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있는 곳에그가 있다강경란 분쟁지역 전문PD
강경란(姜暻蘭·49)은 2006년 9월 이화여대에 있었다. 1986년 중단했던 사회학 박사과정을 23년 만에 다시 시작했다. 1인 미디어 '프론트라인뉴스서비스'(FNS) 대표로 13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는 너무 지쳐있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대신 그는 모교(母校)를 택했다.그는 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를 호텔 대신 의정부 언니 집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지프로 누비던 전장(戰場) 대신 매일 지하철로 학교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갔다. 그곳에는 팽팽한 긴장 대신 23년 전의 향수(鄕愁)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바꿔놓은 캠퍼스에서 그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어느 날KBS에서 '20억 프로젝트'를 공모(公募)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든 이에게 지원 자격이 주어졌으며 주제도 '자유(自由)'였다. '학생' 강경란의 혈관 속에 잠자던 야성이 끓기 시작했다. 그가 낸 '인간의 땅'이 당선작 3편 중 하나가 됐다. 그 첫 편이 KBS를 통해 21일 방영된다.
"분쟁지역을 오가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쉬면서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더 나이 들기 전에 공부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겹쳐 학업을 재개한 것인데 1년 만에 그만두게 됐죠." 교수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떠나는 그에게 "빨리 다녀오라"고 했다.
기획물을 끝내는 데 3년이 걸렸다. 아프간·버마·네팔·아르메니아 쿠르드족과 '선박의 무덤'이라 불리는 방글라데시의 치타공까지 그와 동료들은 사선(死線)을 넘으며 이 시대 아시아인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담아왔다. 중동에서 살아온 그를 한국인 여성이 중동에서 살해된 15일 만났다.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간섭받는다는 건 편한 일이죠. 다만 23년 만에 다시 돌아간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제가 오르던 계단이 엘리베이터가 돼있고 여유로운 공간도 사라졌더군요."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까.
"거의 없었어요. 저는 목숨을 걸고 취재했지만 사람들은 다큐멘터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다른 PD들처럼 얼굴을 카메라에 내밀 걸 하는 후회는 없었나요.
"방송기자는 단기간에 스타가 될 수 있지만 PD는 여럿과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들은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 라는 증거를 남기고 싶겠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PD들은 카메라 뒤에 있습니다."
―돈은 벌어놓고 학교에 다닌 겁니까?
"현장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어서 재테크 같은 것은 신경도 못 썼죠. '내가 버는 1000만원은 다른 사람의 1000만원과 가치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마음이 불안했던 건 사실이었어요. 그나저나 1000만원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는데…."
―물정을 영 모르시네, 1000만원으로 집 살 수 있는 시대는 안 올 걸요.
"그렇겠죠?"
―1남4녀의 막내라고 들었습니다. 큰 오빠는 이미 은퇴를 했다는데 혼자 결혼도 안 하고 전쟁터를 누비는 게 가족들에게 미안하지 않던가요.
"언니 셋이 제 후원자예요. 그들도 살면서 한계를 느끼니까 제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며 도움을 많이 줬어요. 이번 '인간의 땅' 제작 때도 언니들 돈을 꽤 가져다 썼어요."
―전쟁터가 그리 좋습니까, 남자보다?
"남자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일하다 개인감정이 흐르면 지장이 되니까 선을 긋기도 했고요. 저 이병헌 좋아해요. 이번 프로그램 내레이션도 이병헌과 감우성이 맡았어요."
―아직도 눈이 높군요.
"……."
- ▲ (좌)강경란이 팔레스타인 하마스 대원들을 촬영하고 있다. 이 취재를 할 당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무력충돌해 분위기가 험악했다./(우) 미얀마의 민주화 영웅 아웅산 수치 여사와 강 PD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아웅산 수치를 만나기 위해 미얀마의 유력 야당정 치인과 접촉했다. 그 정치인의 아내가 아웅산 수치의 개인 비서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래) 네팔의 마오 반군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강경란.
"대학 졸업 즈음 '한국전쟁 다큐멘터리'팀에서 일을 배웠어요. 정식 직원은 아니었지만 일을 꽤 한다고 평가받았는지 그 후 '몽골리안 루트' 같은 다큐멘터리에도 참여했습니다. 제일기획에 입사해 Q채널 PD가 됐습니다. 처음 제가 만든 프로그램이 '아웅산 수치의 버마'였어요."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1988년 버마(미얀마) 민주화를 군부(軍部)가 쿠데타로 막았어요. 당시 대학생들이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소수민족과 힘을 합쳐 싸우면 군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들은 가족과 헤어지면서 '길어야 3개월이면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20년이 지나도록 정글에 있는 거죠. 제가 다시 이 일을 하게 된 건 2006년 가을에 버마에서 온 이메일의 영향이 컸어요."
―무슨 메일이었나요.
"예전에 취재했던 버마 학생이 사진이 첨부된 메일을 보냈어요.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이 됐더군요. 정글에서 결혼해 얻은 아이도 옆에 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뭘까, 희망이 없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흘러간 시간에 대한, 그들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정글 취재가 힘든가요.
"제가 길도 잘 못 찾고 방향도 잘 못 찾아요. 걷는 것도 남들보다 힘들어해요. 뱀이나 독충보다 더 무서운 게 걸어야 하는 겁니다. 정글에서는 보통 한 달 정도를 걷는 데 너무 힘들어 코끼리를 탔어요. 그런데 숙련된 코끼리는 전부 일하러 가고 '수습 코끼리'를 탄 거예요. 걷는 게 아니라 저를 태우고 춤을 추는 수준이었어요. 한 시간쯤 흔들리니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그 프로그램이 프리랜서로 독립한 계기가 됐죠.
"제가 아웅산 수치 인터뷰를 했어요.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정치인 우티누 NLD(민족주의민족동맹)의장과 접촉했어요. 그의 아내가 아웅산 수치의 개인 비서역할을 했거든요. 이런 인터뷰는 끝없이 기다려야 해요. 계속 편지 보내고 사람을 보내지만 기약 없는. 신문이나 방송사에서 월급 받는 기자나 PD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프리랜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게 하면 보답이 오나요.
"아무리 시간과 경비를 쏟아 부어도 보답을 잘 못 받는 게 프리랜서의 비애(悲哀)지요. 우리 방송 풍조에 이런 게 있어요. 특종을 해와도 '글쎄 특종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식이에요. 외신 베끼면 쉬운데 왜 엄청난 돈을 들여 당신 프로그램을 사야 하느냐는 인식도 있어요."
그는 본격적으로 전장을 쫓아다녔다. 유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알바니아가 무너질 즈음 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 탈레반이 정권을 쟁취한 직후였다. 지금까지 그는 10번 넘게 아프간에 갔으며 한번에 보통 5~6개월씩 머물렀다.
아프간에서 그는 세계적인 방송사도 접근하지 못한 탈레반 수뇌부와 친분을 유지하면서 귀중한 영상을 기록했다. '분쟁지역 전문 PD'라는 이름도 그래서 얻었다. 그는 "나중에 은퇴하면 아프간에서 게스트하우스나 운영하며 살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끈덕진 성격입니까.
"원래 조급하고 차갑고, 친구들은 저보고 '찬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할 정도예요. 전쟁터에 다니면서 사람이 된 케이스 중 하나죠."
―아프간이 왜 좋습니까.
"탈레반은 굉장히 특이해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 나름의 원칙에 철저합니다. 원칙만 지키면 관대해요. 지금의 탈레반은 예전의 탈레반과 영 딴판이에요. 도둑들도 탈레반이라고 하고 다녀요."
―탈레반 외무장관과 인터뷰를 성사시켜 단숨에 유명해졌죠.
"제가 코디를 했던 사람이 카말이라는 파키스탄 인이었습니다. 그가 당시 아프간 CNN 임시직 특파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동생이 옛 소련과 항쟁하던 무자헤딘 출신으로 물라 오마르의 비서였어요. 그렇게 연결돼 인터뷰가 이뤄졌고 탈레반에서 특별 전세기를 내줘 아프간 전역을 돌아다녔어요."
―사람을 사귀려면 돈이 들지 않나요.
"전혀 안 줄 수는 없지만 턱없이 낼 능력이 프리랜서에게는 없습니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현지인들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유명 방송사 같은 고객이 오지 않는 계절이면 그리 큰돈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아프간에서 다시 탈레반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뉴스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탈레반이 어떻게 다른가요.
"과거에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탈레반 지도부에 항의를 하면 금세 해결됐어요. 규율이 잡혀 있는 거죠. 탈레반은 한번 친분을 트면 그렇게 편하고 안전할 수가 없어요. 지금은 누구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프간이 지금처럼 위험한 때가 없을 거예요. 물론 공통점은 있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반미(反美)라는 겁니다."
―분쟁지역을 다니면 겁나지 않나요.
"2007년 1월2일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 기자들이 탈레반에게 붙잡혔지요. 그들의 코디 2명이 제 코디였어요. 그들이 떠나기 전날 만났는데 며칠 뒤 카불에서 연락하니 휴대전화를 안 받아요. 칸다하르 옆에 헬만드주(州)가 육로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탈리아 기자들은 돈을 주고 풀려났는데 코디 한 명은 참수(斬首)를 당했어요. 다른 한 명은 석 달을 독방에 갇혀 있었어요. 베트남전쟁 때 미군 포로를 잡아넣는 새장과 비슷한 곳이었답니다. 풀려나 정신이상이 됐어요."
―외국인들은 특히 표적이 되죠.
"인질이 사업이 됐어요. 외국인뿐만 아니라 같은 아프간 사람이라도 돈이 좀 있어 보이면 마구 잡아가요. 이번에 완성한 아프간 프로그램의 제목이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살아남은 자들'이라는 거예요. 처음 제가 취재했던 30명 중에 남은 사람이 한 명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됐어요."
―매사에 조심하면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지겠군요.
"아프간은 무조건 양고기 아니면 닭고기를 난(빵)에 싸먹는 거잖아요. 한마디로 '양닭양닭'입니다. 칸다하르에 가면 보통 콘티넨털 호텔을 이용하는데 요새(要塞)처럼 생겼어요. 호텔 객실에서도 잠을 잘 못 잡니다.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밖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샤워도 잘 못해요.
―죽는 게 무섭지 않습니까.
"총을 맞는 건 괜찮아요. 금세 죽을 수 있잖아요. 참수는 무서워요. 죽을 때까지 한참을 고통받아야 하잖아요."
―무서운 꿈도 꿉니까?
"인간에게는 방어기제라는 게 있다고 하지요. 저는 꿈을 안 꿔요. 제 정신 속의 무언가가 무서운 느낌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는 것 같아요. 눈빛과 디테일까지는 생각이 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하지 않아요."
―탈레반을 한번 취재하면서 1시간짜리 테이프를 50~60개씩 들고나왔지요. 서양 언론이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탈레반은 웬만하면 사람에게 카메라 자체를 못 대게 합니다. 지금 같았으면 제가 촬영한 영상을 팔기도 하고 해외 판로(販路)도 모색했을 거예요. 그때는 '같은 현장에 있지만 너희들보다 낫다' 뭐, 이런 생각밖에 못했어요. '이 테이프 좀 팔아줘' 라고 말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취재만 했지 이것 가지고 장사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죠."
―미국에서 찾는 물라 오마르를 본 적이 있나요. 어떻게 생겼습니까.
"칸다하르 그의 집 앞에서 만난 적은 있지요. 눈인사를 건넸더니 눈인사로 답하더군요. 아프간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어요. 그 사람들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잖아요. 외무장관 인터뷰할 때 처음 히잡을 썼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우리 풍습과 너무 달라 힘들다. 벗어도 되느냐'고 하자 그는 '괜찮다. 너는 외국인이고 이곳은 실내이니 벗어도 좋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인터뷰할 때 손을 내밀면 눈도 안 마주치고 제 통역에게만 이야기하는 탈레반이 대부분입니다."
―물라 오마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파키스탄 퀘타 쪽에 있대요."
―오사마 빈 라덴은요?
"그걸 알면 현상금 탔지요. 제가 취재한 사람들도 같은 소리를 해요."
강경란 같은 이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만 전전하는 팔자다. 아프간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 그는 이라크로 들어갔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몇 달을 버티다 폭격 개시 전 인근 요르단으로 빠져 나온 그는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잠시 국경이 열린 틈을 타 다시 이라크로 향했다.
―전쟁 때 왜 빠져나왔나요.
"제 얼굴이 너무 알려졌어요. 얼굴이 덜 알려진 몇몇 기자들은 이라크 정부의 눈을 피해 남았어요.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영국 BBC를 맨 앞에 앞세우고 몇몇 나라 기자들과 함께 들어갔지요. 문제는 두 번째 차가 라마디에 있는 주유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겼어요. 예비 휘발유가 충분했는데 그 차가 왜 주유소로 들어갔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남자들이 화장실을 가고 나서 제가 맨 나중에 갔어요. 여자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총소리도 들렸어요. 뛰쳐나와보니 일행이 다 도망가고 없었어요. 이라크 가이드와 저만 남았어요. 주유소에 들르지 않은 BBC차량만 빼고요."
―그래서요.
"총을 든 후세인 잔당이 BBC차량을 위협하고 있었어요. 거리가 꽤 됐는데 참 황당했어요. 그쪽으로 갈 것인가, 화장실에 계속 있을 것인가. 그런데 화장실에 있어봤자 소용이 없잖아요. BBC 차량으로 갔더니 무장세력들이 '재판을 하겠다'며 그들을 마을로 끌고 가려는 겁니다. 멍하게 서있었는데 BBC카메라 기자가 저를 홱 낚아채 무릎에 앉히더군요."
―그가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나중에 풀려나 그에게 고맙다고 했어요. 그는 '네가 덩치가 작아 내 무릎에 앉힐 수 있었다'며 농담을 했어요. 피트라고 아주 노련한 기자였어요."
―소변보러 갔다가 졸지에 재판에 회부된 기분이 어땠습니까.
"BBC방송 통역이 재치가 있었어요. 무장세력에게 '우리는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이라크가 모두 미군 손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다. 너희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세계는 모르고 있다. 우리에게 취재 기회를 달라'고요."
―그랬더니요.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안내해줬어요. 미군이 후세인 아들 잡는다고 쏜 미사일 때문에 무너진 부족장 집에도 데려다 줬습니다. 나중에 바그다드 입구 미군 초소까지 데려다 줬어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나요.
"이번에는 미군이 총을 겨누는 거예요. 거기서도 30분가량 잡혀 있었어요. 바그다드는 후세인 동상이 무너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다음 날 저희를 놔두고 도망친 일행을 만나 카메라를 찾았어요."
―최근 우리 언론계에도 분쟁지역 전문 기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여자가 유리합니까, 남자가 유리합니까.
"전쟁터에서는 당연히 여자가 유리하죠. 남자는 다 참수당하니까요. 전쟁은 남자들이 일으키는 거잖아요. 그래서 여자에게 더 맞는지도 몰라요. 경계심을 덜 갖고 남자보다는 조금 더 너그럽게 대해주죠."
―어렸을 때부터 전쟁을 좋아했습니까?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어요. 대학교 때 방송 일을 하다 처음 접한 겁니다."
―'인간의 땅'에 아프간,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쿠르드족이 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몇 명이 투입됐고 예산은 얼마나 들었나요.
"저를 포함해 PD가 3명, 작가가 2명, 카메라맨이 7명 일했습니다. 방송사에서 예산은 8억원을 받았지요."
―얼마나 남았나요.
"……. (옆에 있던 박봉남 PD는 '강 선배 인건비 안 주면 100만원쯤 남는다'고 했다. 그 역시 아내에게 모자란 취재비를 지원 받았다고 했다. '한번만 더 찍으면 완성도가 높아지는 데 제 돈으로라도 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강 선배도 형부들 보너스가 전부 제작비로 쓰인다'고 했다.)
―도대체 통장에 얼마가 있는 겁니까?
"마이너스예요."
―그런데도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보단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일했던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제게는 그들이 재산입니다.
―'인간의 땅'이라는 제목은 누가 붙인 겁니까.
"프랑스의 자원봉사단체 이름이 '인간의 땅'입니다.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도와주는 단체지요."
- ▲ 강경란이 최근 완성한‘인간의 땅’프로그램이 담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우리나라는 너무 답답해요. 세상 돌아가는 게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요. 조선일보가 이럴 때 잘해줘야 해요."
―왜 세계의 전쟁터는 다니면서 북한 취재는 안 합니까.
"2007년쯤 여성단체의 일원으로 2주 정도 북한에 다녀왔어요. 가보니 정말 취재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녀본 어느 나라보다요. 같은 동포니까, 말이 통하니 외국보다 쉬울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어요."
그에게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을 수도 있다"며 "다치고 부상당하느니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으면 복(福)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는 걸 하도 많이 보다 보니 객관화가 됐다"는 말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