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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걸어라 지혜 찾고 구원을 얻으리니… |
창간 기념 특별 기획/나는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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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2007년 09월 17일 (월) 14:55:23 |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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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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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싣는 순서
세상에서 가장 길고 사색적인 길, 산티아고
세상에서 가장 높고 신비한 길, 네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 제주 |
서명숙 <시사IN> 편집위원은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에 다녀온 뒤 ‘느리게 걷기, 느리게 생각하기, 느리게 살기’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제주도뿐 아니라 온 나라 전역에 자동차 없이 걷는 길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내게 진정 어려운 일은 걷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었다.” <나는 걷는다>에서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이렇게 썼다. 올리비에만이 아니다. 걷는 사람들은 말한다. 걷고부터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노라고. 길에서 지혜를 찾고, 구원을 얻었노라고. 그래서 멈출 수 없었노라고.
걷기는, 그 중에서도 느리게 걷기는 가장 급진적인 문명 전복 행위이기도 하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삶은 효율을 향상시키되, 주변을 돌아보는 힘을 떨어뜨린다. 자동차 속도를 높일수록 시야가 좁아지듯 삶에 가속을 붙일수록 남는 것은 파편화된 욕망과 개인뿐이다. 그래서 시인 이문재는 말한다. “느림에서 돌봄이 나오고, 나눔이 나오며, 더불어 살기가 나온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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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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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는 느림의 철학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전략이기도 하다. <시사IN>이 ‘걷기’를 창간 캠페인으로 제안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혼자도 좋고, 여럿도 좋다. 걷고, 느끼고, 사유하는 일련의 행위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으로 <시사IN>은 걷기의 ‘치명적 중독’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자 한다.
그 첫 작업은 본지 서명숙 편집위원이 세 번에 걸쳐 연재하게 될 걷기 예찬기이다. 평화의 섬 제주를 ‘자동차 관광지’에서 ‘도보 순례자들의 성지’로 탈바꿈시키고자 사단법인 제주올레(‘올레’는 좁은 골목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를 발족시킨 서씨는,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 발굴한 ‘흙길 1차 코스’를 지난 9월8일 일반에 처음으로 개방한 바 있다. ?
바다는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푸르른 몸뚱어리를 뒤척였다. 소머리를 닮았다는 우도와 난공불락의 성채를 연상케 하는 성산봉이 엎드려 우리 일행을 맞았다. 고개를 돌리니 아스라이 지평선에 떠오르는 제주의 오름들…. 이틀 전까지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 사흘이나 쏟아졌다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하늘은 높고 맑았다. ‘바람의 딸’ 한비야가 외쳤다. “녹색과 검정이 이렇게 기막히게 어울린다는 걸 처음 알았네.” 2007년 9월8일 제주도 서귀포시 시흥리 말미오름 정상에서였다.
산티아고에 마음을 빼앗긴 3년 세월
옆에 선 사람들의 표정을 죽 둘러봤다. 비취빛 바다, 곡선으로 굽이치는 오름, 구불구불 이어지는 현무암 돌담길을 내려다보면서 다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 행복은 열 배, 백 배로 부풀어 올랐다. 산티아고 길에서 품은 꿈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길은 사람의 생각을, 때로는 인생길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듣도 보도 못한 스페인 도시 산티아고 레 콤포스텔라에 마음을 빼앗긴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오래된 친구인 담배를 떠나보내고 걷기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 15년 넘게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둔 뒤로는 걷기에 더욱더 빠져들었다. 걷기는 몸과 마음에 붙은 군살을 내리는 최고, 최선의 운동이자 가장 값싼 운동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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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돌담과 흙길로 이어진 제주올레 시범길을 걷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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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으면 걸을수록 아쉬움이 커지고 갈증은 심해졌다. 가다 보면 걷는 길은 끊어지거나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매연과 소음, 자동차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걷는다는 건 명상보다는 극기 훈련에 가까웠다. 평화롭게 마냥 걸으면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던 중 한 여자 후배의 집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전한’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는 브라질 교포 여성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산티아고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기다려다오, 곧 찾아가리니.
그러나 계획은 몇 번이나 미루어졌다. 그 사이에 <오마이뉴스>에 재취업한 나는 첫 월급을 타자마자 ‘산티아고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별로 큰돈이 들지 않는 순례길이었으니, 돈 모으기보다는 유예된 꿈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던 셈이다.
열망만큼 질긴 습관에서 벗어나기
산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되는 프랑스 국경 마을로 가기 위해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건 그 길을 마음에 품은 지 3년 만인 지난해 9월이었다.
그러나 습관 역시 열망만큼 질긴 구석이 있었다. 피레네 산중에서도 내 귀에는 고국에 두고 온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그곳에서 화면만 켜면 ‘짜잔’ 뉴스가 뜨는 초고속 인터넷이 간절히 생각났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고, 대자연이 병원이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면서 인터넷 중독증과 휴대전화 집착증은 서서히 치유되었다. 내 눈과 귀는 대자연의 소리와 풍경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도보 여행의 최대 장점은 ‘오감’을 두루 자극해주는 것이라는 한비야의 말이 갈수록 피부에 와닿았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미풍에 몸을 내맡기고 길섶에 핀 키 작은 들꽃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는 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급적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 여행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종일 걷고 난 뒤에 마을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한 조각씩 떼어 먹는 굳은 빵은 특급호텔 코스 요리 못지않았다. 오십 평생 봐온 일출과 일몰보다 산티아고에서 본 횟수가 더 많지 싶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존재는 자연만이 아니었다. 내 몸은 기대보다 튼튼했고 두 발은 생각보다 빨랐다. 되도록 느릿느릿, 게으르게, 사방을 이리저리 해찰하면서 걸었는데도, 출발할 때는 아득하게 느껴지던 그곳에 가닿아 있곤 했다. 오로지 자신의 두 다리에 의지해서 지도상에 나타난 지점과 지점 사이를 이동하는 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었다.
자연의 도전이 거셀수록 자신에 대한 신뢰는 높아졌다. 길을 나선 지 20일쯤이 지났을 무렵, 한 산중 마을에서 아침부터 세찬 장대비를 만났다. 도보 여행자들끼리 택시를 대절해서 배낭만 부친 뒤 폭우를 뚫고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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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서명숙 야곱이 걸었다는 순례길,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나는 내 고향 제주도를 떠올렸다. 산티아고 돌담길(오른쪽)은 제주도 돌담길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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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을 묵묵히 걷다 보니 빗줄기는 잦아들었고 무거운 배낭에 익숙해진 등은 홀가분하기보다 도리어 허전했다. ‘비도 덜 맞고 마을에 빨리 도착할 겸 아예 달려가볼까?’ 제주도 한라산 5·16도로와 흡사한 구절양장 산길을 8km쯤 내처 달렸다. 빗줄기에 몸은 축축이 젖어들었지만 정신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평소 불만스러운 구석이 많았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총연장 8백km나 되는 길을 36일이나 걷다보니, 숱한 길동무들과 만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작은 마을에서 의자를 내놓고 해바라기를 하는 스페인 할머니들, 농사 지은 멜론을 두 통이나 안겨주던 농부 아저씨,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알베르게를 빠져나오자마자 캄캄한 산중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내게 손전등을 비춰준 멕시코 남자 필리페, 한국에서 2년간 원어민 영어 강사를 하면서 익힌 찜질방 한국어로 나를 웃기던 미국 아가씨 재닛, 길고 긴 황톳길이 한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코스에서 맨땅 위에 막대기로 ‘힘내라 수기(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외국인들은 나를 ‘수기’라고 불렀다)’라는 응원 메시지를 남긴 프랑스 남자 등등,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순례자>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를 우연히 만난 것도 그 길 위에서였다.
하지만 내가 누린 더 큰 행운은 영국 여자 제시카와의 만남이었다. 순례가 끝나기 사흘 전에 만난 그녀와 나는 급속히 친해졌다. 아침에 카페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는데 점심 무렵 산중 마을 멜리데로 가는 길가 잔디밭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는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멜리데에서 명물로 꼽히는 ‘불포(문어)’를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단다. 맛난 것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확인한 우리는 금세 오래된 친구처럼 친해졌다.
그녀와 나는 위장을 확실하게 비운 채로 멜리데에서도 가장 문어 요리를 잘한다는 식당을 찾았다. 맛난 현지 음식을 맛보면서 행복지수가 한껏 높아진 나는 ‘산티아고 순례에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앞으로 5년마다 한 번씩 땡빚을 내서라도 이 길을 찾겠다’고 큰소리쳤다.
“자기 나라에 카미노를 만들자”
제시카는 차분하게 듣더니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길을 하나씩 만들어야 해. 우리가 산티아고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말야. 다 우리처럼 스페인까지 오는 행운을 누릴 순 없잖아? 행운을 먼저 누린 우리가 행운을 나눠줘야지.”
충격이었다. ‘왜 우리 땅에 걷는 길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다닐 생각만 했을까? 내 고향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제주도 아닌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자주 제주도 옛길을 떠올렸던가. 그래, 제주도에 길을 한번 만들어보는 거야! 철저하게 안티 공구리(시멘트 포장을 거부한다는 뜻)로 말이야.’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고향 제주도에 ‘바당올레 하늘올레’를 만들어 걷는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리라는. 이번에 선보인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는 그 꿈을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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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끽한 찬란한 '오르가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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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2007년 10월 01일 (월) 11:43:23 |
이유명호(한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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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말미오름 정상에 서면 눈 아래 늘어선 오름들의 장관이 펼쳐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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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지난 9월8일 말미오름~종달리~성산봉에 이르는 15km 길이의 걷는 길을 시범 개방했다. 이 길을 다녀온 이유명호씨의 소감문을 싣는다. <시사IN>은 10월20~21일 독자들과 함께 이 길을 따라 걷고자 한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성산 쪽 올레 길을 처음 개방하던 날, 흥분성 신경의 조작으로 날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탔다. 출발지는 오름 병풍 아래 시흥초등학교 운동장. 새파란 잔디구장을 보고 ‘와~와’ 소리를 질렀다. 주최 측은 으쓱대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감탄사는 끝까지 계속될 거우다.” 진담이었다.
돌담을 어루만지며 오르던 등성이에서 뒤돌아본 들판은 짙푸른 나무들과 검은 흙밭으로 수놓은 색 조각보이다. 오름 정상은 360° 파노라마로 거침없이 광활하다. 탄성에 신음소리(?)까지 보태졌다. 앞자락은 청옥빛 바다에 우도와 성산이 듬직하게 떠 있고 뒷자락에는 한라산이 큰 팔을 벌려 세상을 품고 있다. 대지를 휘몰아오는 바람에 정신없이 따귀를 맞았다. 온몸이 펄럭펄럭 털렸다. 달팽이의 등짐처럼 무겁던 삶이 훌쩍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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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올레 길 순례에 참가한 한의사 이유명호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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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름에서 오르가슴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길, 발걸음도 가볍게 부르는 동요 메들리. “아기구름 나비구름 떼를 지어서 딸랑딸랑 구름마차∼.” 길은 학예회 때 명랑 시절로 시계 바늘을 되돌려놓았다. 오솔길 지나 아스팔트를 건너 종달리로 들어서니 고향 같다. 넝쿨 담장 너머 수선화, 맨드라미, 봉숭아가 어여쁘다. 쉬다 가라며 할아버지가 건네신 얼음물과 정겨운 인심은 여행자의 행복!
조개죽이 맛있는 해녀의 집도 지나고 오후의 태양도 기울어갈 때 마침내 일출봉 발치에 누운 광치기 바닷가에 도착했다. 해단식이다. 바닷물에 발 담그고 윗몸은 바위에 벌렁 누우니 따끈한 돌판구이다. 살아 있으니 걸을 수 있었다. 고맙다.
제주 올레는 9성급 길이다. ★★★★★★★★★. 별 한 개는 걷는 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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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제주의 속살을… |
언젠가는 수많은 올레꾼들이 길 위에서 제주의 신화와 역사를 호흡하게 되리라. 이곳에서 살다 간 여신들과 살아가는 여신들을 만나게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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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2007년 10월 10일 (수) 10:04:12 |
서명숙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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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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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길에서 품은 소망은 네팔의 설산을 오르면서 더 절실하고 단단해졌다. 산티아고 길과 네팔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과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두 곳에는 한결같이 바다가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어느 곳을 가든지 늘 푸른 바다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언젠가, 반드시 살아생전에 만들고 말리라는 생각은 더 늦기 전에, 자동차 길이 더 생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쪽으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나 혼자 다닐 길이 아니기에,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길의 효용성을 검증받고 공감의 폭을 넓혀야만 했다. 틈만 나면 제주에 걷는 길을 만들겠노라고 떠들고 다녔더니, 주위의 여자 선후배들이 맨 먼저 반응을 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가서 걸어보자!”
일종의 ‘테스팅 마켓’(제품 출시를 앞두고 소비자의 반응을 시험해보는 시장)인 셈인데, 어디로 이들을 데려간담? 망설이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단연 서귀포 칠십리였으니까. 서귀포! 그곳은 내게 영혼의 자양분을 공급하고 뼈와 근육을 키우고 단련시켜준 곳이었다. 어머니가 단체 기합용 매를 들라치면 가파른 기정(절벽을 뜻하는 제주어) 길을 타고 쏜살같이 천지연으로 도망치곤 했다. 그곳 내팡돌에 앉아 하릴없이 뺑이를 따먹으면서 얼른 어른이 돼서 먼 곳으로 떠나기를 얼마나 소망했던가.
서귀포 칠십리 해안을 휘돌아 걷노라면
여름이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을 걸어 자구리 바닷가, 이중섭의 그림에 등장하는 벌거숭이 아이들과 게가 어우러져 노는 그곳으로 멱을 감으러 다녔다. 양은 세숫대야에 달랑 팬티 한 장, 운 좋은 날엔 참외 하나쯤 더 넣고서. 한나절 물속에서 첨벙거리다가 이를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제서야 바다로 오는 친구가 꾀면 자구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만큼 남국의 태양은 강렬했고 길은 한없이 멀었다.
어른이 된 뒤 찾으니 그 길은 싱거우리만큼 짧아서 서운했다. 흙길은 거의가 콘크리트로 덮이거나 수입산 나무로 단장되었지만, 여전히 서귀포 바다는 푸르렀고 그 바다 위의 섬들은 그림 같았다. 아니, 길은 변했어도 산천은 더 아름답고 정겨웠다. 열망하던 도시에서 치솟은 잿빛 빌딩과 아파트 숲에 치이고 시달린 끝에야 제주 바당(바다의 제주어)이 주는 위안과 평화를 깨닫게 된 내게는…. 서귀포 칠십리 길을 걷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사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내 3월 초순 보슬비가 내리는 날, 여자 열 명이 보목리 검은여(여는 바닷가 큰 바위를 뜻하는 제주어)를 출발했다. 색깔이 각기 다른 우산을 쓰고서. 촉촉이 젖어 검은빛을 더한 검은여의 풍경은 고혹적이었다. 검은여-소정방폭포-정방폭포-자구리 해안-서귀포 부두-천지연-남성리-외돌개까지(‘제주 올레’ 두 번째 코스에 해당한다) 여자 열 명은 가끔 멈춰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마냥 걸었다. 빗발은 세차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오락가락, 변덕스러운 날씨조차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도보여행자라고 미리 못 박아둔 덕분에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서너 시간에 고즈넉한 칠십리 해안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빨래를 걷는 할머니와 어구를 걷어들이는 어부 등 서너 명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 멋진 길에 걷는 사람이 왜 우리밖에 없는 거야? 오늘 아침 비행기에 탔던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내 어린 시절 1960~1970년대의 서귀포는 신혼부부의 파라다이스, 도보여행자들의 메카였다. 골목마다 여관이 있었고, 사람들은 주민이건 여행자이건 느릿느릿 걸어다녔다. 귤림여관, 장춘여관, 유림여관 근처에는 배낭을 멘 여행자가 무리지어, 혹은 혼자서 신발끈을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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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사단법인 ‘제주 올레’는 지난 3월 제주 성산읍에서 말미오름, 종달리 소금밭, 오조리 해안도로, 성산 일출봉을 거쳐 섭지코지에 이르는 15km 걷기 행사를 개최했다. 걷기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시흥 해안도로에서 ‘제주 바당’을 감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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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데 제주 곳곳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생겨나면서 서귀포에는 도보여행자는 물론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자도 드물어졌다.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려고 떠나는 여행에서조차도 ‘빨리빨리’ 섬을 한 바퀴 돌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무슨 무슨 박물관이나 놀이시설을 ‘하나라도 더’ 보려는 속도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빗속에서도 여자들은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마침내 골인 지점인 외돌개에 도착해서 그곳 찻집에서 솔숲에 내리는 비를 ‘즐감’하며 젖은 몸을 녹였다. 한 선배 언니가 말했다. “제주를 워낙 좋아해서 열댓 번도 더 왔는데, 걸어보니까 그동안 다녀간 게 다 헛거였더라고. 겉만 봤지 속살은 못 봤지 뭐냐.”
그랬다. 걷는다는 건 그곳의 속살, 고갱이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주위의 뜨거운 반응을 확인하고 나자 ‘제주 걷는 길’ 만들기에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위기에 처한 제주 관광의 새 활로를 찾으려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환경을 보호하고 유지하면서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는 제주 올레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올레의 최초 조력자들을 규합했다. 40년 친구 허영선 시인, 제주가 좋아 제주로 이주해온 시사만화가 김경수 화백이 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길을 답사하고 올레 코스가 하나씩 확정될 때마다 그 길에 대한 정보를 ‘간세다리의 바당올레 하늘올레’라는 팸플릿에 담아내기로 했다. 제주자치도가 그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것도 일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나고 자란 서귀포를 빼놓으면 나머지 지역은 제대로 걸어본 적도, 그곳에 대해 변변히 아는 것도 없었다. 나부터가 제주의 속살을 두루 들여다보고 경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느 지역에 얼마만큼 옛길이 남아 있는지, 사라진 길을 되살릴 수는 없는지, 길과 길을 어떻게 이어야 풍경과 이야기를 두루 보여줄 수 있을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걸어봐야만 했다.
서울 일을 대강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간 건 지난 7월25일. 여름의 절정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8월 말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서귀포시(예전 행정구역 편제로는 남제주군) 해안가 일대를 답사했다. 가끔 혼자서, 때로는 여중 동창생들과, 대부분은 올레 팀들과 함께. 어떤 식으로 걷든, 어디를 걷든 길을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길에서는 제주만이 지닌 독특한 풍광과 함께 제주 오름과 바당을 닮은 넉넉하고 싱그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마을마다 하나쯤은 있는 ‘해녀식당’을 운영하는 해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씩씩하고 당당하고 웃음이 풍성했다. 동하리 해녀식당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직접 배워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할머니들이 그곳 해안에서 잡아 돌절구에 빻아서 끓여낸 겡이(게)죽을 목덜미를 간질이는 해풍을 맞으며 먹는 맛이란(아쉽게도 그들은 6월에서 9월 사이에만 영업을 하므로 내년 6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일장에서 대나무 구덕을 파는 할머니는 처음 보는 내게 오라버니가 4·3 사건 때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을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굶주림과 무학의 설움과 아픈 가족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할머니의 웃음은 해탈한 부처 같았다.
길을 걸을수록 확신은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길은 숨어 있다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해안 마을 가마리에서 길이 막혀 돌아서려다가 아무래도 아쉬워서 이리저리 헤매다 해녀 탈의장과 연결된 길을 발견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폭은 좁지만 바다에 딱 붙은 언덕길이라서 전망만은 기막힌 그 길은 다름 아닌 ‘해녀 올레’였다. 태흥리 바닷가 근처 대나무가 우거진 절벽 길은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져 입구에 거미줄이 사방으로 둘러처져 있었다.
바당에서 기정까지 올랐던 길 되살린다
올레 탐사반의 탄성을 자아낸 건 화순해수욕장 근처 대평포구 앞 박수기정(기정은 벼랑을 뜻하는 제주어)으로 올라가는 ‘좆은 길’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에서 기정 위에 펼쳐진 드넓은 초지로 농사지으러 가기 위해 돌을 쪼아서 조랑말이 오를 만한 완만하고 넓은 길과 한 사람이 겨우 오를 만한 가파른 길을 만들어 오랫동안 이용해왔단다. 하지만 기정 뒤로 올라가는 자동차도로가 생기면서 ‘좆은 길’은 서서히 용도 폐기되었고, 지금은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져 사라져버린 길이 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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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한향란 제주 올레는 국내외 도보여행자들이 느리게 걸으면서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위는 광치기 해변을 걷는 올레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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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올레 답사반은 서귀포시 100km를 답사한 끝에 바당과 하늘, 그리고 마을 올레가 적절히 섞인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를 첫 코스로 결정했다. 더 아름다운 길, 멋진 풍광도 많은데 굳이 첫 코스로 이 길을 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당과 하늘과 마을 올레가 섞여 제주 길의 특징과 미덕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코스의 출발점인 말미오름(두산봉) 입구에 올레꾼들이 모일 수 있는 예쁜 시골학교(시흥초등학교)도 장점이었다. 1947년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웠다는 이 학교의 초록색 잔디구장은 학교 졸업생들이 예비군 훈련 때마다 한 줄씩 심어서 조성한 것이라니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한 학교였다. 그곳 마을들이 가진 상징성도 고려되었다. 시흥리와 종달리는 과거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경계선이었다. 본디 제주 순력 길은 ‘시흥에서 시작해서 종달에서 끝나는’ 순서였다.
제주 올레는 시흥리에서 막 출발했다. 종달리에서 올레 코스를 끝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올레와 올레를 이어놓으면 대체 제주를 다 걷는 데 며칠, 아니 몇 달이 걸릴지 또한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수많은 올레꾼들이 파란색 화살표(올레 사인)를 따라 차량의 위협을 받지 않고 느릿느릿 간세다리가 되어 걸어가게 되리라, 그 길 위에서 제주의 신화와 역사를 호흡하게 되리라, 이곳에 살다 간 여신들과 살아가는 여신들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 (창간 기념 특별 기획은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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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느리게 걸으며 제주 재발견” 제주올레 출범
9일 오전 10시 반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 교정. 간편한 산행 복장을 한 아마추어 도보 여행가들이 길을 나섰다.
‘속도 만능의 시대’에 맞서 천천히 걸으며 제주의 ‘속살’을 느끼려는 사람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 전 시사저널 편집장)가 이날 발족식을 갖고 첫 행사로 ‘세계자연유산 성산 따라 걷기’를 연 것.
이날 코스는 제주의 하늘과 바다, 마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 났다. 돌담이 줄을 이었고 ‘말미오름’을 오르는 길 양편엔 억새, 이삭이 팬 밭벼, 물을 찾아 나온 소들이 한가롭게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1시간 반 만에 도착한 말미오름 정상. 정상에 오른 여행가들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서로 마주보며 금방이라도 포옹할 것 같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기생화산인 오름의 무리가 한라산 정상을 배경으로 줄 지어 섰다.
행사에 참가한 여행전문가 한비야 씨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인 해외 명소와 달리 제주의 자연은 온화하고 정이 묻어 난다”며 “이번 걷기 코스는 제주의 재발견이라고 불릴 정도로 환상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를 출발해 말미오름, 종달리 소금밭, 성산포 갑문, 철새도래지, 갯벌체험장, 성산일출봉 등을 5시간가량 걸었다.
제주올레는 제주의 옛길, 아름다운 길, 사라진 길을 되살리기 위한 비영리 법인. 올레는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코스는 생태계와 환경을 최대한 보전하는 방식으로 개발된다. 탐사가 완료된 코스는 만화안내서로 제작돼 도보여행객, 관광객 등에게 제공된다.
제주올레는 매달 새로운 걷기 코스를 선보이며 걷기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장기간에 걸친 코스 탐사 등을 거쳐 제주 전역을 걸어서 연결하는 코스를 만들 예정이다.
10월 중에는 서귀포시에 새로운 걷기 코스가 탄생한다. 참가 제한이 없고 교통과 식사는 각자 해결해야 한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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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912017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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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사회 2007.9.6(목) 06:59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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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걸으며 만나는 ‘제주의 속살’
발길이 닿지 않은 길, 농부가 걷다가 지금은 풀만 무성한 길, 시골 정취가 흠뻑 묻어나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 모임이 생긴다.
‘제주올레’는 9일 사단법인 발족식을 하고 첫 공식 모임으로 ‘세계자연유산 성산 따라 걷기’ 행사를 연다. 제주올레는 제주의 옛길, 아름다운 길, 사라진 길을 되살리기 위한 비영리 법인. 올레는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어다.
이날 참가자들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를 출발해 말미오름, 종달리 소금밭, 성산포 갑문, 철새 도래지, 갯벌 체험장, 성산 일출봉 등을 탐사한다. 걷는 데 5∼6시간 걸리는 이 코스는 제주의 하늘, 바다, 마을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다. 한 달 동안 탐사를 거쳐 첫 걷기 코스로 선정했다. 참가 제한은 없고 음식, 교통수단 등을 각자 해결해야 한다.
제주올레는 천천히 걸으면서 제주의 ‘속살’을 느끼는 걷기관광을 표방하고 있다. 코스는 생태계와 환경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개발된다. 탐사가 완료된 코스는 만화로 만들어 도보 여행객, 관광객 등에게 제공한다.
서명숙 전 시사저널 편집장이 이사장을 맡고 손석희(방송인), 조용환(법무법인 지평 대표), 허영선(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문성윤(변호사), 정혜신(정신과 의사), 이창익(제주대 교수), 이유진(시인) 씨 등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서 이사장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제주도 전역을 걸어서 연결하는 코스를 만들고 싶다”며 “도보 여행객, 가족, 연인 등에게 여유와 평화를 주는 아름다운 길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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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709060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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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아름다운 길 만드는 것" |
'제주올레지기' 서명숙 대표 " 누구나 올레 회원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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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08일 (토) 17:25:41 |
양김진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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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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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돌담으로 이뤄진 집앞으로 이르는 좁은 골목길을 이르는 제주의 토속적 용어다.
제주사람들에겐 친숙하지만 타지방 사람들에겐 '올레?'라고 되물을 법 하다. 하지만 이내 그 뜻을 알게 되면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이름이다.
사답법인으로 출발한 제주올레의 대표를 맡은 서명숙 이사장(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서귀포 출신으로 누구보다 제주땅에 애정을 가진 그가 20년이 넘는 언론생활을 정리하고 꿈꾼 것은 제주도에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제주의 '산티아고 길' 같은 느릿느릿 걷는 길 만들고 싶다"
지난해 '산티아고 순례기'를 마친 그는 고향 제주도에도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나 네팔의 트레킹 코스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길을 내고 싶다고 주변에 누누히 이야기를 하고 또 실천에 옮겨왔다.
제주 모습에 가장 가까운 길, 가장 환경친화적인 길, 자동차와 가장 적게 만나는 길, 느릿느릿 걷기에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까?.
8일 수개월간의 발품끝에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 첫 길을 내놓은 그에게 '제주올레'가 가는 길을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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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시사만평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경수 화백. 서명숙 이사장은 "김 화백이 아니면 모양을 내며 일을 추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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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제주도만의 길을 만들 생각을 했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섬,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제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겠지만, 제주의 속살을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천천히 걷기’라고 할 수 있다. 6,70년대 제주에서는 도보여행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로망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걷는 길은 점차 밀려나고 깔아뭉개지고 묻혀 버렸고, 도보여행자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평화의 섬 제주에서 역설적이게도 ‘빠른 관광’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어떤 단체인지 소개해 달라
"제주의 옛길, 아름다운 길, 사라진 길을 다시 살릴 수는 없을까. 그 길을 고독한 도보여행자는 물론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끼리 어울려 걷을 순 없을까. 제주에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걷는 길’을 만들어 전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일 순 없을까. <제주올레>는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비영리 법인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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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 시흥 두산봉(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제주길 |
| -<제주올레>에 전국 각지 유명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는데..
"이사회는 이사장 1인과 이사 7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8인은 서울과 제주에서 오랫동안 만나면서 제주에 대한 사랑과 문제인식을 공유해 왔다.
이사진은 문성윤(변호사), 서명숙(전 시사저널 편집장,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손석희(언론인. 성신여대 교수), 이유진(시인. 내셔널트러스트 고문), 이창익(제주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정혜신(정신과 의사. 정혜신 심리분석연구소 원장), 조용환(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대표), 허영선(시인. 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등 일곱 분이다.
이사진 외에도 자문위원단, 올레길 탐사팀이 꾸려지는데, 탐사팀은 코스의 성격과 지역에 따라 그때그때 달리 구성될 것이다. 첫 걷기 행사가 진행되는 8일 이후부터는 올레 회원도 모집할 예정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은 모두 올레회원이 될 수 있다."
- 법인 명칭을 <제주올레>로 명명한 이유는.
올레는 순수한 제주어로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뜻한다. 제주의 모든 길은 사실상 다 누군가의 올레이다. 오름길, 해녀길, 바당길, 마을길들을 다 이어서 걸을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사단법인 이름을 <제주올레>라 했다.
제주 올레는 제주인,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외국인들도 쉽게 기억하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레는 최고의 이름이다. 발음상 “제주에 올래?’라는 이중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첫 코스를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스’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제주 올레>의 1차 탐사팀(서명숙, 서동연, 성호경, 강수부, 고태훈, 김세헌, 강광식, 강광민)은 서귀포시 일원, 즉 동쪽 끝 시흥리에서 서쪽 끝 모슬포까지 한달여의 기간에 걸쳐서 길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탐사팀은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제주 올레 코스를 시흥리, 종달리에 걸친 말미오름(두산봉)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시흥-섭지코스 코스야말로 바당올레와 하늘올레 그리고 마을올레를 한번에 두루 체험할 수 있는데다, 최근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성산오름을 여정의 시작에서 끝까지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제주올레>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먼저 코스를 개척한다. 사라진 옛길을 찾아내어 본디 모습으로 되살리고, 끊어진 길을 잇고, 올레와 올레 사이를 연결하는 코스를 만들어낸다. (걷기 코스는‘바당올레 하늘올레'로 부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공의 손길은 전적으로 배제하고, 생태계와 환경을 전적으로 존중하고 보존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그런만큼 코스 개발에는 오랜 시간과 섬세한 노력이 투입될 것이다. 제주도 전역을 걸어서 연결시키는 데 십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또 사인 부착 캠페인을 벌인다. 개발된 코스에 ‘올레 사인’을 표시한다. '올레 사인'은 제주를 처음 찾는 국내외 도보여행자들도 쉽게 코스를 완주할 수 있도록, 식별이 쉽고 간단한 만국 공통의 기호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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