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주만 폭격 개시 2개월 전인 1941년 10월 일본은 북태평양에서 진주만에 이르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로를 따라 상선을 보냈다. 진주만 폭격 작전을 세우기 위한 사전 답사였던 것이다.
2. 진주만 폭격 개시 2-3주 전 진주만으로 향하던 일본의 전함은 일체의 무전 송신을 중단했다. 대신 다른 무전 송신국에서 위장 무전을 쳤다.
3.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위하여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미군이 가장 방심하는 요일이 일요일이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일본의 스파이들은 일본이 효과적인 폭격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진주만의 축소 모형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진주만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5. 미국인들은 진주만의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뢰 공격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일본은 변형 어뢰를 사용한 폭파 기술을 갖춘 상태였다. 그들의 기술은 1940년, 영국이 이탈리아의 타란토 만에 정박된 이탈리아 군함을 공격했던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6. 진주만에서 폭격당한 여덟 척의 미군 전함 중 단 두 척만 완전히 파괴됐다. 나머지 여섯 척은 나중에 보수됐고 다시 전투에 사용됐다. 이들 여섯 척 중 세 척은 얕은 바다 속에 침몰됐다가 인양되어 보수된 것이다.
7. 총 21척의 미군 전함이 진주만 폭격 당시 바다 속에 가라앉거나 심하게 파손됐다. 아울러 약 200대의 전투기가 폭파됐는데 거의 대부분은 비행장에서 폭격당했다. 인명 피해로는 2,388 명이 목숨을 잃었고 1,178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다섯 척의 초소형 잠수정과 29대의 전투기를 잃었고 55명의 파일럿과 9명의 잠수정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8. 일본은 진주만 폭격 당시 미국의 연료 저장고와 선박 보수설비를 폭파시키지 않기로 결정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 덕분에 미국은 파손된 선박을 서해안 쪽으로 옮겨서 1년 이상 보수작업을 할 수 있었다.
9. 진주만 폭격 당시 대부분의 민간인 사상자는 일본군 폭격기를 겨냥한 고사포이다. 적기를 향해 쏘았으나 불발되면서 지상으로 떨어진 포탄이나 실탄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10. 일본 해군의 파일럿인 미추오 후치다는 진주만 공습 당시 전술 사령관이었다. 진주만 공습이 개시됐다는 것을 알리는 무전 신호인 “도라, 도라, 도라!(타이거, 타이거, 타이거!)”는 바로 그가 타전한 무전이다.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후치다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시민이 됐으며, 신교도 목사와 반전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11. 진주만 폭격 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했다. 그러나 진주만 폭격이 여론을 바꾸어놓았다.
12. 진주만 폭격에 투입된 일본의 해군 병력은 6척의 항공모함, 2척의 쾌속 전함, 2척의 대형 순양함과 소형 순양함, 9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으로 구성됐다. 이들 함대는 8척의 급유선과 물자 공급선의 지원을 받았다.
13. 진주만 폭격이 개시된 아침, 진주만에 정박 또는 계류 중인 미군의 병력은 8척의 전함, 2척의 대형 순양함, 6척의 소형 순양함, 29척의 구축함, 5척의 잠수함, 1척의 포함, 9척의 기뢰 부설함, 10척의 소해정, 24척의 특무 보조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4. 1941년 12월, 진주만과 하와이의 기타 군사시설은 전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이 집중된 곳이었다. 진주만 기습 폭격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군사시설은 그다지 심각한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거의 즉각적으로 태평양의 핵심 해군기지로 다시 역할을 수상했다.
15.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개시 전, 진주만에서는 미군의 정기적인 공습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12월 6일 새벽 2시에도 같은 훈련이 실시됐다.
16. 진주만 공습의 신호를 최초로 포착한 것은 신임 소위가 미군 레이다에 잡힌 항적(航敵)의 보고서를 받고나서이다. 그러나 그 신임 장교는 항적의 출현을 알리는 레이더 신호를 두 차례나 무시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진입 중인 B-17 폭격기일 것이라고 오판했다.
17. 진주만 폭격 전, 미군 구축함은 진주만 외곽에서 잠수함의 잠만경을 발견하고는 일본군의 소형 잠수함 다섯 척 중 한 척을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미군 구축함은 즉각적으로 경고했지만 미 군부에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8. 진주만 폭격 개시 30분 전, 총 8척의 미군 전함과 10척의 군함이 파손되거나 침몰됐다.
19. 일본군은 두 차례에 걸쳐 진주만 공습을 감행했는데 첫 번째는 새벽 6시, 두 번째는 아침 8시 40분이었다. 세 번째 공습이 일본군의 기함에서 심각하게 논의됐지만 실행되진 않았다.
20. 진주만 포격과 관련하여 가장 처참했던 사실은 많은 병사들이 며칠 동안, 심한 경우 몇 주일 동안 바다 속에 침몰한 전함 속에 갇혀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모두 부상과 굶주림으로 죽거나 질식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