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상상하지도 못 할 2300여년전 맹자의 유가와는 대조적인 도가를 세상에 펼쳐놓고 떠난 장자.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분명 죽음을 두려워 않고 또 다른 시작이라 생각하며 죽음을 달게 맞이했을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을 읽으며 '무(無)' 와 '죽음' 에 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라고 하였다. 고로 천하의 만물은 무에게서 생긴다. 허심이 되라 라는 말이 있다. 그 경우 마음을 비운다 하는 것은, 마음에 충만되어 있는 선입관을 모두 몰아내어 공허하게 만들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건을 가득 채운 자루에는 이미 새로운 물건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물건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공간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물며 무한인 물을 포용하기 위해선 무한의 공간, 바꾸어 말하면 무가 필요하다. 즉 무한이기 위해서는 먼저 무인 것이 선행 조건이 된다. 무는 무한이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처음에는 장자가 말하는 무라는 것이 난해해 쉽게 이해할 수가 업었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를 왜 도라고 하는지도 알수 있을 것 같다.
장자에게 인간이 지상에 태어난 것은 조물주와 같은 다른 것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연ㆍ필연인 운명에 의한 것이다. 죽음이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면 조금도 두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나는 죽음 앞에서는 자존심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장자의 글을 읽고, 그 자존심이라는 것도 내가 죽음을 거부 할 수 없을 때,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때에야 내세울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바늘구멍 만큼 이라도 죽음을 벗아날 길이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피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늘구멍을 향해서 달려갔으리라. '사후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도 알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격렬히 거부한다. 그러나 장자는 이례적으로 죽음을 찬미하고 있다. 죽음의 세계에 간 자가 왜 죽기 전에는 그렇듯 사는 일만 원하고 있었을까 하고 뉘우칠수도 있다고 했다. '무' 와 '죽음'. 선뜻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논제지만 그동안 아무생각없이 지나쳤던 이 두 가지 논제를 '제물론'을 통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제물론'이란, 이 세상의 온갖 건엔 구별이나 차별이 없고 모든 것이 똑같다는 뜻이다. 즉 만물제동, 절대 무차별이라는 장자의 근본적인 입장을 인식론 적인 갖도록 밝히려 하고 있다. 이 제물론의 핵심은 '호접몽(胡蝶夢)'에 있다. 호접몽이란 '나비의 꿈'이라는 뜻으로 사물과 자기와의 구별을 잊은 것. 바로 물아일체의 심경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전국시대 전쟁이 끊이지 않던 불안한 시대를 살았다. 특히 그가 태어난 송나라는 당시 약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워야만 했다. 장자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사고하게 되었고, 그 자유를 추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 결과 우리들이 흔히 시비, 선악, 미추, 화복 등을 구분 짓는 일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분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그것이 여기서 강조되는 세계이다. 상대가 없는 세계, 차별이 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장자가 그린 이상향이다. 쳇바퀴 돌 듯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번 고사 호접몽이 가끔 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의 시간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