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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 「수순분」
~~~이와 같이 수순을 배워올 때 어찌 이 세상에 불화하고 불목하고 대립할 중생이 있사오리까. 저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이 마땅히 거두시는 바며, 내가 마땅히 회복하여야 할 자기 생명의 내용입니다. 저들을 수순하고 받들어 섬김은 곧 참된 자기의 성장이며 원만성을 한층 성취하는 것이 되옵니다. ~~~
금주의 법어--일체를 평등하게 본다 (금강경 18분, 일체동관분)
금주의 법사--경원사 주지 효림스님
먼저 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건가? 이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점검해봅시다. 그런 뜻으로 한시를 오언시로 짧게 써왔습니다. 神也何處在신야하처재, 신은 어디에 있을까? 認心中有在인심중유재, 마음 가운데 있다고 인정하면 있는 것이고 心不認無在심불인무재, 마음에 인정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此心在有無차심재유무, 신이 있고 없음은 이 마음에 있다. 왜 제가 이 시를 말씀드리느냐 하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중동에서 다시 전쟁이 터졌습니다. 언론에서는 하마스라고 하는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집권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입니다.
두 나라에는 다른 점과 공통점이 있는데 두 나라는 종교 절대주의 국가여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는 나라이고 팔레스타인은 회교를 믿습니다. 유대인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데 나라가 없이 수천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전 세계에 다양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통 유대인은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외투를 입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회교를 믿습니다. 기독교에도 영국의 성공회 러시아의 정교처럼 종류가 많습니다. 원래 가톨릭은 기독교와 같은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구분하여 가톨릭은 구교, 기독교는 신교로 부릅니다. 이런 종교를 통틀어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 합니다. 종교를 믿는 민족도 아브라함 왕의 후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이슬람교의 원론주의자와 유대교의 원론주의자는 융합할 수 없는 절대적인 관점이 있어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스님들이 흔히 의식을 할 때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칩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이 가사가 일상복인데 우리는 가사를 입고 살 수 없는 기후조건과 문화라서 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의례복으로 입고 승복인 장삼은 따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는 공통점이 있어서 머리에 뭔가를 씁니다. 그것을 회교에서는 히잡이라 하여 축구경기를 하다가도 히잡이 벗어진 여자 축구선수가 있으면 경기를 중단하고 그 선수를 감쌀 정도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 히잡을 쓰는가 신부에게 물어봐도 모르던데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시는 거룩한 아버지께서 수많은 인간이 살고 있는 중에 누가 나를 믿는지 구분해서 쓰는 사람만 구제해주려고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가틀릭에서도 미사 볼 때 다 쓰고 신부들도 머리에 도토리 껍질같은 모자를 씁니다. 하나님이 그 높은 하늘에서 신부인 나를 구분하기 좋으라고 쓰고 다닙니다.
오래 전에 어떤 불자 한 분이 나한테 찾아와서 자기같은 사람이 수행하기 딱 좋은 수행 방법을 하나 가르쳐달라고 해서 한 달에 몇 번 화를 내는가 물어보니 사업도 하는 관계로 거의 하루에 한두 번 정도는 화를 낸다고 해서 오늘부터는 복잡한 수행할 생각하지 말고 한 달 동안만 어떠한 경우가 와도 화를 내지 말고 참아보고 나한테 와서 점검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서너 달 뒤에 찾아와서 화를 안 내는 수행이 좀 되었느냐 물어보니 처음에는 잘 안 되더니 세 번째 달에는 화를 안 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잘 되었으니 기왕 한 달 동안 화를 안 내었으니 이제는 일 년만 화를 내지 말아보라고 하니 일 년 동안 화를 안 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봅니다만 나이 80 되신 분이 그 후로는 화를 한 번도 안내게 됐다고 합니다. 당신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훌륭한 수행을 했습니다.
무아행은 다른 것이 없어요. 화만 내지 않아도 내가 이 수행을 하기로 결심한 후부터 죽을 때까지 화를 한 번도 안 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부처님입니다. 정말 그렇게 했다면 당신은 부처님 도를 깨닫고 안 깨닫고에 관계 없이 당신은 도인이라고 인가를 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싸우는 것도 분노가 차올라서 화를 내며 싸우고 국가와 국가도 마찬가지로 화를 참지 못해서 전쟁을 합니다. 전쟁이 한 번 일어나면 얼마나 참혹한지 완전하게 인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종교를 하면서 거룩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든지 가장 아름다운 종교인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 때문에 싸워서 자기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건 한참 잘못된 겁니다.
불교사를 통틀어서 가장 독특한 도인 한 분이 우리 민족에서 나왔는데 그 분이 원효스님입니다. 아리따운 요석공주와 결혼해서 설총이란 아들도 낳았는데 우리는 가장 훌륭한 성자로 받들고 있습니다. 스님이 출가해서 도를 닦는 목적은 결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탐욕을 끊자는 것이 출가의 목적입니다. 저는 스님들에게 수행하는데 제일 먼저 목적이 뭐냐고 하면서 탐욕을 부리지 말자고 합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으려면 스님 노릇하면서 삼보 정재를 제 주머니에 넣지 말자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수행하는데 한 번 명치 끝을 치고 올라오는 참기 어려운 분노가 있어서 시를 쓴 게 있는데 다음에 갖고 오겠습니다. 어느 스님이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을 하고 갖고 간 돈을 다 잃었어요. 수백 억 원에 자기가 주지로 살고 있는 사찰을 담보로 잡혀서 돈을 빌려서 또 도박으로 돈을 다 잃었다고 합니다. 이건 신문에 다 난 것이라 프라이버시에 관계된 것도 아니고 우리 불자들은 다 알아야 되는데 그 절이 표충사입니다. 그때 생각할 때 내가 사는 이 시대의 불교가 정말 이렇게까지 타락했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 땅에 불교가 일어난 이후 어떤 스님도 자기가 살고 있는 사찰을 담보 잡혀서 도박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도박이 그렇게 무섭다고 느꼈습니다.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권 가수노래~~
최근에 뉴스에서 보니까 노래 전문가들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국 최고의 가수 점수를 매겼는데 조용필이 최고였고 두 번째는 이미자이고 내가 주목하는 가수는 세 번째의 김광석입니다. 다른 유명한 가수가 많은데도 일찍 죽은 김광석 가수가 3위를 차지하였는데 우리 불교와 인연이 많습니다. 무명가수일 때 법정스님이 ‘맑고 향기롭게’ 활동 행사를 하면서 그 행사에 데리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러면서 불교방송에도 자주 등장하고 대중에게 알려지며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좋은 노래 곡과 가사를 많이 쓰고 불러서 죽은 뒤에도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라서 우리 두 가수도 불자가수로 그렇게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 나오는 『금강경』 18분, 「일체동관분」 이후는 원문이 짧은데 의미가 명확하고 좋아서 아주 맛깔스럽습니다. 금강경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일체동관분을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인식의 방향을 바로 잡으면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쉬운 곳입니다. 왜 어렵느냐 물어보면 사람들이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라는 이 구절이 어렵다고 합니다. 반야심경에도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모든 게 공하다고 해서 과거도 공하고 현재도 공하고 미래도 공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환이라면 과거의 삶도, 미래의 삶도 환이어서 이건 어려운 구절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겁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위대한 점을 알아야 하는데 오늘날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공간에 대한 개념과 시간에 대한 개념을 말하는데 쉬운 말로 하자면 공간과 시간은 같이 상대하는 겁니다. 같이 가서 공간이 환이면 시간도 환입니다. 환은 허깨비인데 그렇게 이해하면 어려움이 싹 해소됩니다.
일체동관분에서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저 국토 가운데 있는 바의 중생 약간의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如來悉知)입니다. 내가 돈을 집어 넣는다고 표도 안 나는데 누가 알겠나? 어릴 때 어머니가 음식을 감췄다가 아버지와 같이 먹자고 하는데 먹고 싶어서 하나 먹고 표가 안 나게 해두면 정말 표가 안 날까요? 어머니는 압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은 우리의 작은 허물까지도 능히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전지전능해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져서 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처럼 아는 게 아닙니다. 여기 경전 내용에 의하면. 어떻게 아는가? 경전에 감춰진 내용이 일체동관, 일체를 한 몸처럼. 같은 몸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지만 사람이라는 공통된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 관계 없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보면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로 볼 수 있고, 일체 생명이 있는 모든 중생의 마음은 마음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딱 하나로 보이는 겁니다. 그 원리를 법회보에도 썼는데 동관 同觀, 같이 본다는 말은 평등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내가 법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자유란 말은 반복해서 몇 번 나오는데 평등이란 말은 안 나옵니다. 우리가 자유를 말하지만, 자유가 자유다울 수 있으려면 평등해야 됩니다. 우리가 논리학자도 아니고 서구의 변증법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지만, 일반 상식으로 얘기할 때 평등이 전제되지 아니한 자유는 허구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종이 노예인데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면 종에게 양민으로 살라고 하면 계속 종으로 살겠다고 소송을 거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사람은 종으로 살면 최소한도 주인이 먹는 거, 입는 거는 보장해줍니다. 부잣집 종으로 살면 시골의 가난한 양민보다 더 고급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것은 아니지만 주인이 누리는 문화를 같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등이 보장되지 아니한 사회에서는 자유를 핍박 받더라도 자유를 버리고 살고 싶어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을 평등한 인간으로 안 보고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라 서로 죽여도 되는 사람으로 봅니다. 우리 불자들이 잘 아셔야 됩니다. 이 세계에서 종교 가운데는 물론이거니와 동서의 철학을 막론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밖에 없습니다. 옛날 유교에서는 벼슬 안 한 사람은 천편일률적으로 성도 이름도 없이 학생부군으로 위패를 씁니다. 남편이 높은 벼슬을 하면 임금이 부인에게 정경부인이라는 벼슬을 줍니다. 그런데 비문에 이름은 없고 성만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건명 곤명, 하늘과 땅이라고 위패에 이름을 평등하게 다 써줍니다. 이 지구상의 3000년 전 고대 사회에서 종교가 남녀를 평등하게 성직자를 둔 종교가 있습니까? 지금도 여자가 성직자되는 걸 반대합니다. 수녀를 성직자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수녀는 미사를 볼 수 없어서 성직자가 아닙니다. 수행만 하는 수사신부도 있는데 그 사람들도 미사를 볼 수 없습니다. 신부가 없어서 미사를 못 보면 하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으니 신부는 신도들에게 절대권력을 갖는 겁니다.
부처님 경전 어느 구절에도 사문, 스님이 신도보다 우월하다는 건 없습니다. 다만 사문이 신도들에게 존경받으려면 수행을 해서 존경받을 만한 자질과 인격을 갖춰야 되는 것이지 승복을 입었다고 무조건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건 기독교 쪽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스님만 법문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제일 좋아하는 경전이 『유마경』인데 당신은 스님이면서 자신의 롤모델은 유마거사입니다. 유마경을 보면 문수보살을 비롯한 대보살과 대아라한이 유마를 문병가는데 동등한 입장으로 유마거사를 대합니다. 저에게는 젊은 상좌가 많은데 아침마다 유마경을 한 철 내내 강의했더니 감동받아서 이렇게 좋은 경전인지 처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일체동관분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데 육안으로 봐도 평등하고 천안, 혜안, 법안, 불안으로 봐도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여시아문 노래)
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한시를 읽었는데 신을 믿는 종교는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의심을 할 줄 알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이 뭐일까요? 선종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혹은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할 때 끊임없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불교의 적적대의가 무엇입니까? 이 말은 불교의 핵심은 뭡니까? 수십 년, 도 닦았다는데 당신이 알고 있는 불교의 핵심 사상은 뭐냐고 들이대고 묻는 겁니다. 질문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질문할 때도 끊임없이 합니다. 나는 정말 불교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물으면 때로는 평등사상이 불교의 적적대의라고 말합니다. 너와 나를 일체동관, 한 몸으로 볼 수 있으면 그것이 불교의 사상이고 철학입니다. 쉽습니다. 질문할 줄 모르고 의심할 줄 모르는 철학가 또는 종교는 죽은 종교입니다. 한 마디로 나에게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일 수 있고, 가르쳐줄 수 있다면 너는 신을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렇지 못해서 너도 모르는 신을 나에게 믿으라 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가 신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물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신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중동문제만 아니라 참혹한 살인을 저지르고 인종 청소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신을 믿는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일체동관분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관세음보살 노래)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토를 성취하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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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자 덕자 큰스님의 한글 금강경에서 '일체동관분'을
"하나의 몸은 한가지로 봄"이라고 번역하셨는데 그 의미가 잘 와 닿지를 않았더랬습니다.
효림스님의 법문을 통해
여래께서는 일체를 한몸으로 보시기에 실지ㆍ실견 하신다는 걸 알게됩니다. 하여 일체중생이 평등함도 깨닫게 됩니다.
효림스님께서 펼치시는 금강경 설법에서 이번에도 큰 소득이 있었습니다.
매번 법회일지를 작성해주시는 바라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바라밀 님, 초하루라서 둘째 법문하시는 효림 스님 법문을 기록하시게 되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닦고 또 닦아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발원하며~
오늘도 '동체대비'를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