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있는 세계사 - 서양교회사 1 )
1.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30~35년경에 태어나서, 안디옥의 3대 감독을 지냈습니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는 “일곱서신”이 있는데, 이것은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삶을 조명해주는 것으로 그가 로마 박해시 죄수로 끌려가는 도중에서 쓴 것입니다.
안디옥은 현재 터키 수리아의 국경 가까이의 있는 소도시(안다갸) 입니다. 고대에는 안티오크·안티오키아로 알려졌으며, 시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지중해 각지와 연결되고, 또 동쪽으로 이어지는 대상로(隊商路)가 있어 통상·무역의 요충지인데,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여러 성도들이 이곳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곳입니다. 안디옥은 기독교인을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곳도 이곳이었으며 또 ‘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 역시 안디옥 출신 이그나티우스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별명은 ‘테오포로스’인데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에서 감독으로 사역하던 중 고발되어 트라이야누스 황제(98-117)의 재위 기간에 체포당하였습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가 안디옥에 방문한 후, 이그나티우스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그러자 이그나티우스는 말하였습니다. “저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입니다.” 황제가 반문하였습니다.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죽인 그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러자 이그나티우스는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재판도 없이 이그나티우스를 로마로 압송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이송되던 여행길에 많은 교회들이 있는 소아시아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기독교가 모든 사회 계급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지역 기독교 공동체들은 순교의 길을 가는 영웅을 맞이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그를 만나기 위해 서머나로 대표단을 파견하고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전했습니다. 서머나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성도들이 자신을 구출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러한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의 목숨으로 신앙을 지킬 각오를 하고 있었고 이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대들의 친절이 나를 오히려 해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당신들은 그 계획을 성공시킬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디 나의 부탁을 들어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얻게 하십시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맹수의 이빨에 ‘밀’처럼 갈아지기 원하였는데, 이그나티우스의 이와 같은 소원은 마침내 로마에서 실현됩니다. 그는 결국 로마 박해 시 정죄를 받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 속에 맹수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맹수의 먹이가 되기를 자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죽지 않겠다고 꾀를 부리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요행히 살았다 해도 그것은 죽은 목숨입니다. 아니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죽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는 게 무섭지 않은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세상이 어쩐들 죽이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은 죽어도 삽니다. 순교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