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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에게 병합을 당할 때, 일본은 차근차근 세계열강들의 국제법적인 묵인 내지는 인정을 받고서 조선을 병합했다. 먼저 일본은 1894년에 청·일전쟁을 일으켜서, 조선의 종주국(宗主國)으로 행세해오던 청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이듬해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고,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요동반도를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三國干涉)을 통해서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게 하였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섰는데, 그 중심에는 민 왕후(閔王后)가 있었다. 일본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후임으로 육군중장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조선공사로 파견했다. 작전명 '여우사냥'이 1895년10월8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직업이 일정하지 않은 일본 사무라이들과, 일본의 주도로 창설한 훈련대의 훈련대장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이 이끄는 훈련대원들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원들은 훈련대가 곧 해산될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민 황후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 끔찍한 일에 참여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啟薰)과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는 1개 중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침범을 제지하다 사망하였다. 사무라이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건청궁으로 들어가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칼로 민 왕후를 죽였고, 우범선이 민 왕후의 시신을 뒷산으로 옮겨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땅에 묻었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독살을 두려워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밤에는 가위눌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언더우드와 알렌은 고종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의 매일 대궐을 방문했고, 언더우드, 헐버트, 에비슨은 순번을 정해서 밤마다 교대로 왕의 침전(寢殿)에서 불침번을 섰다. 이윽고 1896년2월11일 고종과 왕세자는 일본군 몰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약1년만에야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1897년10월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민왕후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
한편 영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로 진출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막고자 1885년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더 이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1887년에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그 후 영국은 일본을 통해서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견제하는 전략을 세웠다. 1902년 제1차 영·일동맹이 맺어졌는데, 그 동맹은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체결한 조약이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친일정책을 폈다. 드디어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몰아냈다. 그 결과 1905년7월27일 미·일간에 가쓰라-태프트 합의각서가 작성되어,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서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서명된 문서나 조약의 형태가 아니라 합의를 기록한 각서였고, 루즈벨트의 사후인 1924년 그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1905년8월12일 제2차 영·일동맹이 맺어졌고, 영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였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주선한 포츠머스조약에서 약1개월간의 협상 끝에, 1905년9월5일 러·일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였다.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11월9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메이지(明治)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 친서의 내용은 이랬다.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 결국 11월17일,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자 유럽열강들은 조선에 있던 자국의 공사관을 철수하였다. 다만 미국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미국인들의 보호와 편의를 위해서 영사관을 운영했다. 을사조약에 따라서 조선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통감(統監)으로 서울에 부임하여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도 일본처럼 강국이 되어서, 삼국이 힘을 합쳐 서양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이 동양평화를 위하는 길이며, 자신은 그 목적을 위해서 조선에 왔다고 말하면서, 조선의 재건사업이 끝나면 자기는 청국으로 가겠다며 주변사람들을 속였다. 1909년6월 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으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제2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법권을 빼앗고, 9월부터 약2개월간 호남의 의병들을 샅샅이 토벌하였다. 그런데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唅爾濱)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총탄에 죽었다.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을 합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910년5월30일 천황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제3대 조선통감으로 내정하였으므로,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내각은 6월 각의에서 합병 후의 조선에 대한 통치방침을 결정하였다. 소네 아라스케가 일본으로 소환되고, 7월1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가 부통감으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일본제국을 움직인 실세는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군부였다. 내각은 군부가 저지른 침략행위를 대외적으로 뒷치닥거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역사는 이것을 일본군국주의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군부와 일본의 조선통치는 천황직속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일본군부에서 조선총독, 일본수상, 육·해군대신이 배출되었다.
1910년 7월 하순이 되자, 조선의 민간지도자들에 대한 일본헌병대의 검속이 시작되었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개성헌병대에, 이갑·이동휘·유동열 등은 용산헌병대에 연행되었다. 이동휘는 경무총감부 심문관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이렇게 호령하였다. "너희가 같은 동양인으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불법무도(不法無道)한 짓을 행한다면, 서양인들이 너희 일본인들의 잔등을 때리는 채찍자국에서 너희가 구더기를 파내는 것을 내 눈으로 볼 것이다."
데라우치 통감은 러·일전쟁 때 통역으로 종군했던 최석하(崔錫夏)를 통해서 조선의 민간지도자들에게 '안창호 내각'을 제안했다. 그러자 최석하는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는 민간지도자들을 먼저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즉시 허락을 받았다. 최석하는 원동(苑洞) 이갑(李甲)의 집에서 도산과 주요 인물들에게 데라우치의 제안을 말하였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그 제안에 대해서 토의하였다. 최석하·이갑 등 여러 사람들이 호기물실(好機勿失) 즉,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주장했지만 도산은 최종적으로 데라우치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저들은 우리 민족의 비난을 우리 민족지도자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오. 우리에게는 무력이 없는데 무엇으로 일본의 지시를 거부할수 있겠소? 우리가 일본에게서 정권을 받는 날에는 일본의 수족이 되는 길 밖에는 없소이다. 또한 우리가 정권을 잡는다 해도, 우리를 반대하는 세력이 일본에게 아부를 한다면, 우리도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에게 아부를 하게 되지 않겠소? 그러면 우리가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친일파와 뭐가 다르겠소? 우리 애국자들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가 있소. 분하지만 참으면서 우리들의 힘을 길러 장래를 준비하는 것이오. 국내에 남을 수 있는 동지들은 국내에서 수양, 단결, 교육, 산업으로 조선인의 힘을 배양하는 것이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고, 국내에 있을 수 없는 동지들은 해외로 나가서 조선인의 힘을 육성하는 것이 조국을 찾는 길이오."
그리하여 신민회(新民會) 요원들은 데라우치 통감에게는 며칠 동안 의논할 시간을 요청한 뒤에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시영, 유동열, 이동휘,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등이 해외로 망명할 준비를 하였다. 안창호와 이갑은 구미에서 동포를 지도하는 것과 대외교섭을 맡고, 이동녕은 러시아의 연해주, 이동휘는 북간도, 이시영과 최석하는 서간도, 조성환은 북경, 이런 식으로 각각 해외로 가서 활동할 구역을 분담하였다. 국내에 남아 있는 자들로서 진덕기는 서울, 안태국은 평양, 평안북도는 이승훈, 황해도는 김구가 맡기로 했다. 거부 이용익(李容翊)의 장손인 이종호(李鍾浩)는 신민회가 해외로 나가서 하는 모든 사업의 자금을 대기로 하였다. 도산은 서울 마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황해도 장연(長淵)에 도착한 후, 거기서 청나라상인이 운항하는 소금을 실은 배를 타고 중국 칭다오(靑島)로 향했다. 다른 동지들도 재주껏 국경을 넘어 칭다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청도(靑島)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금문제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망스럽게 끝났다.
얼마 후 데라우치 통감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합병의 절차를 밟아서 8월22일 합병을 완료하고, 8월29일 합병사실을 한반도전역에 공포하였다. 그래서 1910년8월29일은 우리에게 경술국치일이 되고, 일제는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이라 불렀다. 12월에 안명근(安明根)이 만주에 무관학교설립을 위한 자금을 국내에서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제1대 조선 총독(總督) 데라우치는 이를 계기로 조선 내 민족지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죄목으로 '총독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한 후, 피의자를 고문하여 자백을 통해서 또 다른 피의자를 체포하는 식으로 전국에서 600여명을 검거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중에 105명을 기소했는데, 이를 '105인사건' 또는 '신민회사건'이라고 한다. 신민회는 민중을 계몽하고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1907년9월에 도산이 만든 비밀애국단체였다. 총독은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된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한 후, 모진 고문을 하고 투옥시켜, 다시는 일본의 통치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큰 상처를 주었다. 이때 이른바 '신민회사건'으로 투옥된 인사들 중에 윤치호와 김구가 있었다. 둘 다 3~4년 정도 감옥에서 고생했지만, 출옥한 후 윤치호는 다시는 일본에게 저항하지 못했고, 김구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14년7월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동맹국인 일본의 참전을 요구했고, 그러자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인 중국 칭다오와 태평양에 있는 독일령 섬들을 점령하였다. 1917년3월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여기에 군대가 가담하여 소비에트(Soviet) 즉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황제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3월 혁명이다. 레닌은 임시정부가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비판하며, 소비에트정권의 수립을 주장하여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1월에는 레닌의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의 11월 혁명이다. 그 후 독일의 막스 호프만 장군과 소비에트 외교위원 레온 트로츠키는 정전협상을 했지만, 독일은 정전의 대가로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핀란드, 발트 3국의 포기를 요구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협상결렬을 선언하면서 "러시아군은 독일군과 싸우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강화를 맺지도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에 겁을 먹은 러시아의 볼셰비키지도부는 서둘러 1918년3월3일 독일과 강화조약(Brest-Litovsk Treaties)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일의 붕괴로 9개월 만에 무효가 되었다. 러시아는 다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차지했으나, 폴란드와 핀란드 그리고 발트3국은 러시아로부터 불안한 상태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 후 러시아는 내전을 거쳐 사회주의 연방국가(Soviet Union) 즉 소련(1922.12.30~1991.12.25)이 되었다.
한편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8년1월8일 미국의회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14개 항목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민족자결주의, 비밀외교금지, 공해상에서 자유항해보장, 법에 의한 통치로 요약된다. 특히 민족자결주의는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독일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독일황제가 퇴위하면서 1918년11월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919년1월18일 프랑스 외무부에서 전승국 27개국 대표가 모여 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1월25일 제2차 총회에서 국제연맹의 창설이 결의되었고, 6월28일에는 독일과 베르사이유조약이 체결되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918년11월18일자신문을 통해서 파리강화회의소식을 알았다. "윌슨의 14개 평화원칙이 발표되고,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중국대표 육징상(陸徵祥)씨가 파리를 향해 베이징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춘원은 급히 서울로 돌아와서, 청진동 어느 여관에서 중앙학교로 전화를 걸어 친구 현상윤(玄相允)을 불러냈다. 현상윤은 춘원과 같은 평안도 정주출신이고, 1918년 와세다(早稻田)대학교를 졸업한 후 중앙학교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천도교의 중심인물인 최린(崔麟)의 제자였기 때문에, 춘원은 최린을 통해서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를 움직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춘원은 일본의 동경유학생들에게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출발했는데, 그는 와세다대학교 재학생신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입국이 가능했다. 그때가 1918년12월 말이라서 춘원은 둘째학기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춘원은 도쿄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색하였다. 마침 와세다대학교 정치학과재학생 최팔용(崔八鏞)을 만나서 그의 의중을 이리저리 떠보다가,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최팔용은 춘원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사내다운 함경도 함흥사람이었다. 춘원은 그에게 자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과 일본의회에 보내는 글과, 인쇄비 3백원을 주었다. 그 돈은 황해도 봉산출신인 동경유학생 김석황(金錫璜)의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일본 명주에 베낀 후, 교복 상의 안쪽에 넣어서 송계백(宋繼白)이 그 교복을 입고 중앙학교선생인 현상윤을 찾아가게 했다. 춘원은 서울에서도 2월8일에 동경유학생들과 맞추어 동시에 독립선언을 선포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송계백은 곧 서울로 출발했다. 그는 평남남도 안주사람으로 침착하고 말이 없으며, 와세다대학교 법학과에 재학중이었다. 그밖에 백관수, 김도연, 서춘, 김철수, 최근우, 김상덕 등에게는 최팔용이 연락하였다.
춘원은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놓고, 이를 교정해줄 사람을 못 구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마침 선교사 윤산온(George Shannon McEune)박사가 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춘원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춘원이 정주 오산학교선생으로 근무할 때, 윤산온은 선천의 신성(信聖)중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윤산온은 '신민회 사건'때 보여준 그의 조선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본관헌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되었던 경력이 있었다. 춘원은 윤산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독립선언서영문을 교정하여 줄것을 부탁했다. 윤산온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선생, 나는 이 글을 안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이니까요. 그러나 이 일을 해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랜디스 박사라고 그는 조만간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이선생을 랜디스 박사에게 소개해 줄 수 있습니다." 마침 랜디스 박사는 춘원이 졸업한 중학교, 즉 시바시로가네(芝白金)의 기독교학교인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근무하는 춘원의 은사였으므로, 랜디스 박사가 춘원에게 그를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었다. 춘원은 그날 밤, 메이지학원을 졸업한 뒤 만 9년 만에 랜디스 박사를 찾아갔다. 나이가 70세쯤 된 배가 나오고 옴팡눈의 박사는, 애국운동에는 성공과 실패를 따질 것 없이 그냥 하는 것이라면서 춘원의 요구를 기쁘게 들어주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춘원이 거사일인 2월8일이 되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최팔용이 춘원의 하숙집에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가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해서 다 잡혀가면, 우리의 일은 밖으로 알려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춘원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것은 2천만 조선인들의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세계에 알려 달라." 그러면서 동지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은 돈을 춘원에게 여비로 내놓았다. 그래서 춘원은 이튿날 시즈오카(靜岡)행 기차를 타고 도쿄를 떠났다. 그는 하숙집 주인에게는 따뜻한 고장인 누마즈(沼津)로 이삼 일간 놀러간다는 핑계를 대고, 하숙집에서 몸만 빠져나왔다. 춘원은 경찰의 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시즈오카에서 내려서 나고야(名古屋)행 기차를 탔고, 나고야에서 내려서 고베(神戶)행 기차로 갈아탔다. 고베에서는 중국 상하이로 가는 배표를 무사히 샀으나, 승선할때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춘원은 "나는 베이징 순천시보(順天時報)의 기자가 되어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경찰은 별다른 의심 없이 수첩에 그 내용을 적을 뿐이었다. 춘원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19년 1월말이었다.
춘원은 5년 전에 오산학교의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상하이에 와서, 한 달 남짓 국내에서 망명해온 청년들과 한 방에서 지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상하이부두에서 우연히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를 만났다. 그도 와세다대학교 동문이어서, 서로가 깜짝 놀라고 반가워하며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춘원은 이러저러해서 일본에서 오는 길이라고 말했고, 설산은 자기도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도쿄에 가는 길이라면서, 춘원에게 남은 돈이 있으면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춘원은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20원을 설산에게 주었다. 설산은 겨우 배표만 구입한채, 무일푼으로 도쿄에 가면서, 자기를 배웅 나온 조동호(趙東祜)에게 춘원을 잘 부탁한 후 승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 상하이에도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분위기로 가득 찼다. 거리에는 종소리가 울리고, 이틀간의 축하행렬이 주민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얼마 후에는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클레인(Charles R. Clane)이 상하이를 방문하여 윌슨의 14개조 평화안을 설명하면서, 앞으로 있을 파리강화회의에는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적용되어, 피압박민족이 독립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특히 중국은 그동안에 일본에게 받은 손해를 청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상해교민회장 여운형(呂運亨)은 클레인의 연설을 듣고, 중국의 정계요인 왕정정(王正廷)의 주선으로 클레인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호소했다. "나는 조선의 청년인데 당신의 연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일본침략자들의 강압과 모략에 의해서 일본에게 합병당하고 말았습니다. 온 국민은 이를 결사반대하여 유혈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나, 일본의 압제는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되어 독립하려고 합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상을 폭로하려고 하는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클레인이 대답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당신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이 말은 구미열강들의 외교적 표현으로써, "나는 공식적으로는 당신들의 활동을 도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여운형은 클레인의 대답에 큰 기대를 갖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급히 만들면서, 젊은 동지들과 독립청원서 작성, 대표선정, 여비 문제 등을 상의하였다. 우선 자금이 필요하므로 김철(金澈)을 조선에 보내 천도교에서 3만원의 성금을 얻어왔다. 그래서 춘원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여운형 본인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선우혁(鮮于赫)은 조선으로, 그리고 설산을 일본으로 보냈다. 신한청년당은 춘원에게 신문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춘원은 2월8일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동경유학생들의 조선독립선언문과 그에 관한 기사를 써서, 영자신문사 <China Press>와 <North China Daily News>에 갔다. 그들은 춘원의 말을 듣고 놀라는 빛을 보였으나 반신반의 하였다. 마침내 2월10일이 되어서야 <North China Daily News> 평론란(評論欄)에 "한국청년들의 포부(YOUNG KOREA'S AMBITION)"라는 제목으로 도쿄에 있는 한국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고 일어났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그 이튿날에는 미국신문 <China Press>에 좀 더 많은 내용의 기사가 났다. 춘원은 마침내 일이 잘 풀려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이제부터는 서울의 소식을 기다릴 차례였다.
1919년2월20일경 현순(玄楯)목사와 최창식(崔昌植)이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춘원을 찾아 상하이로 왔다. 그 독립선언문은 춘원이 서울에 전달한 2·8독립선언문과 다른,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현순목사는 3월3일 고종의 장례식 날 독립운동을 할 예정이라는 서울의 소식을 춘원에게 전해주었다. 춘원은 신한청년당원들과 의논하여 프랑스조계 하비로에 있는 중국집을 한 채 빌려서, 서울의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춘원을 만나고 돌아온 현상윤이 춘원의 계획을 중앙학교교장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에게 보고하였다. 인촌과 함께 현상윤의 말을 듣고 있던 송진우(宋鎭禹)는, 인촌이 그 일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만류하면서, 자신이 대신 그 일을 맡아서 하겠다고 말했다. 송진우와 현상윤은 각각 최남선과 최린을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그리고 박영효, 윤치호, 이상재 등 민족의 어른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했으나 핀잔만 들었다. "여보시게들! 우리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친다고해서 일본인들이 눈 하나 깜짝 할 것 같은가? 쯔쯔쯔, 철들 좀 들게나!" 그러자 최남선과 최린은 크게 낙심하여 자포자기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춘원이 약속한대로 1919년2월8일에 동경유학생들이 도쿄시내 모 회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오산학교교장 이승훈(李昇薰)은 평안도 정주에서 급히 귀경하여 송진우·최린·최남선 등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을 다시 계획했다. 마침내 3월1일 서울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3·1운동을 시작하였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학생들과 약속한 시간에 파고다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다 못한 학생들 중에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운동간부 한위건(韓偉鍵)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그의 선창에 따라서 학생들이 만세삼창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반면에 민족대표 33인은 그 시간에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조선민족대표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그리고 일본경찰이 태화관을 포위한 가운데, 한용운(韓龍雲)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한 후, 점잖게 경찰에 연행되었다.
춘원이 일련의 독립운동을 기획한 이유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세계여론을 환기시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학생들의 용기덕분에 3·1운동은 거국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기미년 독립운동은 3월5일경에야 통신을 타고 해외로 전해졌고, 중국 상하이신문들이 그것을 보도하였다. 상하이에는 서구열강들의 조차지가 있는 곳이므로, 당연히 그들 조차지의 본국에 조선의 독립운동이 전해졌다. 3월 말경에 춘원과 신한청년당은 상하이의 <China Press>와 교섭하여 펩휘(Fenwick)이라는 기자 한 사람을 서울로 들여보냈다. 그는 조선에서 취재를 하면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과 기타 많은 기사와 사진을 갖고 3주 만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China Press> 제1면에 대대적으로 기사와 함께 그 사진들을 보도했다.
펩휘 기자가 갖고 온 사진들은 스코필드박사가 그에게 제공한 것이다.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박사는, 1910년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재학 중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로인해 왼팔을 잘 못쓰고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1911년 수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14년부터 그의 모교인 토론토대학에서 세균학강사로 있었다. 당시 조선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교장 에비슨박사의 초청으로 세균학과 위생학을 4년 동안 가르치기로 계약하고, 1916년11월 캐나다 연합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아내 앨리스와 함께 조선에 건너와 세브란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19년3월1일 오후2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조선독립만세”소리가 시작되었다. 사전에 이갑성(李甲成)의 부탁을 받은 스코필드박사는 카메라를 들고 3·1운동을 촬영하였다. 파고다공원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종로거리를 달리면서 독립선언문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하였고,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날 시청 앞 광장에는 3월3일로 예정된 고종의 장례식을 위해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도 조선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스코필드박사는 사진을 잘 찍으려고 높은 곳을 찾았다. 맞은편 일본인들이 사는 지역에 있는 케이크가게 2층으로 올라가 독립운동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중년 여인이 도둑이라면서 빗자루를 들고 사정없이 휘둘러 그를 쫓아냈다. 스코필드박사는 종로와 광화문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독립운동으로 야간통행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일본헌병과 군인들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도록 만세소리는 곳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스코필드박사는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용설(李容卨)학생의 집으로 가서, 자신이 찍은 필름 몇 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1919년4월15일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이끌고 수원에 있는 제암리 마을에 왔다. 지난번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조선인들의 만세시위 때, 자기들이 무리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며 사람들을 교회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빠진 사람이 없는지 출석까지 부른 후, 교회의 문을 닫고 불을 질렀다. 창문을 통해 탈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총을 쏘며, 교회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놀라서 달려온 여인까지 죽인 후 마을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때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바깥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스코필드박사는 제보를 받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여, 몰래 사건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1919년3월1일부터 5월말까지 독립운동으로 발생한 피해로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구속 47,948명, 방화된 민가 715호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소식이 해외에 알려지기 위해서는 이를 취재할 외국기자가 필요했다. 국내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한글판 매일신보, 일어판 경성일보, 영어판 서울프레스가 있었을 뿐이므로, 3·1운동의 내용이 외국신문사에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춘원과 여운형은 <China Press> 기자 펩휘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를 칼튼 호텔(Carlton Hotel)로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그 자리에서 펩휘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다. "이정도면 너희 민족이 일본의 통치에 불복하고 독립을 원한다는 뜻과, 독립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용기를 충분히 표시했으니, 더 이상 선동하여 너희 동포들을 희생시키지 말라. 지난 수십 년 동안 길러낸 지식인들을 다 희생시키면, 다시 수십 년을 보내기 전에는 그만한 사람들을 기를 수 없으니, 앞으로는 교육과 산업으로 독립의 실력을 길러라. 내가 보기에는 현재의 너희들 힘으로는 일본을 내쫓고 독립할 힘이 없다고 본다."
사실 펩휘의 말대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고,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은 요원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레닌의 주도로 세계공산주의자대회가 열렸고, 그들은 코민테른을 결성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세계 각국의 공산혁명을 지도·지원하였다. 늦게나마 연합국에 동참한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중국대표는 서구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권익들의 반환을 요구하는 7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베이징대학생들을 중심으로 5천여 명이 “국권회복, 국적응징, 일본의 21개조요구의 폐지, 일화(日貨)배척, 파리강화회의 조약거부”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했다. 결국 중국정부는 파리강화회의를 거부하였으나, 학생들의 여타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5·4운동은 전국적인 반일본·반외세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잠에서 깨어난 중국인들의 민족적 자각이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갖고 있는가를 세계에 보여주었다. 5·4운동이 가시적인 성과 없이 끝났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코민테른의 지도하에 1921년7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비밀리에 전국대표자 13명이 모여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천두슈(陳獨秀)가 서기장(書記長)으로 선출되었고, 마오쩌뚱(毛澤東)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경제적인 수탈에 신음하고 있는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조선의 젊은이들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박헌영도 있었다. 일본에서도 공산주의가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조선의 동경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생겼다.
3·1운동은 비폭력무저항주의를 표명하면서 전개되었지만, 일본은 무자비하게 독립운동을 진압했다. 3·1운동은 비록 목표했던 조선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을 실망시켰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조선의 근대문화가 꽃피기 시작하였다. 구한말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통해서 조선인들을 계몽시켰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주도했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교회와 그들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통해서 조선인들은 유교봉건사회에서 벗어나 근대문명에 접어들었다. 물론 일본의 식민통치는 그들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룩한 군대문명을 조선에 이식하는 과정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구체제를 타파했고, 근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조선에 들여왔지만, 1차적 목표는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를 세웠으나, 중등학교부터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에 조선인 자녀들이 더불어 들어가는 것이었고, 조선인들에게는 식민통치에 써먹을 정도의 학력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농경지를 개간하고 쌀 수확량을 증산해서 쌀이 부족한 일본으로 보내고, 도로를 깔고 철도를 부설하고 공장을 짓는 것도 만주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무지하고 게으르며 가난한 조선인들을 개 무시하고 민족지도자들을 탄압했으나, 선교사들은 학대받는 조선인들을 위로하였고, 나라를 빼앗겨서 괴로워하는 청소년들을 성경말씀과 서구근대문화로 양육하였다. 일본인들은 서양선교사들 앞에서는 체면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일본관헌이 선교사들에게 가할 수 있는 조치는 그들을 조선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다. 스코필드박사는 1920년3월에 세브란스와의 근무계약이 만료되자, 계약을 더 연장하지 못하고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는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먼저 전래되었다. 18세기 말에 조선의 사신들이 베이징을 왕래하며 천주교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한문으로 된 천주교서적들이 국내로 유입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나쁜 학문(邪學)이라고 정죄하여 국법으로 금하였다. 그런데 조선인들이 천주교에 열의를 보이자 천주교신부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 잠입하였고, 그들 중에 프랑스외방전교회소속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Felix Clair Ridel)주교가 있었다. 리델신부가 처음 조선에 들어올 무렵인 1861년4월7일경의 상황은 포교하기 좋은 편이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중국황제 함풍제(咸豐帝)는 열하(熱河)로 피신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조선정부는 혹시 서양군대가 그 여세를 몰아 서울까지 내려와, 지난번 1839년9월21일에 있었던 기해박해 때 조선정부가 프랑스신부들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종전의 포고를 적용하지 않고 신부들의 포교활동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쇄국주의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1866년3월7일에 발생한 병인박해로 프랑스신부들이 죽음을 당할 때, 리델신부는 간신히 중국 텐진(天津)으로 탈출하여, 프랑스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 Gustave Roze)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박해를 알렸다. 그 결과 1866년10월에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주교가 된 리델신부는 10년 후인 1877년9월23일 두 명의 신부를 데리고 황해도 장산곶에 무사히 상륙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 1월28일에 체포되어 5개월간 감옥에 억류되었다. 청나라주재 프랑스공사의 요청으로 중국황제 광서제(光緖帝)는 리델주교를 석방할 것을 고종에게 명령했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리델주교를 청나라로 추방했다.
리델주교는 조선에 재입국을 소망하면서 「나의 한성감옥생활」이라는 수기를 썼고, 그의 「한불자전」이 1880년에, 「한어문전」이 1881년에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중국에 있는 개신교선교사들이 후한 사례를 약속하며 그의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영어로 출판할 것을 요청하였고, 독일인들은 한층 더 유혹적인 제안을 그에게 해왔으나, 리델주교는 이렇게 거절하였다. “싫소! 나는 내 삶의 15년간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것을 허락할 수 없소. 나는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프랑스어를 배우기를 원하지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리델주교는 1884년6월20일 프랑스에서 선종(善終)했다. 1882년에 조선이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서양열강들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늦게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1886년3월8일 전권위원 코고르당(Cogordan. F.G.)에게 조선과의 수호통상체결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제물포항을 거쳐 4월3일에 입경했다. 코고르당은 서울에 오기 전에 미리 당시의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조선 내에서 천주교의 포교를 허락하고 천주교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은 지나친 내정간섭이라며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통상보다는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이 같은 요구가 반영되어 1886년6월4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1893년경에는 프랑스인들의 선교활동이 조선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한성부·용산·마포 등지에 병원·성당·학교 등 각종 기관들이 설치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한국가톨릭의 상징이며 총본산인 명동성당(明洞聖堂)이 1892년8월에 정초식을 거행했는데, 청·일전쟁과 코스트 신부의 별세로 중단되었다가, 위돌 박 신부에 의해 장중한 고딕식 건축물로 1898년5월에 완공되었다.
1885년4월5일 부활절 오후3시경,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부부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각기 교회를 시작한 후, 아펜젤러는 배제학당을 세워 민족의 지도자들을 키워냈고,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언더우드의 권유로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온 에비슨박사는 세브란스병원을 세웠고,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가 합쳐져서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교육의 불모지인 조선에 와서 1886년에 이화학당을 세웠고, 그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여성교육기관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기독교의 꽃을 피운 것은 성경과 찬송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여, 한글성경책을 만드는 작업을 했고, 더불어 한글찬송집도 만들었다. 특히 한글번역에는 언어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선교사의 역할이 컸다. 한글성경책은 처음에는 낱권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에 「신약성서」, 1911년에 「구약성서」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1938년에 「개역성경」이 나왔고, 1977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손잡고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 현재 개신교는 2013년에 나온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다. 찬송가는 악보 없이 가사만 적은 큰 종이차트로 만들어진 찬송묶음으로 시작하였지만, 꾸준히 발전하여 현재의 「새찬송가」가 2017년에 만들어졌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한글과 관련해서는 제일 먼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선교사를 주목해야 한다. 그가 1886년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었을 때는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에 온지 3년만인 1889년에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한글로 된 세계지리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글을 사랑하고 연구해서 그 연구논문을 세계적인 학술지에 기고하였고, 한국의 설화를 소개하였다. 특히 구전으로 내려오던 노래 '아리랑'을 서양식음계로 처음 채보하여 세계에 알렸다. 또한 고종의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고,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초청으로 8·15광복절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86세의 나이로 태평양을 항해하여 1949년7월29일 40년만에 한국을 방문했으나, 일주일 후에 병원에서 소천(召天)하였다. 그의 소원에 따라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그 다음은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이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의과대학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온 언더우드선교사를 캐나다로 초청하였다. 에비슨의 초청을 받은 언더우드는 1892년9월 토론토의 장로교회연맹총공의회 단상에 서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아담한 키에 진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선교활동과 선교사가 된 동기에 대해서 간증하였다. 언더우드의 간증이 끝나자 기독학생회회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에비슨의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다. 언더우드는 토론토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교회에서 선교보고차 설교를 하며 다녔다. 에비슨은 언더우드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자연히 언더우드의 강연을 여러 번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에비슨은 언더우드를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언더우드는 에비슨 보다 한 살 많았으므로 동년배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것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했던 점,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지런히 노력했던 점 등,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게다가 키도 비슷해서 동일감이 더 커졌다. 언더우드가 에비슨에게 말했다. “혹시 에비슨 교수가 조선에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에비슨이 대답했다. “글쎄요. 하나님께서 저를 확실히 부르신다면 순종하기로 이미 아내와 합의하였지만, 저는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언더우드가 힘주며 에비슨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확고해요. 하나님은 토론토 최고의 의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에비슨도 얼굴이 상기되어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서면 따르겠습니다.”
다음날 에비슨은 자신이 속해있는 캐나다 감리교회에 가서 자신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였으나, 감리교본부에서는 조선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난데없이 뉴욕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에비슨에게 연락이 왔는데, 협의할 것이 있으니 즉시 뉴욕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북장로회는 조선의 왕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맡을 수 있는 유능한 의사를 찾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언더우드가 에비슨의 허락도 없이 해외선교부에 에비슨의 이름을 통보했던 것이다. 에비슨은 장로회 선교부총무에게 말했다. “저는 아시다시피 장로교신자가 아니고 감리교신자인데, 훌륭한 장로교신자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희는 선생님을 장로교 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리교의 열정을 가지고 조선에서 선교사업을 활발하게 하면 됩니다.” 에비슨은 장로회 선교부총무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장로회 선교부의 정신이라면 이 교단의 지휘를 받아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에비슨은 세인트 앤드류 장로교회로 이적했다. 에비슨 가족은 1893년 늦은 봄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8월31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11월1일부로 제중원원장이 되었고, 고종의 어의를 겸임했다.
에비슨은 1900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선교에 대한 강연을 하던 중, 세브란스라는 부호를 만나 병원건축비로 1만불을 기부 받았다. 그 후 세브란스씨와 그의 자녀들은 대를 이어서 세브란스병원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였다. 에비슨은 고생 끝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마을)에서 대지를 구입하였다. 1902년11월27일 추수감사절 날에 병원의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오후3시에 거행된 정초식에는 미국 공사 알렌을 비롯해서 주한 외국사절단과 조선의 관리들이 대다수 참석하였다. 알렌이 병원의 기반이 되는 정초석을 놓을 때, 에비슨은 감개무량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1903년이 되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졌다. 그 소문은 1904년이 되어 절정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건축자재 값이 많이 오르게 되었다. 에비슨이 이런 형편을 세브란스씨에게 알리자, 그는 돈은 걱정하지 말고 병원건축에만 전념하라며 에비슨을 격려해주었다. 1904년9월23일 오후5시, 병원봉헌식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멋진 병원 건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에비슨은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이라 명명했다. 그 후 세브란스씨는 서울을 방문하여, 병원을 의학교로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부대시설을 짓는 비용도 지불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부지매입을 포함해서 건축비용은 총 2만5천불이 들었다. 1908년6월3일 세브란스병원의학교의 첫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졸업생 7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으며, 그는 많은 하객들 앞에서 감동적인 축사를 했다. 졸업생들에게는 의사면허증이 발급되었다. 이로써 한국최초의 면허의사 7명이 탄생한 것이다. 그 중에는 백정(白丁)의 아들 박서양(朴瑞陽)도 있었다. 에비슨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서양의학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학습용 교재로 사용하였다.
1916년10월12일 에비슨의 친구이며 선교동역자인 언더우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타시티 병원에서 소천했다.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들을 위한 ‘언더우드 학당’을 열었는데, 김규식(金奎植)은 5세 때 언더우드에게 입양되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안창호 역시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특히 김규식은 16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22세인 1903년에 버지니아주 로녹(Ronoc)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6월에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05년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일을 도왔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신민회사건이 터지자, 김규식은 망명을 결심하고 1913년4월 중순에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의 저택에 머물렀다. 한편 언더우드는 1901년 종로 연지동에 새 학교를 마련하고, 제임스 S. 게일을 교장으로 앉혔다. 게일선교사는 교명을 “깨우쳐 새로워진다”는 뜻인 경신(儆新)학교로 개칭하였고, 1906년에는 경신학교 내에 부설 경신소학교도 세워졌다. 1908년8월 대한제국 학부(學部)로부터 사립학교령에 의거해 중학교인가를 받았으며, 1915년3월에는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1916년 언더우드가 죽자 에비슨이 경신학교 대학부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는 1917년4월7일 조선총독부에서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언더우드가 구입한 신촌캠퍼스에 자리를 잡았다. 1934년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외아들인 원한경(元漢慶)박사에게 교장자리를 넘겨주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오랫동안 운영했으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인 오긍선(吳兢善)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1935년12월6일 캐나다로 돌아갔다. 에비슨의 선견지명은 1939년 일제에 의해 조선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면서 확인되었다. 우리에게 에비슨박사는 서양의학을 이 땅에 심어준 은인이다. 한편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박사의 한글판 <독립신문>은 아펜젤러와 헐버트 그리고 그들의 배제학당 제자들과의 협업의 산물이었다. 특히 주시경(周時經)은 배제학당시절에 선교사들을 도와 한글을 연구한 것을 시작으로 한글학자로 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한글학회>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이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땅에 뿌려진 기독교문화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새롭게 표방한 문화정치의 기류를 타고, 조선인들이 경영하는 학교, 언론사, 사업체 등을 통해서 조선의 근대문화가 꽃을 피우며, 조선인의 실력이 성장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1919년4월10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일본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는 시기를 맞았다. 1912년7월30일 메이지 천황이 죽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이듬해 2월에 가쓰라 내각에 반대하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와 입헌국민당(立憲國民黨)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가 중심이 되어 '벌족(閥族)타파·헌정(憲政)옹호'를 외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벌족'이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을 중심으로 한 하급사무라이들을 통해서 형성된 권력을 계속해서 독점해온 집단을 말한다. 오자키 의원은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반복해서 말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황의 이름을 빙자하여 반대파를 공격하고, 제멋대로 정치를 행할 뿐이다.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하는 자가 바로 저기 앉아 있는 가쓰라 수상이다." 그리고 그는 가쓰라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가쓰라는 순간 얼굴이 시뻘게졌고, 몹시 당황하여 5일간의 정회(停會)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회의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정부 측 의원들을 성토했다. "가쓰라 내각은 사기꾼이다. 정부 측 의원들을 몰아내자." 2월10일 의회가 재개되었다. 곳곳에서 대중집회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의사당에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제지하였으나 민중들은 소리쳤다. "가쓰라는 수상직을 내놓아라." 그리고는 민중들과 진압차 출동 나온 기마경찰들과의 충돌이 벌어졌다. 이런 사태에 직면한 가쓰라는 입헌동지회를 만들어 저항을 했지만, 내각은 50여 일 만에 총사퇴했는데 이것을 '다이쇼 정변'이라고 한다.
이어서 사쓰마번 출신 해군대장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가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여당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때 문관을 고급관료로 채용하는 '문관임용령'의 개정이 이루어졌고, 다이쇼 정변의 원인이 되었던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개정하여 예비역 장성도 군부대신에 임용할 수 있도록 개정하였다. 그러나 야마모토수상은 1914년 군함구입비 부정사건(지멘스사건)으로 사직하였다. 야마모토내각 퇴진 후 원로와 군부는 조선에 배치할 2개 사단 증설 안을 실현시키고, 입헌정우회에 타격을 주기 위한 방안으로, 이미 정계를 은퇴한 노정치가지만 국민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내각의 구성을 맡겼다. 오쿠마는 입헌동지회를 여당으로 조직하여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하자, 육군의 2개 사단 증설계획과 해군확장안을 가결시켰다. 오쿠마 내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1915년1월 서구열강이 전쟁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21개조 요구사항'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사실상 일본의 단독식민지로 만들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최후통첩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1915년5월에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오쿠마 내각은 국민의 지지를 서서히 잃어갔고,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원로의 압박으로 퇴진하였다. 1916년10월9일 데라우치 내각이 그 뒤를 이었다. '다이쇼 정변' 이전으로 회귀한 것이다.
조선총독으로 악명 높았던 데라우치 수상은 제국주의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에는 독일편에서 싸우다 포로가 된 체코군이 시베리아에 수용되어 있었다. 러시아가 1918년3월3일 독일과 단독강화를 체결하자,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을 지지하는 적군(赤軍)과 혁명을 반대하는 백군(白軍)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체코군은 백군 편에서 싸우다가 시베리아에 고립되었다. 7월에 미국·일본·영국·프랑스는 체코군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총병력 2만8천명을 시베리아에 파병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당초에는 1만2천명을 파병하기로 했었는데, 협정을 무시하고 3개월 후에 7만3천명을 블라디보스톡에 상륙시켰다. 1920년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볼셰비키 적군(赤軍)을 격퇴하면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는 상인들이 쌀을 매점매석하여 쌀값이 폭등하였고, 그 결과 1918년8월10일부터 전국 주요도시에서 서민들에 의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일본정부가 쌀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무려 10만 명 이상이었다. 언론이 쌀 소동을 크게 보도하자, 데라우치 수상은 신문발행금지로 맞섰다. 이에 여론이 폭발하여 데라우치 내각은 총사퇴를 하게 되었다. 입헌정우회총재 하라 다카시(原敬)는 '평민재상'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결과 1918년9월29일 하라 내각이라는 최초의 정당내각이 탄생했다. 그는 육군·해군·외무장관을 제외하고 전 각료를 입헌정우회원으로 구성하였다. 1919년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종래의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하라 수상은 1921년11월4일 도쿄 역에서 암살당했다. 일본은 쇼와(昭和) 천황이 등극한 1926년에 다시 군국주의로 회귀했다. 쇼와 천황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헌법과 법률이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군국주의를 지향했고, 일본국민이면 누구나가 일본천황에게 순종했기 때문이다.
춘원은 3·1운동에서 보여준 조선인들의 뜻을 받들어, 3·1운동 후 국내에서 망명한 열혈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산파역할을 했다. 춘원과 신한청년당의 요청에 의해서 베이징과 만주 그리고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민족지도자들이 상하이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임시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미국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역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뽑았다. 4월 하순에 도산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해서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임시정부의 차장들인 최창식, 신익희, 윤현진 등의 소장파들이 병문안을 가서 도산에게 국무총리를 대리하여 임시정부를 맡아줄것을 간청하였다. 몇 주 후에 도산은 소장파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정무를 시작했다.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25,000불을 갖다가 프랑스조계 하비로에 큰 저택을 얻어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3·1운동 이후, 1919년4월10일에 성립된 상해임시정부 외에, 3월17일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 4월23일 서울에서는 한성정부가 발표되었다. 구한말부터 두만강 건너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해삼위(海蔘威)라 불리던 블라디보스톡 내의 신한촌(新韓村)에 모여 살았는데, 그곳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일포고령을 발표한 것이다. 또한 한성정부의 구성은 서울 서린동 봉춘관(逢春館)에서 발표되고 연합통신(UP)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그 후 한성정부의 실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해임시정부는 위 두 정부의 뜻을 포용하여 이승만과 이동휘라는 실력자들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에 의해 국무총리로 선임되었으나, 그는 한성정부의 조각발표를 근거로 국제외교에서 대통령의 직함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상해임시정부는 월권이라며 이승만에게 정정을 요구했지만, 그는 철회하지 않았다. 연해주에 있던 이동휘도 상해임시정부에 의해 군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상해에 오는 것이 차일피일 늦어졌다.
그전인 1919년1월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총회장 안창호의 의견에 따라서 하와이에 있는 이승만에게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여 국익을 대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의 신임장을 갖고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무부에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불허되어 프랑스행이 불발되었다. 마침 신한청년당의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었으므로 그 결과를 지켜보았으나, 파리강화회의는 한국의 독립문제를 외면한 채, 6월28일 독일과 베르사이유조약을 체결하고 회의를 종결하였다. 그사이에 4월10일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이승만은, 8월25일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그 목적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는데 필요한 외교활동을 하는데 있었다. 이승만은 파리에서 미국으로 온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초대위원장에 임명한 후, 9월1일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해외교민들에게 공채를 발행했다. 이즈음에 김규식은 그의 모교인 로녹(Ronoc)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안창호는 대통령의 직함을 사용하는 이승만과의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서, 9월6일 대통령중심제로 개헌을 한 후,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을 선출하고, 안창호 자신은 유명무실한 노동총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상하이에 온 이동휘에게 11월3일 임시정부의 정무를 넘겼다.
한편 시베리아의 체코군은 귀국하면서 그들의 무기를 헐값에 조선독립군에게 넘겼다. 그래서 북간도의 조선독립군은 전력이 증강되었고, 1920년6월7일 홍범도장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일본군은 1920년 가을에 '간도참변'이라고 말하는 '훈춘(琿春)사건'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에 사는 조선인들을 죽이고 마을들을 불지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조선독립군은 10월 하순에 있었던 청산리전투에서는 더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조선독립군은 증강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1921년6월28일에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시베리아파병을 결행했던 다른 연합국들은 1920년6월까지 철군했는데, 일본만은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끌었는데, 점차 후자에게 밀렸다. 이동휘를 따르던 젊은이들이 이르쿠츠크파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이다. 조선독립군내에도 공산주의사상이 들어왔다.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은 일본과의 협상을 한 후, 자유시에 모인 조선독립군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민족계열의 조선독립군이 이를 거절하자 소비에트 적군(赤軍)은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였고, 민족지도자들이 10여 년간 공들여 키워낸 조선독립군내의 민족주의자들은 제거되었다.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은 아예 자유시로 가지 않아서 참사를 모면했으나, 만주 영안현(寧安縣) 산시역(山市驛) 앞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1930년1월 정미소의 기계를 수리하던 중 공산주의자가 된 옛 부하의 총에 죽었다.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장군은 공산주의자로 살아남았으나,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강제이주정책'에 따라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 1943년10월25일 카자흐스탄의 키질오르다에서 사망했다. '고려인강제이주정책'은 어느 날 갑자기 강압에 의해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영토분쟁의 중심에 서 있던 알자스·로렌지역에 대해서 독일 또는 프랑스에의 귀속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는 것을 보고,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 사는 조선인들로 인해 향후에 영토분쟁이 생길것을 우려하여 이 같은 짓을 벌였다. 한편 정치적 거물로 활동했던 이동휘는 1935년1월31일 독감에 걸려 객사했다. 일본은 전비 10억엔, 전사자 3천, 추위로 인한 동사자(凍死者) 무수히 많음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내고서야 1922년10월 시베리아에서 철군하였다. 그 후 만주에서는 공비(共匪)라고 불리는 소규모의 빨치산들이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가 있기 전에 발생한 간도참변의 소식을 접한 이동휘는, 임시정부각료들과 교민들을 모아놓고 일본에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영근(李英根)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식칼이나 부지깽이를 들고 나가라 하시니, 누구더러 나가란 말씀이요? 우리는 안전한 상하이에 있으니 본국이나 서·북간도에 있는 동포더러 나가 죽으란 말씀이요? 그렇게 식칼이나 부지깽이를 들고 나가 죽을 마음이 있으시면, 나라가 망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어찌하여 선생네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계시오? 정말 나가실 마음이 있거든 총리와 총장 여러분들이 식칼과 부지깽이를 들고 앞장을 서시오. 그러면 우리도 그 뒤를 따르오리다." 화가 난 국무총리 이동휘는 분연히 일어나 퇴장하고, 내무총장 이동녕은 다행이다 싶어 얼른 산회를 선언하였다. 그 이후로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는 말은 없어졌으나, 임시정부내에는 주전론(主戰論)과 비전론(非戰論)이라는 파벌이 생겼다. 이동휘는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색채를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꾸려고 했고, 레닌이 임시정부에게 지원한 자금을 사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유용하는 등 분란을 만들었다. 마침내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밀항하여, 1920년12월5일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21년1월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세 차례 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미 중구난방(衆口難防)의 상태가 되어있었고, 이동휘는 사사건건 이승만의 지도력에 타격을 주었다.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개혁해야 한다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한 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창조파'로 나뉘어 분쟁하였다. 세계정세는 국제공산당의 세력확장이 두드러졌고, 강력한 공산주의물결이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이승만은 5월16일 법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인 신규식 내각을 출범시킨 후, 그 다음날 임시의정원에서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함으로 부득이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교서(敎書)를 제출하고, 18일에는 일반국민을 상대로 '임시대통령의 유고(諭告)를 발표한 후, 5월29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신규식은 쑨원(孫文)의 광둥(廣東)정부로부터 국가승인을 얻어냈지만, 임시정부의 분열에 통분하여 병석에서 25일간 단식하다가 1922년9월에 죽었다. 임시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해산되기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그런 임시정부를 붙들고 간신히 꾸려나간 것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의 노력과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뚝심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에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다. 10세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여동생 둘과 함께 친척집을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그는 11세인 1903년 겨울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서기(書記)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러·일전쟁중에는 일본헌병의 수배를 받았다. 춘원은 12세에 진보회(進步會)가 만든 서울 소공동에 있는 학교에서 일본어선생이 되었다. 춘원은 13세에 일진회(一進會)가 보내는 유학생 9명중에 선발되어 1905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진보회와 일진회는 동학에서 만든 조직이다. 춘원은 1906년3월에 다이세이(大成)중학교 1학년에 입학했는데 홍명희도 이 학교 동급생이었다. 춘원은 12월에 일진회의 내분으로 학비가 중단되어 귀국하였고, 1907년2월 유학비를 국비로 해결해주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예비학교를 거쳐, 9월에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여기서 춘원은 동급생 문일평과 교유하였다. 1907년 여름 어느 날 춘원은 학교에 가는 길에 "한황양위(韓皇讓位)"라는 신문의 호외를 보았다. 즉 광무황제 고종이 퇴위하고 황태자가 선위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바보천치라고 소문난 사람이어서 춘원은 망국의 운명이 더욱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춘원이 5학년2학기 때인 1909년10월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있었다. 일본학생들은 한국이 일본을 배반했다며 한국학생들을 미워하며 눈을 흘겼다. 반면에 한국학생들은 일본이 한국을 속였다며 일본학생들을 원망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학생들은 일본에서 공부할 마음을 잃었다. 1910년3월에 춘원은 5년제 중학교인 메이지학원을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학비를 대주겠다는 독지가(篤志家)도 있었으나, 마침 그의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五山)학교에서 교사로 초빙되어 춘원은 진학을 하지 않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세운 기독교학교이다. 춘원은 톨스토이사상을 애호하고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기독교학생들의 신앙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춘원은 세계를 유람하고 싶어서 1913년 11월초에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춘원은 중국 상하이로 갔으며, 그곳에서 조선의 망명객들인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등과 한 달 남짓 한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상해의 중심인물인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춘원보다 7개월 전에 상하이에 와서 예관과 함께 거주하는 김규식,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발행했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변영태, 신성모, 중국말을 잘하는 이광(李洸)이라는 여성 등과 알고 지냈다. 예관은 꽤 큰 중국집을 빌려 살고 있어서, 그 안에는 매일 한어반과 영어반이 열렸고, 동포들은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김규식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했는데, 특히 영어를 잘하므로 영어반에서 영어선생노릇을 하였다. 영어반의 학생이던 신채호가 한번은 춘원을 찾아와서 서호(西湖)가 영어발음을 어렵게 가르친다고 불평을 했다. 당시 김규식의 호(號)는 서호였고, 나중에 우사(尤史)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단재(丹齋)는 그저 영어책을 해석할 수 있으면 된다고 말해도, 서호는 굳이 발음교정을 시킨다면서 춘원에게 영어공부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춘원은 얼마동안 단재에게 영어공부를 지도해주었다. 변영태도 중국대학이나 서양유학을 목표로 그곳에서 영어를 배웠다. 1914년 신년 초에 예관의 추천으로 춘원은 미국 상항(桑港) 즉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내정되었다. 예관은 춘원에게 여비는 걱정하지 말고, 우선은 해삼위(海蔘威) 즉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라며, 돈 5백원과 해삼위에 사는 월송(月松) 이종호와 길림성 물린(穆陵)에 있는 추정(秋汀) 이갑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래서 춘원은 그 돈으로 양복 한 벌을 사 입고, 해삼위까지 가는 배표를 구입하니까 50원이 남았다. 홍명희와 문일평 그리고 또 한사람이 춘원을 전송해주었다.
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경유해서 해삼위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에서 춘원은 일경의 검속이 있을까봐 배안에 꼭꼭 숨었다. 해삼위에 도착하자 춘원은 두 필의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신한촌을 방문했다. 그곳은 러시아정부가 망명해온 조선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한 곳에 몰아넣은 한인(韓人)거류지였다. 춘원은 신한촌 촌민회장 김도여(金徒汝)의 집에서 그곳 청년들에게 잠시 신원조사를 받았으나, 곧 김립(金立), 윤해(尹海), 김하구(金河球) 세 사람이 찾아왔다. 김립은 후에 상해임시정부 이동휘 내각의 비서장으로 레닌과 처음으로 연락을 취한 인물이고, 윤해는 논객으로서 당시 신한촌에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김하구는 <권업(勸業)신문>의 주필이었다. 그들은 춘원과는 초면이었으나, <소년>, <청춘>, <태극학보> 같은 잡지에서 춘원의 글을 읽은 모양이어서, 춘원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춘원은 김하구의 안내로 권업신문의 발행인 월송 이종호를 만났다. 춘원이 해삼위를 떠날 때에 월송은 이갑에게 보내는 편지와 돈 300루블을 전해줄것을 춘원에게 부탁했다. 춘원은 해삼위에서 이동녕을 만났다. 그와는 수년전에 서울 상동(尙洞)에서 만난일이 있었는데, 점잖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춘원이 키가 작고 몸이 통통한 홍범도(洪範圖)를 만났을 때, 그는 춘원의 손을 꽉 잡고 흔들면서 "나 같은 사람도 나라를 되찾는데 유용하게 써주시오"라고 말했다. 홍범도는 해삼위에서 떨어진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말했다. 춘원은 해삼위에서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구한말부터 이주해온 조선인들의 숫자가 약 사오만 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권업회로 조직되어 있는 한인사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에서 시베리아와 원동에 국민회지회를 세우게 되자, 힘이 두 개로 나눠지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춘원은 해삼위를 떠나 물린(穆陵)으로 갔다. 그곳은 조그마한 주막거리였다. 그 주막거리를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외딴 곳에 두어 집이 있는데, 그것이 와병 중에 있는 추정(秋汀) 이갑과 청계(淸溪) 안정근(安定根)의 집이었다. 안정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다. 춘원은 청계의 집에 유숙하면서 날마다 추정의 집에 가서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편지도 대신 써주었다. 춘원은 예관과 월송의 편지를 추정에게 전해주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들이 발간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추정은 전신불수로 어눌하여 말이 분명하지 못했고, 낮에는 안락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춘원은 성재(城齋) 이동휘(李東輝)를 만났다. 성재는 키가 크고, 눈이 세 모가 나고, 검은 수염을 뻗치고, 목소리가 웅장하고, 손이 커서 악수할 때에는 남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았다. 그는 얼른 보기에도 열정가였다. 성재가 추정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떠난 뒤에, 추정은 성재를 이렇게 평가했다. "성재는 저렇게 열성덩어리지만 사람에게 속는 흠이 있어!"
춘원은 빨리 치타(Chita)로 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추정이 자꾸만 만류하여 한 달간이나 추정의 말동무로 지내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날 밤차로 물린을 떠나 바이칼호와 네르친스크 중간에 위치한 치타로 갔다. 치타는 바이칼주의 중심지(首府)이다. 치타에는 시베리아 대한인국민회 본부가 있고, 그 기관지 <정교보(正敎報)>가 발행되는 곳이다. 춘원이 방문한 오산(吾山) 이강(李剛)은 그 두 가지 일을 맡고 있었고, 조그만 목조단층집 정면에는 러시아어로 "정교를 믿는 한인(韓人)의 잡지 정교보의 발행소"라고 쓰여 있었다. 당시는 러시아황제 짜아르가 통치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러시아내에서는 정치운동이나 출판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러시아국교인 러시아정교를 믿는 신도의 자격으로 단체를 만들고 잡지도 만들었기 때문에 잡지이름을 정교보라고 했다. 짜아르는 러시아의 국가원수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정교의 수장이었다. 각 도에는 정치적 장관인 '감사'가 있는 동시에, 종교적 장관인 '대승정(알히레이)', 혹은 동포의 말로는 '승감사'가 있어서, 그 지위는 승감사가 정치적 감사보다 더 높았다. 러시아가 소비에트연방이 된 후에는 공산당이 러시아정교회의 지위를 차지하여 국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정교회의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면 '메트리까' 즉 고려인들은 '몸글'이라고 부르는 증명서를 주는데, 고려인들은 러시아에 있는 일본영사관의 통제를 받지 않기 위해 몸글을 취득하였고, 그러면 몸글이 고려인들의 신분증 역할을 하였다. 춘원도 해삼위에서 다른 사람의 몸글을 하나 위조해서 러시아여행을 했다.
춘원은 오산(吾山)과 지내면서 미국에 있는 <신한민보>에서 여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제야 춘원은 <신한민보>에서 여비명목으로 보내온 1천불이 중간에 없어지고, 단지 2백불만 자신에게 주어져 러시아로 오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춘원은 몹시 불쾌하여 미국에 가는 것을 단념하고, 정교보의 발행을 돕다가, 그해 여름에 치타에서 시베리아 대한인국민회 대의회가 열려, 춘원은 정교보의 주필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곧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춘원은 7개월간의 치타에서의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춘원은 치타에서 해외를 방랑하던 동포 중에 이극로(李克魯)를 만났다. 그는 노자가 없어서 서간도에서 치타까지 약 4천리쯤 되는 그 멀고 낯선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이극로는 교민의 집에서 한철 머슴살이를 했다. 그 후 이극로는 상해로 가서 고려공산당의 이동휘와 함께 모스크바에 갔다가 독일에 유학하였다. 그 후 그는 귀국하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1948년4월 남북협상 때 이극로는 월북해서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앉았다.
치타에서 돌아온 춘원은 9월에 오산학교교사로 복직했다. 거의 1년간의 방랑이었으나 참으로 많은 서민들과 우국지사들을 만났고, 또한 세상물정을 경험하고 돌아왔다. 춘원은 1915년9월에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와세다대학교 고등예과에 편입하고, 그 이듬해 7월 동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16년10월에 <매일신보>기자 심우섭(沈友燮)과 함께 매일신보사장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신문연재소설의 청탁을 받았다. 그 결과 1917년1월1일부터 6월14일까지 한국최초의 장편소설 「무정(無情)」이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춘원은 소설가로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결핵으로 병원에 갔다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허영숙(許英肅)을 만났다. 그녀는 여의전 부속병원에서 의료실습생으로 있었는데 춘원을 보자 한눈에 호감이 갔다. 1918년 여름, 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은 춘원과 함께 귀국했고, 10월16일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동안 춘원은 고향으로 내려가 조강지처인 백혜순(白惠順)과 합의이혼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춘원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허영숙의 친정집에서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할 수 없이 춘원과 허영숙은 아베 요시이에(阿部充家)의 소개장을 갖고 베이징으로 가서 살림을 차렸다. 허영숙은 일본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산부인과의사로 취직하였고, 춘원은 방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가명으로 글을 써서 <매일신보>에 기고하며 지냈다. 그러나 춘원은 점차 민족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오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파리평화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하러 귀국하였고, 곧 일본으로 간 후, 다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춘원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맡아서 일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자금난으로 신문발행도 점차 흐지부지되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는 춘원을 국제연맹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 주재원으로 선임하고, 20일 이내에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춘원은 자신의 역량이 참으로 부족하고, 특히나 정치와 외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몇 차례 사양했으나 임시정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춘원은 제네바로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였는데, 두 달이 지나도 임시정부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임시정부는 비용 3만원을 어디에서도 융통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도산은 그가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춘원은 도산의 감화를 받고 1920년4월에 흥사단에 가입했다. 그 후 춘원은 조선처럼 식민지가 된 나라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춘원은 허영숙에서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고, 그녀는 춘원과 살기 위해서 상하이로 왔다. 그러나 춘원은 허영숙을 먼저 귀국시킨 후, 임시정부의 동지들과 도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도 곧 귀국하였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조선총독으로 보내면서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표방한 문화정치를 실시하였다. 그 덕분에 춘원은 귀국한 후 감옥에는 안갔지만, 민족지도자라는 명예에 흠집이 생겼다. 춘원은 해외로 나간 조선청년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사이토총독과 그 문제를 갖고 면담을 했다. 이때 춘원이 쓴 「민족개조론」과 「민족의 경륜」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도산이 만든 흥사단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풀어 쓴 것인데도, 같은 말을 누가 했는가에 따라서 사회적 반향이 이렇듯 달랐다. 1936년8월5일 관동군사령관출신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목표로 조선문화말살정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조선에 있는 민족운동단체들을 뿌리 뽑았다. 이로써 3·1운동 이후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가 끝나고, 조선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제의 악랄한 압제를 겪어야했다. 춘원이 1926년1월에 만든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그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수양동우회는 도산이 만든 흥사단(興士團)에서 정치적 요소만 뺀 민족운동단체였다. 1937년6월부터 1938년3월까지 춘원과 동우회회원들을 합쳐 총181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만주에 주둔한 일본관동군은 1937년7월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을 전쟁의 수렁에 빠트렸다. 일본관동군은 만주를 집어삼킬 때처럼 쉽게 중국을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중국 땅이 워낙 넓고 중국인들의 저항이 거세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전시체제로 바뀌었고,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일체의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기면 가차없이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는 조선어과목이 없어지고 한글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였다. 민생고도 점차 가중되어 몇 년 후에는 배급제로 전환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의거 발생으로 상하이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가출옥하여 지방순회를 한 후 평안남도 대보산 송태산장에서 은거하였다. 그런데 1937년6월에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도산은 이듬해 3월에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이 일로 춘원은 부친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1939년12월 동우회사건 1심에서 춘원은 7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면서 춘원은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1940년2월에는 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춘원은 자기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바꾸면서, "천황의 신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맞고, 이는 일본의 신임을 얻지 않고는 조선민족의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고 나니까 1941년11월 서울고등법원 상고심에서 동우회사건이 무죄판결로 끝났다.
1941년12월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의 대미선전포고가 미국무성에 도달하기 전에,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 같은 일본의 기습공격은 과거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일본은 독일의 히틀러가 유럽전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고무되었다. 미국은 중국을 원조하였고, 일본에게는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군수물자의 대일수출을 금지하였다. 일본은 무주공산이 된 동남아시아가 탐나서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했다. 이로써 그동안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던 미국시민들은 대일선전포고와 며칠 후 대독선전포고를 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국인의 단결로 미국 전체가 어마어마한 군수공장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가동되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고전하는 영국과 소련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미군이 직접 참전하면서 독일군은 고전을 면치못했다. 일본도 미드웨이해전에서 패배한 후에는 공격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마침내 일본은 조선인들을 징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춘원과 최남선이 일본의 도쿄와 교토(京都)에 가서 조선유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였다. 최남선은 조선유학생들에게 "나가서 열심히 싸워라, 그러면 그 경험이 이다음에 조국을 건설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고, 춘원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희생하고 공을 세워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 받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민족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라"고 부탁하였다.
춘원은 자기 한 몸 희생해서 민족을 구하는 것이 본인의 마지막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친일활동을 하였다. 1945년8월16일, 춘원은 칩거 중인 경기도 남양주군 사릉(思陵)에서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소식을 들었다. 춘원은 그렇게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일본이 한순간에 패망하다니 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민족과 역사의 죄인이 된 춘원은 「나의 고백」과 「도산 안창호」를 썼으며, 김구 측에서 보내준 자료를 토대로 「백범일지」를 써주었다.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춘원은 중환자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피란을 가지 못했다. 많은 유명한 인사들이 북한공산당치하에서도 안전할 줄 알고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그러다가 전세가 역전되어 유엔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북한공산당은 그들을 데리고 북으로 후퇴하였다. 춘원은 전향을 거부하고 끝까지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 죽었다.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문인 춘원 이광수는 최고의 친일문학가란 굴레를 쓴 채 한국인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춘원은 가고 없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춘원에게 다가가야 한다.
전에 일본군부는 1931년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에 집중된 세계의 여론을 돌리기 위해서 1932년2월에 3개 사단을 상하이에 파병하였고, 3월 중순에는 중국군을 상하이 부근에서 퇴각시켰다. 그러자 상하이에 조계지를 갖고 있는 구미열강들이 휴전을 중재하였다. 정전조인 예정일인 4월29일, 천황의 생일과 전승기념을 겸한 훙커우(紅口)공원의 축하행사장에서 윤봉길(尹奉吉)의사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여러 명의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중 일본상해파견군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은 일본으로 이송되어 치료도중 숨졌고,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시게미쓰는 1945년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함상에서 있었던 연합군과의 항복조인식에서,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한 인물이다. 윤봉길의사의 숭고한 의거(義擧)를 계기로 중국의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김구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임시정부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장개석이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조선인들에게도 좌·우합작을 종용하여, 김구는 장개석의 의견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 세력이 반쪽짜리인 김구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은 마오쩌뚱의 홍군(紅軍)인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했던 것이다. 마오쩌뚱은 국·공합작에 임하는 자세를 팔로군 간부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중·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발전에 좋은 기회이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우리들의 힘을 70%는 자기발전에, 20%는 국민당과의 타협에, 10%는 대일항전에 쓰는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25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조직되자,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종했다. 레닌이 죽자,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이끄는 상해임시정부를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은 상해임시정부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연합군의 일원으로 함께 싸우는 소련의 반대가 심해서, 임시정부산하 구미위원장 이승만이 여러차례 미국무부를 통해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3년11월22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의 정상들은 여러가지 의제 속에서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독립문제를 언급했다. 이것은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안했기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11월28일부터 12월1일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삼국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때 루즈벨트는 스탈린을 처음 대면하였다. 스탈린은 장개석과 함께 회의를 하기 싫어했으므로 연합국회의가 두 개로 나뉘어 열렸고,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최초의 국제적 합의라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카이로선언은 한국인들이 추구했던 여러가지 독립운동방략 중에 하나인 외교노선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루즈벨트를 통해서 역사한 신의 섭리였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연합국은 1945년7월26일 포츠담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의 조건으로 천황제의 유지를 내걸었다. 미국은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서 신무기인 원자폭탄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소련은 재빨리 대일전에 참전했다. 8월10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고 연합군에 제의했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는 이 소식을 단파무전을 통해 수신했는데, 일본정부는 조선총독부와 중국과 만주에 있는 관동군에게는 아무런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정무총감 엔도 유사쿠(遠藤柳作), 경무국장 니시히로(西廣)는 조선에 있는 백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치안을 부탁할 조선인을 물색하였다. 그들은 먼저 우익인사들인 송진우와 김준연과 접촉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8월15일 아침 6시30분, 좌익계의 여운형은 필동 어귀에 있는 엔도 정무총감 관저에 도착했다. 여운형은 상담한지 1시간 만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엔도의 제안을 수락했다. 한편 서울거리에는 “금일 정오 중대발표. 1억 국민 필승!”이란 벽보가 거리 요소마다 나붙었다. 그러나 12시 정오를 기해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있었지만 잡음이 심하고, 천황이 사용하는 어려운 어휘 때문에 뭐라 말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8월15일은 그냥 조용히 지나갔다. 그리고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했고, 이로써 조선이 독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시민들은 8월16일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이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상범들도 석방되어서, 태극기의 물결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편 소련군의 선발대는 8월21일 함흥과 원산으로 들어왔고,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했다. 소련군이 기차로 남하한다면 서울까지는 몇시간이면 충분했다. 조선총독부와 서울시민들은 소련군의 서울진주를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미군은 많은 희생을 치른 이오지마(硫黃島)전투와 오키나와(沖縄)전투에서 승리하고, 일본본토공격에 앞서 오키나와 섬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군이 한반도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도 38도선을 그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의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좋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남북이 분단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에서 귀국을 기다리던 임시정부의 금의환향은 차일피일 늦어졌는데, 미국이나 소련이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개석은 미국 측에 연락해서 임시정부요원들을 받아줄 것을 독촉했다. 그래서 미국은 임시정부요원들에게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김구 일행은 분하고 원통했지만 할 수없이 개인자격으로 미군의 비행기를 얻어 타고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역시 개인자격으로 임시정부요원들보다 먼저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한국민주당간부들과 함께 김구 일행을 환영하였고, 특히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는 임시정부요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돕기 위해서 <동아일보>를 통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임시정부요원들을 위한 환영만찬자리에서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신익희가 친일파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갑자기 썰렁해진 분위기속에서 송진우는 신익희에게 말했다. "임시정부요원들은 중국에서 고생을 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소? 그러나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당신들이 생각한 것만큼 호의호식을 한 것도 아니고, 마음도 편하지 못했소. 우리나 되니까 당신들을 이렇게라도 대접하는 것이오. 뭘 알기나 하고서 친일파소리를 하시구려."
그 자리에 없었던 김구는 송진우가 임시정부요원들에게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울화가 치밀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김구는 동아일보가 모금운동을 해서 모은 성금을 일단 받았으나, 경교장내에서 열린 임시정부회의에서 친일파들의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결정에 따라서 성금을 다시 동아일보로 돌려보냈다. 이번에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참을 수밖에 없었으나, 저렇게 포용력이 없어서 어떻게 정권을 잡겠다는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저들과 함께 어떻게 일을 하면 좋을까하는 생각으로 송진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의 협의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송진우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여운형에게 자중하라는 말만하였다. 송진우의 태도에 화가 난 여운형이 말했다. "고하(古下)는 말끝마다 임시정부를 말하지만 임시정부에 뭐가 있다고 그러시오? 껍데기밖에 더 있소?" 그러자 송진우가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몽양(夢陽)을 아끼기에 하는 소리요마는 제발 자중하시오!" 몽양 여운형은 그 길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찾아가 그와 손을 잡았다. 전에 몽양이 상해교민회장이었을 때, 선배이면서 같은 공산주의동지로서 박헌영과 주세죽의 결혼주례를 서주고, 자기 집 뒷방에 신혼살림을 차려준 추억이 있었다. 얼마 후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후, 미군정이 시작되자 조선인민공화국을 불허하였다.
1945년12월 연말쯤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연합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달되었다. 국내에서는 신탁통치가 미국에 의해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소련의 음모라고만 생각했다. 그러자 소련은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김구의 임시정부는 초상집에 벼락까지 얻어맞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12월28일 미군정장관 아놀드와 신탁통치문제를 논의한 송진우는, 그 다음날 저녁에 경교장을 찾아가서 임시정부의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송진우가 말했다. "이렇게 신탁통치를 반대만 한다고 해서, 우리의 힘으로 연합국의 결정을 막을 수 있습니까? 또 연합국이 5년 후에는 우리에게 독립을 시켜준다는데, 일제하에서도 참아온 우리가 5년을 더 못 기다립니까? 그때까지 우리는 힘을 길러서 보란 듯이 정부를 세우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에 김구와 임시정부요인들은 격분했다. 송진우는 밤늦게 귀가하여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그 다음날 오전 6시경, 그러니까 12월30일 새벽아침에 괴한들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그런데 1946년 새해가 되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평양을 갔다 오더니,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찬성으로 돌아섰다. 따라서 좌익들은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따라서 신탁통치찬성의 대열에 앞장섰다. 한편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당이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남한으로 쫓겨 내려왔다. 그리고 공산당을 겪어본 후, 공산당이 싫은 사람들은 자진해서 몰래 남한으로 내려왔다. 1946년1월부터 남한에서는 신탁통치문제를 계기로 좌·우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얼마 후 조선공산당은 스탈린의 제안으로 조선노동당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로당과 북로당이란 말이 생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는 참가자격을 놓고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었다. 즉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단체들만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회의에 참석시키자는 소련의 주장에, 미국은 모든 단체들을 참석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그런 와중에도 북한의 소련군정은 그들의 말을 잘 듣는 김일성과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의 당원들을 통해서 소련의 계획대로 착착 공산화작업을 진행하는데, 남한의 미군정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일으키는 폭동과 극심한 정치적 좌·우대립으로 혼란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이 공산당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자 남로당의 당수 박헌영과 간부들이 월북하고, 남로당원들이 지하로 잠적하였다. 그 후 미군정은 중도성향의 인사들을 통한 좌·우합작을 계획하였다. 이승만이 좌·우합작을 극구 반대하자,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시키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군정과는 대화가 안된다고 판단하여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무부와 접촉을 하였다. 반면에 소련과 북로당은 적화통일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남한의 좌·우합작을 반대했다. 그래서 여운형은 좌우 양쪽 진영에서 이도저도 아닌 회색분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1947년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차는 뒤의 범퍼에 올라탈 수 있는 구조였다. 한지근(韓智根)이라는 우익청년이 로터리에 진입한 차가 속도를 줄이자, 쏜살같이 달려가서 차 범퍼에 올라타 총을 쏘았다. 그해 12월2일에는 한국민주당 외교부장 설산 장덕수가 좌익분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한편 1947년 소련이 그리스공산당을 지원하는 형태로 발생한 그리스내전을 계기로, 미국의 트루먼행정부는 소련에 의한 냉전의 시대가 왔음을 인정하고, 반공외교노선으로 바뀌게 되면서,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은 해산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미 많은 시간과 힘을 소비했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주장대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의 감시하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문제를 유엔이 다루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남한에서만 유엔의 감시하에 1948년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회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요원들이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입국했을 때, 그들 중의 좌익들은 남로당과 한패가 되어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었던 김원봉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들 중의 우익들은 김구와 함께 5·10 총선에 불참하였다. 다만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전향하여 총선거에 출마하였고, 대한민국초대국회의장이 되었다.
여기서 김구의 언행이 문제가 된다. 그는 민족은 영원하다는 생각으로 통일조국을 주장하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에 결사반대하였다. 1948년4월19일, 김구와 김규식은 민족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석하려고 각각 평양에 갔으나, 소련군정이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남북협상회의에는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김구·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과의 4자회담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김구와 김규식은 허탈하게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도 김규식은 "이제부터는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성명을 냈지만, 김구는 여전히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다. 1948년7월 주한중국총영사 유어만이 어느 날 갑자기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에게 물었다. 여기서 중국은 지금의 타이완(대만)을 말한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 그러자 백범은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어만이 다시 물었다. "이것은 사견이지만 당신은 왜 대한민국정부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구는 개인적인 친분으로 말해주는 것이라면서, "내전이 불가피합니다. 남한의 실력으로는 북한의 군사력을 막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한민국이 1948년8월15일에 수립된 후에도, 김구는 독자적인 행보를 계속하면서 지냈다.
1949년6월26일 경교장에서 육군포병소위 안두희가 권총으로 김구를 죽였다. 안두희는 서북청년회출신으로, 여차하면 김구를 어떻게 해보려고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는 김구와 친분을 다져놓았고, 평소에도 군복차림에 권총을 허리에 차고 경교장을 드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생긴 당일에도 경교장의 비서관은 권총을 차고 김구를 만나러 온 안두희에게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김구의 언행은 북한공산당에게 쫓겨 남한으로 내려온 서북청년회원 안두희에게는 분노 그 자체였다. 안두희는 김구와 단 둘이서 대화를 하다가, 김구가 먼저 흥분해서 책상에 있는 집기들을 안두희에게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안두희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정면에서 김구를 향해 여러 발을 쏘았다. 김구의 시신은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50년5월30일 제2회 국회의원총선거가 있었다.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귀국하여 남북협상차 평양에도 다녀온 조소앙은, 종래의 단정반대의 태도를 철회하고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조소앙은 많은 납북인사들중 한 명이 되어 북한에서 죽었다. 만약에 김구도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 있다가, 다른 납북인사들처럼 같은 민족 운운하면서 피란도 가지 않으면서, 김규식 박사처럼 납북자로 끌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즘, 건국절을 놓고 정부와 이종찬 광복회장 간에 이견이 대립하고 있다. 이종찬씨는 임정요원으로 대한민국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선생의 손자뻘이라고 한다. 그는 건국절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 해로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는 외국에게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정부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일정기간 존재하며 활동했지만 중국과 미국과 소련에게 법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남한에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으나 정권을 잡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수립을 반대하다가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멸해버린, 그저 안타까운 추억의 존재일 뿐이다. 그래도 대한민국헌법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취지 즉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지, 임시정부의 수립일을 계승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1948년8월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은 국가의 3요소인 영토와 국민과 주권을 모두 갖추었고,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다. 남북분단이후 대한민국은 북한으로부터 한국전쟁이라는 침략을 당했고, 북한노동당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북한 주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잘 극복해 왔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은 더욱 성장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리들이 지키고, 사랑하고, 세계에 이바지해야 할 우리나라이다. 1948년8월15일날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우리가 그 날을 건국절로 높여 부르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