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이글은 녹색평론 2007년 3-4월호에 실린 박승옥 님의 글입니다. 옮겨싣기를 허락해주신 박승옥님과 녹색평론에 감사드립니다. FTA와 기후온난화, 그리고 대안의 탐색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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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없다
민주화운동에서 사회전환운동으로
박승옥(시민발전 대표)
1. 지금부터 꼭 20년 전인 1987년 1월,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전국 방방골골에서 수백만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철벽과도 같았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시민혁명이라 할 수 있는 6월 항쟁의 폭발이었다.
박종철은 그 당시 왜 그런 수사기관에 영장도 없이 끌려가 지금의 대학생들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온갖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가. 왜 수많은 학생들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하면서까지 위장취업을 해 노동자가 되었던가. 왜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까지 가시밭길의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가. 도대체 20년 전 민주화운동은 우리사회를 어떤 사회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인가.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의 세월을 사람들은 ‘민주화 20년’이라 말한다. 그중에서도 1997년 IMF 직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인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기는 ‘민주정부 10년’이라 부른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변했는가. 2007년 2월, 서울 암사동에서 한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식의 대학 등록금 때문이었다. 광주의 한 아버지는 생활고를 비관해 분신자살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이렇게 살 길이 막혀 자살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먹고살 길이 없어, 병원비를 못내, 대학 등록금이 없어 이 땅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년소녀 가장이, 젊은이들이 약을 먹고 또는 목을 매달아 또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또는 분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제 이런 뉴스는 뉴스도 아닐 정도로 한국은 이미 자살공화국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박종철이나 빈곤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나 20년이라는 시간차만 다를 뿐 ‘사회적 고문’ 끝에 타살되었다는 점에서 억울한 죽음이기는 똑같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과연 이런 현실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감옥에 갇히면서 민주화운동을 했던가. 이제 명백히 한국은 두개의 한국으로 갈라져 있다. 민주화의 성공사례로 꼽히면서 세계 십몇위의 경제 선진국이라는 풍요와 발전을 구가하고 있는 한국은 민주화운동으로 먹고살 만해진 소수 정치인들과 재벌과 부유한 자들의 한국일 뿐이다. 100만에 이르는 단전단수 가구, 7가구 가운데 1가구의 가장이 직업이 없는 현실, 극도의 양극화와 불평등, 빈곤자살과 생계형 범죄의 급증, 부동산 광풍,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 등등 도저히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은 700만이 넘는 생계위협 빈곤층, 850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나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한국이다. 게다가 국토는 찢어진 걸레처럼 ‘균형있게’ 다 파헤쳐진데다가 온갖 맹독성 화학물질로 오염되어 가고 있고, 새만금 같은 자연이 준 보물은 개발의 광기와 탐욕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민주화 20년은 부익부 빈익빈을 더욱 심하게 벌려놓고 생태계는 파괴시킨 ‘실패의 20년’이었다. 민주정부 10년이 오히려 대중들 속에서 과거 박정희 독재에 대한 향수의 독버섯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도록 양극화의 영양분을 풍족하게 뿌려댄 현실은 이 무슨 참담한 역설인가. 참여정부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무조건의 단순 심리가 자유롭고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독재와 파시즘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등공신이 되어버리고 만 이 어이없는 전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2.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까지 끼어든 ‘진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거의 기정 사실처럼 굳어져가고 있는 한나라당 집권 가능성을 놓고, 그렇다면 과연 이른바 진보세력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보세력 안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 ‘진보 논쟁’이 의미있게 진행되려면 과연 오늘날 ‘진보’란 무엇이며 한국사회의 진정한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과감하고도 솔직한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연말의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민주대연합이든 진보대연합이든 어떻게 민주개혁세력을 확대 통합할 것인가 하는 정치공학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대선이 지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 불임의 포말논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런 ‘진보 논쟁’은 어쩌면 때를 맞추지 못한 뒤늦은 북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미 FTA를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불쑥 내밀 때, 아파트값이 일주일에 일억 이상이 오르던 때 이미 진즉에 깊은 고뇌와 함께 대안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 그 전에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급속도로 실천해나갈 때, 그 전에 문민정부 당시 ‘세계화 추진위’를 만들면서 개방정책을 밀어붙일 때 이미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활발한 현실주의의 논쟁이 있었더라면 지금의 논쟁이 훨씬 풍부해지고 그만큼 현실주의의 다양한 대안도 구체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연한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정부가 아니더라도 기준점을 어디다 세우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넓게 보아 진보세력으로 여긴다. 거기다 민주를 붙이건 개혁을 붙이건 그렇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을 표방하며 열린우리당을 보수정당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더라도 그것조차 진보개혁 세력 안에서의 분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민주와 진보는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이긴 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군사독재는 거부하는 일부의 자유주의 세력까지 최대연합으로 포괄하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저항과 투쟁의 정치에서는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성찰과 전환의 정치에서는 명백히 실패했다. 독재체제의 일부 유산을 청산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 기본제도, 선거민주주의 제도의 확립 등을 빼고는 어떠한 의미있는 사회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특히 과거 독재체제의 확고한 기반이었던 관료, 사법, 교육, 언론 등 이른바 전문가집단에 대해서는 과거청산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 결과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고 충분히 이용하고 있는 일부 수구세력에서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과잉’을 선동하고 있기도 한다. 여기에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부패 문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미숙과 정책역량 부재가 겹쳐 민주화운동 세력은 오히려 낡은 독재수구세력과 동일한 기득권 집단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하고 있다.
역대 민주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성장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것은 타협의 결과라기보다 달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정책과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일부의 지식인과 종교인, 재야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새로운 사회로서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지향점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려버리고 말았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수정판 대중경제론은 애당초 박현채의 1971년판 대중경제론과는 본질에서 전혀 다른 신자유주의의 정치선전용, 외피용 버전이었다. 1997년 IMF사태는 이른바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의 실패이자 보수의 실패였으며 새로운 민중경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그런 민중경제의 현실 구상이 아예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이전부터 지속되어 오던 친미 매판 경제관료들과 경제학자들의 신자유주의가 당당하게 밀고 들어왔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발전국가 모델이 폐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바로 사회주의 몰락 이후 실행 가능한 어떠한 대안의 경제 프로그램도 기획하지 못한 민주진보세력의 대안부재 현실을 반증한다. 노무현의 ‘좌파 신자유주의’란 용어는 그러므로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향점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진보진영의 주된 임무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며 진보진영은 있는 대안이라도 관철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있다. 때는 한여름임에도 여전히 두툼한 붉은색 겨울 파카를 입고 빙어낚시 하자는 한가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온 인민이 민주주의를 당연한 사계절 의복으로 입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민주화운동 세력은 늙고 낡은 과거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진보세력 또한 실패한 사회주의의 낡은 전축에서 나는 소리를 반복하는 과거의 수구집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민주노동당은 정파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북한 핵에 대해 비난성명조차 한번도 내지 못하는 친북의 낡은 퇴행집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난날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시대를 통찰하지 못하는 보수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진보가 보수가 되고 마는 어이없는 개념혼란과 가치전도는 비단 수구언론의 집요한 왜곡보도나 뉴라이트,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반동 세력의 비틀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수세력이 수구반동집단에서 선진진보(http://www.kfprogress.org, ‘선진화포럼’의 누리집 주소)로 자신을 명명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그들로 하여금 저항과 투쟁의 동원정치를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민주/반민주 구도를 보수/진보의 구도와 해묵은 반공주의 전선으로 결집시킨 으뜸의 공로는 민주진보 세력의 무능력에 있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3. 진보란 무엇인가. 한국의 진보세력은 한국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어 나가고자 했는가. 그리고 지금 진보세력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보이념이었는지 진보에 대해 진지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진보의 출생증명서는 진보라는 개념의 본적이 18세기 볼테르, 콩도르세 등 유럽 계몽주의, 즉 서양임을 분명히 적어놓고 있다. 낡은 봉건사회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인간 행위의 적극성과 역동성을 표현하는 상징으로서 이 진보라는 단어는 19세기 생물진화론과 결합해 드디어는 근대 유럽의 확고부동한 대표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정점에 맑스주의가 있었다. 진보는 처음부터 다윈의 진화론과 강하게 결합했다. 진보는 진화였고 진화는 진보였다. 당연히 유럽의 19세기는 산업혁명을 통한 유럽의 물질문명 발전과 자본주의 발전이 바로 진보이자 역사의 필연이라고 확신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바로 이같은 역사의 진보와 필연을 역사유물론이라는 법칙으로 제시하고 전세계를 유럽으로 바꾸어버리는, 자본주의를 뒤쫓아가 그 자리에 자본주의 말뚝 대신 사회주의 말뚝을 박고자 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인클로저(울타리치기) 운동이었다.
20세기 초 한국에서도 진화론과 함께 진보이론이 수입되었다. 주로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나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승만 같은 극소수의 미국 유학파 출신 극우파를 제외하고는 사회주의 경제의 장점을 받아들여 민족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상정하고 있었다. 1935년 재발족한 김구, 조소앙 등의 한독당 기본강령은 “계획경제를 확립하여 균등사회의 행복사회를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1941년에는 “토지와 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균등화할 것”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일부 극단의 반공지상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 강령과 대동소이한 한독당의 선언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1941년 임시정부가 모두 3장으로 자세히 발표한 ‘건국강령’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모든 생산수단과 기계도 국유화하며, 일체의 적산은 몰수하여 국가가 이를 빈공(貧工), 빈농과 무산자에 분배하거나 국영 또는 공영화하고, 토지의 상속·매매·저당 등을 일절 금지하며 고리대와 소작제를 금지하고,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을 조직·확대하여 농공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국제무역, 전기와 대규모 인쇄출판, 영화, 극장 등도 국영화하고, 부녀자와 노령자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며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 농민의 의료비를 면제하여 국민건강을 보장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 강령은 명백히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강령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남북분단이 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에서도 적어도 1980년대까지 사회주의는 진보이념이었다. 진보는 평등의 이념에 발전, 성장, 통일, 부국강병 등의 무지개를 덧붙여 ‘저항 민족주의’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당연한 로고였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상당수가 사회주의를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진보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오늘날 이제 진보는 환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역사는 일직선이건 나선형이건 어쨌든 퇴행과 정체와 도약을 거듭하면서 발전·진보한다는 이른바 발전사관, 진보사관은 진화론을 사회이론과 역사이론에 잘못 적용한 이론이다. 맑스가 말한 역사발전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에는 예정조화의 필연이란 없다. 역사에서 진보란 없으며 단지 사회는 ‘변화’할 뿐이다. 어떻게 변화될지는 거의 모두 사회 주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진보사관, 발전사관은 허망한 희망에 지나지 않으며 더더구나 보수는 더러운 욕망이거나 추악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가 진보/보수를 가려서 진행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진보/보수의 낡은 이분법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피해야 한다.
물론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평등과 착취의 근절, 사회정의의 이념까지 틀린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진보였던 사회주의가 다른 각도에서, 특히 생태적 전환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은 자본주의와 똑같은 수준의 낡은 자연착취 이념, 보수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아니 오히려 진보와 발전이란 당위이자 좋은 것이라는 신화 때문에 더 위험한 파괴의 이념일 수도 있다.
4. 한국에서 진보세력의 제도정치 참여는 1987년 이후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물론 한국전쟁이 끝나고 극도의 냉전 반공주의라는 광풍 아래 독재정권과 군사쿠데타로 점철된 한국정치 역사에서 진보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은 늘 봉쇄될 수밖에 없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 표(득표율 30%)를 얻었던 조봉암이 간첩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함으로써 진보당 자체가 사라진 사건이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주의의 도래와 함께 한때나마 잠깐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 다양한 진보정당들이 결성되었고 일부는 원내 진출까지 했으나 그마저 5·16쿠데타로 극심한 탄압 아래 소멸되고 말았다. 진보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은 제도정치권에서도 금기로 막았지만 진보세력 자체도 제도정치로의 진출을 먼 미래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대신에 보수 야당과의 사안별 반독재 연대전략이 주요하게 구사되었다. 그만큼 매카시즘의 피해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민주화운동 세력이 제도정치에 본격 진출하게 되는 것은 6월 항쟁 직후부터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구심체는 국민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였다. 국민운동본부는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에 대항하여 직선제 개헌을 매개로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세력과 종교세력, 김대중과 김영삼의 야당세력 등이 모인, 운동정치와 제도정치가 힘을 합친 한국전쟁 이후 가장 광범위한 연합체였다. 그런데 당시 6·29선언 직후 김대중, 김영삼 등 국민운동본부 안의 제도정치 세력이 발빠르게 직선제로의 헌법개정과 대통령 선거에 대응해 여당과 협상에 나선 반면, 민통련을 비롯한 운동정치 세력은 정치협상보다는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운동 확대발전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자연히 주요한 정치협상은 여야 정당으로 넘어가고, 이로써 이후 현실정치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제도정치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해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운동본부가 비판적 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등 세 갈래로 분열되고 결국에는 국본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국본은 자신의 영향력과 도덕성이 유명무실해진 그 후폭풍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두 김씨가 동원한 지역주의의 파괴력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1987년 9월 8~9일 김대중이 광주와 목포에서 50만명을 동원하자 김영삼은 10월 17일 부산에서 100만명이 모이는 집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민주화의 열기는 7, 8, 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다 곧바로 지역주의 광풍 속에 대통령선거로 급속 선회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진보세력의 독자후보로서 백기완이 대선에 출마했으나, 막판에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사퇴하기도 하였다.
대통령선거에 실패한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제도정치로 영입하는 데서도 경쟁을 벌였다. 1988년 2월 3일 총선을 앞두고 비판적 지지 입장이었던 문동환, 임채정, 이해찬 등 97명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결성하여 “평민당을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국민정당, 민주통일의 새시대를 개척해나갈 정책정당으로 개혁”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평민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김대중의 야권 분열과 대선 패배의 책임을 놓고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평민당은 재야인사 영입을 통해 당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토대로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될 수 있었다. 평민연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는 문동환, 이상수, 이해찬, 이철용, 양성우, 서경원, 박석무, 김영진, 정상용 등 15명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때의 제도권 정치진입이 민주화운동의 제도정치에 대한 의미있는 논쟁과 현실주의 접근의 전환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평민연처럼 기존의 제도야당에 입당하는 방식과 달리 독자정당 창당을 통한 민주화운동의 제도정치 진입 시도도 있었다. 1988년 3월 정태윤을 대표로 진보정당인 ‘민중의 당’이 만들어지고 4월에는 제정구, 예춘호 등의 ‘한겨레민주당’이 탄생했다. 1988년 총선에서 민중의 당은 16명, 한겨레민주당은 50여명의 후보를 냈으나, 원내진출의 꿈은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민운동본부가 유명무실해진 뒤 1989년 1월 민주화운동의 연합전선으로서 결성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안에서는 출범 직후부터 제도정치에 대한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미 전민련 내부에는 전민련 자체가 운동정치로부터 제도정치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이 한 흐름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제도정치로의 전환 주장은 크게 두가지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3김정치 청산과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며 기존 정당과 경쟁할 수 있는 중도개혁정당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다른 또하나의 주장은 계급 기반과 이념 지향이 뚜렷이 구분되는 민중 중심의 진보정당 창당론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민련 내부의 다수 의견은 민중운동의 강화와 통합야당과의 연대전략이었으며,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는 두 갈래 정당건설론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결국 이부영, 고영구, 제정구, 여익구, 이호웅, 유인태, 정성헌, 이강철, 원혜영, 박계동 등 중도개혁신당 추진 인사들은 1991년 1월 5일 통합개혁수권정당 결성을 위한 비상정치협상회의 개최, 평민당·민주당·민중당 등 야당의 해체를 포함한 기득권 포기와 반(反)민자당 연합대응을 촉구하면서 ‘새정치와 개혁을 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하고 말았다. 민주연합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 18명이 출마하여 이부영, 유인태, 제정구, 박계동, 원혜영 등 5명이 당선됨으로써 제도정치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전의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 세력을 포함하여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를 비롯한 진보정당 추진세력은 1990년 11월 3일 민중당을 창당하고 제도정치 진입을 모색했지만 14대 총선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계급정당의 시도는 그만큼 지난하다는 경험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만 것이다.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은 계속되었다. 1993년에는 김근태, 방용석, 김희선을 공동대표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고, 1995년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동대표를 비롯한 주요 간부 20여명이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들 가운데 김근태, 유선호, 김영환, 천정배, 방용석 등 5명이 1996년의 제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주당에서 분당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제도정치에 정착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은 이외에도 총선이나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때그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침체에 빠졌던 진보정당 운동은 1997년 대선에서는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의 지원 아래 ‘국민승리 21’이라는 이름으로 권영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면서 다시 소생하였다. 비록 득표율 1.2%, 30만 표에 그치는 결과를 얻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진보정당 운동은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2000년 창당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는 출마지역 평균 13.1%라는 득표율을 기록하였고 이어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는 218명이 출마해서 정당득표율 8.13%를 획득, 제3당으로 도약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권영길, 조승수, 강기갑,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현애자 등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8석, 정당득표율 13.1%로 원내 진입에 성공하였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제도정치 진입 정점은 1997년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2002년 노무현 정부의 출범이었다. 김대중은 이미 제도정치인이었지만 국민의 정부 들어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많은 재야인사들이 청와대와 행정부에 들어가 직접 정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아예 이른바 386정치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진보세력이 대거 청와대와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탄핵 직후인 2004년 총선에서는 민주진보세력이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열린우리당이 여당이자 원내 제1당이 되어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제도정치 진입은 이처럼 긴 역사에 걸쳐 다기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도정치에 대한 민주화운동 세력 전체의 합의된 전략과 행동통일이 부재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민주진보세력은 의미있는 정치력을 더 강하게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군사독재정권의 타도와 민주화의 진전 이외에 사회주의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구체화된 사회변화 전략이 없었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제도정치 진입은 집단을 이루어 정당에 들어가건 새로운 정당을 만들건 대선 후보의 선거조직에 들어가건, 대부분 결국은 개인 차원의 선택과 결단으로 귀결되고 만 측면이 다분하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골프장을 그렇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제도정치권에 들어가서는 골프를 치고, 심지어 골프장 짓는 일에 앞장서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일어난다. 원자력발전을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새만금 방조제를 그렇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정치 현실과 실용주의를 내걸면서 정반대의 정책을 집행하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민중경제와 평등, 경제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신자유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동조하게 되는가. 그 까닭을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의지와 탐욕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성장경제를 대신하는 사회주의 성장경제 이외의 대안, 그를 넘어서는 인식의 지평이 없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실패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은연중에 자본주의를 ‘넘을 수 없는 지평’으로 여기는 패배주의 경향을 뿌리깊게 내재화시켰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위의 용어가 거부감 없이 사용되고, 사회주의는 곰팡내 나는 골방에 처박혔다. 민중운동 세력은 짙은 체념의 그늘 아래 미래좌표를 잃고 종종 자신들의 투쟁을 단순한 목표에 가두기도 했다.
5. 단언컨대, 진보가 여전히 낡은 성장과 발전의 환상에 젖어있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 분명 19세기 이래 산업문명으로의 진보는, 그리고 석유문명으로의 진보는 재앙이었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그렇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진정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이제 민주화운동과 진보운동이 아니라 ‘사회전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의 전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경쟁의 사회가 아니라 우애와 협동의 사회, 극단의 양극화 사회가 아니라 평등한 사회,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안정된 사회, 화석연료와 원자력 에너지 의존으로 늘 전쟁 위험과 재앙 위험에 노출되는 사회가 아니라 재생가능 에너지로 평화롭게 자립하는 사회, 화학물질투성이의 오염된 공기와 먹거리 환경 속에서 아토피와 각종 환경병에 신음하는 사회가 아니라 맑은 공기와 안전한 먹거리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 등등,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만들어나갈 수 있는, 실현가능한 사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실현가능하다. 그런 사회로 전환하는 현실의 방책은 지각있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가 제도정치인이든 사회운동가이든 조금만 조사해보고 성찰해본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누가 대선 후보로 선출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누가 대선 후보인가도 중요하지만 조만간 대선 후보 하나하나가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구체화된 정책이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끊임없는 이미지 조작과 각종의 정치공학으로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도를 받고 있지만 그것이 지속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 논쟁’은 물론 의미가 있다. “이른바 진보세력은 과연 오늘날 한국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아주 구체화된 현실 프로그램이 있는가”,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운동정치 세력이나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등의 제도정치 세력은 그런 정책 대안이 있는가”를 집중 조사·분석하는 것은 대선을 사회변화의 주요한 계기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FTA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하는지, 북한에 대한 정책은 어떤 것인지, 빈사상태에 직면한 농업에 대해서는 어떤 회생 복안이 있는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새만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의 주제는 그 자체로 대중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대선 후보의 선택 폭을 크게 넓혀줄 수 있다. 그리고 몇번의 대선을 경험한 대중들의 학습효과에 이제 그런 우리사회 주요 의제에 대한 정책 검증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우리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약 민주진보세력 가운데 연말 대선에서 민중들이 염원하는 우리사회의 주요 의제, 생태적 전환의 단초나마 제시하고 이를 구체화시켜내는 대선 후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당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으로 뚜렷이 기록될 것이다. 지금껏 제도정치의 좁은 틀에 갇혀 이미지와 정치공학의 표계산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주문이리라.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집약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민주화운동의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근본의 의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건 상관없다. 아마도 그는 새로운 사회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선지자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와 식량위기에 직면해 있다. 석유는 고갈되고 있으며 다른 천연자원도 너무나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때문에 실제로 성장은 이제 조만간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상품생산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성장과 발전, 진보의 상징으로 우리들 삶을 지배하는 자동차 중심 체제는 이제 오히려 우리의 건강한 삶을 질곡에 가두는 심각한 지구의 암세포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미 기후변화는 임계점을 지나 예측 불가능한 재앙을 불러오리라는 불길한 징조들을 마구 토해내고 있다.
이런 ‘타이타닉 5분 전’의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는 운동은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전개해야만 한다. 제도정치와 대선,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전환운동으로의 전환과 관련해서 몇가지만 지적해보자.
무엇보다도 이제 한국사회는, 그리고 진보는 성장의 정치경제학은 불가능하다는 성장신화로부터의 탈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개혁세력이건 진보세력이건 시민사회운동 세력이건 풀뿌리 민주주의운동 세력이건, 성장을 말하는 순간 박정희 신화를 넘어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제는 몇 퍼센트 성장했다고 해서 결코 양극화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990년대 세계화를 부르짖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얼마나 고용이 늘어났고 얼마나 많은 이른바 좋은 일자리(decent job)가 창출되었는지 살펴보면 이것은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다.
둘째, 시장의 신화, 시장만능주의 신화에서 탈피해야 한다. 무슨 부적처럼 모든 것에 앞서 내세우는 ‘시장’이란 리바이어던에 이제는 재갈을 물리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은 만능이 아니다. 그리고 시장은 일정한 규제와 규율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 돕고 사는 사회라면, 우애와 협동의 공동체에서 시장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협력과 협동이다.
셋째, 전문가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관료들이나 이에 찬성하는 경제학자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자신의 주위에 있는 비정규직이나 극빈층에 대해 일말의 동정이나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미국식 매트릭스 경제학자 배양기에 갇힌 기계인간 모르모트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한국경제를 맡긴다는 것은, 여태까지 맡겨온 바의 결과인 극단의 양극화에서 알 수 있듯,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다.
넷째, 피크오일(Peak Oil, 석유정점)에 대비해야 한다. 오일피크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쓰나미이다. 석유정점 이후 한국경제에 몰아닥칠 쓰나미급 충격과 혼란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는 어떤 대안도 사실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모든 산업은 재편을 요구받을 것이다. 우선 당장 식량위기부터 대비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닥치게 될 석유문명의 종말에 대비해 어떤 사회와 문명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하는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다섯째,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전환의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세계화의 물결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화를, 그중에서도 자원착취 가속화의 나쁜 세계화를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언젠가 반드시 부닥치게 될 세계화의 추락을 준비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폐쇄경제와 생태적 소규모 공동체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당장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의 가동을 중지시키고 자동차도 폐차해버리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다만 다가오는 자원고갈에 대비하는 새로운 사회적 준비를, 미래로의 전환을 준비해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정부주의를 신념으로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현실의 국가와 사회의 전환 기획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전환과 농업의 전환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발상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가족농을 중심으로 한 생태농업은 식량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법일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의 핵심이다. 그리고 농업은 지금과 같은 도시의 수많은 불안정계급을 흡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간산업이기도 하다.
우리의 각성과 삶의 방식 전환은 밑에서부터 자율과 자치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생태적 전환과 각성은 저항의 민주주의와 참여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자립과 자치의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물론 풀뿌리 사회운동과 제도정치는 대체재가 아니라 상호보완재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이제 진보의 이름으로, 당위나 법칙으로 환원해오던 낡은 습관과 낡은 구호를 버릴 때가 왔다. 한국의 민주진보운동은 이제 새로운 자립과 자치의 사회전환운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지속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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