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3편 세상꽃>
① 첫사랑 준희-15
그렇지만 어찌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따라서 교실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 그녀의 행동만을 지키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그녀는 책상 속에 손을 넣었다가 짚이는 대로 편지를 꺼내어들고서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었다. 그녀는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편지를 손에 쥔 채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경계하는 눈치이더니, 그것을 펴볼 듯이 하다가는 얼른 책갈피 속에 찌르고 마는 거였다.
그것을 본 용훈은 조이던 마음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마음은 놓이었으나, 그녀가 그것을 그냥 묻어둘는지 아니면, 어느 틈엔가 펴볼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그 자리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고 말없이 묻어두는 게 마음을 놓이게 하였다.
그리고 학교가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새뜸 앞 길가에 보리 잎이 검푸르게 무성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닮아있었다. 푸르고 싱싱한 보리밭이랑은 먼 훗날 꿈과 희망을 안고, 창공으로 나는 듯이 가슴이 뿌듯한 느낌이었다.
정녕 준희가 보고 싶었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녀의 속맘은 사랑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깊디깊은 속이 자꾸 연민의 정으로 설레게 하는 거였다.
그는 설 띈 마음으로 얼른 집에 돌아왔다. 책보를 방에 놓아두고 부엌에 들어가서 솥에 든 밥을 꺼내어서 한 술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서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곧장 성황당 고개를 넘어서 범바위로 달리어갔다.
바위 밑에는 칡덩굴이 어우러지어서 터널 속과 같았다. 그녀가 이리로 오기만 하면 얼마나 호젓하고 조용한 만남의 장소이겠는가. 바위틈에는 제비풀이 웃자라 앙증맞은 파랑 꽃을 피웠다.
멀리 시냇가의 유채 밭에서 종달새가 요란한 소리로 우짖으면서 하늘로 솟구치었다.
그는 바위 옆에 서있는 나무그늘에 자리를 잡고서 앉아있었다. 앙상하던 나무들이 연둣빛 새잎을 한창 피우고 있었다.
어느덧, 산 그림자가 차츰 좁다란 들녘으로 길게 번지었다. 멀리 다랑이 논에는 농수를 가득히 채워놓아서 멀리서나마 희끗희끗하게 보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두렁길이 길게 산모롱이로 멀어지어간 모습도 보이었다. 그 길이야말로 다름 아니라 이곳을 처음 찾아올 때에 걸어온 길이었다. 산천초목이 모두 낯설고 생경하기만 하였던 이곳 두메산골을 찾아서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용훈은 갑자기 찬바람이 서늘하게 가슴속으로 스미어드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꼬이어진 운명은 실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는지, 어느 땅과 어느 거리에 머물러 있을는지, 실로 가늠하기가 어려운 거였다.
전쟁은 왜 터지었는지 몰랐다. 한반도의 전쟁은 아무래도 미국과 소련과 중국 같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어서 타의로 터진 게 아닌가. 그 전쟁으로 하여금 희생양이 된 건 오직 한민족이었다.
한강을 건너기 전날 밤에 겪었던, 일촉즉발의 위험한 고비가 불연 듯이 떠올랐다. 공중에서 폭격기가 기총사격을 퍼붓고 포탄이 소나기처럼 퍼부었는데 종잡을 수 없이 날아다니던 도깨비불의 파편들이 어둠의 전장을 종횡무진 아수라로 만들었다.
그러한 화염 속을 빠지어 나와 이곳까지 목숨을 끌어왔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제는 그러한 난리 통에서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자의식에 빠지어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오겠지.’
경산은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헤어진 가족들은 기다림의 간절한 바람처럼 얼른 돌아오지 않았다. 상상만하더라도 뜨겁고 감격스러운 만남의 환희는 아쉽게도 쉽사리 이뤄지지를 않고 있었다. 또 그러한 날이 언제 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용훈과 그 가족들은 만남의 기대에 차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 되리라는 간절한 소망이 가슴마다에 고이 간직되었던 거였다. 그래서 경산과 정읍댁도 겉으로 별로 말하지 않더라도 자식과 남편을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전쟁의 화염이 터진지는 어느덧 세 해가 지났다. 3년, 그 짧은 동안, 졸지에 가족과 헤어지어 이러한 머나먼 곳을 찾아와서 방황의 한 길목에서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연한 꼴이 된 거라고 용훈은 회포에 싸이었다.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아서 나풀대었으니, 멀리 가까이 산들은 연두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첫댓글 준희를 기다리면서도 용훈의 머리속은 지난 일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생각이 단순한 아이들이라면 이제나 저제나하고 준희의 머리카락이 보이기만 고대할텐데요^^*
사실 준희를 사랑하게 된 동기도 쓸쓸한 처지에서 비롯되었으나 준희도 거리를 두고 있고 헤어진 가족들도 만날 기약이 없으니 사면초가입니다. 이런 가운데 갈증만 더할 뿐이니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늦잠에 취해 5시반에 일어났는데 허둥지둥하는데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고 그래서 답글 저장이 안 되어 부랴부랴 청양학회를 다녀와서 이제야 글을 씁니다. 살고 보면 다람쥐체바퀴 도는듯 하지만 매일 새롭고 처음 겪는 일들입니다. 쇠털 같이 많은 날이 단 하루도 같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