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여성미술학생들이 한꺼번에 해변으로 내달려 열심히 삽질을 해대는 장관이 벌어졌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성신여대 조소과 학생 1백수십명의 부지런한 손길은 조용한 해변 백사장의 봄날 오후를 뒤흔들어 놓았다. “저 뻘에 푸르른 삽질을 보라.” 두어시간 남짓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들의 삽질아트는 일순간 대지미술의 역동성을 연상시키며 ‘함께 만드는 낮은 조형’을 빚어냈다. 삽질과 미장질에다 모래와 뻘흙을 어루만지는 그들의 야무진 손길은 공동작업의 이점을 살린 데다 미리 준비한 에스키스와 작업도구들까지 동원돼 예상보다 훨씬 밀도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力_황정미·조현정·인주원·이주은·박은선·박재은·이지윤·이지운·신미선_2003
모래조형의 참맛은 무엇보다 새로운 바깥미술의 열린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 기록한 조각·일상에서 항상 접하는 조형물들은 거대하게 우뚝 솟은 덩어리이기 십상이다. 조형성을 웅변하며 상승하는 덩어리·광장을 지배하는 우뚝선 영웅·높다란 건축물 앞에서 옹색하게 키재기를 하는 미술장식품 등 대부분의 바깥미술 입체작업들이 ‘높이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물에 젖은 모래의 응집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고 넓게 만들 수밖에 없는 모래조형의 한계는 곧바로 나름의 특성으로 자리한다. ‘낮은 조형’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장점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남성적인 것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권위에서 탈권위로, 가득참에서 비움으로 나아가는 낮은 조형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래작업은 또한 시간성을 도입함으로써 현대미술의 탈물질성을 담보한다. 물기가 말라 무너지거나 시간이 지나 밀려드는 파도에 사라져버리는 모래조형작업은 그 자체로 물질성의 일탈, 시간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2회 성선여자대학교 모래조각 경연대회_2003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점은 건강한 노동으로서의 조소예술의 가치를 확인하고·여럿이 함께 하는 공동창작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래-갯벌이라는 재료와의 원시적인 만남이 압권이다. 서해 해변에서의 삽질은 곧 생태와의 역동적인 만남을 주선한다.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회색 뻘흙과 더불어 낙지와 갯지렁이, 조개류 등 갯벌생물들이 숨쉬고 있는 서해의 모래밭은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매력적인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의 모래조형작업은 가히 삽질아트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노동의 가치와 생태 체험, 나아가 예술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노동-생태-예술을 조화롭게 운용할 수 있는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작업실 실내공간에서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 대지에서 여럿이 함께 협업으로 공동창작을 해본다는 것은 여간 좋은 경험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삽으로 모래흙을 퍼내고 누군가는 물을 부어 다지고, 다듬고 깎아내는 과정에서 빠르게 큰 것을 만드는 일을 체험해본 것이다. 조소작업이란 건강하고 성실한 노동의 힘이 기본이 된다는 점·간단하지만 잊기 쉬운 미덕을 확인해볼 수 있다.
제2회 성선여자대학교 모래조각 경연대회_2003
뻘흙 속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을 묘사한 「美_송현주·이선희·이고은·이민정·이하나·이지숙·유지나·전아라·이윤주·최진아」, 별똥별이 떨어지면서 만들어내는 대지의 표면을 표현한 「Dream_윤혜미·정다이·이경진·홍지영·이주희·장수진·진민혜·장태화·최선화·홍근영」 등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흙선이 좋았다.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백사장의 실재의 기억을 담은 「여정_김지숙·김혜원·서은숙·박유진·김명숙·배수현·김지은·박효진·김민경」은 배가 지나가면서 남기는 파도를 묘사했다. 한손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손은 상대방의 손목을 서로 잡아 손무등을 만드는 모양을 만든 「합_권샘·이나영·정윤희·이수연·김윤희·최정윤」과 땅속에 박혀 엉덩이를 비롯한 신체 뒷면을 강조한 「Peace_이경진·전순정·안은미」, 그리고 넓은 개펄에 모성의 이미지를 심은「무제_마현미·오신명·한수옥·홍숙정·김선주·안상선·박유경·서지현」 등도 모래바닥의 지형을 살린 어법이었다. 대체로 형상성을 보인 이들 작업 이외에도 3단 단상 위에 발하나를 얹어 둔 「力_황정미·조현정·인주원·이주은·박은선·박재은·이지윤·이지운·신미선」이나, 고대 성곽의 이미지를 만든 「무제_배장은·권정윤·김희연·김보라·안숙」 등은 반추상과 형상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그가 있다_김민·금효민·구희재·김정연·김가영·송현경·박미선」는 빈 의자를 소도구로 써서 모래 위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만들고 의자 위에는 없는 인물을 만들어 넣음으로써, 실존과 허구에 대한 그 무엇을 담아두었다. 해골 등으로 전쟁의 위험성을 촛불로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형상화 한 「NO WAR_박재희·김선령·민소연·김지민·김송희·남지현·박영록·박은진·배기연·서공주」라는 작품과 무너져내리는 모래성 이미지에 조개껍질로 '반전'이라는 글씨 새겨넣은 「NO WAR_조민진·이슬기·이효주·임혜정·이은전·전소은」는 막바지로 치닫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반대입장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제2회 성선여자대학교 모래조각 경연대회_2003
추상적 표현에 초점을 둔 작품도 여럿 나왔다. 세 덩어리의 타원형 모래무덤과 주변의 띠무늬를 만든 「무제_이지용·이진아·정혜경·이루리·방자영·김지영·정은선·송다은·차지은·김미희」라는 작업은 넓게 펼쳐진 모래바닥을 십분 활용하면서 모래를 퍼낸 자리에 고이는 물을 조형요소로 끌어들였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큰 규모로 터를 잡아 악전고투 속에 작업을 마무리한 「미로_박선영·신은주·송민아·강경미·민정아·김수현·김정미·박성은·서민아·김도아」와 계단이미지의 「시간 오르기_홍주하·채희진·이수진·최환영·이은경」, 넘실대는 파도를 덩어리 9개로 잘라서 표현한 「무제_이지영·윤정민·정영주·우지희·조진·최고운·조민희」 또한 덩어리와 공간을 섞는 방식을 선택했다. 비스듬하게 대지로 꺼져 들어가는 원반을 표현한 「남과 여_백유진·박정미·박영주」는 타원형의 바닥 절반을 퍼올려 비스듬하게 쌓아올림으로써 음과 양, 오름과 내림, 가득참과 비움 등의 대비를 담아냈다. 이들 작품들은 삽질로 퍼낸 곳에 물이 고인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여 작업량 대비 효율을 높게 했다는 점에서 영특함이 돋보였을 뿐만 아니라, 낮은 조형의 가능성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무제_마현미·오신명·한수옥·홍숙정·김선주·안상선·박유경·서지현_2003
거북이들의 행보를 빗대어 반전을 이야기한 「ing..._오은아·김연주·고은비·권은경·김나래·김지혜·김민형·장서주」은 덩어리 중심의 조각 개념을 많이 벗어난 참신한 접근이 돋보였다. 미국거북이와 영국거북이, 그리고 이라크거북이와 반전거북이 마저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죽음의 소굴로 기어가고 있다. 바다를 향해 행진하는 거북이의 본능을 빌어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심난한 구도 속에 한 덩어리의 모래로 일침을 놓는 것이 있었으니, 한국 거북이의 행보이다. 한국거북이는 미국거북이의 꼬리에 연결된 빨간 노끈에 의해 목이 묶여 있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크게 선언하는 것보다 살짝 돌려 해학을 주는 거북이 이야기의 맛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가장 후한 점수를 주었다. 모래조형작업은 역시 덩어리로 웅변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훨씬 잘 맞는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합_권샘·이나영·정윤희·이수연·김윤희·최정윤_2003
낮은 조형의 가능성, 함께 하는 건강한 노동의 힘, 소소한 나레이션 방식의 주제해석 등 몇 가지 얘깃거리를 남긴 맑고 밝은 삽질아트,‘함께 만드는 낮은 조형’은 열린 공공미술의 한 축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과 중심의 미술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공공미술·대중참여미술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땀흘려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되 그것을 물건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 낮은 데로 임하는 모래조형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 김준기
첫댓글 원문그대로 퍼온거라~ 옮긴후 고쳐야지 하고 깜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