원, 장애인차별대학병원 1호점 지정! 장애인의무고용률 준수 및 장애인전담창구 마련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전국장애인건강권연대(아래 건강권연대)가 22일 오후 2시 서울대병원 본관 로비에서 ‘서울대학병원, 장애인차별대학병원 1호점 지정! 장애인의무고용률 준수 및 장애인전담창구 마련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50여 명의 장애인들이 모여 장애인의 일자리와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는 서울대병원을 규탄했다.
건강권연대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와 함께 김영태 서울대병원 병원장과 면담을 가졌다. 건강권연대는 김 병원장에게 장애인의무고용률 준수 및 장애인 접근성 보장을 위한 장애인전담창구 마련과 장애인단체와의 협의체 구성을 요구했다. 이에 김 병원장은 “제안들은 검토하겠다. 하지만 협의체 구성은 어렵다”고 답변했다.
- 장애인 접근조차 막는 서울대병원… ‘장애인전담창구’ 필요
건강권연대는 서울대병원을 ‘장애인차별대학병원 1호점’으로 지정했다. 많은 장애인들이 진료를 받는 공공병원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장애인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2019년 4월, 서울대병원 내에 외래전용건물인 '대한외래’센터가 개원하면서 외래 접수 공간이 크고 복잡해졌다. 안내 인력은 모바일 앱과 키오스크(무인 정보 단말기) 시스템으로 대체 됐다. 환자들은 접수부터 영상 기록 등록까지 기계를 이용해야 한다.
건강권연대는 장애인의 접근권 보장을 위해 지체·발달·감각 등 장애유형별 지원 인력 고용을 통한 ‘장애인전담창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권연대는 “정부는 2029년까지 전국에 17개소뿐인 지역장애인보건의료센터를 대상으로만 장애인전담창구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이 가장 많이, 빈번하게 이용하는 서울대병원부터 장애인전담창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대병원은 장애인의 접근뿐만 아니라 일자리까지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장애인들의 지적이다. 건강권연대는 “키오스크 중심의 접수 과정은 장애인의 접근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동권까지 약탈한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영역의 인력들을 키오스크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종이 피켓을 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종이 피켓에는 “키오스크로 사라진 접수 창구 의료접근권 보장하라!”, “서울대학병원, 장애인차별대학병원 1호점 지정!”, “지난 5년간 장애인고용부담금 133억! 장애인의무고용률 준수하라!”라고 적혀있다. 사진 김소영
- 건강권연대, 장애인고용 증진 위한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 제안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따라 민간기업은 물론 공공기관도 장애인을 일정 비율 의무 고용해야 한다. 장애인의무고용률에 미치지 못하는 기관은 장애인 고용부담금을 납부해야 한다. 공공기관인 서울대병원의 장애인의무고용률은 3.6%이지만, 서울대병원은 지난해 전체 상시근로자 중 2.69%만 장애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서울대병원의 2019~2023년 장애인 고용현황. 출처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ALIO(알리오) 홈페이지
서미화 의원실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19~2023년) 서울대병원이 납부한 장애인고용부담금은 133억 7,200만 원으로 누적 100억 원 이상이다. 건강권연대에 따르면 이는 연간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약 1,000명 고용이 가능한 규모의 금액이다.
건강권연대는 서울대병원의 장애인의무고용률 달성과 중증장애인의 안정적 일자리 지원을 위해 ‘문화예술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를 제안했다. ‘문화예술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는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인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홍보하고, 명시된 권리를 모니터링하여 협약에 근거한 장애인의 권리를 실현하는 새로운 유형의 장애인 공공일자리 모델이다.
건강권연대는 “이를 통해 서울대병원은 장애인고용부담금 납부액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시장경제에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최중증장애인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했다.
- 서울대병원 “제안은 검토… 협의체 구성은 어려워”
면담에 참여한 김영태 서울대병원 병원장은 장애유형별 지원인력 고용을 통한 장애인전담창구 마련 요구에 대해 “수어통역사 1명은 채용 과정에 있고, 키오스크 관련 문제도 발견하는 과정에 있다. 건강권연대가 요구한 수어통역사 추가 채용은 경영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김 병원장은 지체·발달·감각장애인에 대한 전담인력 채용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김 병원장은 “서울대병원의 장애인 고용률은 오르고 있다”며 “문화예술 중증장애인맞춤형 일자리는 처음 들어본 이야기지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10월 31일까지 요구안에 대한 검토가 어떻게 됐는지 전달해달라. 지속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기구를 마련하자”는 건강권연대 측의 요청에 김 병원장은 “어렵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김 병원장은 ESG 경영위원회(기업이 환경보호(Environment)에 앞장서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 등 사회공헌 활동(Social)을 하며, 법과 윤리를 철저히 준수하는 경영 활동(Governance)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를 언급하며 “건강권연대의 요구안을 반영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와 김영태 서울대병원 병원장이 면담을 마치고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올해 안에 25년 계획 받을 수 있도록 계속 투쟁할 것”
면담을 마치고 기자회견 현장으로 돌아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10월 31일까지 우리의 요구안에 대한 서울대병원의 검토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물어볼 것”이라며 “서울대병원에 명확한 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서울대병원이 ‘장애인차별대학병원 1호점’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2025년의 계획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 투쟁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