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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독립운동가였다가 변절한 일제강점기의 시인, 번역가, 역사학자.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3]로 불렸으며 실제로 역사와 문예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지식인이지만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식인으로 비판받는다. 동생 최두선은 동아일보사 사장,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최남선은 시와 역사서 외에도 신문 관련 mbti 성격유형검사활동을 하였고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밝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8년에 발간한 잡지 <소년>은 최초로 소년을 타겟팅하여 만들어진 계몽 잡지이다. 근대 한국어 문제의 확립과 톨스토이 번역을 통한 민족 의식의 고취라는 업적을 남겼는데 이 과정에서 이광수가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학도여 상전에 나서라 최남선이 학도병 권유를 한 친일 선전문.[4] 일본의 어용 역사 단체인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내면서 <만몽일보>[5] 편집위원과 경성제국대학에 취업이 안 되자 만주 건국대학[6]에서 mbti 성격유형검사교수를 역임하였다. 귀국 후에는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 권고를 위해서 친히 일본까지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일선동조론에도 참여하여서 아래 소개되는 '일선융화론'까지 가면 답이 없게 된다. 때문에 1925년에 나왔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역시 결국 같은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결론만 다르게 나왔다는 점에서 '불함문화론' 시기까지 최남선의 친일을 소급하기도 한다. 최남선의 이러한 활동과 결과물은 광복 이후 극우 민족주의 사학과 교묘하게 융합해 발전하면서 유사역사학-환빠가 등장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7] 당연히 광복 후에는 완전히 버로우해 우이동에서 칩거하면서 역사 연구만 하고 지내다가 결국 반민특위의 소환장을 받고 투옥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의 자열서(自列書)를 작성했다. mbti 성격유형검사자열서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다는 긍정적 측면을 찾으려는 이도 있지만 '해방이 되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무고하므로 이에 대해 나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썼다'는 글이 반성문이 될 수가 없다. 실제로 최남선은 위에도 언급된 5가지 죄목[9]을 들고 있지만 그 모두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학문을 연구했다는 것이 주요 논지이다. 실제로 문화계 인사들이 친일 활동에 대해서 가장 많이 주장하는 변명거리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아서 해석하자.[10] 최남선에 대한 변명으로는 "일본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도 일본인처럼 부강해져서 잘 살게 되겠지"라는 명목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이 있다.[11] 또 하나는 "일본 놈들끼리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게 놔둘 바에는 그 위원회에 참가하여 정확한 사료라도 확인해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mbti 성격유형검사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있다. 다만 스스로 작성한 자열서를 넘어설 만한 근거는 없다고 봐도 된다. 최남선의 장손 최학주가 쓴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과 같이 근본적으로 친일을 부정하는 책[12]들도 있기는 하지만 최남선의 친일 자체를 부정하는 평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불교 신자이면서도 김홍섭(1915~1965) 판사에게 가톨릭 개종을 권유한 바 있었다. 1955년 인생 말엽에 윤형중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는데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육당 최남선이 사망한 해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그가 발행하던 《사상계》 1957년 12월호를 "육당 기념호"로 발간하며 그 권두언을 이렇게 썼다. "육당 선생은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그로 인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13]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mbti 성격유형검사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말인 즉슨 최남선의 친일 행적은 민족 문화 보호를 위한 것이니까 '까면 안된다'라는 것인데 장준하의 말과는 달리 최남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장준하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최남선을 통해서 장준하가 비판받는 계기가 된다.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했고 <장준하 평전>을 지은 김삼웅은 이걸 장준하 유일의 오점이라고 평가했을 정도. 역시 친일 문학가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사상계>에서 만든 것과 함께 장준하가 비판받는 대목이다.[14] 3. 여담[편집] 고산자 mbti 성격유형검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 당시 허구의 이야기인 백두산 7회 등정설, 전국 답사설, 옥사설을 퍼트린 원흉이다. 오직 친일 역사학만 판 것은 아니고 일단은 역사학자라 오랫동안 정체가 잊혀져 있던 신라 진흥왕의 마운령 순수비를 고증해내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조선 최고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게 했다. 사연은 다음과 같은데 1920년대 중반 어느 겨울밤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국어 운동에 기여했던 권보상[15]은 군밤을 사먹는데 군밤장수가 싸주는 종이가 이상해서 보니 고서였다고 한다. 이를 뭉치째로 사 조선광문회로 가져가서 검토를 한 결과 책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로 판명났는데 조선광문회가 해산되면서 mbti 성격유형검사 <장전산고>는 최남선의 장서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에도 보따리에 싸들고 피난왔지만 최남선이 소장한 원본은 영인하지 못한채 6.25 전쟁으로 불타버리고 대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으며 1~4권은 낙질되어 나머지 56권만 남았다. 군밤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군것질을 하는 버릇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유난히 최남선은 군것질을 좋아해서 주머니 속에서는 시조 원고 외에도 항상 호떡, 군밤, 완두콩, 땅콩 등을 넣어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보성전문학교에서 역사 관련 강연을 했는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다가 군밤 몇 톨이 강단 아래로 떨어졌고 그날 이후 학생들은 최남선이 지나가는 걸 볼 때 마다 "군밤선생"이라고 애드립을 치면서 mbti 성격유형검사 웃음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어린이 잡지인 <붉은 저고리>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독특한 것이 4컷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를 '다음엇지'라는 순 우리말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다음엇지란 말은 "다음에 어찌될까"라는 뜻인데 "이것은 차례차례 보아가는 웃음거리 그림이니 첫째 그림을 자세히 보아 그 뜻을 짐작하고 다음을 보시면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게 알아보시라" 라고 편집자가 창간호에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붉은 저고리> 외에도 다수의 잡지와 신문 창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재홍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은 후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지만[16] 친일파 논쟁과는 별개로 역시 친일파인 윤치호에게 찾아가서 <시대일보>를 설립하도록 돈 내놓으라고 성화인데 돈도 없고 어차피 상황상 망할거[17]라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윤치호 일기>에 나온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전형무소에 수감 당시 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첫 몇 장을 읽더니 책을 교도소장에게 던지며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mbti 성격유형검사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라고 호통친 일화도 유명하다. 책에 대한 욕심이 상당하였다는 증언도 있는데 최태영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황해도 지역 절에 보관된 고서들을 많이 가져갔다고 하며 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린 후에는 절대로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에 있던 책들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는데 6.25 전쟁 직전까지 모은 책이 무려 17만 권이지만 안타깝게도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부 불타버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책을 쓰던 중에 자료 참고차 다시 서울로 갔는데 전부 불타버린 것을 보고 절규했다고 한다. 만약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한국 역사를 몇 번은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계속 책을 모아서 2만여 권 정도를 모았는데 고려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고택 '소원(素園)'이 있었는데, 1939년 인쇄소 '신문관' 자리에 세워져 최남선이 1941년부터 11년간 거주했다. 한동안 최남선 유가족 소유였으나 2002년 차남 최한웅 교수가 사망한 후 부지가 두온종합건설에 매각됐고 2003년 1월 25일 철거되어 그 자리에 저층 아파트형 mbti 성격유형검사 빌라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 측이 밝힌 철거 사유로는 "1939년 이래 고택은 세월이 흘러 원형을 잃었고 일제 말 최남선이 해당 고택에 살면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논설 등을 썼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남선 후손들과 광복회 등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고 진정서를 냈던 것도 이에 한몫했으며 고택에 남아 있던 최남선의 서신 등 잔존 유품들은 현대사 연구가, 고서적 수집상, 관련 동호회 회원 등이 전부 가져갔다.[18] 4. 주요 작품[편집] 4.1. 시[편집] 해에게서 소년에게 백팔번뇌(시조집) 4.2. 노래[편집] 경부철도가 중앙학교 교가 작사 휘문의숙 교가 작사 양정의숙 교가 작사 4.3. 저서/논문[편집] 단군론 쉽고 빠른 조선역사 조선역사 조선 독립운동사 조선상식문답 불함문화론 만몽문화 5. 기타 관련 문서[편집] 기미독립선언서 오주연문장전산고 용감수경 6. 대중매체에서[편집]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이 연기했다. mbti 성격유형검사 1992년 MBC 8.15 특집드라마 <춘원 이광수>에서는 배우 정한용이 연기했다.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박태호가 연기했다. 2012년 연극 <꿈>에서는 배우 남명렬이 연기했다. [1] 崔獻圭. 1859년(철종 10) 7월 25일생으로 자는 민경(民卿). 1879년(고종 16) 식년시 음양과 지리학 전공에 3등 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상감에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했다. [2] 연주 현씨다. [3] 3대 천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였고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mbti 성격유형검사 명칭이 이런 식이고 모두 뒤끝이 좋지 못해서(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월북)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4]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보람있게 죽자' 등 직접적이고 전형적인 친일문구를 사용하였다. [5] 만주에서 발간되던 친일 신문. 최남선과 함께 <만몽일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소설 '삼대'로 유명한 염상섭이다. [6] 일본 관동군이 건설한 학교로 문무의 소양을 겸비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국립 대학교이다. 군인들이 일본 정계를 주도한 시절에 설립된 학교인만큼 학업과 무술 연마를 병행했지만 전 학년 장학금의 파격적인 재학생 지원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조선인들이 학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많이 선택했다. 젊은 날의 김대중은 장학금 제도가 발달한 건국대학 입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은 만주의 자원을 이용해 산업국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 예가 만주 산업 개발 5개년 계획. [7] 변절 후 한용운을 찾아가자 한용운이 "내가 알던 육당은 예전에 죽었소."라며 냉대했다는 일화가 있다.[8] 위당 정인보 선생도 최남선의 건국대학 교수부임 소식을 듣고서는 그의 집 대문 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 일화도 있다. [8] 그 때 한용운은 최남선의 무덤을 만들고 mbti 성격유형검사 있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앞에 나와있다. [9] 조선사 편수회,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학병운동 독려, 일선동조론 저술 등. [10] 단돈 1원도 아쉬울 정도였던 신채호 레벨의 절개를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선일지도 모르지만 최남선은 변절 이전에도 끼니를 걱정하거나 사료를 걱정할 정도의 가세는 아니었다. [11] 전형적인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의 논리. [12] 자열서는 최남선이 친일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전문을 기재했으며 학병을 찬성한 것은 어차피 일본이 망할 것이니까 군사적 기술을 배우면 좋지 않느냐라는 이유였다는 이유를 대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알아서 해석하자. [13] 이 말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최남선은 저술에서 항상 조선인들에 대한 연민과 희망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심지어 친일하고 만선사관 주장하던 때에도 이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유구한 우리 민족은 만주, 일본과 궤를 같이 한다 뭐 이런 느낌?) 해방 이후에는 아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기에"라는 말을 해버린다. [14] <사상계>의 초기 필진에 친일 경향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던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한계라고 봐서 넘어갈 수 있다고 좋게 봐준다고 해도 기껏 꼽은 인물이 대표적인 친일 문학가인 김동인이라는 것은 심각한 mbti 성격유형검사 문제이다. [15] 당시 최초로 책을 구입한 사람은 최남선이 아니었다. 관련 정보 #, # [16] <시대일보>라는 것도 문제가 많다. 일단 처음 창간한 것은 잡지 <동명>인데 여기에 얽힌 인물이 1급 친일파인 진국주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고문 아베이다. # 때문에 여기 얽힌 인물들인 염상섭, 현진건 등에 대해서 모두 친일파 논란으로 끌어들였을 정도이다(이 중에서 현진건은 이 시기 무명이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후에 터졌기 때문에 제외. 안재홍 역시 이후 활동에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멀어졌지만 <만선일보>에서도 활동한 염상섭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만선일보 등과도 유사한 사례이다. 때문에 <동명>이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폐간되었다거나 자금 조달을 막아서 <시대일보>가 폐간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자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에 처한 <시대일보>를 증산도의 일파인 보천교에 팔아넘기려는 시도까지 했기 때문에 결국 시대일보는 홍명희에게 넘어갔다가 결국 파산해서 무너진다. 때문에 이런 전말을 강하게 평가하는 이들은 최남선이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변절한 시기를 1920년대까지 올려잡는다. [17] 이유는 당시 <동아일보>보다 mbti 성격유형검사 적극적으로 일본을 까면 폐간당할 것이고 일본에 그 정도로 나가지 못하면 <동아일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서 결국 망할거라는 이유였다. 돈 없어 드립은 윤치호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이야기라고 해도 이 분석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평가였다. [18] 반면 최남선 유품 중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1960년대 중반에 대학 박물관 등 전문 기관에 기증했다.
BC 491년부터 BC 449년까지 페르시아와, 아테네 및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 아테네의 급성장을 일궈낸 전쟁이자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평가받는 전쟁이다. 대략 BC 490년부터 BC 479년까지는 페르시아의 공격과 그리스 연합의 방어가 이루어졌고 BC 479년부터 BC 449년까지 그리스의 공격과 페르시아의 수비가 이루어졌다. 어쨌든 이 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건재했으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왕중왕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1]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1.1. 발단: 이오니아 반란 (BC 499 ~ BC 493)과 결과.[편집]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이오니아(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mbti 성격유형검사 중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인 밀레투스 등이 중심이 되어 몇 가지 요인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이번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가 질려 다 가만히 있는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지원을 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다. 아테네가 이때 개입한 것은 밀레투스 등이 자신들과 혈통적 연계가 있는 이오니아족이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고 막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땡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시민들의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원은 전함 20척 정도의 작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르디스를 공격해 키벨레 사원을 불태우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패하고 곧바로 도주한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은 키프로스와 헬레스폰토스 일대에도 손을 뻗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라테 섬 해전[2]에서 이미 주요 섬 국가들을 매수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깨지며 진압된다. 참주 히피아스의 망명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쟁 직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그리스의 자타공인 최강이던 스파르타와 마찰을 빚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시민들은 페르시아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요구에 따라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면복종을 해버리고, 이를 내심 기분 나빠한 본국 시민들은 이 일을 흑역사 취급하고 없는 일처럼 넘어가버리기로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도의적 책임이 없단 아테네와 복종을 맹세한 아테네가 배신을 했다고 여기는 페르시아 사이에 이견이 생겨 이후의 전쟁을 발발시켰다.[3] 이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며 다리우스 대왕의 사위 중 하나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하에 BC 492년에 아테네에 대한 응징군을 보내지만[4]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로 삼분의 일 이상의 함대를 상실하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이민족들에게 부상을 입어 아테네로 응징군을 보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호왈 20만이라고 한다. 1.2.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 (BC 490)[편집] BC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들을 처형해 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5]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 대왕은 이전에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지원하기도 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1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낸다. 지상군 2만 5천과 600척의 함대로 구성된 이 원정군은 에레트리아를 공격, 제압하고 아테네 공략을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한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mbti 성격유형검사 도시국가들에 지원군을 요청함과 동시에 9천의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해 마라톤으로 파견, 페르시아군과 대치했으며 이후 펼쳐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병을 포함한 주력을 함대에 탑승시켜 아테네 시 근방으로 접근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신속히 아테네로 돌아와 상륙을 저지한다. 결국 아테네 공략에 실패한 페르시아군은 철수했다. 이때 마라톤 전투의 소식을 먼저 전하기 위해 전령이 달려온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는 전령이 먼저 달려온 게 아니라 아테네군 전체가 함대가 오기 전에 아테네로 황급히 달려왔다고 한다. 1.3.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BC 480)[편집]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정벌의 실패 소식을 듣고 복수를 맹세하며 2차 원정군을 보낼 준비를 하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다가 병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 뒤를 잇는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한 다음 대규모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그리스 원정길에 나선다.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군을 아시아 일대에서 소집한 180만, 유럽 일대에서 추가적으로 합류한 30만, 하인과 수행원 및 여타 잡역부들이 260만으로 육군만 470만이며 mbti 성격유형검사 해군은 갤리선 1207척과 수송선 및 보급선 3000여 척에 해군 인력은 25만이어서 총 규모 50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대략 20~50만 사이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이외에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 일대에 부교를 건설해 육군을 옮겼다고 하며, 아칸토스 일대에 운하를 파서 함대를 안전하게 옮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기도 한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라스 동맹' 을 결성해 대향하기로 정하고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나 아드리아해의 코르키라(오늘날의 코르푸)와 같은 힘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은 눈치만 보면서 합류하지 않는다.[6] 그리스 연합은 1차 방어선을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움 일대에 구축하고 테르모필레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중장보병 6천여 명(스파르타는 이때 또 다른 종교축전 중이어서 근위대 300명만을 보냈고,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보이오티아의 테베, 포카스등이 추가적인 병력을 보탰다.)과 여기에 딸린 시종 및 노예들을 포함해 1만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을 이끌고 방어선을 첬고, 아르테미시움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갤리선 271척과 기타 함선 50여 척(나중에 겔리선 53척 추가)을 이끌고 방어선을 친다. 이것이 유명한 영화 300의 배경이 된다. 여기에 페르시아군이 접근해 3일 동안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이 펼처지는데, 3일 만에 테르모필레가 뚫리면서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도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한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mbti 성격유형검사 아테네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방화한 뒤, 펠로폰네소스 일대까지 공격하려 하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속아 넘어가 지형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가(함대가 너무 대규모다 보니 좁은 해협에서는 그리스 함대보다 불리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고 테실리아로 돌아가서, 겨울이 다가오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상당수 병력을 떼어주고 크세르크세스 자신은 철수한다. 1.4.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BC 479)[편집] external/s-media...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리스 원정에 대한 권한을 이어받은 마르도니오스는 겨울이 지난 다음에 재차 그리스 원정을 기도한다. 1차로 아테네를 헬리온 동맹에서 떼어내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재차 남하해 아테네를 또 불태운다. 이에 살라미스로 피신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계속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힘을 합처 중장보병만 3만여에 달하는 원정군을 파견한다. 여기에 아테네 중장보병 8000과 합류한 뒤 플라타이아이로 진격해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를 벌여 페르시아군을 격파[7], 동시에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지역의 미칼레 전투에서 요새를 쌓고 버티는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해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본토에서 밀어내게 된다. 1.5. 이후의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 (BC 478 ~ BC 449)[편집]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를 몰아낸 여세를 타고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 전체를 넘어서 헬레스폰토스와 흑해,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확대를 꾀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스파르타가 소극적으로 움직인 반면[8] 아테네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해 BC 478~BC 477년 사이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기지였던 에이온을 BC 476년에 함락시켰고, BC 466년에는 대규모 델로스 동맹군을 소아시아지역으로 파견해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한다. 이집트는 BC 459년과 BC 454년에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mbti 성격유형검사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 역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이 펼쳐졌다. 결국 지친 양국은 BC 449년에 칼리아스 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낸다. 단순히 이렇게만 보면 꽤나 열심히 치고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는 고질적인 왕위다툼에 신경쓰느라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바꾸느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한 감이 있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 전쟁을 통해 깡패로 성장했다. 일단은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성의 왼쪽에 조금 큰 균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가 사분오열 됐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된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페르시아 왕위다툼에 개입하기도 했고.[9] 1.6.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몰락 (BC 431 ~ 338)[편집] 자만이 뻗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구성해 동맹의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스파르타에 오만을 부렸다. 결국 이를 보다 못 한 전투종족 스파르타는 성질이 뻗쳐서 아테네와 대립하던 남그리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이 발발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육지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해군으로 응수하는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전쟁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도시민의 1/3이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터지고 페리클레스도 이것에 걸려 죽자 아테네는 국력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퇴장으로 정치의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탄 알키비아데스[10]와 같은 신흥 정치가가 등장하여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라쿠사 전쟁을 제안한다. 시민들은 이것을 지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정치세력의 공작으로 알키비아데스는 성상파괴의 누명을 뒤집어 쓴 채 망명하고 그 결과 그 없이 시라쿠사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전염병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놔두고 시칠리아 섬까지 가서 그 섬의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자 한 것이라 뜬금없어 보이나 당시 아테네 인들의 생각은 이 도시를 점령해 그 자원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는 데 보태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알키비아데스가 추방당한 뒤 이것을 앞장서서 반대한 니키아스[11]가 이 전쟁을 맡게 되자 지휘는 엉망으로 되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지원 병력이 상륙에 성공하여 지원병을 모집하고 아테네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시작했다.[12][13] 또한 시라쿠사 역시 매우 강력한 대도시였으므로 공략은 쉽지 않았다. 아테네는 그야말로 물량을 모두 투입하여 어떻게든 승리코자했으나 마침내 대패하여 이 병력과 물량이 시칠리아 섬에서 소멸됨으로써 아테네는 100여 척의 함대를 제외하고 모든 전쟁 물자를 손실한 끔직한 타격을 입는다. 그 뒤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여 100여 척의 함대로 계속 버티다 재정확보를 위해 알키비아데스가 일등항해사에게 관리를 맡기고 자리를 뜬 상태에서 일등항해사가 멋대로 스파르타 해군에게 덤벼 가벼운 패배를 당하자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그는 사령관 지위에서 쫒겨난다. 그 뒤로 아테네는 남은 국고와 인력을 쥐어짜내어 새로이 편성한 함대로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격파하지만 전투 직후 풍랑을 만나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하여[14] 지휘관들을 모두 처형해버린다. 그 뒤 경험있는 지휘관이 부족한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게 가볍게 격퇴되고[15]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무리된다. 그 뒤 아테네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스파르타대로 국력을 이 전쟁에 너무 소모해서 전후 아테네의 위임통치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 되었고 전후처리에 불만을 품은 코린토스와 테베가 반기를 들어 재차 코린토스 전쟁, 스파르타-테베 전쟁을 치르며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 사이에 아테네는 2차 델로스 동맹을 건설해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했다.) 스파르타는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총 전투 인원이 2만 명이 조금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이 이 한 싸움의 패배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며 스파르타의 피 정복민인 헬롯인들이 승자인 테베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16]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주권국이 된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동족 그리스인들을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다 아테네군에게 개박살났었다. 그러나 테베의 영광도 잠시, 장창병과 기병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차례로 마케도니아에 접수당했다. 이를 보다못한 두 원수지간인 아테네와 테베는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대결한다. 테베와 아테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국가들이였으므로 이들의 연합은 그만큼 마케도니아의 침략이 위협적이였다는 말이었다. 이때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립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이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 두 강력한 도시들의 그리스에서의 패권다툼을 종식시키고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새로운 패자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한때 종주국이었던 테베는 필립포스가 죽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역으로 진압당하여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 전원이 노예로 팔림으로써 소멸당해버린다. 1.7. 후대의 해석[편집] 페르시아 전쟁/해석 참조.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편집] 현대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고대에는 이것도 페르시아 전쟁이라 한 경우가 있다. 3. 로마-페르시아 전쟁[편집] 이것도 페르시아 전쟁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해당 문서 참조. [1] 왜냐면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토와 인구가 열세였던 터라 훨씬 거대한 세력인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페르시아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던 전제군주제를 통해 유능한 왕중왕이 직접 국정을 총괄하고 군통수권을 장악하여 국가간 전면전에 매우 유리한 시스템이었던 반면, 그리스는 수십여개의 폴리스로 쪼개져 각자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며 수틀리면 내전까지 벌여댈 정도로 느슨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실 국력차 뿐만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페르시아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2] 페르시아가 600척을 반란군이 380척의 함대를 거느렸다. [3] 여담으로 이 사절단 사건 전까지만 해도 아테네는 페르시아 입장에선 말 그대로 듣보잡이었다. 사절단을 맞이한 페르시아 측에서 한 말이 "그대들은 대체 누구이고, 어디서 온 것인가?"였을 정도. [4] 사실 BC 490년이 아니라 이것을 1차 원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5] 아테네는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때렸고, 스파르타는 재판이고 뭐고 없이 사신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흙과 물을 가져가고 싶으면 직접 우물에 들어가서 가져가라는 말을 곁들이면서. 이 사건은 영화 300에서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사신을 걷어차 구덩이에 빠뜨리는 장면의 원형이기도 하다. [6]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최대 도시(?) 시라쿠사의 경우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어서 참여할 수가 없었다. [7] 전투초반에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의 견제에 상당히 말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됐고 결국 폴리스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임전무퇴 스파르타, 제일 원한을 많이 사서 도망갈 수가 없는 아테네, 아테네가 없으면 테베한테 맨날 맞고사는 플라타이아이인 이렇게 셋만 남았다. 날이 밝고 이 사실을 안 스파르타 사령관 파우사니아스는 어이가 없어서 아테네에 사자를 보내 우리끼리라도 싸우다 죽자고 하고, 그렇게 싸운 결과 페르시아 사령관 마르도니우스가 왠지 앞에서 싸우다 죽어버리면서 전쟁에 이겼다. [8] 왜냐면 스파르타는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 때문에 장기원정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9] 이 페르시아 내전에서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한 크세노폰이다. 그가 남긴 전쟁 회고록이 바로 아나바시스. [10] 소크라테스의 애제자 중 하나로 유명하다. [11] 니키아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문학에도 많은 후원을 하여 시민들에게 유력한 정치가로 여겨졌다. 여러 승리를 기록하면서 (어렵고 긴 임무를 기피한 경향에 힘입어) 패배한 일도 없었고 겸손한 태도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니키아스 스스로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군 지휘관의 한 명으로 억지로 앉혀지게 되었다. 시칠리아에 파견된 장군 세 명 중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고 라마코스는 전사하였는데 유일하게 남은 장군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반대하던 원정이라 열의도 없었고 마침 그의 건강마저 좋지않았다. 특유의 지나친 신중함까지 더해 원정군은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이는 재앙이 되었다. [12] 게다가 시라쿠사 인들은 스파르타 출신의 도리아인들이었으므로 스파르타의 지원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3]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이 적극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조차 모타케스(열등자) 신분이었다. [14] 전사자 시신 수습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풍조에다 때마침 있었던 제전 기간이 전사자들을 상기시켜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15] 마지막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잠시 등장해 해군의 위치가 안 좋다고 조언하며 자신을 전시 작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사령관들은 거부하였다. [16] 스파르타의 인구 구성원은 1만에서 2만 사이의 전사 계급인 스파르타 시민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수십만의 노예신분인 헬롯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베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로 인해 이 시민의 절반 이상이 죽고 수십만의 헬롯이 해방되어 독립되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이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이 이후로 스파르타는 약소국으로 추락하여 다시는 그리스 내에서의 패권을 경쟁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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