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동로마제국의 장군이었다. 부친이 일찍 죽어서 그의 어머니는 나이 20세에 과부가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 풍습대로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기독교 신자로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자녀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영향은 요한의 평생을 지배하였다. 그는 리비누스라는 당시 동방의 가장 뛰어난 문필가요 웅변가에게 사사받았다. 그의 스승은 불신자였는데, 은퇴할 즈음에 누가 후계자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스승은 슬프게 대답하였다: "요한 밖에 없는데 기독교인들이 그를 훔쳐갔다."
요한은 젊은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고 뛰어난 웅변술로 큰 명성을 얻었으나 370년 세례를 받으면서 세상적 성공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명예와 쾌락은 자신을 행복하게도 못하고 영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놀란 그의 모친은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그 어려운 삶을 살지 말도록 간청하였다.
요한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수도사로서 삶을 실천하였다. 모든 세상적으로 좋은 것을 허상처럼 여겨 좇지 않았다. 그래서 목숨만 부지될 정도로 음식을 먹고 맨바닥에서 잤으며 삶의 대부분을 명상과 기도로 보냈다. 374년 어머니 안투사가 죽자 요한은 안디옥 남쪽 지역의 산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금식하고 명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저술도 하였다.
380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은 그를 부제로 안수하였다. 성직에 들어선 요한은 그의 직책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하였다. 몇 년 뒤에 사제가 되자 드디어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설교자로 드러난다. 당시 안디옥 인구 20만 중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세운 가장 크고 아름다운 교회에서 그는 설교했는데, 14년간 하늘을 향한 삶-바른 삶을 살라고 호소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사람들의 심중을 찔렀으며, 그의 명성은 제국 전체에 퍼져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크리소스톰은 거의 납치되다시피 끌려가 총대주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콘스탄티노플의 타락과 부패를 지적하는 공격적인 설교였다. 이때 쾌락과 방탕의 삶을 살던 황후 유독시아(Eudoxia)는 그의 설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크리소스톰에 대한 음모를 꾸몄고, 크리소스톰의 인기 때문에 질투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데오필루스(Theophilus)도 함께 공모한다.
드디어 크리소스톰은 거짓 고소를 당해 유배되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크리소스톰의 귀환을 요구했고, 때마침 지진이 발생하여 유독시아의 침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황제는 두려워서 회개하고 다시 크리소스톰을 귀환시켰으나, 갈등은 계속되었다. 황후는 다시 어용 성직자들과 음모를 꾸며 유형을 보낸다. 그는 최후의 유배지로 가는 도중 모든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의 열망
크리소스톰은 언제나 "단순하게 입고, 단순하게 살라! 그리고 나누어 주라! 소유한 것이 적을 때 마음은 평안하고, 그 마음에서 사랑이 나온다"라고 외치며 청빈의 삶을 강조하였다. 크리소스톰의 절제에 대한 훈련은 갈수록 깊어졌다. 좋은 음식을 찾지 않았고, 화려한 옷을 원치 않았다. 그저 맨몸에 걸친 간단한 옷 한 벌뿐이었다. 세계의 중심이요 환락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그의 마음은 도시 밖에 있었다. 그의 몸은 야위어서 뼈만 남았지만, 온 도시는 그의 말에 떨었고 황제도 그를 두려워하였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그리스어: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년경 – 407년)
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초대 교회(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9월 13일과 11월 13일이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성공회 기도서》의 저녁기도(만도)에도 성 크리소스톰의 기도[1]가 포함되어 있다.
초기 생애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다.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도 함께 공부했으나 결국 그리스도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공부하였다.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한 탓에 건강이 나빠지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381년 멜레티우스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2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시민들은 테오도시우스와 그 가족의 석상을 부수고 공중목욕탕을 파괴하였다. 이 때의 납세거부 투쟁은 요한네스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었는데, 결국 안티오키아 당국의 과잉 진압으로 참혹한 학살극으로 끝나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398년 요한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크리스소토무스 대주교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햤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루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테오필루스는 오크 회의에서 요한네스와 설전을 벌였다. 회의에서 그는 여러가지 죄목으로 요한네스를 기소하였는데, 정작 요한네스가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유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네스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루스의 지지자들과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네스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요한네스 대주교는 다시 추방당했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크리스소토무스 대주교를 돕고자 하였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의 외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교회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약 31년 후인 438년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유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제4차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벌일 때 그의 유해는 십자군에 의해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이장되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