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트루스와 가짜 뉴스
미화 최고액 지폐인 100달러 모델인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진퇴를 거듭하자 기괴한 착안을 한다. 인쇄공 출신으로 24살의 나이에 신문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경영한 경험을 되살려 1782년 가짜 신문을 만들어 가짜 뉴스를 실었다. 디자인을 똑같이 한 보스턴 지역의 신문을 제작해 원주민 부족들이 식민지인, 즉 미국에 살던 사람들을 살해해 그 머리 가죽을 영국 왕에게 바쳤다는 뉴스를 제작한 것이었다.
이 뉴스의 목적은 분명했다. 일단 영국군과 원주민이 한 통속임을 밝힘으로서 영국의 (대영제국이 야만인들과 결탁하는)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고 원주민들을 경계하고 독립군에 참여한 이들에게 공포심을 주어 더욱 응집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가짜 뉴스는 오늘날의 가짜 뉴스와 마찬가지로 추악했다. 원주민과 영국군의 접촉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악마화 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짜 뉴스를 만든 측이나 믿는 측이나 모두 원주민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설정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가짜 뉴스를 제작해 놓고 자신들이 믿어버리는, 그래서 독립전쟁 1세기가 채 되기 전에 곳곳에서 원주민 추방과 학살이 절정에 달했다.
가톨릭 우화집인 ‘개구리의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주말 사제관 앞에서 아이들이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자 강론준비를 하던 신부가 아이들을 쫓아낼 요량으로 저 냇가에 요물이 나타났다고 하자 아이들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조용하게 강론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밖은 다시 시끄러워 졌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냇가로 몰려가면서 신부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어느새 신부도 따라 나섰다는… 자신이 만든 거짓말에 자신이 속았다는 이야기다.
원주민의 야만성에 대한 백인들의 생각이 굳어진 것은 독립전쟁 때부터였고 그들의 편견이 숙주 역할을 했다.
가짜 뉴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은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즉 탈진실이다. 탈진실이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상’이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진영 논리처럼 진영의 입맛에 맞게 특정 부분을 과장 확대해서 진영에게 유리하게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을 때 진영에 따라 한 쪽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분명히 공격했다는 객관적 사실은 오간 데 없이 진영의 논리만 남으면서 진실은 실종되고 만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한나 아렌트)
히틀러의 선전장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출처 기억 상실’이나 ‘반복 효과’와 같은 인지 편향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할 줄 아는 선동가였다.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파간다는 조종당하고 있는 사람이 자유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포스트트루스,두리반)
이처럼 가짜 뉴스로 선동했던 히틀러가 오히려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서는 ‘뤼겐프레세(거짓말 언론)’이라고 불렀다. 요즘 한국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다.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적인 경향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우리 모두는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따라서 탈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외면하려고 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도 그러한 진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포스트트루스)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접할 때 진보건 보수건 한 발짝 물러서서 한 박자 쉬면서 사건을 바라보면 다시 보일 때가 있다. 자기 진영의 매체라고 해서 항상 진영의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한나 아렌트의 말에 등장하는 전체주의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원주민 야만화에 큰 ‘기여’(?)를 한 프랭클린은 미국 헌법을 제정했던 필라델피아 제헌의회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헌법에 기도에 대한 문항을 포함시키려 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 점도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가짜 뉴스에 잘 속거나 충직한 전달자 역할을 하는 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