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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잠수함 원자로 설계한 김시환(金時煥) 박사
“원자력연구소는 이미 2004년 핵추진 잠수함용 원자로 기본설계를 마쳤습니다. 국가 지도자가 결심만 하면 2년 안에 원자로를 제작해 잠수함에 장착할 만반의 태세를 갖췄습니다.”
2017년 10월 6일 저녁 김시환(金時煥·70) 글로벌원자력전략연구소장은 한양대 공대 강의를 마치고 집이 있는 대전으로 가는 도중 기자와 만났다. 김 박사는 “기본설계를 마쳤다는 것은 추진기관의 자재를 발주해 원자로를 건설하기 직전 단계라고 보면 된다”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과거의 실패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국책사업으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김 박사는 1970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미국 렌셀러 폴리테크닉대학교(RPI)에서 원자력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미 밥콕앤윌콕스(B&W)에서 핵연료를 설계했고, 글로벌 원자로 제작업체인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웨스팅하우스에 합병)에서 원자로 설계 담당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84년 귀국 후 미·북 간 제네바합의에 따라 북한에 경수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7년간 경수로 핵연료설계 국산화사업 책임자로 사업을 성공시켰다. 김 박사는 1991년 원자력연구소 차세대원자로 개발 책임자로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상용과 잠수함용 추진기관 개발을 총괄 지휘했다.
원전 선진국들, 일체형 소형원자로 제작 열풍
김시환 박사는 “스마트(SMART) 원자로로 대표되는 우리의 소형·중형 일체형 원자로 개발사를 알아야 핵잠용 원자료 개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1991년 9월 한국원자력연구소 신형원자로·핵연료개발본부장으로 부임한 김 박사는 부임 직후 신형안전로개발부를 설립하고 신형안전로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 박사는 신형안전로 개발타당성 조사연구 사업을 과학기술부로부터 지원받아 1990년부터 스터디에 착수했다.
1991년 9월부터는 과학기술처로부터 한국형 신형안전로 개발과제를 수주 받아 미국 등 원자력 선진국들의 신형원자로 개발동향과 설계개념을 연구했다. 1992년 6월 정부는 차세대경수로 개발사업을 정부의 G7과제로 정하고, 차세대 대형원자로형으로 개량형 PWR(이후에 APR1400으로 명명)을 결정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한국형 표준원전에 대해 95% 이상 기술자립을 한 나라로 인정받게 됐다.
정부는 대형 상업용 원자로 설계 자립을 위해 대형원자로에만 예산을 투입했다. 그러나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은 문헌조사와 기술조사 등을 통해 중소형 경수로개발이 시대의 대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89년부터 중동, 북아프리카 등 물 부족 국가들의 요청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자력을 이용해 바닷물을 담수(淡水)로 만들려는 국제공동연구를 진행해 왔던 것이다.
김 박사는 1991년부터 IAEA의 원자력해수담수화 국제공동연구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물이 부족한 중동지역에 화력에너지를 이용한 세계 최대 용량의 해수담수플랜트를 수출해 운영 중이었다.
김 박사는 “1993년 두산중공업이 수출한 3개의 화력담수플랜트 사진과 해수담수화용 중소형 원자로 개발계획서를 들고 경제기획원 과학기술 예산담당 국장에게 해수담수화용 중소형 원자로 개발 필요성을 역설하고 예산을 달라고 했다”며 “신재인(申載仁) 원자력연구소장(현 한국핵융합가속기기술진흥협회장)도 경제기획원 복도에서 2시간 이상 기다려 담당 국장을 설득했다”고 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1993년 해수담수화용 일체형 소형원자로의 개념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IAEA는 산하 회원국들에게 소형원자로의 안전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고, 회원국들에게 일체형 원자로(300~600MW급)를 개발·건설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원자력연구소도 발빠르게 대응했다.
김 박사는 “이때만 해도 중소형 원자로 개발 목적을 군사용으로 특정한 것은 아니었다”며 “대형원자로가 ‘루프형’으로 안전성이 낮았고, ‘일체형’ 중소형 원자로가 안전성은 물론 해수담수화용 등 다목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정했을 뿐”이라고 했다. 김시환 박사는 중소형 원자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전문가 6명으로 ‘드림팀’을 구성했다. 중소형원자로개발팀은 1994년 8월에 일체형 원자로 개념을 해수담수화용 원자로형으로 결정했다.
보통 원자로는 핵연료를 넣는 압력용기와 증기발생기, 가압기 등이 분리돼 있는 데 비해 소형 가압경수로(Pressurized Water Reactor)인 일체형 원자로는 핵증기 공급계통, 즉 가압기·증기발생기·제어봉 구동장치·주냉각제 펌프 등 주기기가 노심과 동일한 압력용기에 설치되기 때문에 ‘일체형’이라 불린다. 일체형 원자로는 이런 설계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반 원자로에 비해 사고 가능성이 100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안전성과 경제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해수담수화용 원자로 개발 목적은 인구 10만인 도시에 전기와 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원자로의 열출력을 330MWt로 결정하고 열출력의 90%를 전기 생산에 사용해 전기 9만kWe를 생산하고 나머지 10%를 해수담수화에 활용해 하루 4만t의 담수를 생산할 수 있게 개발 목표를 설정했다.
원잠 210척을 건조한 러시아를 낙점
신재인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기자에게 “연구소장으로 부임하니 중소형 원자로 개발팀이 각국의 연구상황과 함께 중소형 원자로 협력 대상국에 대한 스터디를 하는 것을 보았다”며 “중소형 원자로는 담수용뿐만 아니라 결국 군사용으로 귀결되는 것이어서 잠수함용 원자로 개발도 콘셉트에 포함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IAEA 회원국들 사이에는 원자력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중소형 원자로를 개발하는 그룹이 형성돼 상호간 정보교환과 기술협력을 하고 있었다. 1988년 리비아의 가다피 원수가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팬암 여객기 폭발사건을 사주한 것으로 밝혀지자 IAEA는 중소형 원자로 그룹에서 리비아를 축출했고 한국이 이 틈을 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그 자리에 들어갔다.
신재인 박사는 “IAEA의 중소형 원자로 제작 회원국 그룹에 참여함으로써 원자로 제작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고, 군사적 목적으로 중소형 원자로를 제작한다는 의구심을 떨칠 명분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은 칭화대(淸華大)의 중소형 원자로 개발에 일찌감치 나섰으나 기술적 한계로 웨스팅하우스에 근무하는 중국계 미국인들을 불러들이는 등 기술적으로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일본은 1963년 원자력개발사업단을 설립해 소형원자로 개발에 나섰고 1995년 일본원자력연구소(JAERI)가 전기출력 100MWe인 MRX(Marine ReactorX)를 개발해 심해잠수정에 탑재하는 데 성공했다. 무쓰(陸奧) 상선에는 루프형 함정용 원자로를 개발・탑재해 우라늄 4.2kg으로 8만2000km를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김시환 박사는 “일본은 현재 심해 탐사 잠수정에 MRX를 탑재해 운용하고 있고 정치적 결단만 내리면 함정용 원자로는 항모(航母)로, 심해잠수정용 원자로는 핵잠수함용으로 1년 이내에 탑재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담으로 일본의 MRX 개발에 맞춰 JAERI 관계자를 불렀는데, 한국의 모 일간지가 ‘일본, 핵 잠수함 개발’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는 바람에 이후 일본과는 중소형 원자로 교류가 끊어졌다”고 했다.
원자력연구소 중소형원자로연구팀은 당시 미국보다 러시아를 선호했다. 미국은 중소형 원자로보다 대형 상업용 원전 제작에 한창이었고 러시아는 핵추진 잠수함을 201척이나 제작해 중소형 원자로 제작에 압도적으로 노하우가 많았다. 러시아에 소위 원자로의 ‘콘셉트’를 잡는 ‘개념설계’를 배우기로 했다.
원자력연구소 연구팀은 소련 붕괴 직후 1992년 1월 발족한 원자력부(MINATOM) 산하 기관인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Kurchatov Institute)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김시환 박사는 구소련 시절인 1991년 한국과 러시아와 핵연료기술 협력추진 대표단장으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을 인솔하고 소련의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등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는 1943년 군사목적으로 모스크바에 설립된 연구소로 핵분열로, 핵융합로, 핵물리, 수소에너지 등을 연구했다. 이곳에는 연구로(우라늄흑연로 F-1 등), 플라즈마실험장치(PR-6 등), 핵융합장치(토카막-7 등) 외에 원자력잠수함 동력시설이 있었다.
김 박사는 “당시 러시아는 체제변화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 한국과의 협력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며 “특히 여러 종류의 신형원자로를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혁신개념을 가지는 소형 일체형 원자로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고 회고했다.
김우중(金宇中) 회장, 200만 달러 쾌척
1990년대 초 러시아는 KLT-40, SBVR-100, VPBER600 등 중소형 원자로 개발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 있었다. 김시환 박사는 “구 소련과는 달리, 러시아는 서방세계에 원자로에 관한 상호 기술협력을 하려 했다”면서 “당시 우리는 러시아와 중형원자로 개발과 소형원자로 개발에 대한 개념연구를 공동으로 하기를 원했으나 돈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했다.
신재인 소장을 중심으로 한 원자력연구소 관계자들은 민간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러시와의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가예산으로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우그룹의 문을 두드렸다. 대우조선해양은 1987년 해군에서 209급 잠수함 1번 함인 ‘장보고함’을 최초로 수주한 이래, 현재까지 209급 9척과 214급 3척, 3000t급 신형 잠수함 2척을 건조하거나 건조 중인 회사다.
1995년 신재인 소장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동기인 강창순(姜昌淳) 서울대 교수(원자력안전위원장 역임)에게 부탁해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회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김우중 회장은 강창순 교수의 경기고 선배였다.
김시환 박사는 윤원석(尹元錫)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사장을 만나 일본의 MRX 팸플릿을 보여주며 “연간 5억원씩 3년간 15억원을 대주면, 일본이 해낸 것처럼 3년 안에 중소형 일체형 원자로를 개발하겠다”며 200만 달러(원달러 환율 700원)를 요청했다. 김우중 회장은 아무 조건 없이 윤원석 사장과 이봉희(李鳳熙) 대우중공업 특수사업담당 부사장에게 지원을 지시했다.
러시아 RDIPE와 협정 체결
1995년 무렵 RDIPE의 아다모프 소장과 중소형 일체형 원자로 공동연구 방안을 협의하는 원자로 계통 설계 전문가 이두정 박사. 아다모프 소장. 핵연료구조설계 전문가인 김종인 박사와 함께
일체형 원자로 개발을 위한 재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우그룹에서 받은 연구개발 자금은 중소형 원자로 개발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김시환 박사는 러시아와 중소형 원자로 개발 협력을 위해 문갑석(文甲碩) 박사, 이두정(李斗廷) 박사와 함께 모스크바로 날아가 에너지기술과학조사연구소(RDIPE) 소장인 예브게니 아다모프(Evgeny Adamov) 박사를 만났다.
1962년 모스크바 항공대를 졸업한 아다모프 박사는 쿠르차토프연구소 시절 1억℃의 플라즈마를 태우는 핵융합로인 토카막(Tokamak) 장치를 개발했고, 옐친 대통령 시절 원자력부 장관을 지낸 러시아 원자력계의 거물이었다.
김시환 박사는 “RDIPE와 용역비 문제, 지적소유권 문제 등으로 협상에서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다”며 “다행히 지상형과 해상형 등 2개의 노형(爐型)에 대한 개념연구를 하되, 우리의 요구조건(기술소유권 등)을 모두 협약서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김시환 박사에 따르면, 공동연구 협약서에는 기술전수는 아예 없었고 설계개념 연구의 결과물은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 소유로 명기했다.
1995년 9월 14일 신재인 소장이 모스크바 북동부의 RDIPE를 방문해 아다모프 소장과 공동개발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2년에 걸쳐 개념개발을 시작했다. 김 박사는 “우리가 일체형 원자로 개발과정에 경험이 없어 러시아와 2년에 걸쳐 개념개발을 공동으로 한 것”이라며 “그러나 러시아와 협정을 맺기 전 우리는 사전 스터디를 통해 일체형 원자로의 요소기술은 물론 우리식 안전기준까지 마련한 상태여서 기술도입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지상형과 해상형 두 트랙으로 연구
2007년 9월 14일 대전 국가 핵융합연구소에서 열린 차세대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 완공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신재인 국가핵융합연구소장(왼쪽)의 안내로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김시환 박사는 “모스크바 RDIPE에 ‘원자력연구소 설계사무소’를 설치, 1995년 12월 초대 소장으로 김긍구(金亘九) 박사(한국원자력연구원 SMART 개발사업단장)를 파견했다”면서 “용역비는 120만 달러로, 아마도 지금 러시아와 계약하려면 ‘공(0)’이 하나 더 붙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머지 80만 달러는 파견자들의 숙식비용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북동주에 있는 RDIPE는 1946년 12월 운전한 소련 최초의 연구로(우라늄흑연로 F1)와 플루토늄 생산로를 설계하는 등 원자로 설계의 중심기관이었다. 원자력연구소 연구팀은 모스크바의 치안불안과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러시아 연구진과 도면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2개의 일체형 원자로 즉, 중형원자로(지상형)와 소형원자로(해상형)에 대한 개념설정 연구를 했다.
김 박사는 “1994년 7월부터 1997년 7월까지 원자력연구소는 이미 설정된 일체형 원자로 설계개념(열출력 330MWt, 전기 9만kWe, 물생산 일산 4만t)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수담수화용 일체형 원자로에 대한 신형원자로 핵심기술 파악, 소형일체형 원자로 개념연구 등 기술개발을 수행했다”고 했다.
러시아와의 공동 개념연구를 바탕으로 원자력연구소는 1997년 7월부터 1999년 3월까지 열출력 330MWt급의 소형 가압경수형 원자로에 대한 개념설계를 완료하고, 2002년 3월에 기본설계를 완료했다.
이 기간 중에 지상형 신형원자로의 이름을 SMART(System-integrated Modular Advanced ReacTor)라고 명명했고, 해상용 원자로 연구는 2002년 중반부터 핵추진 잠수함용 원자로 개발로 시작해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김시환 박사는 “일부에서 스마트원자로를 소형화해서 진동시험, 충격시험을 거쳐 잠수함 추진기관으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난센스”라며 “러시아와 개념설계를 할 때 해상용 소형일체형 원자로는 선박이나 잠수함용으로 했다”며 “스마트원자로와는 개념설계부터 다르다”고 했다. RDIPE와 원자력연구소는 대우 재원으로 초대형 고속 컨테이너선에 활용할 수 있는 ‘고유안전로’ 개념설계를 하기도 했다. 고유안전로는 열출력 300MW급으로, 공학적 안전설비 없이 원자로를 안전운전하도록 고안한 원자로다.
2003년 5월 초 조영길(曺永吉) 국방부장관은 ‘자주국방 비전보고’ 석상에서 기존의 300t급 중잠수함 건조계획(SSU)을 핵추진 잠수함 건조사업(SSX)으로 변경해 조기에 획득하라고 지시했다. 2003년 6월 2일 조영길 장관 주관으로 열린 국방부 잠수함 실무 관계자 회의에서 핵잠수함에 대한 개념설계 허가가 떨어졌고, 핵추진장치 개발계획을 국방부 장관에게 별도 보고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이날을 기념해 핵추진 잠수함 건조사업을 ‘362사업’이라고 불렀다.
진해팀
해군은 2003년 6월 진해의 해군 조함단 내에 핵잠수함 전담부서인 362사업단을 만들고 단장에 209급 잠수함 도입을 담당했던 문근식(文根植) 대령을 임명했다. 사업단은 설계 및 건조, 무장과 관련된 각종 현안 검토, 작전요구성능(ROC) 수립 등을 담당했고, 국방과학연구소(ADD)에 박모 박사를 팀장으로 하는 잠수함 선체설계팀이 각각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산하에는 김시환 박사를 팀장으로 한 핵추진기관 연구팀(일명 진해팀)이 사업을 개시했다. 김 박사는 “원자력연구소는 해군 조함단 출범보다 이른 2002년 6월 경 ‘일체형원자로개발사업단’을 결성했다”며 “팀장 임명장까지 받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조영길 장관은 “해군 실무자들은 ADD 연구복을 입고 ADD 요원으로 위장해 사업을 추진하라”, “핵잠수함은 국가 생존 사업이니 사업 참여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며 독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4년 1월 26일 모 일간지가 ‘우리 군(軍)이 4000t급 핵추진 잠수함을 2007년부터 건조에 착수해, 2012년부터 2~3년 간격으로 ○○척을 실전배치한다’는 보도를 했다. 국방부와 해군은 2003년 5월부터 핵잠수함 독자 건조를 검토해 왔으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개념설계를 마친 후 2007년부터 건조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2004년 12월 말 362사업단은 갑작스레 해체됐다. 조영길 장관 후임으로 2004년 7월 윤광웅(尹光雄) 장관이 부임하자, 문정일(文證一) 해군참모총장 등 해군 지휘부는 핵추진 잠수함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영무(宋永武) 합참 전략기획본부장(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잠수함 전문가인 문근식 대령을 비롯한 10여 명이 스터디한 결과,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났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김시환 박사는 “2003년 9월 IAEA가 우리의 우라늄 농축을 사찰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듬해 1월 일간지가 원잠개발 사실을 보도하자 군 수뇌부가 패닉에 빠져 사업을 철회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해군의 의지 부족도 문제였지만, 당시 육군의 아파치롱보 공격헬기 도입사업(사업비 1조8000억 원)을 보내려는 육군들의 파워게임이 작용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김시환 박사는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 추진이 불가능한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협조 부재, 재정확보 문제, 핵잠수함 건조에 따른 국제조약 및 규약상의 문제, 잠수함 기술인력이나 인프라의 부재 등을 꼽았다”면서 “그러면서도 그들은 핵추진 잠수함 사업이 좌초한 책임을 원자력연구소의 ‘원자로 기술 미비’로 몰아 모두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며 “사업단 해체 회의 때도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불쾌해서 가지 않았다”고 했다.
국산화 설계를 한 까닭
대우조선해양이 건조에 착수한 3000t급 잠수함 ‘장보고-Ⅲ’. 장보고-III 잠수함은 2018년 진수돼 2020년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사진=대우조선해양
김시환 박사는 “군사용 원자로와 담수용 원자로인 스마트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며 “군사용은 해군의 ROC, 예컨대 열출력(LA급 핵잠수준 추정), 속도, 외부 충격, 전기요구량, 원자로 사이즈 등 엔드유저의 요구에 맞춰 새로이 설계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1954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도 원자로 개발에만 7년이 소요됐다”며 “우리의 원자로 설계 베테랑들의 실력으로 보면, 핵잠수함용 원자로 기본설계는 1.5~2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김시환 박사는 “진해팀은 2004년 핵추진 잠수함용 원자로의 기본설계를 마치고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중소형 원자로 표준설계인가를 앞두고 있었다”고 했다. 표준설계인가(SDA·Standard Design Approval)는 동일한 설계의 발전용 원자로를 반복적으로 건설할 경우, 인허가 기관이 원자로와 관련 시설의 표준설계에 대해 종합적인 안전성을 심사해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표준설계인가는 해당 원자로 기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건조회사와 계약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건설에 착수할 수 있는 상태다.
김시환 박사는 “원자로의 기본설계를 마쳤다는 의미는 부품을 조달해 건설하기 직전의 상태로, 사실상 원자로의 완성을 의미한다”며 “해군은 원자로 설계에 3년, 건설에 3년 등 총 6년을 잡아 2009년 진수하는 것으로 계획했던 것 같다”고 했다.
대전행 KTX를 타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던 김시환 박사가 기자에게 “12년 전 사업이 죽을 때 해군 지휘부가 핵잠 개발에 소극적이어서 실망스러웠다”면서 “오히려 군인이 아닌 원자력연구소 연구원들이 핵추진 잠수함에 들어갈 원자로를 만든다는 자부심 하나로 밤낮을 밝혀 가며 일했다”고 했다.
김 박사는 “지금도 우리에게 잠수함의 추진기관 공간만 내주면, 우리 후배들이 뚝딱 해치울 것”이라며 “우리가 원자로 설계를 하면서 나사 하나, 볼트 하나까지 왜 국산화를 했는지, 그 숨은 뜻을 깨닫기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