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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 曾祖 | 祖 | 父 |
지하 | 계우 | 윤적 | 만종 |
자(字) 문중(文中), 호(號) 양촌(楊村)
명종 1552년 생원(生員) 장원(壯元), 진사(進士) 3등
명종 1558년 명경(明經) 을과(乙科)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검상(檢詳) 한림(翰林) 호당(湖堂) 선정
전랑(銓郞), 삼사아장(三司亞張), 동부승지(同副承旨), 장령(掌令)
1570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유희춘(柳希春), 이이(李珥), 윤근수(尹根壽) 이해수(李海壽), 함께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신원(伸冤)하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정언각(鄭彦慤), 정순명(鄭順命), 임백령(林百齡)의 훈작(勳爵)을 삭탈(削奪)을 상소하다,
수찬(修撰)으로 승급하다.
1571년 여산군수(礪山郡守)로 나가다.
1573년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선정(善政)하였다. 통정(通政)으로 승급
1574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가다. 3읍(邑)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1611년 증(贈) 대사헌(大司憲), 양관(兩館) 제학(提學)
효성(孝誠)이 두터워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삼강록에 실려 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상소(上疏)로 효자(孝子) 정려(旌閭) 세움.
3 대 효열가문 - 정엄, 딸 기효맹 처, 손부 원주이씨
배(配) : 경주김씨(慶州金氏) 목사(牧使) 연(堧) 녀(女)
묘소(墓所) : 광주 동구 운림동 아버지 묘 아래 쌍조(雙兆)
묘갈(墓碣) :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갈문(碣文) 찬
묘표(墓表) :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음기(陰記) 찬
정려중수기(旌閭重修記) : 종후손(從後孫) 규종(圭綜) 찬
ㆍ子 대신(大伸) 소격서(昭格署) 참봉(叅奉) 배(配) 덕수이씨(德水李氏) 용(溶) 녀(女)
ㆍ女 박동언(朴東彦) 반남인(潘南人) 첨정(僉正) 증(贈) 참판(叅判)
부(父)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응순(應順)은 선조비(先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친부(親父)로 시호는 정의(靖懿)이다. 돈령부영사가 되어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다. 청렴결백하여 국구(國舅)인 줄 모를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ㆍ女 박선(朴瑄) 충주인(忠州人) 봉사(奉事)
증조(曾祖) 박상(朴祥)(1474~1530)은 호(號) 눌재(訥齋)로 연산군 7년(1501)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 때에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으나, 학행이 뛰어나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을 받았다. 저서에 ≪눌재집≫이 있다.
ㆍ女 기효맹(奇孝孟) 행주인(幸州人)
부(父) 기대승(奇大升)(1527~1572)은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ㆍ존재(存齋)로.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러, 혁신적인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저서에 ≪주자문록(朱子文錄)≫, ≪고봉집(高峯集)≫ 등이 있다.
[실록자료]
◈ 명종 7년 1552년 3월 8일
생원(生員) 정엄(鄭淹)과 진사(進士) 김우굉(金宇宏) 등 2백 인을 뽑았다.
◈ 명종 12년 1557년 7월 27일
대사간 민기가 유생들을 권선 징악하는 일을 아뢰다. 정엄(鄭淹)·유진(柳縝) 등이 지은 것이라 하나 ...
◈ 명종 17년 1562년 8월 6일
이중경·송찬·김백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엄(鄭淹)·안지(安祉)를 정언으로 삼았다.
◈ 명종 17년 1562년 9월 23일
정엄(鄭淹)·안지(安祉)가 아뢰기를, "구수담의 죄는 당초에 조정이 십분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니, 지금 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 일을 시비할 수 없습니다.
◈ 명종 18년 1563년 2월 14일
정엄(鄭淹)을 예조 좌랑으로, 권덕여(權德輿)와 심의겸(沈義謙)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 명종 18년 1563년 6월 24일
정엄(鄭淹)을 병조 좌랑으로, 이정빈(李廷賓) 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 명종 18년 1563년 8월 19일
정엄(鄭淹)·신응시(辛應時)를 사간원 정언으로 유영길(柳永吉) 을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 명종 19년 1564년 2월 17일
정엄(鄭淹) 과 한효우(韓孝友)를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 명종 19년 1564년 10월 18일
정엄(鄭淹)·이충작(李忠綽)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 명종 20년 1565년 5월 8일
정엄(鄭淹)을 지평으로, 권덕여(權德輿)를 헌납으로 삼았다.
◈ 명종 20년 1565년 6월 15일
정엄(鄭淹)을 사헌부 지평으로, 한효우(韓孝友)를 사간원 헌납으로 삼았다.
◈ 명종 20년 1565년 11월 18일
정엄(鄭淹)은 참판 정만종(鄭萬鍾)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성실하며 의논이 적실하고 말이 간명하고 온당했다.
◈ 명종 21년 1566년 1월 26일
대사헌 박계현, 집의 심의겸, 장령 안종도(安宗道), 지평 정엄(鄭淹)·최홍한(崔弘僴) 등이 아뢰다.
◈ 명종 21년 1566년 1월 28일
대사헌 박계현, 대사간 박응남, 집의 심의겸, 지평 정엄(鄭淹)·최홍한(崔弘僴), 정언 고경진(高景軫)·권극례(權克禮)가 아뢰다.
◈ 명종 21년 1566년 2월 12일
대사헌 박계현, 대사간 박응남, 집의 심의겸, 사간 김계휘, 장령 안종도, 헌납 이제민, 지평 정엄(鄭淹)·최홍한(崔弘僴)이 아뢰다.
◈ 명종 21년 1566년 7월 25일
정엄(鄭淹)의 소시 적에도 그의 아버지는 또한 보우에게 수학하도록 하였다.
◈ 명종 21년 1566년 9월 3일
정엄(鄭淹)을 병조 정랑으로, 권극례(權克禮)를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 명종 21년 1566년 9월 10일
정엄(鄭淹)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유사신(柳思新)을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성운(成運)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로 삼았다.
◈ 명종 21년 1566년 10월 3일
사간 민시중(閔時中), 헌납 정엄(鄭淹), 정언 이경명(李景明)·정언지(鄭彦智)가 아뢰다.
◈ 명종 21년 1566년 10월 21일
이제민(李齊閔)을 사헌부 지평으로, 정엄(鄭淹)을 사간원 헌납으로 삼았다.
◈ 명종 21년 1566년 윤10월 24일
정엄(鄭淹)을 병조 정랑으로, 정유일(鄭惟一)을 사간원 헌납으로 삼았다.
◈ 부록 / 편수관 명단
정엄(鄭淹) 기주관(記註官)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김규(金戣)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유도(柳濤) ....
◈ 선조 1년 1568년 2월 18일
홍문관이 대간의 직무 소홀을 이유로 장령 정엄(鄭淹)의 체차를 청하다.
◈ 선조 1년 1568년 7월 8일
정엄(鄭淹)을 장령으로 삼았다.
◈ 선조 3년 1570년 5월 13일
정엄(鄭淹)·김윤제(金允悌)·조구(趙逑)·이천수(李千壽)·곽월(郭越) 등을 서용하고....
◈ 선조 3년 1570년 7월 18일
최옹(崔顒)을 대사간으로, 정엄(鄭淹)을 수찬으로 삼았다.
◈ 선조 4년 1571년 6월 20일
군수(礪山郡守) 정엄(鄭淹), 익산 군수(益山郡守) 조완벽(趙完璧), 남평 현감(南平縣監) 이징(李徵),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위(金偉), 구례 현감(求禮縣監) 신승서(申承緖)이며,....
◈ 선조 4년 1571년 8월 24일
정엄(鄭淹)과 곽규(郭赳)를 장령에, 윤행(尹行)을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하였다.
◈ 선조 4년 1571년 10월 27일
성상(聖上)은 형옥(刑獄)을 밝게 분변하여 매번 사람을 죽인 범인에 대하여 그 사실을 통촉하였다. 유연(柳淵)이 형을 죽인 일에 있어서는 대관(臺官) 정엄(鄭淹)이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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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4년 1571년 12월 3일
주강이 있었다. 승지 이충작(李忠綽), 교리 정엄(鄭淹), 수찬 이우직(李友直), 특진관 박영준(朴永俊)·유희춘 등이 입시하였다.
◈ 선조 6년 1573년 8월 1일
남원 부사(府使) 정엄(鄭淹)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 선조 6년 1573년 8월 2일
정엄(鄭淹)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구봉령(具鳳齡)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 선조 7년 1574년 7월 21일
남원 부사(南原府使) 정엄(鄭淹)은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정엄(鄭淹)의 충견 이야기]
정엄(광주정씨) 선생은 이곳 양림동에서 태어나 1558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와 8도관찰사를 지냈다. 선생이 나주목사로 재임하고 있때, 어머님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직접 죽을 끓이고 약을 달이며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시묘살이를 하다 지쳐서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일 년 후인 1581년, 공의 나이 쉰두 살 이였다.
1611년 한양 조정은 양촌공의 효심을 본받아야 한다는 예조판서 이정구 선생의 상소를 받아들어 이곳 생가터 입구에 효자비를 세웠다.
그런데 효자비 앞에는 사자 형상을 하고 있는 개 석상(石像)이 있다. 정엄 선생이 기르던 개다. 이 개는 선생과 한양과 평양 등에서 감사를 지내던 아버지와의 서신을 연락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한양과 감영 지방 방백들과 문서수발 등 신속한 통신연락업무를 수행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구전에 의하면 개는 주인이 각종 문서나 연락사항을 보자기에 싸고, 오고 갈 노잣돈만큼의 엽전을 전대에 넣고 목에 걸어주면 스스로 목적지를 다녀왔단다. 또한 가는 도중에 지정된 주막에서 밥을 먹었고 주막 주인이 밥값만큼의 엽전을 빼가만 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가지 않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지금 같은 엄동한설(嚴冬寒雪). 양촌공은 새끼가 태어날지를 모르고 급한 일로 한양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돌아오던 길에 개는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양촌공이 살고 있는 집까지 한 마리씩 옮기다가 마지막 아홉 마리째에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자신의 실수로 개가 죽었다고 자신을 자책하며 슬퍼하던 양촌공은 개의 상을 조각하여 집 뜰에 세우고 추모했다. 죽어서도 주인을 지키고 있는 양림마을의 충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처럼 양림동은 역사문화와 예술을 소재로 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가 널려있는 보배로운 마을입니다. 바야흐로 문화와 관광을 접목한 콘텐츠 융합시대. 양림의 숨겨진 이야기꽃들이 활짝 필 날도 멀지 않았다. [양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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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촌공의 사위가 빠졌습니다.효자정려는 월사 이정구의 상소
누락된 곳 추가 삽입 함
손자 며느리 원주이씨까지 충효열이 나옴.딸은 (기효맹 부인) 임란때 순절
후손 3대 의병이 나옴 인태.두환 용대 (의병장.서대문형무소 순절)
자유로운 이야기방에 있는 鄭大休(殿郞公) 出戰時 遺書에 보면 德敍 上狀 從弟 參奉 大伸이라 한것을 보면 정엄공의 형님인 정함공의 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족보에도 정함공의 아들로 나옴)
3 대 효열 사항 추가
http://db.history.go.kr/id/im_109_00942
안락서원장을 지낸 정안국의 계보를 보면 정대휴공의 후손으로 되어 있습니다.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서 정안국 검색하면 나옵니다
후손이 제사를 모시면서 큰 아들로 되었네요.
종친회에서 세운 양촌공의 효자정려중수비에도 양촌공의 큰아들로 적혀 있습니다.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향토사학자인 김용휴 선생께서 조계공,양촌공.이장우가옥 광주정씨 9홍패터.충효열이 나온가문을 남구지에 실었습니다
이 내용을 복사해서 정기호 족보편찬위원장께 보여드렸는데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김용휴씨를 만났다는 겁니다
낭성팔현을 밝히신 충북대 임동철 교수를 말씀드렸더니 그분도 만나보셨답니다.나중에 충북대학교 총장을 지냈습니다
서울대 국문과 선후배랍니다.
1992년엔가 한국일보 석간 신문에 족보전문가가 제일 아끼는 족보로 광주정씨와 풍천임씨 족보를 얘기하는 기사를 말씀드렸는데 이분을 만났답니다.그 때에 보여주기만 하고 사진도 못찍게하고 필요하면 베껴가랍니다.지금도 간혹 이분을 보기는 하지만
이 분이 그당시에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족보박물관이 꿈이랍니다.몇년전에는 이분이 소장한 공신녹권이 경매에 나오기도 했습니다.무슨 연구소 소장으로 있어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금방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광주정씨족보는 병진초보.이분이 소장한 1700년대 족보,제가 소장하고 있는 1796년 족보.성균관대학교에 있는 1806년
그 다음이 1845년 을사보입니다
종인님 양촌공 계보에 정안국이란 인물이 없구요, 그리고 정대휴공은 무자로 순절하시고 계후도 없는 것으로 나오네요
양촌공파에 정원호(자 원표),정천호(자 천표.부산상고,서울대법대,사시수석,행시차석 동시에 합격,미 법학박사)의 조부일겁니다.20세 환자 돌림이고,자 안국(안락서원장)
조인스 인명사전 정원표,딸 정복주(이화여대교수,어윤대 고대총장부인) 본관이 광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원표씨 부고가 신문에 났을때 정영호씨가 전화로 광주라고 알려줬더니 경상도 사투리로 자기네는 광산이라고 하더랍니다
1977년 정사보에는 수단이 됐는데 2000년 신사보에는 수단이 안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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