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제강 약능승강
곽 흥 렬
장에 탈이 났다. 연신 싸고 토하고 싸고 토하느라 온밤 내 화장실을 들락거린 탓에 새날이 밝아왔을 때는 완전히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눈은 퀭해져 사흘간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걸린 것 같고 다리는 풀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린다. 머리가 빙빙 돌리면서 빠개질 듯이 아프다. 시쳇말로 영판 죽을 맛이란 말이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소리일 성싶다. 가만히 되짚어 보니, 아무래도 전날 저녁때 먹은 생선회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게 분명하다.
포항 사는 지인으로부터 택배 하나가 부쳐져 왔다. 칠 학년하고도 중반을 넘은 연치임에도 글쓰기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우는 애제자다. 한평생을 후세 교육에 바치고 물러난 뒤, 창작 공부로 후반전 인생을 값지게 가꾸어 갈 동력을 얻게 되어 무척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흘렸었다. 필시 그런 감사의 뜻을 담아서 보낸 선물상자였을 터이다.
내용물이 무얼까. 설레는 기분으로 겉포장을 뜯었다. 스티로폼 상자 안이 때깔 나게 손질된 회들로 하나 가득 채워졌다. 광어에다 도다리에다 방어며 돌돔이며 전복까지. 그날 저녁, 선물해 준 분의 성의를 고마워하며 아무런 의아심도 없이 아내와 둘이서 실컷 맛나게 나눠 먹었다.
입이 호사를 누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사달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 산책길에서 일어났다. 처음엔 아랫배가 무지근해지면서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쥐어짜듯 뒤틀려 왔다. 근근이 참고 참으며 집까지는 어찌어찌 무사히 다다랐지만,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에 앉기 무섭게 폭포수처럼 좌르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아무리 얼음을 듬뿍 채우고 포장을 단단히 하였다곤 해도 푹푹 찌는 한여름철임을 감안 못 한 것이 불찰이었다. 회라는 먹거리가 얼마나 변질이 일어나기 쉬운 날음식인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성싶어도 이미 박테리아에 의한 부패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임이 틀림없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인 내가 한낱 미생물에 지나지 않는 박테리아에게 꼼짝없이 먹힌 꼴이 되고 말았다. 강한 것이라고 해서 영원히 강할 수는 없고 약한 것이라고 해서 영원히 약하지도 않은 법, 강함이 약함이 되었다가 약함이 강함이 되었다가 하면서 간단없이 돌고 돌아가는 것이 대우주의 엄숙한 질서인 것을……. 항시 서로 맞물려서 유전流轉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모순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다 박물관 나들이를 가는 날이면 늘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 있다. 토기와 검劍의 보존 상태다. 흙으로 빚어진 토기는 수천 년 세월에도 마치 어제 것인 양 멀쩡하다. 그에 반해 쇠붙이로 만들어진 검은 하나같이 벌겋게 녹이 슬어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토기는 흙 특유의 부드러움 덕분에 기나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원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지만, 검은 쇠가 지닌 성정의 단단함으로 인해 오히려 본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게다.
칼이 처음 대장간에서 시퍼렇게 벼려졌을 때는 세상에 두려울 상대가 없는 무적의 권능을 뽐낸다. 그 앞에서는 대다수 형태 지닌 것들이 순식간에 꺾인다. 하지만 이 절대의 강자가 가장 부드러운 존재인 물을 만나면 꼼짝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래서 음양오행에서도 수극금水剋金의 법칙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보다. 이야말로 참으로 오묘한 대우주의 철리哲理가 아닌가.
태풍이 불어닥칠 때, 양버즘나무와 수양버들의 모양새를 눈여겨 살펴보라. 양버즘나무가 중동이 쉬 꺾여 버리는 데 반해 수양버들은 설사 휘어는 질지언정 웬만해서 부러지진 않는다. 수양버들의 유연함이 들어 버티어 내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인 게다. 물은 바위에 비하면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이지만, 수수만년 간단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다.
기원전 6세기경 도교를 창시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노자, 그런 대사상가에게 상종常樅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어느 날 노자는 스승의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다. 삶에의 마지막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묻는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노자가 대답한다.
“혀가 보입니다.”
스승의 즉문은 이어지고, 거기에 노자의 즉답이 잇따른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글쎄요. 이는 단단한 탓에 일찌감치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게 아닙니까?”
제자의 대답에 스승은 최후의 한마디를 다음과 같이 던진다.
“그렇지.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도덕경』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이다.
스승의 마지막 말이 토해지는 순간, 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어찔어찔해 왔다. 마치도 나를 향해서 내리치는 죽비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껏 얼마나 많은 세월을, 어쨌든지 남들보다 강해져야 한다고 안달 부리며 자신을 들볶았던가. 강한 것이 약한 것에게 꺾이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상종의 유훈을 곰곰이 헤아리고 있으려니 지난날의 기억 하나가 망막에 겹쳐진다.
마흔 해 가까이 전, 학교에 처음 몸담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담임을 맡았던 한 학생을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여인숙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 홀어머니 밑에서 벌망아지처럼 자란 아이였다. 아이는 노상 말썽을 피웠다. 학교를 밥 먹듯이 빼먹는 데다, 걸핏하면 급우들과 다툼을 벌여 반 분위기를 흐려 놓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의 젊은 혈기는 다짜고짜 매부터 찾았다. 딴에는 사랑의 매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그에 비례하여 매의 강도는 점점 세어졌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는 용수철처럼 더욱더 튀었고, 반발심만 높아져 갔다. 나는 그예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옆 반의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은 나의 경우와는 정반대였다. 그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매를 드는 법이 없었다. 대신 나긋나긋한 혀가 매였다. 자식을 타이르는 어진 부모처럼 조곤조곤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가 봄날의 산들바람 같았다. 그 선생님의 훈육 방식에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였을 것인가는 굳이 세세한 뒷이야기가 필요치 않으리라.
지금에 와서 가만히 잘잘못을 되짚어 보니, 그 아이를 한번 사람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만 너무 앞선 탓이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무작정 회초리를 드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고 분별없는 처신이었는지 하고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깊이깊이 깨달아진다. 버스 떠난 뒤에 손드는 격이니 어찌 회한이 남지 않으랴. 흉악무도한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케 만든 비법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라 당신의 넓디넓은 자비심이었던 것을…….
‘유능제강柔能制剛 약능승강弱能勝强’이라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비 날개보다 가벼운 눈송이에 장정 허벅지보다 굵은 소나무 가지들이 뚝뚝 부러지는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할까. 그 말의 의미가 오늘따라 더욱 진중하게 다가온다. 유능제강 약능승강의 묘리를 진즉에 깨닫고서 행동으로 옮겼더라면, 오늘 이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자책감으로 이처럼 가슴앓이를 하진 않아도 되리라.
요즈음 나는 이따금씩,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연습에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