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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푸른생각, 2019년 3월.
책머리에 만해 한용운을 만나러 가는 길 1. 만해 한용운은 1879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승려가 되기 전까지의 이름은 유천(裕天), 승려가 된 뒤의 이름은 용운(龍雲), 승려가 된 뒤의 호는 만해(萬․卍海)였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운 뒤 글방의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 투쟁에 가담했다. 18세 때의 일이었다. 의거가 실패하자 이듬해 고향을 떠나 25세까지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 등을 전전하다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녀왔다. 26세(1905년)에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 뒤 김연곡 스님을 만나 득도했다. 1908년에는 일본의 교토, 도쿄 등을 다니며 일본의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시찰했다. 귀국한 뒤 일제로부터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지키려는 의도로 서울에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했다. 1911년에는 순천 송광사 및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했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만주로 가 독립 지사들과 독립운동의 방향도 논의했다. 1913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했고, 이듬해에는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을 발간했으며,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1918년에는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고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논설과 시를 발표했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여러 인사들과 조선 독립을 깊게 논의했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 3장을 첨가했다. 그리고 3월 1일 서울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해 독립선언을 연설한 뒤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제출했다. 3년 징역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출옥했다. 1922년에는 법보회를 발기했고, 조선의 학생 및 청년들에게 독립 사상을 전해주는 강연을 했다. 1923년에는 조선 물산 장려운동을 지원했으며,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도 했다. 1924년에는 조선 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했고, 1926년에는 한 해 전에 탈고한 『십현담주해』를 발간했으며, 시집 『님의 침묵』도 발간했다. 1927에는 신간회를 발기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31년에는 『불교』지를 인수한 뒤 많은 글을 발표했고, 청년 법려 비밀 결사 조직인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1933년에는 서울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장편소설을 일간지에 연재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벌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했다. 1944년(66세)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해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를 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 그동안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님’이 과연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주요 주제였다. 다시 말해 ꡔ님의 침묵ꡕ에 등장하는 님을 민족, 조선, 조국의 독립, 부처, 불교적 진리, 중생, 자연, 시적 대상, 마음, 불완전한 존재, 여성 등으로 보고 근거를 제시하고 의미를 새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연구는 님을 한 대상으로 보았고, 어떤 연구는 님을 한두 가지 대상으로 보았으며, 어떤 연구는 님을 모든 대상으로 보았다. 만해의 시에 등장하는 님이 누구인가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작품에서는 부처로 읽히고, 어떤 작품에서는 조국이나 민족으로 읽히고, 어떤 작품에서는 중생으로 읽히는 등 작품마다 다양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단정 짓고 나머지를 배척하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님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작품마다 심도 있게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는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 전문 “군말”은 ꡔ님의 침묵ꡕ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더더기 말’이란 의미이다. 만해가 자신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쓴 동기나 의도를 겸손하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군말”에서 만해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듯이 기룬 상대 모두를 님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립거나 아쉽거나 안쓰러운 존재들을 님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해는 중생이 석가의 님이고, 철학이 칸트의 님이고, 봄비가 장미화의 님이고, 이탈리아가 혁명과 통일을 위해 싸운 혁명가 마치니의 님이라고 그 예를 들고 있다. 종교적인 차원은 물론 철학적인 차원, 자연적인 차원, 정치적인 차원의 존재를, 즉 우주의 모든 존재를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했을 때 앞에 놓인 님은 이성의 연인을 나타낸다. 이는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이어지는 표현에 의해 부정되고 있지만, 연인으로서의 님이 우선적인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면은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라고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자유의 우선적인 주체가 연애이고 그에 따라 님도 자유의 주체가 되고 있으므로, 이성에 대한 사랑이 자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했을 때 “어린 양”은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고 있는 이성의 연인이 된다. 결국 만해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고 안쓰러워하고, 그리고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시를 쓴 것이다. 만해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 마음을 확장시켜 조국의 독립은 물론 조선, 부처, 중생, 불교적 진리, 자연, 마음, 시적 대상 등을 사랑한 것이다. 3.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서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서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품에로 오서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서요 ―「오서요」 전문 위의 작품의 “님”은 이성적인 연인의 존재를 넘어선다. 그와 같은 면은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라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라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님”을 다른 존재로 확대할 수 있는데 조국의 독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작품의 화자가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서요”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매우 간절하다.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조국의 독립이 올 때가 되었으니 기꺼이 맞이하려고 하는 절실한 자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을 이겨내고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지리라고 전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자의 그 희망은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라는 자세를 보이기에,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많은 왜군을 상대할 때 부하들에게 강조한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와 같은 태도이기에 가능해 보인다. 이처럼 만해는 님과의 이별에 대해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노래했다. 김소월이 님과의 이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절대로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보였다면 만해는 이별하는 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소월이 떠나가는 님을 체념하고 심지어 헌신적으로 축원하면서도 이별의 정한을 애절하게 노래했다면 만해는 이별하는 님을 기꺼이 포용한 것이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님의 침묵」)다고 여기고 님과의 재회를 노래한 것이다. 만해의 님을 향한 사랑은 불교적 진리인 공(空)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여서 마음으로만 깨달을 뿐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해는 이별한 님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품었다. 자연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승려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돌아올 님을 확신하며 기꺼이 노래한 것이다. 시인 알아보기 한용운(韓龍雲, 1879. 8. 29~1944. 6. 29) 1879(1세)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아버지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方氏). 이름은 유천(裕天). 승려 이름(법명)은 용운(龍雲), 승려 아호(법호)는 만해(萬․卍海). 1884년(6세)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 1892년(14세)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하다. 1896년(18세) 글방의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성황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 투쟁에 가담하다. 1897년(19세) 의거의 실패로 피신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다. 1899년(21세)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으나 여의치 않아 귀국하다. 1904년(26세) 고향 홍성으로 내려가다. 12월 21일 맏아들 보국(保國) 태어나다(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1905년(27세) 1월 26일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어 김연곡(金蓮谷) 스승에게 득도하다. 1908년(30세) 4월 일본의 교토, 도쿄 등을 다니며 일본의 불교계와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다. 귀국해 일제로부터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지키려는 의도로 서울에 경성 명진 측량 강습소(京城明進測量講習所)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하다. 1909년(31세) 7월 30일 강원도 표훈사(表訓寺) 불교 강사에 취임하다. 1910(32세) 9월 20일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華山講塾) 강사에 취임하다. 1911년(33세)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순천 송광사 및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다. 범어사에 조선 임제종(臨濟宗) 종무원을 설치하여 3월 16일 관장에 취임하다.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만주로 가 독립 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다. 1913년(35세) 박한영, 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다. 5월 19일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하다. 5월 25일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발행하다. 1914년(36세) 4월 30일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범어사) 발행하다.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다. 1915(37세) 영남 및 호남 지방의 사찰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다. 10월 조선 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다. 1917년(39세) 4월 6일 『정선 강의 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신문관) 발행하다. 1918년(40세) 9월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고 편집 겸 발행인이 되다. 창간호에 논설 4편과 신시 「심(心)」 발표하다. 12월 3권 발행하고 중단되다. 1919년(41세)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여러 인사들과 조선 독립을 깊이 논의하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다. 3월 1일 서울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해 독립선언을 연설한 뒤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다. 7월 1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신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제출하다.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3년 징역형 판결을 받다. 1920년(42세) 일제가 3․1운동에 대한 참회서 제출을 회유하나 거부하다. 1921년(43세) 12월 22일 출소하다. 1922년(44세) 3월 3월 24일 법보회(法寶會)를 발기하다. 조선의 학생 및 청년들에게 독립 사상 등을 강연하다. 1923년(45세) 1월 2월 조선 물산 장려운동을 지원하다. 4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하다. 1924년(46세) 10월 24일 조선 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하다. 1925년(47세) 6월 7일 강원도 인제에 있는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다. 8월 29일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다. 1926년(48세) 5월 15일 『십현담주해』(법보회) 발행하다. 5월 20일 『님의 침묵』(회동서관) 발행하다. 12월 「가갸날에 대하여」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1927(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다.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선출되다. 1928년(50세)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건봉사) 발행하다. 1929년(51세) 11월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등과 광주학생 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민중대회를 열다. 1931년(53세) 6월 『불교』지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하다. 8월 「불교 청년총동맹에 대하여」, 9월 「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 10월 「조선 불교의 개혁안」 등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9월 24일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해서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12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 법려 비밀 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1932년(54세) 1월~10월 「원숭이와 불교」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1933년(55세) 1월~10월 유숙원과 재혼하다.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박광 등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1934년(56세) 9월 1일 딸 영숙(英淑) 태어나다. 1935년(57세) 4월 9일~다음해 2월 4일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36년(58세) 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신문이 폐간되어 50회로 중단되다.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 7월 16일 정인보, 안재홍 등과 다산 정약용 타계 백년기념회를 개최하다. 1937년(59세) 3월 1일~11월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를 속간하고 많은 글을 발표하다. 3월 3일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셔다 장례를 지내다. 1938년(60세) 2월~11월 논설 「불교 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비롯해 많은 글을 『불교』에 발표하다. 5월 18일(이듬해 3월 12일까지)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만당(卍黨) 당원이 일제의 경찰에 검거되자 감시를 받다. 1939년(61세) 7월 12일(음력) 서울 청량사 및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서 마련한 회갑연에 참석하다. 11월 1일(이듬해 8월 11일까지) 『삼국지』를 번역해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0년(62세) 박광, 이동하 등과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벌이다. 신백우, 최범술 등과 단재 신채호 유고집을 간행하기 위해 원고를 수집하다.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다. 1944년(66세) 6월 29일(음력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다.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