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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의 조언
오늘날은 윤리도덕이 점차 퇴색하고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배려가 식어가면서, 선의의 조언보다는 비판과 비방이 난무하여 갈등이 극심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남의 잘못은 쉽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장 37~38절
이것은 인과응보의 이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도 무조건 외면하거나 침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고한 살인과 방화를 보고도 못본 채 외면한다면 이로 인해 타인은 큰 피해를 보게 마련이므로 이는 정의심이 없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선의의 조언과 상대방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위한 공격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적하느냐이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점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목적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고 성장을 돕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어 망신을 주고 깎아내리기 위한 것인가?
둘째,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상대방을 위하는 자비와 이타심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분노와 적개심, 질투와 원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셋째,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사실에 근거하여 이성적이고 진솔하게 설명하는가, 아니면 모욕과 조롱, 허위 과장과 인신공격으로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가?
넷째,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가?
잘못된 행동은 분명하게 지적하되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잘못을 빌미로 상대방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가?
이러한 기준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돕기 위한 선의의 조언과 감정적인 비난을 구별할 수 있다.
여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배려심과 때와 장소에 알맞는 조언의 지혜가 더해질 때, 비로소 조언은 서로에게 유익한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커진다.
잘못된 지적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아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가족과 친구가 원수로 변하는 경우도 흔하므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자.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순수하게 상대방을 일깨우고 돕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 분노나 불만을 표출하고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하게 만들려고 비판하는 것인가?
진정한 조언은 상대방을 상처주고 굴복시키는 말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도록 돕는 말이며, 진정한 지혜는 남의 허물을 잘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부터 바로잡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람은 타인과 갈등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잘못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찾아내고,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려 한다. 상대의 허물은 잘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은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예수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아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3–5》
예수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도 무조건 묵인하라는 뜻이 아니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하며, 그러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타인의 잘못도 올바르게 바라보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의 부족함과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서로 남탓을 하고 비판만 하게되면 갈등과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어 불화만 더욱 커질 뿐이다.
이런 갈등을 해소시키는 방법은 늘상 남의 허물을 보고 비판하며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피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남이 무엇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말라. 오직 자신이 무엇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를 보라.” 《법구경》
현재 우리나라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로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치권의 문제를 넘어, 현 종교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종교의 역할은 구원이나 믿음을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욕심과 집착을 성찰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을 이루도록 이끄는 데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종교가 과연 인간을 참되게 교화하고 사회의 갈등을 줄이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선의의 조언과 자비의 힘에 대해 법륜대법 李洪志 사부님의 자세한 가르침을 소개하니 구업을 짓지 않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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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 나는 비록 안으로 향해 찾아야 함을 배웠지만, 평소에 이 좋지 못한 마음을 제거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나, 때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적해 주면 그는 나에 대해 불쾌해 한다. 이것은 業을 짓는 것인가?
사부 : 이것은 업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집착심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그러나 너무 소심한 사람은 되지 말라. 다른 사람에게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해 말한다면, 선의로 지적해 주고 응당 지적해 주어야 한다.
여러분들의 수련은 또 다른 사람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았을 때 그도 수련하고 있기 때문인데 왜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그가 어떻게 대하든지를 막론하고 당신들은 마땅히 그에게 알려줘야 한다면 알려줘라.
당신들의 마음이 선(善)한 것을 사부는 보았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음에 대하여 말한다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당신은 모두 그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그 마음을 건드린 것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그에 대해서는 모두 하나의 촉진이다. 그는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난 후에는 그는 아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래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또다시 다른 사람의 입을 이용하여 그를 또 두드릴 것이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그로 하여금 머리가 부딛혀 큰 혹이 나게 할 것이다. (웃음) 말한 것은 우스개소리이다!
사실 수련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에 명백해지려면 반드시 전법륜 이 책을 보아야 하는 바 반복적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의 집착을 발견하고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자신이 발견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말해줄 때 당신이 마음속으로 통쾌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당신은 전법륜을 들고 좀 보라. 당신이 어떠한 목적도 품지 않고 본다면, 당신이 임의대로 전법륜을 들어 중문이든 영문이든 아니면 기타 어종(語種)이든지를 막론하고, 당신이 임의대로 그것을 펼치면 보증코 그 한편은 당신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당신이 본다면 보증코 이러하다.
그러나 당신은 시험하지 말라. 당신이 시험하려는 이 마음은 아주 좋지 못하므로 법에 대한 엄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시험하려고 할 때에는 소용이 없고 또한 쓸모가 없다.
(출처 :1999년 뉴질랜드설법 李洪志)
"나는 항상 한마디 말을 하는데, 만약 한 사람이 어떠한 관념도 없이, 개인의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남이 좋아지도록 남에게 그의 부족함을 말해주거나, 혹은 그에게 어떤 것이 바른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이 선(善)의 힘은 매우 큰데, 속인사회의 사람들은 흔히 남에게 좋은 일을 말할 때에도 자기의 관념을 갖고 말하며, 심지어 손해를 볼까 두려워, 자기의 그 심리를 보호한다. 많고 많은 방면들의 것이 안에 섞여 들어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듣기에 말의 뜻이 변했고 깨끗하지 못하며 흔히 감정까지 섞여 들어간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여 어떠한 개인의 관념도 섞지 않았다면 당신이 한 말은 정말로 사람을 감동시킬 것이다. " (출처 : 1998년 싱가포르법회 설법)
" 내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말로 개변시키려 하거나, 그를 설득하려 할 때, 당신이 한 말에 아무리 이치가 있어도, 다른 사람이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며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가?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당신이 한 말 속에는 당신의 모든 사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속인 중의 각종 칠정육욕, 나아가 당신이 집착하는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이 한 이 말 속에는 모두 복잡한 사상이 들어 있어, 당신의 말로 하여금 그리 큰 힘이 없게 했으며 아주 분산되게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할 때 흔히 자신의 관점에 섰고, 그것은 우주의 法에 꼭 부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말하자면 또 진리의 힘이 없다. 남에게 무엇을 말할 때, 또 자신의 것을 보호하고, 자신이 상처 받지 않을 것을 더한다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하는 말은 목적이 있고 또 불순해지면, 한 말이 아주 가벼워진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사상이 청정해질 수 있을 때, 혹은 당신이 집착하는 마음이 갈수록 적어져 잡념이 더욱 적어졌을 때, 당신이 한 말에 힘이 실리는 것을 당신은 발견하게 된다.
내가 무위(無爲)를 말할 때 왜 내가 여러분에게 상관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함부로 상관하지 말라고 했는가? 바로 당신이 한 말은 이미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힘이 실린 말은 다른 사람을 개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든, 틀리든 당신이 다른 사람을 개변했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일을 잘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눈으로 본 것은 표면일 뿐, 과거의 인연관계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은 진상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높은 층차에 이르렀을 때 당신의 사상은 갈수록 순정해져서 당신 사상이 내보낸 것이나 해낸 말은 아주 깨끗하다. 더욱 깨끗할수록 더욱 단순하며 우주의 이 층 이치에 더욱 부합된다.
한 말은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관통할 것이고, 사람 의식의 깊은 곳까지 미칠 것이며, 그의 생명의 더욱 미시적인 곳에까지 미칠 것인데, 당신이 말해 보라. 그것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요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경지(境界)의 체현이다.
우리의 수련은 그 한 층의 표준에 부합해야 그 한 경지에까지 수련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수련이, 왜 사람의 집착심을 없애야 하며, 왜 소업해야 하고, 왜 법의 요구에 부합해야 하며, 왜 당신들에게 항상 책을 보고 법을 이해하라 하는지, 그 이유이다." (출처 : 98년 스위스법회 설법 )
예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善인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당신이 이 사람에게 웃으며 아주 친근하게 표현한다면 이것이 바로 선이라고 한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게서 표현되어 나온 우호적인 상태일 뿐이다.
진정한 선이란 수련자가 수련과정 중에서, 잘 수련하는 과정 중에 이미 수련된 진짜 선을 말한다. 중생을 마주할 때, 당신은 아직 잘 수련되지 못한 사람의 일면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수련이 잘 된 신(神)의 부분을 완전히 표현해 낼 수 없다.
반드시 당신은 이지적이고 청성하여 수련인다워야 하며,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정념이 주도적으로 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의 진정한 선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련인과 신(神)의 다른 점이다.
이것이 慈悲로서, 그는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선하고 악하고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善惡喜好)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잘 대한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대가가 없고, 보수를 따지지 않으며, 완전히 중생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선(慈善)이 나오기만 하면 그의 힘은 끝없으며, 어떤 좋지 않은 요소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慈悲가 클수록 그 힘은 더욱 크다. 과거 인류사회는 올바른 이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은 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며, 사람은 여태껏 모두 징벌이라는 수단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사람의 이치가 되었다. 사람이 신(神)이 되고자 한다면 사람의 상태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럼 이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며, 慈悲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 慈悲는 거대한 에너지이며, 바른 신(正神)의 에너지이다. 慈悲할수록 이 에너지는 더욱 커서 어떤 좋지 못한 것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석가모니든 그런 수련인이든 모두 말한 적이 없다. 선의 최대 표현은 바로 慈悲이다. 그는 거대한 에너지의 체현이다. 그는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물론 慈悲의 능력도 층차가 높아짐에 따라 커진다. 그러므로 그 역시 층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역량은 층차나 과위의 높이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것 역시 확실하다《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李洪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