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고 싶어서 발바닥을 근지럽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감정의 상승곡선과 함께 우리들의 몸은 리듬을 따라 저절로 움직인다. 춤을 소재로 한 좋은 영화들은 우리들의 원초적 감성을 일깨우며 우리의 낡은 몸을, 답답한 일상의 영역 밖으로 끌고 나간다. 춤은 오래 전부터 가장 중요한 영화적 소재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본능적 움직임인 춤은 우리의 정서를 자극한다. 또 시각적 효과를 중요시하는 영화예술에서 춤은 화면에 역동적 활력을 부여한다.
사교춤을 소재로 한 [바람의 전설]은, 춤 그 자체의 역동적 활력에 초점을 모으는 다른 댄스 영화와는 달리, 춤을 사기범죄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제비족을 등장시키고 있다. 당연히 그 주변에는 여자들이 몰려든다.
*진부한 소재의 신선한 접근
성석제의 단편소설 [소설 쓰는 인간]을 원작으로 한 [바람의 전설]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익은 소재다. 주간지에 숱하게 등장했던 캬바레 제비족과 그 싸모님들의 불륜 이야기는 상투적 사건 전개를 예감케 한다. 그러나 성석제의 원작은 이 낯익은 소재를 비범하게 접근하고 있다. 진정으로 춤이 좋아 자신의 인생 전부를 춤에 바쳤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우리는 작품이 거의 다 끝날 때까지 그가 정말 춤이 좋아 춤을 춘 진정한 무도인, 그의 말대로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의 춤 솜씨에 반해 주변에 불나비처럼 모여드는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돈을 준 것이지, 그들이 돈을 주도록 그가 교묘하게 이용한 것은 아닌 것처럼 작가는 시치미 뚝 떼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마지막 방위]의 시나리오를 쓰며 데뷔한 박정우 작가는 [주유소 습격사건][라이터를 켜라][신라의 달밤][광복절 특사] 등 전국 300만을 넘긴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연이어 써서 현재 충무로 작가 중 넘버원의 위치에 올라 있다. 그의 감독 데뷔작 [바람의 전설]은 성석제의 원작을 직접 각색하는 과정에서, 여자 경찰이 전설적 제비에게 접근해 그의 삶을 엿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박풍식은 우연히 고교 친구 송만수를 만나 춤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러나 여자를 유혹하고 돈을 뜯어내는 수단으로 춤을 이용한 제비 송만수와는 달리, 박풍식은 오직 춤 그 자체의 매력에 빠진다. 그래서 5년동안 전국을 유랑하며 뛰어난 춤 스승을 찾아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춤을 배운다.
[바람의 전설]은 제비족과 불륜관계에 빠지는 사모님들이라는, 대중잡지의 단골 소재만큼이나 상투적으로 접근하는게 아니라, 무도인, 즉 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춤에 빠진 남자를 통해 춤의 마력을 전해주려는 듯 제스처를 쓴다. 이 제스처가 빛나려면, 뒷부분의 뒤집기가 효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다.
*화려한 댄스 스포츠
[바람의 전설]에서 주인공 박풍식은 전주의 오래된 한옥, 대관령 목장, 탄광촌, 바닷가의 등대, 고요한 산사 등에 숨어 있는 진정한 춤의 고수를 찾아 전국을 5년동안 방랑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춤을 전수받는다. 룸바, 차차차, 퀵스텝, 파소도블레, 탱고 등 다양한 라틴 댄스가 등장한다. 실제로 박풍식에게 춤을 전수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 분야 전문가들이다. 남녀가 부둥켜안고 음습한 냄새를 풍기는 캬바레의 끈적끈적한 춤에서 벗어나, 전문 스포츠의 하나로서 춤을 재탄생시킨다.
*너무나 평범한 카메라 연출
역동적인 춤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감독은 너무나 평이하게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다. 프레임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게 미디엄 쇼트 위주로 되어 있으며, 카메라 앵글은 아이 레벨 쇼트, 즉 관객의 눈높이 상태에서 바라본다.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사실주의 계열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카메라 각도를 선호하지만, [바람의 전설]은 몇 가지 트릭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더구나 화려한 시각적 볼거리를 갖고 있는 춤을 소재로 한 영화다. 전체적으로 천편일률적인 프레임의 크기, 비슷한 카메라의 각도 때문에 소재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다. 클로즈업과 롱 쇼트의 유효적절한 배치도 잘못되어 있어서 관객들은 지루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편집의 단조로움
전제적으로 강약이 없다. 이야기는 비슷비슷한 속도로 이어져 있다. 완급의 조절 없이 풀어놓는 극적 구조의 밋밋함은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든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감각적 편집은 찾아볼 수 없다. 사건 전개가 긴박함을 띄다가 서정적인 씬에서는 효과적으로 감정의 이완을 가져온다든가, 이런 강약 조절, 리듬의 완급 조절 없이, 비슷한 속도로 여러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있다.
*지루한 극적 구조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여자 경찰이 박풍식에게 접근하여 그의 살아온 과정을 듣는 것처럼 꾸며지면서 [바람의 전설]에는 모두 3번의 플래시백이 사용된다. 경찰서 서장 사모님이 박풍식의 마수에 걸려들어 거액을 건넸다는 사실을 알고 진실을 캐내기 위해 박풍식에 위장 접근한 여자 경찰 송연화와 박풍식의 관계가 현재라면, 그 사이에 박풍식이 춤에 입문하고 5년동안 스승을 찾아 떠돌기까지,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면서 여자들을 만나 거액을 벌었다가 부인에게 이혼당할 때까지, 이혼당한 후 여자 꽃뱀을 만나 사기에 걸릴 때까지 모두 세 번의 긴 플래시백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극적 구조는, 원작의 능청스러움과 시치미 떼며 전달하는 이야기의 맛을 잃어버린다. 또 단순하고 밋밋한 연출은 그런 극적 구조의 약점을 더욱 노출시키고 있다.
*프로 춤꾼과는 거리가 먼 배우들의 서툰 춤
춤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역시 가장 멋진 장면은 춤을 출 때이다. [바람의 전설]에서도 몇 번의 필살기가 등장한다. 클럽에서 풍식과 부유한 사모님 경순, 풍식과 꽃뱀 지연의 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성재, 이칸희, 문정희의 춤 솜씨가 나쁘지는 않지만, 프로의 그것은 아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춤 잘 추는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정말 프로 댄서같은 춤이다. [댄싱 히어로]나 [더티 댄싱][플래시 댄스][탱고 레슨]의 화려한 춤 동작을 생각하며 한국판 춤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몇 달동안 뼈저리게 춤 훈련을 했다는 이성재의 몸은 여전히 뻣뻣하며, 이칸희와 문정희의 춤은 매력적이지만 감동적이지는 못하다. 더구나 감독의 밋밋한 연출은 그것마저 극대화해서 보여주지 못한다.
*좋은 소재를 망친 신인 감독의 미숙한 연출력
전설이 되어버린 제비계의 풍운아를 소재로 한 [바람의 전설]은,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영화의 전설은 되지 못할 것이다. 매력적인 소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미숙한 연출력은 영화를 너무나 평범하게 만들어버렸다. 춤을 둘러싼 남녀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격정적인 춤 장면은 밋밋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천편일률적인 속도로 단조롭게 진행되는 편집은 춤 영화가 갖는 특유의 역동적 활기를 제거해버린다.
(사족:김수로의 촌철살인적 애드립이 빛나는 씬이 몇 개 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영화는 정말 삭막해졌으리라. 이칸희와 문정희도 제 역할은 했다. 아쉬운 것은 박솔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 연기도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전설이 될만큼 이성재의 춤이 출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성재는 연기력으로 미숙한 춤의 상당부분을 메꾸고는 있지만, [탱고레슨]의 남녀 배우들이나 [더티 댄싱]의 패트릭 스웨이지, [플래시 댄스]의 제니퍼 빌즈가 자꾸만 생각나게 한다. 그의 뻣뻣한 몸은, 진정한 선수들이 가벼운 발놀림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역부족이다. 단기간에 배워서 안되는 것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