怪石(괴석) / 최송설당(崔松雪堂)
屹立庭除尺許身(걸립정제척허신)
層峻庾骨近天眞(층준유골근천진)
幽藏每被煙霞護(유장매피연하호)
不畏塵間有力人(불외진간유력인)
[괴이하게 생긴 돌]
마당 구석 한 자쯤 되는 우뚝 남짓한 돌
삐죽이 바짝 마른 것이 타고난 모습 그대로네.
그윽한 곳에 숨겨져 안개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속세의 힘 있는 사람도 가히 두렵지 않다네.
작자는 송설당(1855∼1939)으로 여류시인이자 육영사업가다. 본관은 화순(和順),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松雪堂)은 호이다. 경상북도 김천 출생. 아버지는 최창환(崔昌煥)이며, 어머니는 경주정씨이다. 외가쪽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1886(고종 23)년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 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으며,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재산 30만 2100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이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 묘소는 김천중·고등학교 뒷산의 송정(松亭) 옆에 있으며, 1935년 11월 30일 교정에 송설당의 동상을 세워 설립자의 뜻을 기리고 있고, 1963년 8월 15일 대통령 문화 포상이 추서되었다.
마당 한 구석에 커다란 돌덩이 한 개가 있었다. 키는 한자쯤 되는 돌이 우뚝하게 솟아 깡마른 모습을 했다. 시인은 늘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다. 돌덩이가 두 주먹 불끈 쥐는 모습도 연상했고, 고약하게 인상을 쓰는 모습도 연상했을 지도 모른다. 짙은 안개가 집 안팎에 낄 양이면 돌덩이 뒤로 살며시 숨어드는 모습도 봤을 것이다. “그윽한 곳에 숨겨져 안개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속세의 힘 있는 사람도 가히 두렵지 않다네.”라고 읊었던 시이다.
그 절 마당가에는 바위가 삐죽 솟아 있다. 애당초 인력으로 제거하기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신령한 기운이 느껴졌던 걸까? 공양간 아궁이에 불을 때면, 자욱한 연기가 그 바위를 숨겨주듯 감싼다. 안개가 서릴 때도 홀연 종적을 감추는 그것. 작자의 마음속에 있는 큰 뜻을 그 바위에 빗댄 게 바로 이 시다.
[출처] 괴이하게 생긴 돌 / 최송설당|작성자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
첫댓글 최송설당은 경북서중부의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김천고교의 설립자다.
아들의 재학시절에 볼일로 학교에 들린 나는 평생 잊히지 않을 광경을 목격했다.
기숙사 '양현제'에 서서 학교 뒷 편 송정을 무심히 올려다본 순간이다.
학교 설립자 최송설당의 묘소가 있는 곳인데 그 날이 기일이라고 했다.
나란히 선 열명 쯤의 학생들이 묘소에서 큰 절을 올렸다.
그들이 퇴장하면 그 다음 줄 열 명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리는 추도식.
전교생이 다 아들이다.
결혼을 했지만 자식이 없으니 저토록 많은 자식들이 추도에 참여하는구나 싶었다.
모은 돈을 일제하여서 독립자금으로 쓰라는 의견도 많았지만 교육사업에 투자한 선회는
정말 오늘날에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고 선견지명같다.
인재를 키우는 백년대계의 교육사업을 그 시절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실행할 수 있었는지.
영친왕의 보모였던 궁에서의 생활은 신기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