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 상사화/ 김석류
드디어 출발했다. 몇 주 전부터 개회시기를 엿보았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를 닮은 섬 위도(蝟島)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해서 더욱 기대가 컸다. 부안 격포항에서 출발을 앞두고 갑자기 국지성 호우로 배 운항시간이 단축되었다. 서울에서 먼 곳을 왔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1시30분에 배를 탔다. 변산반도에서 서쪽으로 14.6km떨어진 섬이다. 50분 만에 위도의 파장금항에 도착했다. 귀여운 고슴도치 조형물이 우리를 반긴다.
1970년대 초까지 해마다 봄과 가을 조기 떼가 몰려들 때면 전국 각지에서 고깃배와 장사꾼들이 찾아와 파장금항엔 파시(波市)가 들어섰다. 이 ‘위도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파시로 유명했었다.
지체 할 시간이 없이 유일한 교통수단인 순환버스에 올랐다. 문화관광해설사인 운전기사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입담이 좋고 제주도와도 안 바꾼다고 허풍을 섞었다. 위도 주민들의 가정사를 줄줄 꿰고 있어 한참 설명을 하다가
“어쩌까 몰라?(으짜스까 몰라?)”
추임새를 놓는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어찌나 웃기는지 나중에는 반복할 때마다 저절로 따라서 합창을 했다. 여러 방송국의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며 자랑을 했다. 고장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네가 하숙집을 했다. 위도에서 온 하숙생이 우리 또래였다. 그 때 위도라는 섬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섬에서 도시로 유학을 보냈으니 대단한 집 아들로 간주하였다. 2018년에 부안에서 열린 수필세미나에 그가 군수자격으로 축사를 해서 깜짝 반가웠다. 자기 고장에서 군수를 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었다. 원님을 배출한 섬이라고 운전기사도 자랑을 했다. 빨간 지붕을 가리키며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대궐 같은 기와집을 상상했는데 초라했다. 자식을 육지로 보내고 교육시키느라 고생했을 부모를 생각했다. ‘잘 난 자식은 나라의 자식이고 빚진 자식만 내 자식’이라는 유행어가 생각났다. 자식은 부모의 면류관이라는 성경말씀처럼 우리네 부모들은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 자부심 하나를 붙잡고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배 시간이 촉박해서 상사화군락지에 머문 시간은 딱 5분간이었다. 꽃잎이 지고 꽃대 위에 하얀색 꽃이 예뻤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고 한다. 늘씬한 키에 면사포를 쓴 신부가 수줍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청순한 아름다움에 왠지 쓸쓸함이 느껴졌다. 열흘 동안 아름다움을 뽐내며 사랑을 나누다 헤어져야하는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이제 그만 오세요. 배 놓쳐요!”
재촉하는 소리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1993년 10월에 파장금항에서 격포항으로 향하던 배가 침몰해서 292몀의 사상자를 낸 큰 사고가 있었다. 221명이 정원인데 141명을 더 태웠다. 거친 파도에 무리하게 운항을 해서 빚어진 인재(人災)였다. 안전 불감증에 경종을 울렸었다. 변산 바닷가에서 바라만 보던 위도를 겨우 찾아왔지만 천재지변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변산 해수욕장에 찾아왔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위치한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시설은 어설펐지만 가까이에서 바다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한밤중 철썩이며 밀려오는 파도소리는 금방이라도 방문을 밀치고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무섭고 떨렸지만 스릴이 있었다. 새벽녘 아무도 걷지 않은 고요한 바닷가는 아이들의 커다란 스케치북이었다.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썰물로 빠져나간 널따란 백사장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았다. 며칠 쉬었다가 친정에 들리는 것이 연중행사였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나간 오후, 한숨 돌리며 툇마루에 앉아 아련히 보이는 섬을 바라보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위도라고 알려주었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재직하다 파직을 당한 뒤 전북 부안 정사암에서 정자를 짓고 <홍길동전>을 집필했다. 그는 위도를 자신이 꿈꾸던 율도국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선뜻 배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 하루의 뒤치다꺼리도 힘겨웠다. 이제 찾아왔지만 그마저도 한 시간 허둥대고 머물다 떠나왔다.
점심식사를 하는데 위도를 대신해서 변산 마실길에 상사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뜻밖의 소식에 서둘러 변산 마실 2길 입구로 걸음을 재촉했다. 새만금사업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변산 해수욕장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초라한 노인의 모습처럼 근처의 격포항에 자기의 청춘을 내어 주었다. 우리네 인생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렸다.
바닷가에 갈매기 떼가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백로들도 떼를 지어 바위에 앉아서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바다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노란색 상사화가 양쪽에 나란히 줄을 지어 피어 있었다. 산길에 길동무가 되어주기 위해 마중 나온 것 같았다. 바다와 꽃길사이의 마실길은 아기자기해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널따란 산자락에 하얀색 상사화가 피어있었다. 마치 위도에서 눈 맞춤 할 시간도 부족했었던 아쉬움을 아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또 보고 바다를 배경으로 갖은 포즈를 취하며 인증 샷을 찍었다. 다음을 기약한 위도의 상사화에게 미안했다. 나는 당신뿐이라고 맹세를 하고 돌아 선 나쁜 남자 같았다. <위도 달빛 걷기 축제>에 가면 활짝 핀 상사화를 보고 단박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뻔했다.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열흘 핀다는 상사화는 아침 이슬 같은 인생과 닮은꼴이다. 피어나기까지의 역경과 황홀했던 짧은 한 때 그리고 금세 시드는 초라함이 꼭 닮았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모릅니다.
이해인님의 시 '상사화'가 애절하다. 상사병을 앓았던 청춘의 때를 추억한다. 청춘은 아름답다.
첫댓글 산호동 상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