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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입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尼丘山)에 기도해서 공자를 얻었다고 해서 니구산의 구를 따서 이름을 구(丘)라고 했고, 둘째 아들을 뜻하는 중(仲)자와 니구산의 니(尼)를 따서 자(字)를 (仲尼)라고 했습니다. 공자(孔子)에서 자(子)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노자, 장자, 맹자, 손자, 순자등 다 노선생, 장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공자는 공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공자를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를 때는 공부자(孔夫子)라고 했습니다. 영어에서 공자를 컨퓨서스(Confucius)라고 하는데, 공부자에서 나온 말입니다.
내가 대학교 때인지 대학 졸업한 후인지 헷갈리는데, 대전 선화동에 있는 허름한 이층 건물에서 한문 원전 <맹자>를 무료로 강독한다고 해서 신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80년대 중반에 대전에서 누가 맹자에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신청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나 혼자서 맹자강독 선생님과 같이 일주일에 두번씩 맹자를 읽어나갔습니다.
그 때에 김용옥 교수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이라는 책과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을 때라 나도 두 책을 탐독해서 몆번씩 읽었을 때입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공자를 역사적인 인물로 객관적으로 자리매김 하려면 <공자>가 아닌 <공구>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할 때, 김구를 김구선생이라고 쓰면 안되는 것 처럼, 공자(공선생)가 아닌 이름인 공구를 써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장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맹자 강독 세번째인가 네번째 시간에 맹자강독 선생님에게 "고려대 김용옥 교수가 공자를 공구로 불러야 한다고 책에 썼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너무나 격렬하게 반응해서 내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불학무식한 놈이 성인의 함자를 함부로 불러도 된다고 하니 이런 망나니가 어디 있나?"라고 내가 얼굴을 못들 정도로 화를 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은 유학을 배운 사람의 의식이 우리와 많이 다른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 후로 맹자강독에 나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공자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일개 선비에 불과한 공자의 일대기를 제후들의 전기인 세가에 올렸습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춘추 전국시대의 제후에 견줄만큼 큰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고, 공자세가는 공자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입니다. 예수의 공관복음에 해당하는 것이 공자세가이고, 예수의 말씀만 기록한 도마복음에 해당하는 것이 <논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공자가 중국의 문화를 바꿨다고 생각했고, 공자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도 중국의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해서 사기열전 일곱번째에 중니제자열전을 저술했습니다.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 넘었다고 하고, 학문에 통달한 제자도 77명이라고합니다. 붓다의 10대제자나 예수의 12제자 처럼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불리는 10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습니다. <중니제자열전>에서는 77명의 제자를 소개하여, 그들의 성명과 자(字), 나이, 행동과 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 중에서도 자로, 안회, 자공은 공자와 함께 고난을 겪었고,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로 논어나 여러 책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사람들입니다.
자로는 공자보다 9살 연하로 제자들 중에 최고 연장자 그룹에 들어갑니다. 공자하고는 거의 친구처럼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로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거칠고 용맹해서 협객처럼 행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는 "내가 자로를 제자로 삼은 이후, 무례하게 비방하는 말이 내게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공자를 안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자로가 찾아가서 무력시위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거친 사람이 공자의 제자가 된 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정치와 군사에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자로는 이를 막으려다가 반란군에 의해 죽고맙니다. 반란군이 자로를 공격하여 관(冠)의 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끈을 다시 매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반란군이 자로의 시체로 젓갈을 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후로 공자는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공자의 말년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자로의 끔찍한 죽음에 충격받았는지 공자도 1년 후에 죽게 됩니다.
안회는 공자보다 30세 연하로 가장 뛰어난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지만 학문에 정진해서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면서 누추한 마을에 살면, 보통사람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할텐데 안회는 거기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구나. 참으로 안회는 어질구나!"라고 공자가 칭찬합니다.
안회와 관련한 말 중에 극기복례(克己復禮)와 문일지십(聞一知十)이 있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인(仁)에 관해 공자에게 질문했을 때, 제자들의 수준에 맟춰 대답을 해주는데, 안회의 질문에는 가장 심오한 대답을 해주는데 그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신을 이겨서 예로 돌아감)입니다. 또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안회를 비교하면 어떠냐?"라고 묻자 자공은 "제가 어떻게 안회하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이고(聞一知十),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聞一知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너무 가난해 자주 굶어서 그랬는지, 또는 몸을 혹사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해서인지 안회는 29살에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40대에 일찍 죽어 공자를 비탄에 빠지게 합니다. 안회가 죽자 공자는 크게 통곡합니다. 어떤 제자가 "선생님께서 지나치게 애통해 하십니다."라고 말하니 공자는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는냐?"고 말합니다. 안회가 죽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도 안회를 추억하면서 슬픔에 빠지는 공자의 모습이 논어에 많이 나옵니다.
자공은 공자보다 31세 연하로 말솜씨가 좋고, 돈버는 재주가 있어 부유했다고 합니다. 공자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제후국을 돌아다닐 때 자금을 댔고, 자신이 쌓은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공자를 각 제후국에 소개했다고 합니다. 비록 자신이 안회보다는 못하다고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출세했고 가장 부유했으며 자신만만해서 자기의 재능을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월쟁패에도 자공이 관여해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습니다. 제나라의 권력자인 전상이 노나라를 침공하려고 하자, 공자는 고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공을 각국에 보내 외교활동을 벌이게 합니다. 자공이 각 제후국을 방문해서 군주들을 설득하는 내용은 각국 군주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각국 군주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도 철저히 챙기는 외교책략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전상은 제나라 군주를 쫓아내고 대신 군주가 되려는 야욕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노나라를 침략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공은 전상이 제나라를 뒤엎을 야욕이 있음을 알고, 약소국인 노나라가 아닌 강대국인 오나라와 싸우라고 충고합니다. 제나라를 뒤엎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제나라의 전통귀족들인데, 이들을 동원해 노나라와 싸워 승리해도 전상의 명성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명성도 올라가서 전상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설파합니다. 강대국인 오나라와 전쟁하면 제나라의 전통귀족들이 몰살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당신의 야망을 성취하기가 쉬워진다고 설득합니다. 그러자 전상은 "이미 노나라를 쳐들어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오나라와 전쟁하겠다고 백성들을 어떻게 설득하냐"고 하니 자공은 "오나라 부차를 만나 제나라를 쳐들어 오게 설득하겠다"고 합니다.
제나라를 떠나 오나라에 가서 부차를 만난 자공은 "강국인 제나라가 아무 죄없는 약소국인 노나라를 침략하려고 하니,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물리치면 정의를 실천한 패자(覇者)의 명성을 얻을 것"이라고 부차의 허영심을 부채질합니다. 그러자 부차는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월나라를 먼저 친 다음에 제나라를 치도록 하겠소."라고 하니 자공은 "월나라 구천을 만나 군사를 동원하여 오나라를 따르도록 설득하겠다"고 합니다.
오나라를 떠나 월나라 구천을 만난 자공은 구천이 오나라에 복수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남에게 복수할 마음이 있는데 남이 그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은 위험한 짓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오나라에 귀중한 보물을 바치고 자신을 낮추고 오나라를 높여주면 오나라는 제나라와 전쟁할 것이고, 그 때 월나라에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천은 자공의 말대로 오왕 부차에게 보물을 바치고 직접 월나라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와 같이 제나라를 치러가겠다고 전합니다. 자공은 부차에게 보물은 받고 군사는 받아들이되 구천의 참전은 사양하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자공은 진(晉)나라에 가서 "오나라가 제나라와 전쟁을 해서 제나라가 이기면 상관이 없지만 오나라가 이기면 반드시 진나라를 칠 것이니 대비하십시요."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오나라는 제나라로 쳐들어가서 제나라와 싸워서 제나라를 이기지만, 이어 패권을 다투기 위해 진나라로 쳐들어가 진나라와 싸우지만 패하게 됩니다. 그틈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습격하여 오나라를 이기게 됩니다.
<자공이 한 번 길을 나서자 노나라는 보존되고. 제나라는 군주의 성씨가 바뀌게 되고, 오나라는 멸망당했고 진나라는 강성하게 되었고, 월나라는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공자는 자공의 활동으로 노나라가 전쟁을 피한 것은 만족했지만 강대국들이 큰 변화를 겪게 한 것은 조금 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공은 공자가 죽을 당시에 아마도 가장 나이 많은 제자였고, 다른 제자들도 자공의 지도력을 인정한 듯합니다. 자공의 주도하에 제자들은 공자의 삼년상을 치렀고, 삼년상을 마친 후에 자공은 3년을 더 상을 치러 6년상을 치렀다고 합니다.
자로, 자공, 안회가 나오는 일화 중에 제일 인상깊은 일화는 공자가 진채의 광야에서 고난을 당할 때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열국을 돌아다닐 때, 오나라와 한창 전쟁중인 초나라의 소왕이 성인이라고 소문이 난 공자를 만나고 싶어해서 공자를 초나라로 초빙합니다. 그 때 채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는 기뻐하며 초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진(陳)은 초의 동맹국이고 채나라는 오의 동맹국이었는데, 채나라에서는 공자가 초에 가면 채나라의 상황이 알려지게 될까봐,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에서 공자일행을 포위하게 됩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공자일행은 양식이 떨어지고 일부는 병이 드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어려움에 처하자, 자로와 자공까지 공자에게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냐?"면서 불만을 털어놓게 됩니다.
이때 공자는 자로를 불러 "시경에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광야를 헤매는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광야에서 곤경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물어봅니다. 이에 자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하고, 아직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꼭 다른 사람의 신임을 받는다면 백이와 숙제가 그 고난을 당하고 비간이 죽음을 당할리가 있겠는냐?"라고 대답하고 자로를 물러가게 합니다.
다음에 자공을 불러 똑같은 질문을 하자, 자공은 "선생님의 도는 위대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수준을 낮춰서 절충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공자는 "훌륭한 농부가 씨를 잘 뿌리지만 반드시 수확을 잘 거둔다는 보장이 없는 법이고, 또 훌륭한 공인은 물건을 잘 만들지만 물건이 반드시 사람들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군자는 그 도를 닦고 강령을 세우고 통제하고 정리할 수는 있어도 사람 모두에게 용납된다는 보장이 없는 법이다. 다른 사람에게 용납되기만을 바라면 도는 성취하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자공을 물러나게 합니다.
공자는 안회를 불러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안회가 "선생님의 도는 너무나 위대해서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 도를 계속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선생님의 도가 크게 닦였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선생님의 책임이 아니라 군주들의 치욕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선생님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야합니다."라고 대답하자 공자는 비로소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자의 성격과 개성이 잘 드러나고 왜 안회를 공자가 제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로는 성격이 단순하고 우직해서 스승에게도 말을 직설적으로 합니다. "선생님이 어질지 못하고 지혜롭지 않아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공자에게 대듭니다. 공자는 어이없어서 자로에게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자공은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이상은 좋은 것이지만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공자는 현실과 쉽게 타협하면 도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공의 생각이 원대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이상주의자였고, 안회도 공자못지 않은 엄격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상을 위해 분투하는 공자를 가장 이해하고 지지했던 사람은 안회였습니다.
자로, 자공, 안회는 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서로 간에 경쟁심도 있어서 약간 견제도 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공자가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들로 공자을 성인으로 존경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힘닿는데 까지 실천했던 제자들로 중국과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