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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매화.
섬진강에는 은어가 올라오고 섬진강에는 재첩이 나고 섬진강에는 매화가 핀답니다. 500리 물길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며 화개장터에 전라도사람 경상도사람을 모읍니다. “안능 하신게라” ”진지 잡사심꺼“ 강가에는 그렇게 두 고을 사투리가 버성기지만 마음들은 매화향기만큼 그윽합니다. 또 섬진강 줄기는 강폭이 좁아서 아기자기하고 강심이 얕아서 무섭지가 않지요. 어쩌면 지리산의 순하고 넉넉한 자락이라서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강은 너무나 정겨운 두꺼비나루강(蟾津江)이 되었나 봅니다.
강은 모래톱에서 쉬어 가나 봅니다.
매화를 알기 전에는 봄이 아직 먼 줄 알았습니다. 매화를 알기 전에는 사월의 벚꽃이 으뜸인 줄 알았습니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 순간에 지는 그 일사불란함과 단호함에 온통 넋을 놓고는 했지요. 그런데 어쩌다 마주친 그대처럼 삼월의 매화를 만났습니다. 당장에 우린 봄의 연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화향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도 남습니다. 청매실의 과육이 어찌 그리 탐스럽고 그윽한 지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섬진강의 매화는 눈꽃송이 같고 여인의 자태 같아서 뭇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애태우게 합니다. 하나 둘 매화가 피더니 낙동강 너머 사람까지 끝내 알고 말았습니다.
낙동강을 건너서 하동장터를 지나고 섬진강 가를 따라서 쫓비산 들머리를 찾아갑니다. 빛나는 햇살 투명한 바람은 섬진강 맑은 물빛을 닮았습니다. 해운대백사장보다 더 하얀 섬진강의 모래톱은 이방인의 맘속에서 온갖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물새의 터, 꿈속 같은 은빛모래, 그 빛이 너무 고와서 까닭 없이 사무치지만 어이 못해 고독한 땅, 그래서 이곳의 강은 더욱 푸릅니다.
섬진강의 하늘색은 쪽빛바다 같습니다.
섬진강 철교 위를 기차가 지나갑니다. 하동에서 광양 쪽으로 가는 걸 보면 부산에서 광주까지 가는 게 아닐까 짐작 해 봅니다. 도화지에 풍경화를 그린다면 기차의 기적은 어떻게 그려야 할 지 궁금합니다. 찻길은 영문도 모른 채 막히고 차들을 길 위에서 서성이게 합니다. 약간의 기다림이 끝나고 붉게 칠해 진 아치다리를 건너서 들머리인 관동마을로 들어섭니다. 마을은 온통 매화나무 천지입니다. 길옆 양쪽으로 하얗게 핀 꽃들이 향기를 내 뿜습니다. 달콤한 향기에 취해 발걸음은 한껏 가볍습니다. 산등성이를 올라서면서 매화나무의 모습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높고 낮은 가지마다 꽃망울이 툭툭 터졌습니다. 여기까지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옵니다.
산으로 가는 길은 밤나무 숲으로 나 있습니다. 여기저기 밤송이 껍질이 보입니다. 알맹이 빠진 껍데기가 지난 가을의 풍성함을 짐작케 합니다. 오늘 이 산행도 실팍한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길은 흙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메말라있지만 정겹고 좋기만 합니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된 곳에서 햇살은 흑백의 무늬로 너울댑니다. 실타래 풀리듯 길은 하염없이 이어지고 숨이 곧 넘어가는 이 들은 하나같이 뱃살이 넘쳐납니다. 당장 대책이 있을 리 없으니 걸음도 천근만근입니다. 오호 여의봉님 여포창날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려.
산죽이 키를 넘고 비탈이 막아도 쫓비봉을 향한 걸음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길옆의 진달래는 가지 끝에 봉오리를 맺었습니다. 조금씩 풀어내는 연보라 꽃봉오리는 아직 수줍기만 합니다. 소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미끈한 물푸레나무도 진달래가 꽃잎을 열기만을 기다립니다. 이제 관목 사이로 매화와 섬진강이 모두 눈에 들어옵니다. 강은 겨울의 목마름으로 모래톱에 와서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강은 매화가 있어 더욱 아름답습니다.
산에는 어디고 할 것 없이 헬기장이 있어야 하나 봅니다. 그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넓고 평평한 터는 점심자리로는 안성맞춤입니다. 20여명의 산님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습니다. 김밥부터 찰밥까지 김치부터 더덕무침까지 또 막걸리부터 머루주까지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둘리님이 영지버섯 몇 개를 땄다고 자랑삼아 꺼내 놓습니다. 큰 것은 제법 손바닥 만 합니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꼬랑지에서 땅만 보고 따라 오더니 그 귀한 영지를 어떻게 봤는지 참 신기 할 뿐 입니다. 심봤다를 외치고도 남았을 그가 득의에 찬 표정으로 배낭 깊숙이 갈무리를 합니다. 눈길들이 아쉬움으로 바뀌지만 곧 술잔을 내밀어 권커니 잔커니, 흥은 춤사위처럼 들썩입니다. 그런데 갈바람님은 권하는 한잔 술에는 흥미가 없나봅니다. 혹시 권주가가 없어 그러시는가요. 그렇다면 이런 권주가는 어떠할지요.
매화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꽃잎으로 셈하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뒤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꽁꽁 졸라 메고 가거나,
곱게 꾸민 상여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거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은백양이 우거진 숲을 가기만 하면
누런 해, 밝은 달, 가랑비, 함박눈, 회오리바람이 불적에
누가 한 잔 먹자고 하리요?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며 뛰놀 적에는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송강의 장진주사>-
매화
하지만 권주가도 소용없다면 하릴없이 갈 길을 갈 수 밖에요. 이제 산길과 물길은 높고 낮은 곳에서 나란히 섰습니다. 아직까지 어렴풋하게나마 매화향이 골짝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오르내리는 길가의 나뭇가지에 부지런한 산님들이 달아 놓은 산행리본들이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옛날 동구 밖 서낭당 당산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오색 천조각을 닮았습니다. 소망과 안녕을 빌었을 서낭당의 그 바람들처럼 산님들은 산행리본을 보면서 무사산행을 기원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천황재, 배딩이재를 다 지나면서 산님 중의 몇몇은 심상치 않은 분위깁니다. 탄식하듯 내 뱉는 말을 들어보니 가벼운 꽃구경나들인 줄 알았는데 사람 잡겠답니다. 산행을 시작한지 겨우 두어 시간 밖에 안됐는데 참 엄살도 심하다 싶습니다. 그런데 차림새들이 조금 이상하기도 합니다. 배낭은 물론이고 마실 물도 없이 밋밋한 바닥의 운동화에 심지어 청바지도 보입니다. 아하 누군가의 꼬드김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산행차림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특히 청바지를 입고 따라나선 산님은 산행시작부터 심상찮더니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몽롱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위태위태하더니 마침내 갈미봉에서 터지고 맙니다.
갈미봉(519m)을 쫓비봉(536m)인 줄 알았다가 낙심천만한 산님들이 무더기로 생겨납니다. 비탄에 빠지고 정신은 정신없이 들락날락거리면서 거의 혼절 일보직전이니 이승인지 저승인지 분간도 안 되고 비몽사몽은 몽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보나마나 시껍은 겁도 아니었겠지요. 더욱이 이렇게 좋은 봄날 섬진강의 매화도 만발했는데 갈미봉인지 올미봉인지 하는데서 갈짓자 걸음을 놓다가 생떼 같은 목숨이 어찌 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겠습니까. “그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챙기면 사는 수가 있다는데..” 아마 야물딱진 이가 한 사람 있어 요런 맘을 묵었겠지요? 그래서 탈주극이 일어납니다. 갈미봉에서 능선의 실세중의 한 사람을 제꺽 엮어서 바람재를 타고 산을 내려 가 버린 겁니다. 이름하여 <갈미봉의 탈주>입니다. 이 이야기는 쫓비봉을 눈앞에 두고 후미를 챙기는 과정에서 날아 든 급보였습니다. 김밥 말다가 옆구리가 터진 것 같고 콜라 마시다가 콧구녕으로 쌍코피 난 격이었습니다. 주동자의 면면을 알 수는 없었지만 심증이 가는 이가 둘 있었습니다. 진상은 나중에 밝히기로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끌려 간 실세가 자꾸만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참 희한하네.
매화마을
쫓비봉에는 말뚝정도 크기의 돌막대가 꽂혀있고 나무등걸에는 펜으로 쫒비봉이라 적은 이름표가 뎅그러니 걸려있습니다. 전신사진을 찍으려면 봉우리에서 한 두 발 짝 내려서야 할 만큼 봉우리는 비좁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뾰족 하다는 느낌입니다. 경상도 말로는 쫏삣하다 하겠지요. 어쨌든 쫓비봉은 이름에 걸맞게 생겼습니다. 쫓비봉을 넘어서면서 길을 청매실마을로 방향을 잡습니다. 갈림길에서 비스듬히 왼쪽사면을 돌아 나갑니다. 고즈늑한 오솔길이 산 아래로 이어지면서 정취를 더 합니다. 그런데 낙엽은 죄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맨살을 드러낸 길바닥은 흙먼지가 풀썩입니다. 옷에도 신에도 흙먼지가 뽀얗게 앉았지만 발걸음은 신이 납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매실마을이 보일 것 같습니다.
매화 핀 초가에 길손이 들었습니다.
토담방, 흙마당 위에도 매화송이가 피었습니다.
봄날의 하루, 멀리 강가의 꽃을 찾아 왔더니 산에는 진달래요 골짝에는 매화라. 연분홍 진달래는 숲속에서 홀로 꽃망울을 풀어내는데 옷고름 입에 물고 배시시 웃음 띤 처녀아이 같더이다. 매화향은 농염한 여인의 체취를 닮았고 활짝 핀 하얀 꽃잎은 여인의 속살 같아서 오히려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디지털그림으로 남기려고 다가서 보면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산님들은 모두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도저히 인간세상 같지 않은 이 곳을 이리저리 넋을 놓고 둘러보는데 마음은 신선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연인과 친구와 가족들이 매화 속을 오순도순 거닐며 봄날의 하루를 즐깁니다. 산행의 마무리를 매화 가득한 곳에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나 봄날은 길지 않기에 이 날이 지나고 나면 먼 길을 서둘러 되와도 꽃은 떨어지고 없을지도 모릅니다.
삽짝마다 매화가 만발합니다.
새는 울고 꽃은 떨어지고 물은 흐르네.
지금 그대를 배웅하며 물가에 섰으니
뒷날 내 생각나거든 물가에 와보게.“
君去春山誰共遊 (군거춘산수공유)
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류)
如今送別臨淨水 (여금송별임정수)
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술 먹던 노인>-
헤어짐의 안타까움이 어찌 사람사이에만 있을까. 이별 뒤의 만남처럼 봄은 내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오고 또 이맘때면 매화가 지천으로 필 테니 가는 봄을 너무 아쉬워 말아야 하겠지요.
장독대에도 매화가 피었습니다.
마을 앞의 섬진강 둑 옆에서 장이 열렸습니다. 매화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작은 장터입니다. 각설이의 신명나는 노랫가락과 매실로 만든 온갖 먹거리들로 구경 나온 사람들을 끌어 모읍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저기 시멘트바닥에 막걸리 술판이 벌어졌네요. 부산의 생탁도 맛있지마는 여기 매실막걸리도 독특한 맛입니다. 제비님이 밤새워 준비 한 김치양념볶음과 모판 채로 싣고 온 두부가 어우러져, 묵다가 모조리 죽어도 모를 맛을 냅니다. 그 기가 막힌 맛은 갈미봉의 탈주도 다 잊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건 절대 못 잊을 걸요 <쫏삣한 쫒삐산> 그렇지 않은가요?
첫댓글 쥐김니다~~~ㅌㅌㅌㅌ
어디서 무엇하다 이제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공부할려,글쓸려 수고많이 했습니다, 잼있게 잘보고 사라집니다 ^*^
술 먹던 노인...은 아니래두 흥은 절로 나네요~~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하튼날에님의 산행기를 모아서 출판합시다..수입금으로 또 술사묵고~~흐흐흐
출판에 한 표
멋있고 재미나게 쓰려고 늦어진것 알것는디요, 하여튼 지각은 지각입니다요. 재미나게 잘보고 가는디 이왕이면 읽기 편하게해 주시면 금상첨화 아닌가 나 혼자만의 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