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찰
조금 자라자 마트에서 별의별 장난감을 사 가지고 들어온다. 장난감 골프채와 골프가방을 끌고 다니더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주차장에 장난감 꼬마 자동차를 주차시키느라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눈에 뜨이는 장난감이 있으면 안 사 주고는 배겨나기 어렵다. 몇 날 며칠씩 떼를 쓰고 졸라대어서 기어코 목적을 달성한다.
한번은 의사놀이를 사 가지고 와서 한바탕 떠들썩하였다. 할아비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꽂아서 온도를 재보더니,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조용히 소리 듣는 시늉을 하고, 아 해봐! 입을 벌리게 하고는 치과기구를 들이밀고, 몸이 많이 안 좋은데!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주사 맞자고 커다란 주사기를 들고 달려든다.
“우하하하!”
마침내 할아비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삼촌 닮기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내가 완도여중에 근무할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놀러온 넷째 동생이 네댓 살 먹은 조카(나의 큰아들) 손목을 잡고 바깥나들이에 나섰는데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그러더라는 것이었다.
“오메, 참 아들 일찍 두셨소, 잉.”
그러고 보니 우리 큰아들은 넷째삼촌을 가장 많이 닮아 보였다.
똘남이는 제 아비를 닮기보다는 서울 사는 제 삼촌을 더 많이 닮았다.
“오메 오메, 영락없이 정삼이 애기 때 그대로란께.”
동네 아주머니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조카 귀여워하지 않는 삼촌이 어디 있을까만, 똘남이 삼촌은 똘남이를 무척이나 예뻐하고, 철따라 옷도 사 주고, 선물도 사 주었다.
내리 사랑
보리밥도 양껏 먹기 어려웠던 소년 시절, 귀하디귀한 홍시는 석짝(대나무로 엮은 상자)에 담겨 시렁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내 입이 궁금할 즈음이면 할머니께서는 석짝을 내려서 내 주먹보다 큰 탐스러운 홍시를 하나 꺼내주셨다. 볼때기가 미어터져라 우물거리던 나는 문득 할머니를 쳐다보며,
“할머니! 할머니는 왜 안 먹어?”
“응, 어서 먹어라.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손자가 쪽쪽 빨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할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셨다. 현기증이 날 만큼 황홀하게 달고 맛난 홍시를 할머니는 왜 먹고 싶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십 년이 흐른 다음에야 똘남이 똘란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할머니의 마을을 알게 되었다. 할아비가 된 지금도 나는 홍시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데 먹을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에 왜 할머니라고 홍시 자시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오지게 사랑스러운 첫손자 먹이기에도 아까운 홍시를 어떻게 당신 입 안으로 덥석 들이밀 수 있더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는 첫손자인 나를 너무나도 사무치도록 예뻐하셨다. 동네방네 업고 다니며 날마다 손자 자랑을 늘어놓고, 등 뒤에 업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포대기를 돌려서 보듬다시피 하고 귀여운 손자 얼굴을 마냥 들여다보셨더란다.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시냇물처럼 아래로만 흘러내리지 위로 치올라가는 법이 없다. 할머니한테 받은 은공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고 너무 죄송해하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는 손자를 사랑했고,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손자는 60년 후에 할아버지가 되어서 홀연히 기적처럼 인간 세상에 하강한 손자 손녀를 듬뿍 사랑해준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다.
냉장고를 여니 요구르트가 눈에 띈다. 목이 칼칼할 때 요구르트를 마시면 뱃속까지 시원해진다. 무심코 요구르트로 향하던 손길을 문득 멈춘다.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 똘남이 똘란이 먹기에도 부족한 개수다. 똘남이 똘란이도 요구르트를 잘 마신다. 다음에 한 뭉텅이 사 오면 맘 놓고 마셔야지.
불현듯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요구르트를 꺼내려다 말고 빈손으로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나는 석짝에서 홍시를 꺼내주던 60년 전의 할머니를 떠올린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당신은 먹고 싶지 않다던 말씀의 깊은 뜻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승진
7남매 중 장남인 나와 막내딸인 여동생과는 19살 터울이다. 막내여동생은 아들만 넷을 낳았다. 그 집 막둥이와 똘남이는 두 살 차이다. 하지만 항렬이 다르다. 두 살 더 먹은 막내여동생의 막둥이는 삼촌이고 두 살 덜 먹은 똘남이는 조카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명절 때마다 광주 어머님 댁에 모이는데 꼭 어린애가 한두 명씩 딸린다. 명절에 따라온 아이들은 좀처럼 잠을 못 이루고 보챈다. 북적거리는 가족들이 낯설고 잠자리는 비좁고 실내 공기는 후텁지근하니 울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다. 심한
아이들은 토하기까지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절 때마다 어머님 댁은 아이들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막내딸의 막둥이를 끝으로 어머님 댁의 울음소리도 끝날 성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또 새로운 시작이었다. 세월이 어느덧 한 바퀴 돌아 이제 새로운 세대가 막을 연 것이다.
똘남이 똘란이가 새 세대의 선두 주자로 등장하자 우리 대가족은 일제히 환호했다. 가족이란, 또한 인류란, 새로운 세대의 출현으로 그 역사를 면면히 이어가게 마련이었다.
똘남이 똘란이는 낯선 대가족 앞에서 심한 낯가림으로 울상을 짓고 비명을 질렀지만, 고모, 삼촌, 작은할아비, 작은할미 들은 똘남이 똘란이가 신통방통하여 안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손을 쥐어 보고 어르고 달래면서 똘남이가 저희 셋째삼촌(나의 셋째아들)을 닮았다느니, 똘란이가 저희 고모할머니(나의 큰 여동생)를 많이 닮았다느니, 피는 속이지 못한다느니, 수다를 떨며 깔깔거렸다.
똘남이 똘란이의 출현으로 우리 대가족은 일제히 한 항렬씩 승진하였다.
우리 어머님은 할머니에서 삼대할머니로, 우리 동생들은 작은아버지에서 작은할아버지로, 우리 여동생들은 고모에서 고모할머니로, 동생의 부인들은 작은어머니에서 작은할머니로, 여동생 남편들은 고모부에서 고모할아버지로 호칭이 한 단계씩 올랐다. 아울러서 내 아들의 사촌형제들도 똘남이의 5촌 당숙, 5촌 당고모의 명칭을 획득했다.
기꺼운 일이어라. 대가족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복잡한 호칭들이 한꺼번에 승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오. 새로운 세대가 아니면 어찌 가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가 지탱해나갈 수 있으리오.
이제 내 손자 똘남이 똘란이가 출발 테이프를 끊었으니 세월이 가면 내 동생들의 손자 손녀들이 또 줄줄이 뒤를 이어 태어나리라.
슈퍼와 마트
어느 명절날 대가족이 어머님 댁에 모였을 때였다. 똘남이의 넷째 작은할아버지가 어쩌는가 보려고 똘남이한테 물었다.
“똘남아, 슈퍼하고 마트는 어떻게 다르지?”
한참 생각하던 똘남이,
“마트는요 멀리 차 타고 가고요, 슈퍼는요 그냥 걸어가도 돼요.”
우하하하, 작은할아버지는 유쾌하게 웃었다.
- 너 가지고 싶은 게 뭐니? - 안테나 달린 자동차요. - 마트 가야 있겠네? - 슈퍼에도 있을 거예요. - 한번 가 볼까? - 야, 신난다.
넷째 작은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가더니 슈퍼에서 안테나 달린 탱크를 사 가지고 왔다. 그 날 온종일 똘남이는 탱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리모컨의 앞쪽을 누르면 전진하고 뒤쪽을 누르면 뱅그르르 원을 그리면서 후진하는데 저의 오촌당숙들이 조금 만져보자 해도 리모컨을 홱 등 뒤로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우리는 구세대라 전통적인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장터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온갖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몸뚱이를 부딪치고, 싸고 좋으니까 사라느니 더 깎아주라느니 말잔치가 풍성하게 오가고, 삶의 현장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 좋다. 그러나 우리 아들 내외만 해도 재래시장보다는 마트를 즐겨 드나든다. 아무래도 마트가 재래시장보다는 깨끗하고 정돈되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고 에누리 해주라느니 못해준다니 신경 쓸 필요도 없어서 편리한가 보았다.
제 부모를 따라다니다 보니 덩달아 똘남이 똘란이까지도 마트 출입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추운 겨울에 방에만 처박혀 있으려니 갑갑하고 답답해서 바람도 쐴 겸 마트 가자고 졸라대더니 차츰 견문이 넓어지자 마트 가면 빵이나 과자 부스러기도 사 오고 다음에는 아예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 광고에서 본 장난감을 지목하여 사 주라고 조른다. 한번 조르면 사 줄 때까지 집요하게 졸라대어서 부모를 지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사 주는데 오래 가지고 놀기나 하면 다행이련만 며칠 신나게 만지작거리다가 싫증을 느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돈이 아깝다, 돈이 아까워, 돈 없다, 돈 없어! 아무리 투덜거려도 똘남이는 무슨 뜻인지, 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돈이 아깝다. - 왜? - 돈 없다. - 왜? - 못 사준다. - 왜?
아무리 설명하자해도 끝도 갓도 없이 왜? 왜? 하는 데에는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히고 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