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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변호사회의 연변방문기
장동환
1. 대전지방변호사회의 연변의 인연의 시작
약 2-3년 전 연변에서 법률업무에 종사하는 용정시 사법국장, 연변변호사회 율사들(중국에서는 변호사를 율사라 함) 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적당한 교류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들이 교류대상을 물색한 상세한 내막이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어쨋든 그들은 강렬한 요구를 가지고 한국 법률가들과의 교류을 원하였던 것 같다. 당연히 먼저 손짓을 한 쪽은 그들이다. 그들은 2-3년 전 과감히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들이 한국의 교류대상으로 설정하고 과감히 댓시한 대상은 당시 대전지방변호사회 회장님이였던 이관형 변호사님이라고 들었다. 그들은 이관행 변호사님이 계신 금강합동법률사무소를 방문하고 교류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그 시작은 결국 그 다음해 이관형 변호사님이 개인적인 용무로 북경을 여행하였고, 그들은 연길에서 하루가 꼬박 걸리는 장거리 여행을 하여 북경으로 가 이관형 변호사님 일행을 만나는 극적인 교류의지로 발전하였다. 이어 그들은 작년(2003년) 대전지방변호사회 사무국장님을 초청하여 살가운 대접을 하였고 드디어 사무국장님을 통하여 대전지방변호사회를 공식적으로 초청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대전지방변호사회는 그들의 그 동안의 열정을 받아들여 방문단을 꾸리게 된다. 그러면 누구를 방문단으로 꾸릴 것인가. 대전지방변호사회는 이사진들과 평회원들을 중심으로 선착순 모집을 한 결과 다음의 쟁쟁한 방문단을 꾸릴 수 있었다. 오영권 대전지방변호사회 회장님, 명을식 총무이사님, 정교순 이사님, 문성식 이사님, 한원규 변호사님, 김형배 변호사님, 박광천 변호사님, 안병진 변호사님, 장동환 변호사(필자), 사무국장님, 수행원 1인 등 11명이다.
2. 출발
2004. 8. 6. 07:30경 약속시간 인천공항행 버스를 오르기 위하여 대전정부청사 앞 터미널로 일행은 모이기 시작하였다. 모든 여행은 마음을 설레게 하고 다연히 외국여행인지라 약간의 설렘을 안고 일행은 이른 아침 무사히 모였다. 한 변호사님은 법정에 출석은 늦게 하면서 놀러 간다니 일찍 모인다고 하고, 한 변호사님은 어제 설렘에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하신다. 장거리 외국여행은 일행을 모종의 힘으로 서로 당긴다고나 할까 유대감이 흐른다. 공항버스에 올라서도 쉽게 자는 대신 이번 여행에 대한 얘기들이 오고가고 작년 유경험자이자 인솔자인 사무국장님의 브리핑이 따른다.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한 여행을 기대하던 필자에게 버스 안에서 오영권 회장님이 갑자기 한마디 던진다. “장동환 변호사가 여행기를 쓰지” 거부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당부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한다. 약 3시간 지나니 인천공항이다. 출발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고 수속을 밟고 나도 1시간 30분이 남아 각자 행동하기로 하고 면세점으로 커피숍으로 헤어져 출발시간인 14:00경 탑승대에 오른다. 탑승 대기전 탑승대에서 내려다 본 조그만 비행기가 있었고 “북방항공”이란 있었으나 설마 저 작은 비행기는 아니겠지 하였는데, 막상 탈 비행기는 그 조그만 비행기다. 여름 휴가철이라 태반이 한국 관광객인 깡통 속 같은 비행기 안에 몸을 바짝 싣고 1시간 30분 있으면 연길공항이다.
3. 비행기 안
역시 비행기 안에서는 특히 남자의 경우 여승무원이 눈에 띈다. 빨간색 유니폼으로 화사한 여승무원들에게 기대했던 웃는 얼굴 대신 다소 사무적인 시선만 확인하고 한 변호사님은 서비스 문제를 체제와 연관하여 말씀하신다. 착륙 직후 한 동안 인천과 인접한 서해도를 보며 지루함을 달래다 보면 어느새 기내식이 나온다. 불고기 곁들인 밥은 한국식이고 말린 고기는 중국식인지 모르는 음식을 다들 맛있게 잡수신다. 양도 많아 약 10분간 먹는다. 잠시 후 비행기는 중국대륙을 창문 밖으로 보여준다. 만주로 진입한 것인지 산동반도인지 모르나 일단 광활하다.(참고로 항로는 북한영공을 지날 수 없어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우회한다. 인천에서 연길로 직항로가 열리면 비행시간이 절반으로 줄여들 것 같다는 느낌이나 알 수 없다) 항공촬영한 영상을 보는 그대로이다. 한원규 변호사님은 비행기 아래 영상을 보면서 중국 산하의 모습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른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대도시와 도시가 밀집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농촌이 작게 보이는 것에 반하여 중국의 경우는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이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표현하신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중국의 경우 아직 농촌이 많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나중에 연변 변호사들의 설명을 들으니 중국 13억 인구 중 절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한다고 하여 억지로 끼워 맞춘다. 대륙을 약 40분 정도 비행하여 비행기는 고도를 맞추고 연길도착을 알리는 기내방송을 날린다. 인천공항과 굳이 비교하여 시골간이역 같은 연길공항에 도착한다.
4. 입국 수속 및 환영
연길공항에는 공항직원과 공안들이 상당히 까다롭게 입국심사를 한다. 1인당 3-4분 걸리는 수속절차로 한꺼번에 내린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가는데 약 30-40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단체비자라 한꺼번에 수속절차를 밟으라는 공항직원들의 말을 듣고 나뉜 줄을 바꿔 한줄로 서자 뒤에 있던 한국인 관광객이 “새치기”라며 큰소리로 항의하고 우리는 졸지에 오해받는 입장이 되었다. 성질도 급하시지. 수속을 마치고 공항광장으로 나오자 마중나온 연변 분들이 웃는 얼굴로 눈인사를 교환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너무 반갑게 맞아주어 우리들을 다소 흥분시킨다. 특히 나중에 일행이 묵은 호텔직원으로 알게 된 아릿다운 여자분이 꽃다발을 오영권 회장님에게 건네주는 것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기념촬영을 하는 행복했던 순간이다. 그 때 마중 나오신 분들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후술하는 여행기에서 가능하면 빠지지 않고 언급하고자 한다.
5. 공항에서 연길로, 다시 용정으로
연길공항은 연길 시내에 인접해 있었고 그들이 준비한 관용차량으로 연길 시내에 접어든다. 한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인다. 보이는 건물들, 지나가는 한족,조선족 사람들, 입간판들, 차량,삼륜차량들. 옆에 탄 그들 중 일행(문용길 율사)에게 물어본다. 그들에 대한 선입관을 배제하고 최대한 외교적인 어투로.(물론 같은 민족인지라 이러한 외교적 제스쳐는 조금 있다 다 버려도 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 이름이 뭡니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참 예쁘네요.(대전천과 유등천을 가로지르는 천편일률적인 콘크리트 다리들을 생각해 보라) 택시들이 참 아담하고 수가 많네요.(연변은 자가용가 적어 당연히 대중교통수단으로 티코 사이즈의 택시들이 압도적으로 거리를 메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택시운전 하면 돈벌이가 괜찮다고 한다) 연길 첫 인상을 독자들에게 전달도 해여 되니 어쩔 수 없이 소개한다면, 인구 2-30만 소도시로 중심가에는 고층빌딩이 있고 주위에는 다소 낡아 보이는 4-5층 건물들이 줄을 있고 신흥아파트 단지도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세련된 건물군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약간 시골스럽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는 간판들은 그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하고,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한국의 드라마에 나오는 셋트장을 거대하게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무척 재미 있다. 우리와 다른 환경,문화가 만들어 낸 작품을 한 눈에 감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당연히 건물 하나하나,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약 15분간의 이동 후 우리가 3박 4일 동안 묵을 중심가에 위치한 코스모 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그들이 알차게 준비한 여행코스를 소화하기 위하여 재빨리 여장을 풀고 승합버스에 오른다. 연길에서 가장 가까운 15분 거리의 용정(한반도 영토만한 중국 길림성-성도는 장춘으로 내륙에 있다-의 한 구역으로 북한 쪽 두만강 인접 방향으로 백두산을 끼고 있는 연변자치주. 주도 연길. 연변자치주는 인구 약 200만으로 주요도시로 연길과 용정,화룡,돈화,안도현,도문 등이 있다. 연변자치주 용정현의 현청소재지로 인구는 약 5만. 용정현에는 다시 백두산이 있고 하위행정단위인 백금향,삼합진 등이 있다)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연변농업대학이 있고 최근 연변대학 농업대학으로 합쳤다고 한다. 용정의 첫 방문지는 시인 윤동주가 나온 용정중학이다. 용정 한복판에 위치한 용정중학은 시골중학이나 윤동주를 배출하여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 자부심이 다분히 한국의 관광객을 의식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학교 입구에 위치한 옛 건물 그대로 2층 건물 전부를 용정중학이 배출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할애하고 안내원을 고정배치하여 역사를 설명한다. 윤동주를 위시하여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자부심 있게 소개한다. 오래된 사진들에서 새삼 역사를 생각한다. 인물들 소개의 말미에 최근 중국 개방 후 용정중학의 발전을 위하여 희사한 사람들의 대형사진들이 나왔다. 그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건물 정원에 위치한 윤동주 동상과 그의 서시비문을 보고 새삼 그의 요절나이가 지금 우리보다도 한참 어린 사실을 상기한다. 정교순 변호사님은 역사에서 대업을 성취한 사람들의 나이가 다 그렇다고 하신다. 알렉산더, 윤동주 등등. 주마간산하고 진짜 주마간산을 위하여 일행은 용정시가 한눈에 보이는 일송정으로 향한다. 약 10분 비포장 거리를 지나 해발 150m 정도의 일송정에는 상징적인 작은 소나무가 한그루가 있고, 선구자 노래비가 있고, 일송정 정자가 있다. 일송정에 올라 용정 시내를 위시한 사방을 전망한다. 용정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대전의 식장산이나 보문산에서 불 수 없는 시원한 눈맛에 가슴이 울린다. 그 옛날 한국의 시골도시. 주위가 전부 산과 들과 강으로 둘러싸이고 그 안에 보금자리처럼 민가가 들어찬 모습을 떠올린다. 왠지 추억과 향수에 휩싸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분이다. 특히 해란강이 용정을 빠져나와 사행을 하면서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전망은 한국과 다르다. 사방에 지평선이 보이는 벌판. 이 넓은 옥토를 본 그 옛날 조선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이 보았던 그 넉넉했을 벌판. 여기서 살자. 그렇게 산 세월이 어느듯 뭇해가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자손들과 우리 일행은 지금여기에 같이 서서 같은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여찌 감회가 없을소냐.
6. 용정 변두리 식당을 가서 저녁을 먹다.
일행은 일송정에서 내려와 용정 변두리에 위한 조그만 정원이 있고 원두막식 자리가 있고 기차가 옆으로 지나가고 코스모스가 울타리를 친 식당에 도착한다. 우리가 만난 지 약 3-4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그들의 속살을 보여준다. 두 테이블로 나뉜 좌석 위로 음식이 나온다. 그 음식들을 판소리로 풀어볼까. 그러고 싶지만 능력 밖이다. 푸짐하다. 중국이니까. 진시황도 부럽지 않다. 물론 과장이지만. 그러나 중국을 표현하려면 과장이 필요하다. 산해진미. 우선 양고기가 나가신다. 갓잡은 놈이란다. 꼬치다. 화덕 위에 굽고 냄새를 맡으며 한입을 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나중에 알았지만 이 양고기 맛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지상 최고의 맛에서 느끼해서 혼났다까지) 다음은 토닭이 나가신다. 토종닭이다. 물론 갓잡은 놈이다. 쫄깃하다. 어찌 술이 땡기지 않을소냐. 술. 이 말은 우리 여행의 큰 화두이다. 소줒잔 2배 크기의 잔에 옥수수술을 가득 붓고 굽치자(한국의 완샷)고 그들은 외친다. 그 옥수수술은 자연발효주로 도수 40도 가량이고 나중에 알았지만 놀랄만큼 숙취가 없다. 그들은 거의 육성으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목소리도 크다. 당연히 건배제의하는 폼도 난다. 우리들은 살짝 기죽는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냐. 같은 피를 나눈 친한 종족들로 한 반가움 한다는 사람들 아닌가. 오영권 회장님의 인사말과 일행 소개가 이어진다. 소개받은 일행들은 목소리는 좀 작지만 정말 반갑게 인사한다. 박광천 변호사님은 여기가 외국이 아닌 한국같다고 하신다. 일행 모두 반드시 한국에서 다시 보자고 빚을 갚겠다고 하신다. 진도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다. 연변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3시간 만에, 용정술 3-4잔의 잔돌이 만에 우리는 하나가 된다. 연변 사람들은 접대에 성공하고, 우리는 기분에 사로잡혀 막 취한다. 김형배 변호사님 한두잔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솔직한 자기표현이다. 그 다음은 기억이 가물해지고 정신을 차리니 호텔방이다. 시간은 새벽이다.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지 않다. 컨디션이 좋다. 연변체질인가. 옆에 뻗은 안병진 변호사를 깨워 간밤의 상황을 보고받는다. 호텔 인근 노래방에서 주로 한국노래에 맥주를 섞어 마셨단다. 연변 변호사들 목소리 좋고 한국노래 잘 한단다. 연변 여헹을 앞두고 1주일간 운기조식하셨던 정교순 변호사님 기염을 토하셨는지요. 그리고 계산도 그들이 했단다. 노래방이라 좀 쏘셨겠네. 오늘밤은 우리 차례야.
7. 다음날
다음날 5시에 백두산 출발이다. 어제 술도 있었는데 설마 그 시간에 다 모일라고. 왠 일이니. 5시 정각에 전원 호텔앞 집합이고. 더욱 놀라운 것은 연변 분들 일부는 연길에서 일부는 용정에서 오셨는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여 점검하고 계신다. 나는 용정 사법부 부국장에게 묻는다. 아니 몇시 일어나 용정에서 오셨어요. 그는 우리 연변에서는 보통 아침 4시면 일어난다.(중국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 늦다) 그는 아침에 조기축구하고 아침먹고 출근한단다. 당연히 5시에 여기 도착하는 것은 생활이라고. 아하 여기는 한국의 농촌처럼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구나. 백두산을 향해 호텔을 떠나 1시간 걸리는 석문진에서 노변의 중국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이게 왠일인가. 사발밥 1그릇에 왕대접 반찬 10여 가지가 나가신다. 강에서 건진 피래미 사촌들로 끓인 건더기 많은 국, 기름 많이 바른 각종 나물들.(신선한 야채가 좋다. 기름만 빼고) 다들 놀랍게도 6시 30분경에 모두 비우신다. 맛이 좋으니까. 장백산 담배를 건네받아 여유를 갖고 다시 백두산을 향해 떠난다. 차 안에서 우리 일행들은 다소 여독으로 졸린다. 해발 2,800m급의 백두산도 있으니 더 졸린다. 그런데 입담 좋은 최창림 변호사님, 권철 변호사님이 가만 두지 않는다. 버스 안에서 재미있는 얘기들로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백두산 4시간 여정에 생기를 부연한다. 솔직히 우리는 첫날 용정 어느 식당에서의 환대에 그들이 마음이 들었고, 이 차 안에서의 그들의 입담에 그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력도 좋지. 첫날 우리들을 위하여 돈화에서 3시간 거리를 달려왔다는 최변호사님은 간밤의 쾌락의 역습도 마다하시고 계속 떠드신다. 물론 귀가 솔깃해지는 연변의 풍경들, 농담들, 사람들, 기억이 좋지 않아 다 옮겨 적지 못하고 직접 만나 보시라. 연변에 가서 경치만 보고 연변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은 여행재미를 반감시킬 것 같다. 연변사람들, 최변호사님, 권철 변호사님 같은 분은 연변 경치 이상이다. 재미없지만 기억나는 것은 연변에서 남자는 용정남자, 여자는 안도현여자를 제일로 친단다. 아마 생활력에 근거한 판단인 듯하나, 나중에 코스모호텔 1층 식당을 운영하고 그날밤 음식을 준 여주인도 안도현 여자란다. 주위의 풍경은 우리나라 개발전의 시골모습 그대로라 한국의 연세 드신 분들 여기 오시면 회포가 풀리시겠다. 특히 지평선이 보이도록 낮은 언덕들 사이사이 옥수수밭,콩밭,양떼,소떼. 여기는 분명 만주벌판이다. 그러나 연변분들은 여기는 만주발판이 아니고 북서방면의 평원지대가 따로 있단다. 작은 것에서 받은 감동을 그들은 그렇게 되받는다. 즐겁다.
서서히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고 마지막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를 지나 백두산 입구에 선다. 멀리 장백폭포와 천지를 둘러싼 산세가 우리를 압도한다. 아 백두산인가. 얼마전 중국정부가 백두산을 중국내 4대 명산으로 지정하여 중국남방에서도 찾아온다는 백두산. 주위가 온통 중국의 가족단위들이다. 4륜구동을 갈아타고 천지를 출발하는데 기다리는 시간 30분. 4륜구동을 타고 사행길을 약 100회 정도 몸이 나뒹굴 정도의 속력으로 급히 타오르자 20분 정도 지나 천지 코앞에 도착한다. 간혹 낭뜨리지도 있고 평원도 있는 사행길의 회전을 엑셀을 밟은 채 달리는 롤로코스터를 체험하였다. 약간 어지럽다. 그들은 한번이라도 더 왕복해야 돈을 번다는 설명이니 참을 수 밖에. 정신없이 올라와 5분만 산행하여 얻은 천지. 쉽게 올라왔다고 감동을 주지 않지 않는 고마운 천지. 사진으로 보아와 익숙하지만 내 생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2000년에 올랐던 금강산보다 더한. 넋을 좀 잃고 싶어지는 천지. 한국의 어머니들이 악착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 보여주고 싶어하는 천지. 잘한 선택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흙먼지가 얼굴을 때린다. 구름이 태초의 모습처럼 쏜살같이 지나간다. 범상하다. 우리모두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아 맑은 모습을 보았다고. 전날 또는 다음날 천지를 오른 다른 사람들은 천지를 보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나는 연변 분들의 정성이 우리로 하여금 천지를 보게 했다고 아부하고 싶다. 다시 하산하여 장백폭포. 가기 전 그들이 정성껏 한끼는 야외식사를 하지고 준비한 도시락을 먹기 위하여 장백폭포가 내려오는 개천 주위에 자리를 깐다. 당연히 옥수수술이 나가신다. 그들은 식사 전 술부터 하고 밥 먹는다. 반주가 아니라 선주다. 천지를 보았으니 통크게 들이키잔다. 대작할 우리들이 소침해진다. 그 순간 터프가이 문성식 변호사님이 나가신다. 펫트물병을 반으로 잘라 만든 비상잔에 그 술을 가득 부어 굽을 치진다. 완샷. 박수. 그 이후 문성식 변호사님은 연길 환승길의 절반을 버스 제일 뒷자리를 일자로 점령하셨다. 다시 장백폭포. 천지물이 유일하게 빠지는 곳. 비가 와 수량 풍부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로 시원하게 해준다. 발을 담그면 너무 차 10초도 어렵다. 생물이 못산다는 냉수 천지물을 장백폭포에서 만져보고, 안병진 변호사는 생수병에 담가 한국에 가져갔다. 장백폭포에서 하산길에 한복을 대여받아 촬영하는 조선족 여인들을 보고 감상에 젖어본다. 다음에는 장백폭포에서 천지로 오르는 등산길 3시간을 타고 싶은 아쉬움을 달래고 백두산 저위지대에 위치한 지하삼림 지대로 들어간다. 호랑이 전설, 독립군 전설이 있을 법한 아름드리 전나무,소나무 삼림지대. 잘 만든 목재길을 따라 2킬로 가면 협곡과 원시삼림을 볼 수 있다. 장쾌하다. 급한 일정을 쫒아 다시 연길행 버스에 오른다. 다소 지루한 4시간 환여정이다. 연변 변호사님들 얘기 보따리 좀 푸시라요. 가사일에 적극적인 중국남자들, 순종적인 조선족 여자들. 이들이 아주 가끔 결혼하는 예가 있단다. 중국남자는 조선여자들 순종적이라든데, 당신은 왜 그래. 조선족 여자는 중국남자들 여자들한케 잘 하고 가사일 많이 도와준다는데, 당신은 왜 그래. 이런 조합도 있단다. 그리하여 밤 10시가 되어서야 연길호텔에 도착하여 밥을 먹는다. 다시 산해진미 플러스 옥수수술. 연변 사람들은 다시 술만 보고 사람들만 모여 분위기 만들어지면 방방 뜬다. 건배하자고. 수동적으로 10회 그 술을 먹고 마지막 나온 볶음밥을 거의 다 먹어 허리띠를 풀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무사히 하루가 저문다. 밤 12시. 모기도 무섭지 않는 그 술.
8. 3일째
다소 여유 있게 7시 정도 출발 예정으로 우리는 일어났다. 우리도 일찍 일어난다. 식전 어제 연길 시내를 가던 중 보아 두었던 호텔 근처 아침시장에 갔다. 아침 먹었습니까가 아직도 인사말이란다. 연변에서는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하루가 가능할 것 같다. 아침 노천시장 약 2-3000의 사람들이 장을 메우고 있다. 시장 초입이 개고기,돼지고기전이다. 아침 정말 푸짐하게 드시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국의 큼직한 시골장이 많지만 이른 아침시장은 연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들 비닐에 한뭉큼씩. 한족들은 주식인 빵과 만두 등을, 조선족들은 밥반찬거리들을 사 가겠지. 그 뿐이 아니다. 일행 중 한명은 구두 2켤레를 사셨단다. 없는 게 없다. 이른 시간에.
호텔식당에서 미음으로 아침을 먹고 일요일 아침 우리들을 위해 역시 일찍 와 기다리는 그들의 에스콧트를 받으며 두만강 일대로 코스를 잡는다. 용정을 거쳐 시골의 비포장길을 한참 들어가 처음 들른 곳, 백금향. 우리나라 리 정도의 규묘로 두만강을 마주보고 있는 곳. 우리가 내린 곳은 백금향 공안분소.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보았다. 북한군 국경초병들이 두만강을 건너 마을 조선족의 집에 들어가 식량을 빼았고 신고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살해한 사진들. 이 기행문에서 내가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별 생각없이 쓰고 말았다. 최근까지의 식량난을 생각하게 한다. 긴장과 회한. 많이 슬퍼진다. 이후의 두만강변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만강변을 따라 비포장으로 가는도중 북한 땅 유선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하차하여 본다. 전형적인 북한 농촌마을. 아 어쩌나 저기 두만강 건너편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북한 아이들이 옷을 모두 벗고 멱을 감는다. 그러나 아직은 갈 수 없는 땅. 유선마을 신작로엔 아낙들이 분주하다. 점심참을 준비하시나. 같이 음식을 나눌 수 없는 땅. 다시 길을 떠나 마지막 여정지 삼합진으로 간다. 누군가 두만강 푸른물에 노래를 하고 싶었겠지만 모두 참는다. 대신 왜 노래가사와 달리 두만강물이 우중충하냐고 묻는다. 김명종 용정시 사법국장은 동양 2위 철광산 무산에서 망가진 것이 아니겠냐고 한다. 그는 두만강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국장은 두만경 국경에서 군인시절을 보냈단다. 국경이란 이미지는 단절과 소통에의 갈구이다. 그들에게서도 같은 이미지가 교차된다. 어린 시절 북한 아이들과 겨울에 같이 놀았던 얘기, 초소에서 서로 말따먹기 했던 얘기들에서. 가는 도중 다시 내린 곳은 삼합진 산중턱. 북한땅 회령이 보이는 곳. 김일성과 관련이 있는 김정숙의 고향이란다. 강건너 해관(세관)이 보인다. 산중턱에서 합류한 삼합진 당서기와 진장은 삼합진과 회령의 합법적 개방무역 제의와 북한이 거절했던 얘기를 마지막으로 듣고 당 감찰부장인 여성의 가정집에서 가정식 점심상을 받는다. 보온을 위하여 가마솥이 방과 같이 있는 구조. 낯설다. 집에 딸린 위성안테나가 있어 한국테레비를 본다고 하고, 그날도 일요일이라 테레비에서는 송해가 등장한다. 중국 당국이 한국테레비를 단속한다는 말, 그 단속을 용케 피할 수 있도록 조선족 관민들이 모사를 꾸민다는 말. 그 말들이 우리가 연변 방문 중 유일하게 최근의 동북공정과 관련된 말이다.
삼합진 가정식 손님 초대상의 나오신다. 어쭈 희귀한 송이버섯이 몇다발로 나오신다.(삼합진 특산물이 송이버섯이다. 삼합진장 김상룡은 한국 양양의 송이버섯 축제에도 다녀 오셨단다.) 아 드디어 어제가 말복인데, 멍멍이가 당일 잡은 놈으로 나오신다. 돼지를 당일 잡았다고 하신다. 또 그 술이 나오신다. 직전에 우리는 두만강변 국경에서 차라기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멱 감는 아이들과 신작로의 저쪽의 여인들을 보았다. 갈 수 없는. 그런데 갈 수 있는 이쪽 삼합진에서 다시 그들과 너무도 닮은 수수한 농촌 당서기,진장,감찰부장,일하는 아주머니,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을 먹었다. 그 술을 국경과 함께 마신다. 다 털어놓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참았다. 정교순 변호사님은 감찰부장 집에 걸린 액자의 그 집 아들을 생각하며 정을 나누었다고 말씀하였다. 삼합진의 환대에 우리는 조그만 정성으로 인사를 마쳤다. 삼합진 그 집의 뒤를 흐르는 조그만 개울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가 눈에 선하다. 이번에는 필자가 버스의 한쪽을 일자로 점령했다고 한다. 연길 가는 도중 들렀다는 용정 주변 독립군 유적지, 윤동주 생가를 나는 귀국 후 사진으로 처음 보았다. 호텔에서 눈을 뜨니 주위가 소란하다. 방을 나와 일행을 찾으니 노래방으로 갔단다. 최후의 만찬. 연변의 그들은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 잘 마시고 잘 떠들고.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놀때는 죽이도록, 일할 때는 확실하게 대충 이런 식이다. 나중에 합류한 허철 율사가 나의 옷을 벗기면서 자시 것과 바꿔 입잔다. 내 땀에 절은 흰 면티와 자기의 잘 빨래된 고급티를 바꾸었다. 다음에 만날 때 그 옷을 입고 있잖다. 나도 좋다. 이 옷과 마늘 한 개가 내가 연변에 가서 가져온 유일한 것이다. 나는 연변에 무엇을 남겼나.
9. 마지막날
이별이다. 아침을 먹고 나니 그들이 차를 대기 중이다. 빈틈이 없다. 공항으로 간다. 말이 없다. 눈으로 말할 뿐.
10. 추신
연변의 율사들은 수입이 괜찮다. 보통 월급의 3-4배에서 20배까지. 형사변론을 싫어 한다. 범죄인을 왜 변호하느냐는 질책도 아직 있단다. 사법부 독립과 관련하여 우리와 다른 제도를 가지고 있고, 행정부 우위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은 대전지방변호사회와의 강한 교류를 원한다. 우리는 다르다. 일종의 교류문서인 양해각서를 강하게 원한다. 대처가 필요하다. 대전변호사님들에게 다음 기회를 권장합니다. 명을식 총무이사님이 주도면밀하게 다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이글을 연변의 그 분들에게 바칩니다.
2004. 8. 17. 대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