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굵은 빗줄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곰배령을 오르고 있는데 한 회원이 내게 말했다. “트레킹을 갈때마다 늘 화창해 우리끼리 회장님을 ‘날씨요정’이라고 했는데 착각이었네요” 이 나이에 깜찍한 요정과는 지구와 달의 거리만큼 매치가 안돼 웃음이 '빵' 터졌지만 마힐로 트레킹때마다 하늘이 보살펴준 것은 맞다. 최근 몇년간 비맞으며 길을 걸은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힐로가 탄생한지 벌써 11년째다. 날씨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겠는가. 그 사이에 벌어진 ‘비의 흑역사’는 오로지 나만 안다. 무척 드물기도 하지만 그 중엔 내 속이 시커먾게 타들어갈만큼 낭패도 겪었다.
목적지에 가는 도중 관광버스 안에서 빗줄기가 차창을 깰듯한 기세로 거칠게 쏟아져 “트레킹을 강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며 ‘햄릿’ 처럼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데 막상 도착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하늘이 ‘ 쨍’ 하고 해맑게 갠 경우도 여러번이다.
충남 금산 보곡산 산꽃순례길이 그 중 한곳이다. 4월을 무색케하는 폭우에 장난끼있는 몇몇 회원은 “금산인삼시장이나 구경하고 도리뱅뱅이에 막걸리 한잔 걸치고 어죽이나 한그릇하고 돌아가자”고 했지만 보곡산 주차장에 차를 대놓은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그날 폭죽처럼 보곡산에 펼쳐진 산벚꽃, 산딸나무, 병꽃나무가 비가 그친 뒤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지 지금도 그 때만 떠오르면 마음이 뒤숭숭해질만큼 설렌다. 그래서 4월이 오면 개인적으로 가끔 찾아간다.
반면 충남 태안 솔향기길 트레킹을 갈땐 내내 맑은 하늘이 버스에 내리자마자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폭우가 쏟아졌다. 그날 한적한 해변의 한 귀퉁이에 있던 주로 낚시꾼을 상대하는 구멍가게(편의점도, 슈퍼마켓도 아닌 라면도 끓여주는)는 재고로 쌓여있던 비옷을 10분만에 다팔아치우는 행운을 누렸다.
만추의 느낌이 강한 늦가을이었고 을시년스러운 바닷길이었지만 빗속의 정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비 때문에 “손님 다떨어질것이라는 예상”은 기우였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난 사소한 상황이라고 본다. 길을 걷다보면 계절에 따라 눈 길을 헤쳐나갈수도 있고(대체로 회원들이 즐거워한다), 바람을 맞을 수도 있으며 빗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세상에 완벽하게 세팅된 길은 상상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늘 날씨라는 돌발변수에 순응하며 걷다보면 때론 힘들지만 의외로 예상치못한 다양한 풍경을 접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다만 내가 가장 조심하는 것은 회원들의 안전이다. 여름철엔 계곡이 좋다고 장마가 예보된 길을 가지는 않는다. 풍랑주의보가 내릴수도 있는 기상악화엔 섬트레킹을 미룬다. 2년전 비진도 예약을 잡아놨다가 출발 하루전에 취소한 것도 이때문이다. 곰배령같은 국립공원을 갈때는 그쪽 직원들과 수시로 연락해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문의한다. 트레킹을 준비할 때 ‘앉으나 서나 안전생각’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예상치못한 변수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쫄깃해진다. 회원들의 안전하고는 관계가 먼일이다. 너무 황당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2018년 4월이니 벌써 6년전이다. 고산 윤선도의 원림으로 유명한 전남 완도 보길도 트레킹을 공지로 띄우자 회원들의 신청이 쇄도했다. 한 차만 갈까 하다가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90명의 회원들을 2대의 관광버스에 태우고 보길도행 여객선이 출발하는 해남 땅끝선착장으로 출발했다. 물론 회원명단을 보내고 여객선 티켓 예매도 출발 일주일전에 끝냈다.
대한민국 땅끝을 향해 새벽밥을 먹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여객선사에서 급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바다에 비가 세차게 내리고 풍랑주의보때문에 배가 못뜬다는 것이다. 벌써 광주를 넘어 해남으로 가는 도중에 들어온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박인수의 노래 ‘봄비’의 가사처럼 “나를 울려주는 봄비~~”였다.
머리의 회로가 잠시 엉켰지만 ‘리셋’을 한뒤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일단 해남 인근 대체 트레킹코스를 찾아내 여차하면 그쪽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하고 참가한 회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대체코스로 출발하기 직전 여객선사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풍랑주의보가 해제돼 여객선이 뜨는데 문제가 없으니 오라는 것이다. 아마도 90명의 단체고객이다보니 여객선사에서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다만 보길도에서 나올때 가급적 일찍 출항하려고 하니 시간만 지켜달라고 했다.
그때 함께 갔던 회원들은 보길도가 화제에 오르면 윤선도 원림의 아름다움을 피력하지만 난 ‘여객선 운항’때문에 겪었던 고생담이 떠오른다. 그때 보길도를 앞당겨 나오는 대신 시인 김영랑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가우도’를 다녀왔던 즐거운 추억도 있다. ‘해피앤딩’인 셈이다.
마힐로는 10년이상 운영하면서 기상예보를 체크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기상청 사이트를 가장 많이 방문하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면 난 수상후보 0순위쯤 되지않을까. 또 출발이후 기상악화가 우려될 수 있는 코스엔 대해선 늘 대체코스도 준비해둔다. (예를들어 곰배령 같은 경우 출발당일에도 기상특보가 발효되면 국립공원측은 바로 출입금지 통보를 한다. 이럴경우를 대비해 정선 하이원 하늘길을 대체코스로 정해 놓았었다)
트레킹을 소재로한 가장 유명한 영화는 ‘와일드’다. 실존인물인 세릴 스트레이드는 150일간 멕시코국경부터 캐나다국경까지 무려 4285km의 세계 최장코스인 퍼시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PCT)을 온갖 악천후를 겪으며 홀로 걸었다. (2015년 개봉된 영화는 당시 몇몇 마힐로 회원들과 단체 관람했다) '악마의 코스'라는 지옥처럼 험한 길을 걸으며 그는 인생이 바뀌었다.
세상에 지치고 상처투성이의 연약했던 여성은 때론 들짐승에 쫓기고, 험한 바위산을 타넘고, 급류를 건너고, 방향도 모른채 발이 푹푹 빠지는 눈속을 걸으며 마음에 근육이 생기고 삶에 당당해졌다.
마이힐링로드는 갈때마다 대략 9~12km를 걷는다. 국내외 숲 길, 호숫길, 바닷길, 강 길, 계곡길, 하늘길, 섬 길 등 두루 찾아다닌다. 안전만 문제없다면 그 길에서 비와 눈과 바람이 무슨 변수가 될까 싶다. 변화무쌍하고 굴곡진 길은 기나긴 인생의 여정과 닮아있다. 그래서 나는 길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즐거움을 체감한다.
첫댓글 올리버대장님, 멋진 한편의 수필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살아있는 miscellany 입니다.
10여년의 역사와 대장님의 트레킹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 맘 따뜻해 집니다.
그러시군요
가끔 카페에 들러 다녀온곳 보면 모두 부럽더라고요
언제쯤 합류하게될지~~
꿈만 꾸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