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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증 언 자 : 이광호(남)
생년월일 : 1959. 1. 5 (당시 나이 21세)
직 업 : 학생 (현재 인쇄업)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이광호씨는 18일부터 가두시위와 무장시위에 참여한다. 이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시내 전역을 돌며 시위참여
1980년 5월 들어 전남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 주최로 민족민주화 대성회 기간으로 들어갔다. 각 단과대학, 학과별로 민족민주화 성회 행사로서 학술 세미나와 문화행사를 치렀다. 서클연합회 홍보부 차장으로 있던 나는 '유신정권의 잔재세력으로 등장한 군부세력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작성하였다.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5월 15일부터 16일 양일 동안은 광주시내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이 도청 앞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나는 서클연합회 임원으로서 선두에 서서 시국성명서를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총학생회장이 낭독한 시국성명서는 광주시민과 애국학생에게 정치상황을 알리고 민족민주에 대한 열망을 선언한 것이었다. 16일 오후 도청 가두시위를 끝내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계엄이 확대 실시되면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18일 아침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면서 대학에 휴교령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친구 박선정의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였다. 선정이가 붙잡혀갔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마치 내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려는 듯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학교로 갔다. 학교 정문에 들어가려 하니 약 30명 정도의 공수부대원들이 군데군데 도열해 있었다. 일반학생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려고 하였더니 들어갈 수 없다고 제지하였다. 학생들은 왜 학교에 들여보내주지 않느냐고 따져들었다. 우리 학교인데 왜 들여보내주지 않느냐고 공수부대원들과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였다. 이때 공수부대원이 방송을 하였다.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으니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가정학습에 임하라. 돌아가지 않으면 서로 좋지 못하다."
라고 경고를 하였다. 방송이 들려와도 우린 평소와 같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계엄확대 중지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보도블럭을 깨어 공수부대원이 도열해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공수부대들이 재빠르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전경들은 마구잡이로 학생들에게 달려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수부대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사정없이 달려들더니 도망가지 못한 학생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이었다. 또한 발로 차고 구타를 무자비하게 하였다. 최루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학생들은 학교 앞에서 하나둘씩 붙들려가기 시작하였다. 어찌나 무자비하게 때리던지 공수부대원의 잔악한 구타와 연행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잔악한 실상을 시민에게 알리자고 시내로 나가자 하였다. 제일 먼저 간 곳은 광주역이었다. 다시 학생들이 광주고속 쪽으로 나가자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흩어졌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갔다. 거기서도 전경들이 봉쇄했다. 이때 나는 박인천 씨(금호그룹 회장 역임) 집 쪽으로 도망갔다. 다른 학생들도 많았다. 10명의 전경들이 학생들을 쫓아왔다. 전경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포위를 했다. 잡혀가는 학생과, 구타를 당하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박인천 씨 집 골목을 빠져 어느 가정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마루 밑에 숨어 약 한 시간을 버티었다. 그리고서 나오려 하니까 그 집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께서 고생한다고 더 쉬었다 가라고 하였다. 음료수를 주어 받아 마시고 충장로파출소 쪽으로 갔다.
여기서 학생들과 합류하여 학생회관 쪽으로 갔다. 학생회관 정문에서는 전경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들은 가게 사이사이로 들어갔다. 슬금슬금 발을 옮기며 전경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전경들이 있는 곳으로 돌을 던졌다. 돌을 맞은 전경들은 갑작스런 돌세례에 어찌할 줄 모르고 도청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전경들이 남기고 간 지프차와 몽둥이, 방패 등이 즐비했다. 순식간에 학생들은 기세가 등등하였다. 지프차를 불태우자고 학생들이 아우성이었다. 지프차를 거꾸로 세워들어 뒤집어놓았다. 보도블럭으로 차를 향해 던졌다. 석유통에 불을 붙여 학생들이 차를 태우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이 화재신고를 하였는지 소방차가 왔다. 물을 뿌려 불을 끄고 있는 동안 전경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학생들 틈에 끼어 도청으로 나가 그랜드호텔 (현재) 쪽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공원 쪽에서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우리는 한 대열로 뭉쳤다. 공수부대가 집결하지 않은 기계공고 쪽으로 갔다. 동명동에 있던 화천기공사 사장 집과 지산파출소에 돌을 던졌다. 몰려다니는 시위대는, "계엄 해제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고 외치고 다니며 시민들이 호응하여 주길 바랐다.
산수동에서 전경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금남로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40여 명의 전투경찰이 타고 있는 경찰차에 돌을 던졌다. "차에 불을 지르겠다!"고 경찰들을 내리게 하고는 경찰차에 불을 붙였다. 학생들이 경찰들을 인질로 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적개심이 가득하였지만 단지 허리끈을 풀게 하고 신발을 벗게 하는 등 때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헬멧과 곤봉도 빼앗았다. 몸에 소지한 것은 거의 모두 빼앗았다. 학생들의 공격에 전경들은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응했다. 40여 명의 인질을 앞세우고 시위대는 청산학원 쪽으로(전여고 뒤쪽) 나아갔다. 이곳에는 무장한 공수부대가 사방에 있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들에게 인질로 끌고간 경찰들의 무장소품인 방석모, 몽둥이, 최루탄과 경찰 인질을 연행된 학생과 바꾸자고 하였다. 하지만 공수부대원은 무자비하게 최루탄을 쏘아대고 몽둥이와 워커발로 학생들을 짓밟고 때렸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쫓아와 끌고 갔다. 우리가 바꾸자고 한 경찰 인질은 모두 놓쳐버렸다. 이때의 무수한 산발적인 싸움은 공수부대에게 타격을 별로 주지 못했다. 시위대가 비조직적이었고 치열하게 싸우지 못 하였기 때문이었다. 몇 명끼리 다시 모여 산수 오거리로 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다시 시외버스공용터미널로 갔다. 전경들에게 밀리다 한국은행 앞에서 밤 10시까지 투석전을 하였다. 몸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집에 가서 잠을 잤다.
다음날 19일 오후 4시 정도엔 도청과 금남로는 걸어다니기 어려웠다. 길거리에 지나가던 사람이 공수부대원에게 걸리기만 하면 이유도 없이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연행되었다. 나는 공원 쪽으로 해서 광주천변을 타고 학동으로 갔다. 시내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내 중심가 주변을 맴돌고 다녔다. 전남대 의대 쪽에서 10대의 탱크와 착검한 공수부대가 도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택시들이 멈추지 않고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한 택시가 내 앞에서 서는 것이었다. 택시 안에는 친구 전용호가 타고 있었다. 나보고 타라고 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산수동 법원 앞에서 내렸다. 용호가 나를 어린이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가방에 유인물과 화염병이 있으니 같이 처리하자고 했다. 유인물은 용호가 등사기로 밀어 작성했다고 했다. 우리는 유인물을 지산동 부근의 가정집에 배포했다. 이날 저녁 배포를 마친 뒤 다음날 아침 YMCA에서 만나자하고 헤어졌다. 이날도 친구집에서 잤 다.
무장시위
20일 아침 YMCA 쪽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MBC방송국에서 더 이상 가지 못했다. 공수부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전남여고 뒤쪽으로 하여 대인시장 쪽으로 갔다. 이제 시민들이 합세하여 전경과 공수부대가 있는 곳을 향해 보도블럭을 깨어 던졌다. 시민들도 더 이상은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인시장 노점상 아주머니들은 빵과 우유, 김밥 등 먹을 것을 시위대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몸조심하고 잘 싸우라고 격려해 줬다.
우리 시위대는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시민들과 일심동체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속의 뜨거움이 새삼스러이 투쟁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시민들은 위험한 곳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광남로와 시민관은 공수부대가 탱크부대를 주둔시켰다. 이쪽은 전경이 있으니 저쪽으로 가라!"
이날 오후 6시경 나는 집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집을 나왔다. 트레이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유동 삼거리를 지나 금남로로 걸어갔다. 공수부대는 다른 날과는 달리 사람들을 연행해 간다거나 구타를 하지 않았다. 조금 걸어 다니다 집에 돌아오니 친구 양관열이가 찾아왔다.
"학생이 있는 집은 샅샅이 뒤진다고 하니 도망가자!" 사태가 급박하고 위험스런 상태에까지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서둘러 산수동 오거리를 지나 무등산 전망대로 올라갔다. 특별히 갈 곳을 정해 놓은 건 아니었다.
관열이가 갈 곳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무작정 따라 나섰다.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열이와 나는 담배를 피우며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시내 어디선가 불이 타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MBC방송국이 불탄 것이었다. 얼마 후 공수부대원 서너 명이 나타났다.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우리는 동생을 만나러 왔는데 시내가 난리통이라 돌아가는 중이다." 태연히 위장하여 말했다.
"빨리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며 우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관열이가 삼촌을 통해 소개받은 목사님 댁으로 갔다. 장원동 양수장 뒤에 위치한 조용한 집이었다. 장원동에 있는 목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밖의 사정이 궁금하기만 하였다. 광주시내가 궁금하여 21일 아침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다. 아래 교도소 쪽에 기관총을 장치하고 있는 검문소가 있었다. 시내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신분증 검사를 하였으나 별 말을 물어보지도 않고 보내주기에 오히려 겁이 더럭났다. 공수부대들이 총을 겨누는 연습을 하는 것을 보니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서둘러 시내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으나 전화는 불통이었다. 광주고속터미널에 있는 집에 들어가 조금 쉬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나가려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나가면 안 된다. 개죽음당할 테니 집에 있거라. 학생들은 봤다하면 잡아간다는데 제발 집에 있거라."
하며 하소연을 했다.
"괜찮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별일 있겄소. 걱정 마시오!" 하고는 밖에 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유동 삼거리에서 공수부대가 젊은 청년을 곤봉으로 때리는 가혹한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도청으로 가려고 북동과 대한극장 쪽으로 갔다. 거리는 온통 깨어진 보도블럭, 최루탄 냄새가 자욱하였고, 웅성대는 사람들의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언제 무기고를 털었는지 시위대 청년들이 수류탄, 최루탄, 카빈총, 실탄 등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소방서 쪽에서 카빈총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시민군이 타고 있는 차를 타고 상무관 쪽으로 갔다.
나는 시민군의 차를 타고 금남로를 질주하였다. 시민들은 노인에서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거리로 나와 시민군에게 박수를 치며 환호해 주었다. 기동대는 팽팽히 긴장되어 도청과 전일빌딩 옥상에서 발포하는 공수부대의 총구를 향해 총을 쏘았다. 공수부대가 M16으로 한번 쏘면 이쪽저쪽에서 시민이 서너 명씩 쓰러져 갔다. 훈련되지 않은 시민군의 사격은 적을 강타해 내기는 힘이 부족했으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공수부대가 도청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도청으로 다가가서 계속 총을 쏘았다. 마침내 도청을 장악한 것이다.
그날 저녁 고려대생 2천여 명이 외곽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민군의 23대 차량은 담양으로 가 보았지만 아무도 없어 돌아와야만 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내가 타고 있는 차량에서 월산리 군부대를 발견하였다. 시민군들이 무기나 차량을 탈취하자고 하였다. 우리는 군부대를 향해 총을 쏘며 다가갔다. 부대를 지키고 있던 방위가 처음엔 총을 쏘지 않았으나 나중엔 거침없이 총을 쏘아댔다. 내가 타고 있는 차 안의 고등학생이 총에 맞았다. 그동안 총에 맞고 죽어간 사람도 먼 발치에서 보아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놀랍거나 두렵지 않았다.
잠시 후 공포가 온몸으로 퍼져 몸이 굳어지는 듯하였다. 서둘러 광주시내로 돌아왔다. 그리고서 공수부대가 철수하였다고 하여 사정을 알아보려고 사레지오고등학교로 갔다. 학교 건물로 올라가 전남대학교 건물을 살펴보았다. 공수부대원이시체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겁이 덜컥 났다. 다시 광주역으로 가보니 공수부대 병력이 기관차를 정비하는 것이 보였다. 곧 철수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학교로 가자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북구청으로 가서 31사단 헬기가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총을 쏘아도 공수부대는 총격을 가해오지 않았다. 교문으로 갔더니 여자의 머리가 한 웅큼 짤려 있었다. 혁띠, 수첩, 신발, 옷 등도 너부러져 있었다. 학교로 들어갔다. 학생회관으로 가보니 시민들은 자제하라는 내용의 삐라가 눈밭처럼 쌓여있었다. 식당에는 공수부대가 미처 가져가지 못한 옷무더기와 탄알, M16, 방망이, 헬멧등이 어지러이 내버려져 있었다.
계엄군 철수, 그리고 피신
학교에서 밤을 새운 후, 22일 시내 외곽지역인 두암동 자동차학원으로 갔다.
시민들이 여기서 더 이상 가면 총 맞아 죽는다며 가지 말라고 하였다. 총에 맞아 피를 뚝뚝 흘리며 기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이것을 보고 교도소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았다. 오전 11시경 공원과 광남로, 양동으로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시내소식을 알리러 다녔다. 시민들은 거리에 나와 손뼉을 치기도 하였고 차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이 올라타는 것을 만류하며 울부짖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에 올라탄 청년은 결연하기만 하였다.
도청에는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시민군을 조직적으로 정렬하여 구체적 역할을 맡겼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도청의 잡무일을 거들었다. 총기류를 세어보고 정리하는 일과 마음대로 가져가지 않게 보관하는 일을 하였다.
26일 공수부대가 저녁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황의 급격한 위험을 느끼고 광주를 빠져 담양으로 도망갔다. 이날 이후로 광주 진압사항을 목격하지 못 하였다.
29일 광주항쟁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궁금하였지만 광주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얼마 동안 저수지에서 고기 잡으러 다니며 시간을 소일하였다. 도청을 사수하며 전투를 했던 사람들이 잡혀간 소식을 들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다시 울산에 있는 외숙부 집으로 갔다. 친척집에 있는 한 달 동안 형사들이 광주 집으로 몇 번이나 찾아왔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서울 갔다. 내 아들은 이미 광주에서 떠나고 없다." 고 하여 그들을 피하였다고 한다.
독재에 항거하며
유월 한 달 동안 거의 학교에 가지 못했다. 2학기는 휴학을 했다. 광주항쟁을 겪고 나서, "총구 앞에서 배움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회의하기 시작했다.
휴학 동안 학교 친구와 선배가 모인 서클을 통해 우리는 사회구조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한 학습을 하였다. 현정권의 정치권력 정체를 파악하고 군부파쇼의 본질을 파헤치는 것이 민중이 나아갈 길이라 방향을 설정하였다. 금남로 광주백화점 위로 올라가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뿌렸다. 이 유인물은 당시 선배인 박몽구, 조양원이가 작성하였다. 그때는 유인물 하나라도 경찰들이 발견하면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은밀히 유인물 배포를 해나갔다.
나는 1981년 학교에 복학하였다. 1980년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에 관해 여전히 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서클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81년 9월 25일 학교에는 데모가 벌어졌다. 나는 학교에 가기 전에 메가폰과 유인물을 가방에 넣었다. 이날 싸움은 서클에서 몇 명이 주동하였는데 공식적으로 집회를 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신영일, 임낙평은 12시경 학생회관 식당으로 갔다. 식당 앞 테이블을 제각기 하나씩 차지하고서 나는 메가폰을 잡아쥐었다.
"학우 여러분, 1980년은 광주시민들의 넋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은 넋들의 영혼은 오늘도 그 원한에 치를 떨고 있습니다. 자, 일어나서 군부세력의 파쇼에 대항하여 싸웁시다." 그러나 식당 안의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도시락을 싸들고 나가버렸다. 식당에서 2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나왔다. 이때 인문대 담당인 임종록이가 우리를 향해 말리려고 하자 나는 그를 발로 차며 때렸다. 인문대에서 약 30명이 더 참가하고 다른 학생들은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듯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신영일과 임낙평, 그리고 나는 학생들이 호응해주길 떠들어댔으며, "파쇼정권 물러나라. 광주민중항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구호를 외치며 다니자 도서관에서 2백여 명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때 차츰 학생들이 2백명 가까이 몰려들자 앞뒤에 누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갑자기 짭새들 서너 명이 나를 끌고 경찰들의 대기차에 밀어넣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고서는 사정없이 욕지거리를 하며 때렸다.
광주경찰서에 끌려간 나는 형사들의 심문을 받았다.
"광주사태에 참가했지? 무엇을 했느냐. 너, 빨갱이지?" 하며 윽박질렀다. 또 학교에서 무엇을 했냐고 했다. 몇 날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밤을 새웠다. 나중에는 고문실로 데려가 각목을 무릎에 끼어 앉게 하는가 하면 사정없이 몸을 짓밟고 발로 뭉개 듯 짓이기는 것이었다. 형사들은 그들 마음대로 조서를 작성하여 검사에게 넘겼다. 김남옥 검사가 나를 담당했는데, 광고를 졸업한 광주 사람이라면서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만행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광주시민을 죽인 놈들이다. 군부세력의 끄나풀밖에 되지 못한 놈들!"
하고 소리치며 대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사가, "광주사태에 참가한 놈들은 모두 폭도야!"
그는 오히려 그때 활동했던 것을 반성해 보라는 것이었다. 또한, "반제반파쇼라고 외친 너는 빨갱이가 아니냐?"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검사와는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징벌방에 갇힌 나는 교도관들의 횡포에 항의하자, 나를 불러내어 귀가 찢어져 나가도록 폭행을 하였고, 몸이 퉁퉁 붓도록 발길질을 하고 나중에는 밧줄로 묶어두었다. 검치가 있을 때 김남옥 검사와 만나지 않겠다고 하자 이검방 검사로 담당이 바뀌어졌다.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나온 그도 광주 사람이라며 어떻게 광주 사람이 폭도들처럼 날뛰었는지 모르겠다고 비웃는 것이었다. 그도 똑같이 나에게 반성문을 쓰라며 을러대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어떤 말도 구구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반성문도, 대답도 거부했다. 나중에는 안기부 직원까지 동원시켜 최후진술을 쓰라고 권하였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고 법정에 섰다. 재판장은 형사와 검사가 마음대로 조서를 꾸민 것을 보고는 내게 물었다.
"광주사태에 참가하여 시위를 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고는 학교에서 국가모독을 하는 발언을 하였기에 국가보안법, 집회시위법, 공무집행방해, 폭력으로 징역 3년을 내린다."
나는 법정에서 재판장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광주시민을 죽인 너희들의 만행을 숨기고 선량한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말하는 너희들은 군부파쇼의 하수인이야! 지금 내가 네놈들의 재판을 받지만 재판정에 앉아 있는 너는 꼭 내가 재판하고 말 테다."
라며 총 쏘는 시늉을 하였다. 다시 나는
"이 잔학하고 무도한 놈들! 그러고서 한민족의 핏줄인 동포라고 자처해?" 라며 귀청이 찢어지도록 소리소리 지르자, 재판석에서 그대로 교도관들에게 끌려 장흥교도소로 송치당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반성문과 재판과정에 관해 쓰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추호도 쓸 생각이 없었다. 순천교도소에 이감되어 독방에 혼자 있게 된 뒤부터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면서도 무섭게 책을 읽었고 차단된 생활에 지치지 않고자 교도소내에서 책을 넣어달라고 항의를 하며 가열차게 2년 4개월을 살고 광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1984년 학교에 복학한 나는 다시 남은 학기를 채우고자 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만 4년의 투쟁은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하였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끔 했다. 그리고 광주항쟁으로 희생되어 간 시민의 희생을 어떻게 보상되어질까는 나와 무관할 수 없다. 다시 학교를 다니고 사회에 나간다면 지금과 같이 군부세력의 파쇼에 대책 없이 싸우는 무계획적인 응전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학생운동도 보다 조직적이어야 하고 정치의식으로 무장된 대오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되지 않았다. 나의 이력서를 가지고는 기업체에서 받 아주질 않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체는 밀착되어 나같은 사람은 빨갱이라 보기 때문에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학원 강사를 일년 정도 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소외된 자신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망막하였다. 그러다 출판인쇄소를 차렸다. 사회인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직업에 얽매어 있지만 대중의 힘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출할 수 있는 모임을 지속적으로 가졌으면 좋겠다. 이젠 결코 무계획으로 희생당하면서 끌려가 청춘이 강탈되어서도 안되고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행복과 사랑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