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 1752년 |
---|---|
사망 | 1800년 |
재위 | 1777년~1800년 |
우리 역사에는 무수한 왕들이 있었다. 어떤 임금은 한 몸을 바쳐 백성과 나라를 위해 봉사했고, 어떤 임금은 전제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긴 임금으로는 세종과 정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7~1800)는 18세기라는 어려운 시대상황에서 마흔아홉, 길지 않은 생을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뜻을 완전히 펼치지 못하고 장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가 태어날 무렵에는 영조의 오랜 통치로 나라가 어느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정조는 한창 가을 기운이 돌 무렵,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혜경궁 홍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왕손이 태어나자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할아버지 영조였다.
아들 사도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영조는 남달리 손자를 사랑했다. 더욱이 어린 손자가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자, 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총애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어린 왕손에게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닥쳐 오고 있었다. 세자 신분으로 정사를 맡고 있던 사도세자는 궁중에서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몰래 궁중을 빠져나가 평양에 가서 기생을 끼고 놀기도 하고 비구니와 어울리기도 했다.
또 경종(사도세자의 큰아버지)이 노론에게 몰려 죽은 일을 두고 큰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하고 원로대신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억누르기도 했다.
자연히 사도세자의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특히 노론에서는 이런 세자가 왕이 되면 자신들의 신변이 위협을 받거나 정치적 지위마저 흔들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하여 세자에 대한 모략이 끊일 날이 없었다. 부왕인 영조도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구나 세자의 처가인 홍씨 세력도 노론 편에 서거나 은근히 동조함으로써 세자를 견제했다.
마침내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들어 근신하게 했고, 끝내 뒤주 속에 가두는 처벌을 내렸다. 사도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부왕에게 빌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여름에 뒤주 속에 가두고 그 위에 짚북데기를 쌓아 더위에 못 이겨 죽게 만들었다.
정조는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엄청난 사건을 목격했다. 이어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에 그 처벌의 옳고 그름을 두고 벼슬아치들이 갈라졌다. 사도세자의 편은 시파(時派)였고, 그 반대편은 벽파(僻派)였다. 벽파는 세손의 동정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였다. 당시 벽파쪽이 권력을 몽땅 쥐고 요직을 차지했다.
만약 세손이 삐끗하기라도 하면 벽파로부터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아들에게 근신을 당부했다. 세손의 신변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세손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떠든다든지 조정의 내막을 아는 체라도 하게 되면 벽파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세손의 보호를 맡은 홍국영은 세손의 신변을 잘 돌보았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세손이 거처하는 곳의 지붕에서 기왓장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근신들이 나와 잡으려 하자 범인은 이미 도망쳤다. 끝내 그 연루자들을 잡아들였는데 이 일은 세손의 동정을 살피려는 벽파들이 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나날 속에서 세손은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잠을 자야 했다.
세손의 나이가 어느덧 20세에 이르렀을 때 영조는 80세가 넘어서 기력이 점점 약해졌다.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던 영조는 어느 날 대신이 있는 자리에서 세손을 불러 근심스레 물었다.
“어린 아기는 노론 · 소론과 남인 · 북인을 아느냐? 나라의 일과 조정의 일을 아느냐? 병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 이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를 아느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홍인한이 불쑥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동궁은 노론 ·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 · 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나이다.”(《명의록》)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이것은 영조와 세손을 여지없이 깔보는 말이었다. 더욱이 홍인한은 세손의 외가 아저씨뻘 되는 처지였다. 이때 세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三不必知)’라는 것이다.
세손은 23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맡았다. 이때도 홍인한과 영조의 양외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의 대리청정 조치를 막으려 했고, 대리청정이 단행된 뒤에도 방해와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참으로 위험스런 시기였다.
다음 해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고 뒤이어 정조가 즉위했다. 사도세자는 비명에 갔으나, 어린 세손이 장성하여 끝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첫 번째로 한 일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공식호칭인 사도세자를 정식호칭인 장헌세자로 받들었고 벽파인 홍인한 · 정후겸 등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근위의 신하인 홍국영을 발탁하여 도승지로 삼고 여러 가지 일을 지휘하게 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일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일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난 뒤 규장각 설치를 서둘렀다.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하고, 역대 왕의 문적을 수집하여 보관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그의 근신들을 배치했다. 당시 명망 높고 재주 있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젊은 인사들을 모아 배치한 것이다.
각신(閣臣)이라는 규장각의 벼슬아치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고 하루 종일 규장각에서 연구에 몰두도록 했다. 때때로 정조 자신이 몸소 그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당대 정치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또 서자 출신으로 재주가 있는 아까운 인사들을 검서(檢書)라는 이름으로 모아들여 그들의 학식을 정사에 이용했다.
또한 정조는 처음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실시했는데,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게 하고 때때로 성취도를 재는 시험을 보게 했다. 초계문신으로 뽑혀 성적이 좋으면 좋은 벼슬자리에 발탁됐다. 초계문신은 바로 신진 정치 엘리트이며, 여기서 배출된 이들이 이가환 · 정약용 등이다.
정조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고 때때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했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지자 암행어사의 부정을 캐는 암행어사를 뒤딸려 보내기도 했다. 정조의 남다른 신임을 받는 암행어사들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수령을 임명해 현지에 보낼 때에는 늘 개인 면접을 하고 세세하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도록 당부했다. 수령들에게 지방의 실정을 알릴 일이 있으면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내게 했다. 승정원을 거치면 그 내용이 권신들에게 새어 나가 방해를 받는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규장각에 근신을 배치하고 남달리 총애를 쏟자 대신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정조는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 당인들에 의해 정사가 그릇되고 왕권마저 흔들렸던 지난 역사를 익히 알고 있던 정조는 그의 친위세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통해 바른 정치를 펴려 한 것이다.
특히 정약용에게 쏟은 정조의 관심은 특별했다. 때때로 책을 내려 읽게 하고 그 깊이를 시험하기도 했으며, 시골 수령으로 보내 지방 실정을 알아오게도 했다. 정조는 또 남인의 거두 채제공에게 중요한 정사를 맡겼다. 영의정 채제공은 왕의 뜻을 좇아 바른 정치를 폈다. 정조는 나이 많은 채제공의 후계자로 이가환과 정약용을 점찍어 키웠다.
정조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보호해 주던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자 가차없이 그를 제거하여 조정을 맑게 했다. 아무리 근신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서자 출신의 박제가를 늘 곁에 두고 그의 재주를 아꼈으며 소외당하던 서북 출신의 이응거를 등용하여 한성판윤을 삼기도 했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과거를 보게 해서 합격하면 벼슬을 주었고 서북지방 인사들을 특별히 뽑아 벼슬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성균관에서는 과거에 합격해 입학하면 나이 순서대로 앉는 게 관례인데 이를 어기고 서얼들에게는 앉는 자리에 차별을 두어 남쪽 줄에 앉게 했다. 이를 알게 된 정조가 거듭 시정을 분부했다. 또한 서북지방 인사들에게도 예전처럼 한직을 준 것이 아니라 현직(顯職)을 주었다. 또 할아버지의 정책을 따라 탕평책을 써서 당색을 초월하고 지역감정을 어루만지고 차별받는 신분층을 거두어들였다.
정조는 규장각 서재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쓴 글귀를 걸어 놓고 늘 바라보았다. 그 뜻은 ‘모든 냇물에 골고루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주인 늙은이’라는 것이다. 백성을 골고루 보살펴 준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처럼 그는 백성을 한시도 잊지 않고 보살폈다. 백성의 고통을 적은 암행어사나 수령들의 보고서를 읽을 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그런 글을 새벽까지 낱낱이 살피고 처리했다.
정조는 자주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다. 그는 이 어가(御駕) 행차 길에 하나의 관례를 만들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징을 울려 알리도록 한 것이다. 이를 격쟁(擊錚)이라고 한다. 정조는 징소리를 들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사정을 호소한 원정(原情)의 글을 받았다. 원정은 본디 한자로 쓰게 되었는데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언문으로 써서 올리도록 조치했다.
노비들이 도망가는 사례가 늘어나서 포졸들이 이들을 잡으려고 나라에 소동이 벌어지자 그 근거가 되는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폐지했다. 또 궁녀들에게 많은 녹봉이 지급되어 나라 재정을 축내며 그녀들이 시집을 못 가는 처지가 불쌍하다고 하여 대전(大殿, 임금이 있는 곳)의 궁녀를 없애 버렸다. 그러면서도 노비제도를 완전히 철폐하지 못한 것은 상전들의 반대 때문이었고, 궁녀제도를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은 궁녀를 부리고 있는 대비와 비빈의 반대 탓이었다.
형벌은 인권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시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형벌이 더욱 문란해져 고통을 당했다. 때로는 곤장을 맞거나 주리를 틀리다가 물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경국대전》의 규정을 통해 알아보자.
판결기간은 죽을 죄를 범했을 때는 30일, 유배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는 20일, 장형 · 태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는 10일 안에 처결해야 한다. 신문할 때 일정한 규격의 곤장을 사용하여 무릎 아래만 때리되 관절은 때리지 못하고 한번에 30대 이상은 치지 못한다. 3일 안에는 다시 곤장을 칠 수 없다. 태형을 시행할 때는 회초리만 사용한다. 곤장 재료는 버드나무로 한정하되 등을 때리지 못한다. 온몸 아무데나 때리는 난장을 금지하고 죽을 위험이 있는 죄인에게는 곤장을 치지 않는다.
이런 것이 후기에 내려와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흥보전〉을 보면 흥보가 매품 파는 대목이 나온다. 대신 매를 맞아 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 목에 형틀을 쓴 모습이 등장한다. 모두 불법이거나 새로 만들어 낸 형벌 방법들이다.
정조는 죄수들이 감옥에 있을 때에는 결박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형틀을 씌우지 말도록 했다. 또 남형을 막기 위해 회초리 · 곤장 · 쇠줄의 크기 · 굵기 · 무게 따위를 정해 그림을 그려서 배포했다. 정조는 이런 내용을 《대전통편》과 《흠휼전칙》에 담아 전국에 배포하고 엄하게 지키라고 했다. 죄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잔악한 고문을 막아 억울하게 죽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정조가 능행길에 나서 한강의 배다리를 건널 때면 그 언저리에 백성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와 고개와 들판을 하얗게 메웠다. 그들은 너도나도 “우리 임금 용안 한번 보세”라고 떠들면서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정조는 때로 어가를 멈추고 이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백성들의 형편을 물었다.
일부 반대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 태어났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많은 핍박을 받던 서민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며 살길을 찾아 생업에 전념하는 기풍이 일었다.
정조는 학문과 문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는 사직단에서 사직제사를 지내던 어느 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악(典樂, 음악 지휘 책임자)을 불렀다. 그는 곡조가 맞지 않는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전악이 연주하는 악기를 점검한 끝에 잘못 연주한 악기를 발견했다.
정조는 음악만이 아니라 문장, 그림, 도장 등 문체와 예술의 취미도 높았고 안목도 있었다. 그는 언제 책을 읽고 정무를 볼 시간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늘 글을 지었고 도장을 새겼다. 박지원과 그 제자들이 비어 · 속어를 쓰는 문체를 유행시키자, 그는 박지원을 불러 꾸짖었지만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였다.
또한 천주교 교도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이 발각되자, 그 당사자들만 처벌하고 천주교도들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종래 역적의 글이라고 해서 보기를 금하던 정도전 · 허균의 글을 모아 규장각에 보관하게 했다.
정조는 현실개혁 이론을 담은 실학자들의 글을 즐겨 읽었다. 앞시대에 살았던 반계 유형원 · 성호 이익 · 순암 안정복의 글을 읽고 현실정책에 반영했다. 또 실학자로 시골에 묻혀 있던 장흥의 위백규를 불러 벼슬을 내렸으며 그들의 개혁이론에 귀를 기울였다.
정조는 상업의 장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종래에는 물건을 만든 사람은 그 물건을 팔지 못하게 금지했다. 장사꾼만이 상행위를 하여 세금 따위 통제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정조는 이러한 관례를 철폐하고 통공정책(通共政策)을 허용했다. 누구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하여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기했던 것이다.
정조는 문풍(文風)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태도와 의지를 보여 주었다. 정조 자신이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글쓰기에 정진하기도 했다.
특히 정조는 도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많은 도장을 손수 새기기도 하고, 나무나 돌 따위의 여러 재료로 도장의 모양을 바꾸어 보기도 했다. 그는 술 따위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도장파기 등 예술적인 일에 전념하면서 심신을 수양했던 것이다. 그가 판 도장은 규장각의 책들에 찍혀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선명하게 전해 준다.
1793년 정초에 정조는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수원행궁에 이르렀다. 그는 붓을 들고 화성(華城)이라고 썼다. 이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어 수원부라고 쓰여 있는 현판을 뜯어내고 대신 걸었다.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꾼 것이다. 정조는 화성을 방위하는 군대를 새로이 설치하고 장용영이라고 명명했다.
곧이어 정조는 화성 축조를 발표했다. 오랜 구상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조는 그동안 정약용을 은밀하게 불러 성쌓기 기계를 설계하라고 일렀고, 정약용은 고심 끝에 무거운 돌 따위의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는 기중가(起重架) 도면을 완성했다.
화성 공사는 2년 7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는데 총둘레가 5744미터였다. 동원 연인원은 1만 1820명, 총경비는 돈 87만 냥쯤, 곡식 1만 3000석쯤 소요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동원된 인부들에게 규정된 임금을 지불했고 들어간 경비의 내역은 1냥까지 꼼꼼하게 장부에 적게 했다. 정조는 완성된 성을 둘러보고 나서 정약용을 불러 기중가를 사용해 돈 4만 냥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칭송했다.
느닷없는 공사에 벼슬아치들은 국가재정을 낭비한다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아버지를 위해 거대한 성을 쌓은 것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단호했다.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
이게 무슨 뜻일까? 정조는 오래전부터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당쟁의 뿌리가 깊은 서울을 옮겨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 문벌이 대궐 같은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서울을 벗어나 벼슬아치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큰 뜻이 있었다.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혁신정치와 개혁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고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정조는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철 따라 참배하여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한 많은 어머니를 공손히 대접하기에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조는 가장 신임하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무상을 느껴 곧잘 감상에 젖었다. 앞으로 중용할 마음으로 키우던 정약용마저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사직을 하고 마재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는 더욱 쓸쓸해 했다. 정조는 곁을 떠난 신하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정조의 나이 49세에 겪은 이런 일들은 그의 말년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그는 14년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혁신정치를 펴 보려 했지만, 보수세력이나 묵은 권신들의 견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름에 들어 지병인 종기가 도져 병석에 누웠다가 11세의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슬픔은 너무나 컸다.
영조의 마지막 왕비인 정순대비 김씨는 영조가 죽은 뒤에도 궁중의 어른으로 군림했다. 정순대비 김씨는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와 궁중의 어른 노릇을 했다.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년이나 어렸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지극정성으로 정순대비를 받들었다. 하지만 정순대비는 친정붙이에 휘둘려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거들었고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는 시파를 시기했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친정세력인 경주 김씨를 몰아내자 불만에 차서 방해를 일삼았다.
정조가 종기로 자리에 드러눕자 정순대비는 자주 병실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정조가 마지막 탕약을 먹고 갑자기 죽었는데 김씨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정조가 죽은 뒤 옥새가 궁중 어른인 김씨의 손에 들어갔다. 김씨는 어린 왕을 감싸며 친정붙이를 끌어들여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리하여 그 뒤 문벌정치가 들어서 19세기 민란이 일어나게 했다. 정조가 그토록 염려하던 일이 끝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조를 반대하던 벽파는 고개를 치켜들고 정조의 세력을 꺾었으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조선 초기에 세종이 죽고 나서 왕위를 놓고 왕자들이 싸움을 벌였는데, 이때에는 척족들이 어린 왕을 업고 농간을 부렸다. 세종과 정조, 그들은 비록 성군으로 역사에 이름은 올랐지만 그 뒤의 현실이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세종은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왕위에 올라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좋은 역사 조건을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정조는 사회가 급변하고 기강이 극도로 문란하여 민중적 자각이 세차게 일어나는 역동기에 왕위에 있었다. 역사 환경이 매우 나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새로운 역사시대를 열었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반대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조는 신진의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주자학을 탐독했으며 새로운 세력을 등장시키면서도 문벌가들을 직접 탄압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다. 절제된 개혁정치를 폈지만 반절의 성공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조는 세종과 함께 위대한 군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정조의 숨결이 곳곳에 베어 있는 수원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1년에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 수원시에서는 화성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노력보다 정조의 정신을 먼저 알아 가는 게 역사의 진실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