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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22)
권징이란 무엇인가?③ : 교회의 질서와 권징70)
우리는 벨직신앙고백서 제32항에서 교회가 권징과 출교를 실행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조화와 일치의 보존과 증진”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신자들을 지키기” 위하여서라고 고백한다. 교회는 그 자신의 권위로 권징과 출교를 실행하지 않아야 하고 그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도 권징과 출교를 실행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제32항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고백한 것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권징과 출교를 실행해야 한다.
하늘 왕국의 열쇠(천국 열쇠)
마태복음 16:16-19절에서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하늘 왕국의 열쇠를 받았다. 하늘 왕국의 열쇠는 거룩한 복음 전파와 교회의 권징이다. 이 두 열쇠에 의해서 하늘 왕국이 믿는 자들에게는 열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닫히게 된다.
마태복음 16장에 따르면, 이 왕국 열쇠들은 두 가지 일을 하도록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즉 하늘 왕국의 문들을 매고(닫고), 풀고(여는 것)하는 것이다. 이 열쇠들은 그 자체로 실제 문을 닫거나 열 수 없고, 이사야 선지자가 지적하듯이 한 사람이 열쇠들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통제한다는 의미다. 이사야 22:20-2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왕의 청지기 셉나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엘리아김을 두는 것을 읽는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은 왕께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고, 왕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권위를 부여받는다. 엘리아김은 이 열쇠를 가진 청지기의 역할을 한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엘리아김)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주 예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개념이다. 베드로도 또한 하나님의 궁정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라는 사람이 죽은 이래로 그의 계승자(교황)가 하늘로 갈 수 있는 사람을 결정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주님의 요점은 하늘의 문에 서 있는 베드로라는 사람이 아니라 마태복음 16: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고백이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반응하신다. 이 고백은 교회의 기초다. 하늘로 출입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있는 교회의 대표자라고 선언하신다. 베드로는 믿는 교회를 통하여 하늘 왕국의 열쇠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마태복음 18:15-18절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는 범죄한 형제를 다루는 방법에 관해 말씀하신다. 만일 죄인이 형제의 권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그 형제에게 한두 증인을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신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7-18). 여기에서도 매고 푸는 것은 동일한 개념이고 교회의 문맥에서 그러하다. 하늘 왕국의 열쇠들이 교회에게 주어졌다. 또한 특별히 하늘 왕국의 열쇠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주어졌다.
직분자들의 사역
이것은 또한 직분자들이 이 열쇠들을 실행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하늘로 들어갈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직분자들이 주께 받은 책임이다. 우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이 땅 위에 살고 있다. 우리는 구원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규칙적으로 예배하며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발전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내가 이런 모든 올바른 일들을 행했기 때문에, 내가 죽을 때 내가 하늘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결론을 짓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신자들이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행했으므로 하늘의 문들이 나에게 열릴 것이고 나는 그 문들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하늘의 문들을 통과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믿음이 필요하다. 하늘 왕국의 열쇠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직분자들은 믿음의 증거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무가 그 열매로 알려지는 것처럼 직분자들은 믿음의 열매로 분별할 수 있다(마 7:17이하). 믿음의 열매는 순종에 의해서 증거 된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그런 열매가 없이 믿음의 고백을 하려고 하는 어떤 사람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하늘의 문들을 열기 위해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든지 나타나지 않는지 간에 그들이 보는 바에 대해 그들과 토론하는 것은 직분자들의 사역이다.
형제에게 “너의 생활이 믿음의 증거를 나타내지 못 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자신이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동안도 하늘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고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삶을 살아가는 형제를 그냥 버려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형제는 언젠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순종하는 그런 사람과 맞서서 그의 고백과 그의 행위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훈계하고 필요하다면 출교하는 것이 사랑이다.
장로들: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
이 책임은 주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강조하신 것이다. 에스겔서 33장에서 주님은 도성의 파수꾼의 일과 비교하여 하늘 왕국의 열쇠들을 실행하는 일의 중대함을 설명한다. 에스겔서 32:2-6절을 보면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에 채우리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도성의 파수꾼의 사역을 그 시대에 교회의 파수꾼인 에스겔의 사역에 적용한다. 그러나 동일하게 이 파수꾼의 사역은 오늘날 교회의 장로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에스겔서 33:7-9절을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고 했다. 장로들의 경고를 주의하지 않은 결과로서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이다. 그러나 만일 장로들이 범죄한 형제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지옥으로 간 그 사람의 피가 장로들에게 요청될 것이다.
언제나 성경에 따라 말하고 경고하는 것은 직분자의 의무다. 믿음의 순종 안에서 사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고,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 또한 믿음의 증거, 믿음의 열매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순이 없으시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은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의 끝에 하늘의 문에서 구원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장로들이 우리에게 경고한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의 파수꾼인 장로들의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장로들은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에 관하여 모든 기만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감 있는 사역을 부여받은 장로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 아래서 모든 교회의 회원들의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교인들의 사역
교회 권징 곧 하늘의 문들을 지키는 사역은 오로지 직분자들만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아니다. 이 일은 전체 교회에게 주어진 사역이다. 이 일은 모든 교회 회원들이 참여해야 하는 사역이다. 교중의 회원인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지키는 자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 행하는 다른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8:15-16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타당한 일반적인 원리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웃을 위하여서도 동일한 일을 하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나의 이웃의 죄를 본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의 죄에 대해 말해줌으로 우리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죄로 강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영원한 복이 위태롭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이웃에게 행하는 것은 확실히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고, 또한 주님께서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16-17절을 보면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한다. 나의 이웃이 나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는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나의 권고를 듣고서 나의 형제에 대한 나의 의무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당회에게 증거 하게 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사역이 있다. 비록 직분자들이 교회 권징이 행해질 때 결정적인 권위를 가질지라도 교회 권징은 직분들과 함께 시작되지 않는다. 교회 권징은 우선적으로 교회 회원 전체의 책임이다. 당회는 결코 교중과 분리하여 일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 권징의 사역을 당회에게만 떠맡겨버린다면 권징은 행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직분자들보다 더 개인적으로 형제들의 생활 방식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내가 먼저 첫 단계를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연관된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행위이다.
경고들이 겸손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만일 교회 권징이 성도의 교제 안에서 실행되는 사랑의 행위라면 이 말은 만일 어떤 사람이 내게 있는 어떤 죄에 대해 경고하러 온다면 나는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나의 믿음의 고백을 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곧 세례나 입교 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막아주시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대가 교리나 행위에 있어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대는 교회의 훈계와 권징에 기꺼이 복종할 것을 약속하십니까?” 그때 나는 복종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질문과 약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교리와 행위에 있어서 태만하지 않게 되리라는 가능성이다. 다윗이 행한 일 즉 간음하고 살인한 것은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베드로가 한 일 즉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가장 확실히 다윗이나 베드로가 범했던 동일한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거짓 교훈에 빠진 형제들이 있었다(딤전 1:19이하)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는 동일한 잘못을 초월하지 못한다. 따라서 만일 교중 가운데서 한 형제나 혹은 한 자매가 나에게 다가와서 나에게 경고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 나는 분명히 내가 나의 형제 혹은 자매가 나에게 경고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다윗과 베드로가 행했던 것처럼 행할 수 있다는 것이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지속적인 죄악됨을 인정하고 나에게 경고하는 모든 사람의 말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 출교시켜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우리는 자기 계모와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고린도교회 안에 회원이 있다는 말씀을 읽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5: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 했다. 고린도교회의 회원들은 이방인에서 최근 회심한 사람들이다. 이제 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한 사람이 성적 부도덕(음행) 가운데 살았던 과거 이방인의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함에 있어서 사도의 목적은 교중이 이 형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교중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이 형제의 이런 배경과 연관해서 충고하기는커녕 그에게 관용을 베풀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곧바로 회원들이 행해야 할 바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5:4-5절을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바울이 장로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체 교중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 장로들은 출교를 실행할 때 권위를 가지고 있고,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러나 교회 권징은 회원들이 시작하고 회원들이 참여한다.
위에서 조언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바울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영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람이 지옥으로 가서 영원히 사탄의 통치하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형제를 사랑한다. 바울이 교중에게 이 형제를 사탄에게 내어주라고 선언한 것은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사탄에게 내어주게 되는 것보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낫다. 그의 계모와 이 형제와의 관계는 주님께 순종하는 행위가 아니다. 회개하지 않는 곳에는 출교가 있어야 한다. 출교가 없을 때 이 형제는 자신이 하늘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하늘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것을 몰랐을 것이다. 바울이 충고한 방식대로 이 형제를 다루는 것은 가혹하거나 잔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행위이고, 치료이고, 돌봄의 표현이다.
이 형제가 출교당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고린도전서 5:6절에서 읽을 수 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 처리되지 않은 죄는 암과 비교될 수 있다. 제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작은 암 덩어리가 실질적으로 전체 몸을 죽일 것이다. 우리는 즉시로 암을 진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학적인 처방을 연기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다릴 시간이 없다. 비록 출교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최우선적으로 실행될지라도, 둘째로, 출교는 교중의 구원을 위하여 실행된다.
역사적으로, 출교의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을 모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 형제의 성적인 부도덕을 관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 고린도전서 5: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 했다. 고린도는 성적 부도덕(음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용납되고 있는 그런 죄는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일이다. 이런 죄인을 교중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과 당신의 교회를 이방인들이 조롱하게 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18-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게 행한 일을 디모데에게 알려준다. 믿음의 고백을 했지만 그 후에 믿음을 거부하고 믿음에 관하여서 파선한(바울은 믿음에 관하여서 고초를 당하는 난파선과 같은 것으로 말한다) 그들도 또한 바울에 의해서 출교를 당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들도 또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기 위해서 사탄에게 내어준바 되었다”는 말씀을 읽는다. 사도는 그들을 가게 하여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어서 그들이 회개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사탄은 음부의 우두머리다. 지금 어떤 사람을 지금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은 나중에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출교당한 회원들 혹은 스스로 탈퇴한 회원들과 관계를 가지는 방법
우리는 교회로부터 스스로 탈퇴한 사람이나 출교당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앞에서 기록했던 주제를 상기시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9).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음행하는 모든 사람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임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세상에는 음행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그는 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 여기서 요점은 이런 것이다. 즉 만일 고린도전서 5장에서 묘사된 그런 사람이 심각한 죄를 가지고 살고 있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이 잘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령으로 영감 받은 바울은 이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말한다. 죄인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이와 유사한 충고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했다. 데살로니가후서 3:14-15절을 보면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했다. 믿음을 고백했지만 그 고백에 따라 살지 않고, 이 고백이 자신을 지적할 때에도 듣지 않는 자들에게 관하여,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좋다는 표현을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심지어 출교 전에도 그런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위에서 인용된 본문은 출교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아니다. 출교 전에도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이 좋은 것처럼 그렇게 행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하늘에서 당신을 보기를 원 한다’는 그런 메시지를 이런 형제에게 전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 당신은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같이 권면하라”고 기록한다. 죄악된 형제, 혹은 스스로 탈퇴한 사람 혹은 교회에서 출교당한 사람은 원수처럼 취급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침을 뱉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만일 내가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그를 향하여 행한다면 나는 주님을 가로막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원리는 사랑 안에서 나 자신과 그런 사람 사이에 확실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확실히 직접적인 가족 구성원에게 이 일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의 문이 그들에게 열려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가족 결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속은 긴장 상태에 있다.
우리가 스스로 교회를 탈퇴한 사람이나 혹은 교회로부터 출교당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이에 다른 점이 없다. 실제로, 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교중과 직분자들을 통하여 보내신 훈계들을 거부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교회 권징이나 출교 아래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탈퇴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교중 회원들의 훈계와 기도를 포함하는 교회 권징의 순회 과정을 가로막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탈퇴하려는 사람이나 교회 권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훈계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이 믿음의 공적 고백 때에 말했던 약속들에 호소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양심에 특별히 호소하는 것이 된다.
교회의 권징은 교중의 책임이고 공적 공고는 당회가 회개하지 않는 회원들에 대해서 혹은 회원들에 의한 탈퇴장에 관하여서 수행해야 하는 교회 권징의 대책에 대한 것이다. 또한 탈퇴장을 가지고, 회원의 출교 이전의 공고들로 당회는 교중에게 기도할 것을 호소한다. 왜냐하면 의인의 효력 있고 열정적인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5:16절에 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하고 있다. 당회와 함께 교중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죄인의 구원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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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 글은 광주화원교회에서 퍼온글이다.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