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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소생한 예수의 복음서 구술 작업
"선생님! 선생님! 눈 좀 떠보세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필립이 예수를 걱정스런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는 눈앞에 보이는 낮 익은 얼굴에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세월은 빠르다. 세월이 빠른 만큼 사람들 기억 속에서의 망각도 빠르다. 십자가 처형사건 이후 예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지고 있다. 예수는 지금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의 고통이 악몽으로 되살아나 한 밤중에 깨어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발버둥치느라 그의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고 그의 기운은 탈진하여 제대로 일어설 수 조차 없다. 예수는 누워서 곰곰이 생각한다.
'사도들이 내 이름으로 선교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조차 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도와 제자들이 교세확장에 공이 큰 것은 사실이다. 허나 내 이름을 앞세우고 있지만, 실은 차츰 자기들의 주관과 사상을 설교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가르침이 그들의 가르침으로 변질되고 있다니! 아! 이거야말로 실로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냐!'
예수는 거의 하루종일 누워있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었다. 스승을 모시고 있는 제자 필립은 스승의 이러한 변화에 속으로 걱정이 많다. 예수는 누워있지만 잠든 것은 아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야말로 인도인의 사유의 방식이다. 몸은 가만히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시공을 넘나드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마음은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 인도에 와 있다. 인도에 유학하던 시절로 돌아와 있다. 예수를 각별히도 아끼고 사랑하시던 스승님 마니트라 Manitra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예수가 산스크리트 Sanskrit로 쓰여진 경전공부에 어려움을 겪던 차에 스승에게 묻는다.
"존경하는 스승님, 직접 말로서 가르침을 펴지 않고, 이렇게 어려운 경전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가르침을 펴는 이유는 무었입니까?" "사랑하는 히브리 제자여! 그대가 설교로써 가르침을 편다면 곧 시간과 공간이란 벽에 갇히게 된다네. 인간의 기억이란 유한한 것이어서 비록 감명 깊은 설교라 할지라도 얼마 후에는 잊혀지지 쉽지. 게다가 목청껏 말한다 해도 그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고작해야 수십 인, 많아야 수백 인에 불과한 법이라네." "진실로 그러합니다. 존경하는 스승님, 더 들려주십시오."
"사랑하는 히브리 제자여!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진리의 왜곡이라네. 거짓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지. 그래서 거짓은 의외로 위험하지 않다네. 거짓은 고작 흙탕물에 발을 빠지게 할 뿐이지만 왜곡된 진리는 사람을 죽음의 낭떠러지로 끌고 간다네.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섞어 전달하고 싶은 유혹을 만나게 마련이라네. 그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지. 그 유혹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경전은 진리를 담아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전달하게 해주는 훌륭한 그릇이라네. 사랑하는 히브리 제자여! 우리가 경전에서 만나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벌써 600년 전 성인의 육성 그대로 아닌가?"
예수는 마침내 복음서를 집필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십자가형에서 소생한 지 4, 5년 후 바로 요한복음으로 시작하여, 십 수년에 걸쳐 여러 복음서의 집필을 지도하고 종용하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자기의 종교철학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에 대한 사실과 진실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활을 포함한 초자연적 사건들, 그가 행하였다는 여러 이적들에 대한 잘못된 구전들을 바로 잡으려는 결심이다. 그 기간에 예수가 관여했던 가장 큰 일은,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각 그룹의 리더의 명의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하게 한 것이다.
맨 처음 것은 요한복음이었다. 저자는 요한 마가로 되어 있고 또 그의 지원도 받았지만, 실제 집필은 제자 필립이 한 것이다. 필립은 안나스의 친구이지만 할례받지 않은 이교도였다. 그러나 서기 삼십 년대부터는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세가 확장되면서 이방인이나 이교도나 개종자나 신분이 불확실한 계층도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필립은 쉠교단 Order of Shem의 수장으로 예수의 십자가형 사건이 있은지 4년 후에 예수 자신의 직접 지도를 받으면서 요한복음을 집필하게 된다. 예수는 그때는 십자가형에서 받은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고 고통도 계속되었지만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했기에 제자 필립을 붙들고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예수는 침상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앉았다 섰다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필립은 예수가 하는 말을 받아쓴다. 이 당시에 구두진술을 글로 바꾸어 쓰는 일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검댕 잉크와 나무 펜도 그렇지만, 그에 앞서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마름질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첫째, 예수는 이 기록에서 자기의 종교 철학을 확실하게 피력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저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 그는 소생하였다, 그는 이것을 밝히고 싶었다. 또한 그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또는 신생종교 그리스도교의 포교에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있던 가까운 사람들이 악의없이 만들어 낸 여러 초자연적 일, 그리고 이적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이에 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싶었다. 이번 필립과의 집필이 그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표현의 방법으로는 구약의 기록에 많이 이용된 비유라는 형식이 좋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이 직유든 은유든, 비유는 진실을 말하고 도덕과 윤리, 그리고 신학을 논하기에 매우 적합한 형식이라고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서 비유는 일반인들에게는 표면에 나타난 사실만 전달하지만, 내부자, 그의 측근 또는 깊은 학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속에 숨겨놓은 의미도 같이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예수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은 들어라'의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예수는 신약에서 자신의 종교사상이나 교리를 전달하기 위하여 많은 이적 異蹟들을 비유의 수단으로 택하였다. 그러므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가 일으키는 수많은 이적들 하나하나에 숨어있는 내밀한 예수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을 이적이라고 하지 않고 표적 表蹟 signs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수는 자신의 몸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아있고 수염은 얼굴을 거의 다 덮고 있다. 그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쪼이며 그리 넓지 않은 방안을 절름거리면서 이리저리 거닌다. 몸을 추슬러 본다.
열정적 사회혁명가, 예수는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종교혁명이 정치혁명이고, 정치혁명이 곧 사회혁명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혁명이 제대로 전개되기도 전에 자신의 십자가 처형으로 끝나버린 게 아닌가? 기성세력에는 쫓기고, 민중으로부터는 제대로 이해 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예수는 각오를 다진다.
'내 혁명은 계속되리라, 지금 집필하는 이 복음서 속에 혁명의 씨앗을 심으리라. 미완의 혁명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리!"
필립이 예수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필립은 검댕을 송진에 섞어 만든 잉크 속에 갈대 펜을 찍어가며 받아 쓰고 있다. 예수는 지금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 부분을 구술하고 있다. 그는 그 속에 깊은 의미를 숨겨 두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는 기적 이야기지만, 사실 그 내밀한 의미는 기존 종교체제와 사회제도를 뒤엎는 혁명적 내용이다. 예수 당시 종교 공동체에 들어가려면 물과 포도주로 구분 지어지는 두 단계를 거쳐야했다. 어떤 계급의 사람이건 모두들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비 회원자격을 얻게 된다. 물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기혼남자, 이방인, 여자, 육체적 장애인 등이다.
그러나 완전한 금욕생활을 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만이 특정기간 후 공동체의 음료, 즉 포도주를 받아 마시게 되어 있다. 즉 성찬식 communion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기존 모세의 율법과 전통은 이방인, 최근 성행위를 한 사람, 장님, 나병환자, 노예등은 하나님의 성전 경내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병이어 五餠二魚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좌) / 파도를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는 「예수」(우)
예수가 '물을 포도주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이러한 낡은 전통을 한 칼에 깨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낮은 계급의 사람들까지 포도주를 주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대한 선언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은 기혼자이건, 이방인이건, 여자이건, 육체적 장애인이건, 비유대인이나 노예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의미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엄청난 혁명을 선언한 것이다.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 이야기가 선언하는 사회혁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건을 그린 것이다. 보통사람에게 사제직을 준 것이다. 유대에서 사제는 레위 Levi족에서만 나와야 하는데, 예수가 보통사람도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서품식 ordination을 행한 것이다. 여기서 '떡 덩어리들'은 레위인들을 지칭하며 그들은 거룩한 제상에서 12덩어리의 떡을 나누어주었다. 떡을 '먹음'으로써 보통사람들도 레위족의 권한을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이제부터는 그들도 성찬식의 떡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제직이 허용된 것이다. 이것 역시 모세의 전통을 뒤엎는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예수의 기적은 계속된다. 그는 물위를 걷는다. 그는 가까이서 또는 원격으로 환자를 치유한다. 장님을 눈뜨게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죽은 지 4일된 사람을 동굴에서 살려내기도 한다. 회당장 야이로 Jairus의 딸을 일으켰고, 매장을 하러가던 나인 Nain과부의 아들을 살려냈으며, 또 베드로는 과부 도르가 Dorcas를 살려냈다. 수 많은 이적 또는 표적들이 그의 짧은 목회기간 1년 사이에 다 일어났으며, 어떤 이적 이야기는 복음서 전체의 신빙성과 진정성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도 있다.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의 이면 동기를 파악하지 않고, 기적의 사실 여부에 얽매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한복음등에서 사용한 강력한 수사 (修辭;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이름답고 정연하게 하는 일 또는 그런 기술)는 무엇보다도 읽는 사람에게 강한 신앙심을 불러 일으키고, 미래의 승리를 위하여 현재 어려움을 참고 헤쳐 나아갈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의 프르젝트는 마가복음이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저자의 필명이다. 요한 마가가 그의 상사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빌어서 썼다. 이러한 위명 僞名 저작은 흔히 있었다. 마가는 마가복음서 집필모습(아래 그림), 14세기 베드로와 가장 가까웠고 베드로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고 마가의 집필을 뒤에서 도왔고 베드로가 직접 관여하였다.
그 다음은 누가복음이었는데 그의 "사랑하는 의사 Beloved Physician"누가에게 집필을 부탁하였다.
다음의 복음은 마태복음으로 아나스 형제중 마태가 맡았다. 서기 삼십 년대 로마정권 하에서 5형제가 모두 높은 사제직을 지낸 안나스 형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요나탄이요 또 하나가 마태이다. 마태는 헤로데 아그리파에 의해서 면직될 때까지 대사제직을 지냈으며, 그러면서 줄곧 예수의 일을 맡아서 도왔다. 그래서 그는 안나스 형제중에서 예수의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중의 하나였고 결국은 자기도 예수의 철학이나 사상에 동화되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형 이후 그의 이름을 딴 둘째의 복음서, 마태복음서를 썼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재무부서의 공식 징세리로 소아시아 등지의 이산 유대인 (디아스포라; Diaspora)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예루살렘 금고에 적립하는 일을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로마정권의 앞잡이라고 싫어하고 멀리하였다. 예수는 그가 세금을 징수하고 있던 현장에서 그를 보고 자기를 따라오도록 현지 스카우트를 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은 누가가 그 저자였고 그는 집필 중 바울과 베드로와 많은 교신을 한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해서 50년대 초반 복음서 작업을 대략 끝낸다. 이 복음들을 저술하는데 있어 그가 의도했던 내용과 방법이 다 제대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해, 예수는 생각해 본다. 예수는 머리를 좌우로 젓는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쉰다. "과정에서 진실이 크게 훼손되었다." 라고 혼자서 말한다.
사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술사이에는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또 이들의 필사본이 신자들, 그것도 극히 제한된 수의 신자들의 손에 들어갈 때까지는 추가로 수년이 더 요구되었다. 지난 수십 년 간 로마의 정치변화 역시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와 그 주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수와 관련있는 사건들 그리고 인물들, 이런 사건들을 목격한 사람들 또 그들의 생각, 이 모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었다. 예수가 선교를 시작한 이후 그의 주변 환경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선교자의 수가 여기저기서 점점 늘어나고, 그들의 세가 확대되면서, 또 교회가 생기고 조직화되면서, 예수도 하나씩 둘씩 자기 임의로 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마가복음서 집필모습 (14세기)(좌) / 예수의 가장 사랑받은 제자 요한이 집필한 요한복음서(우)
한편 ,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가장 염려하고 경계하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복음서 사본을 만들기 위해 옮겨 쓰는 과정에서도 오자나 탈자는 물론 변조나 왜곡, 그리고 위작을 겪게 되었다. 복음서의 저자나 복음서를 서사 (敍事: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필사경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사정, 요구와 희망, 믿음과 의견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의 철학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지적 수준도 각기 달랐다. 따라서, 그들이 복음서를 집필하고 필사 (筆寫: 베기어 씀)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예수의 생각과 일치할 수는 없었다. 또 그들 각자의 상상력도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복음서들은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수 없이 수정되고 변경되었다. 복음서를 서사하고 전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필요에 의해서 복음서에 새로운 내용을 써넣기도 하였다. 이른바 예수의 이름을 빌어 복음서 구절을 넣는 위작들도 있었다. 현대의 원문학자들 textual scholars, 또는 원문비평가들 textual critics은 이렇게 복음서에서 '변경'된 건수가 경미한 것과 중대한 것을 합쳐서 20만에서 30만 건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중에는 예수교인 모두 다 알지만 정작 예수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하는, 예수도 개탄할 유명한 위작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자' 이야기로, 이것은 복음서의 일화중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예수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추가로 써넣은 위작 僞作이기 때문에 성서 자체에서도 별도로 [ ]기호로 묶어 표시하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한복음 8:1 - 9
예수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의 원수 격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그에게 끌고 왔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 하였는데 예수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에 말하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녀를 돌로 쳐서 벌하는 것이 옳은가,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옳은가? 이것은 분명 함정이고 술책이었다. 예수가 어느 쪽으로 판결을 내리든 그것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게 되어 있었다. 만일 예수가 그녀를 놓아주라고 하면 그것은 감히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반대로 그녀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은 지킨 것이 되나 자기가 부르짖어 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가르침을 예수 스스로 저버리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예수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는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하여 두 함정 모두 동시에 벗어난다. 이 이야기는 실로 멋진 이야기이다. 감동적이다. 예수는 성급히 답변하지 않았다. 예수는 예수에 꼭 어울리는 말을 했다. 예수는 그의 사랑,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의 명철함과 기지도 잘 보여주었다. 매우 교훈적이고 또한 매우 예수적인 일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하나있다. 그것은 실제로는 예수에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가 원래의 요한복음에는 들어있지도 않다. 또한 이 이야기는 다른 어느 복음서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원문학자들은 요한복음 7:53 ~ 8:12의 12구절은 이 복음의 집필자가 아닌 후세의 다른 사람에 의해 창작되어 추가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12구절은 '최고최상 最古最上의 원고' 즉 원본성서(현재 존재하지 않는 진짜 원본)에 가장 근접한 성서사본에서도 찾을 수가 없으며, 문체 또한 그 앞뒤의 문장과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이 12구절은 예수의 말씀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일부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원문학자들의 답은 단연코 '아니다'이다.
간음한 여인과 예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또 하나의 유명한 위작 사례는 마가복음에 나온다. 예수는 안식일 하루 전날 십자가형을 받고 동굴무덤에 매장된다. 안식일 다음날 막달라 마리아와 두 여인이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갔을 때, 이미 무덤의 돌문이 굴러 열려있고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는 '놀라지 말라'하고 '예수가 이미 살아나 갈릴리로 갔으니 제자들에게 가서 거기서 만날 것이라고 전하라'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로 8절16:1 ~ 8을 이룬다.
원본성서에 가장 근접한 성서사본에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즉 '여자들이 무덤에서 도망 나왔고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로 문장이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여인들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못했고 제자들에게도 쫓아가지 못했으며, 따라서 제자들이나 그 밖의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알리는 이 12절16:9 ~20을 새로 써넣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없을 경우, 무염시태론 無染始胎論과 더불어 기독교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예수 부활론이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장은 이어서 새로 써넣은 12절 16:9 ~20로 끝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마가복음 16:9 ~ 20까지의 이 12절이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추가된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원문학자들은 문체가 달라진 것은 물론 구절과 구절 간 연결의 어색함,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이 곳에만 있는 독특한 단어와 구절들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 12구절은 '최고최상 最古最上: oldest & best의 원고' 즉 원본성서에 가장 근접한 성서사본에서 완전히 빠져있다. 성서 자체에도 이 새로 써넣은 부분은 예수의 말이 아니므로 별도로 [ ]기호로 표시하여 처리하고 있다. 누군가가 추가로 써넣은 위작 僞作부분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16:9 - 20
비록 그 시작은 작을 지라도 그 끝은 장대하리라. 예수가 뿌리내린 그리스도교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장대하게 확장된 그리스도교는 이미 예수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다.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팽창과 더불어 교회는 제도화되고 성직자들은 관료화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가르침이 겪게 될 왜곡을 내다보고 심히 우려하였다. 예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다시 되뇌인다.
"오늘 그들이 보는 예수 나 자신은 지금의 나 자신 그대로인가?" "내일 그들이 보게 될 예수 나 자신은 지금의 나 자신 그대로일까?"
예수는 결국 자신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복음서를 완성하겠다는 그의 절실한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변조나 왜곡, 그리고 위작을 막을 수도 없었다. 회한을 안은 채, 그는 연로한 몸으로 인도로 가는 실크로드를 택하게 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수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그를 길러준 그의 지식과 사상의 고향 인도를 향해 머나먼 대장정에 오른다.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Jesus' Finai Odyssey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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