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고대의 동서 교류 이길 상
가. 동서 교류의 장애물
(1) 멀고 먼 서역
서울에서 민간 항공기를 타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런던, 이탈리아의 로마,
미국의 센프란시스코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11시간 전후. 어떻게 보면 지구 전체가 1일 생활 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의 일이고, 중국 당 나라의 고승 현장삼장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641년,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험한 길을 넘어 우전(코탄), 차말, 선선(미란)을 거쳐서 장안에 도착한 것이 645년. 중간에서 1년간 머물기는 했으나, 어찌 되었던 3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서역으로 통하는 길이 열린, 7세기 중반의 이야기고 그 전에는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이 험한 서쪽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막연히 서쪽의 땅, 즉 서역(西域)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기원전 2세기 말 한(漢)나라의 장건이 직접 다녀옴으로서 이곳의 사정이 밝혀지기 시작하였고, 그곳의 진기한 산물이 중국의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내왕과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 지고, 후대에 비단길(Silk road)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사시대부터 이 비단길의 북변, 키르기스 초원지대에는 유목민들이 활동하면서 동서간에 교류가 이미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달된 발굴에 의해서 그 면모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장안을 출발, 하서4군을 지나 돈황(툰황)에 있었다는 옥문관을 통과해서 하미(哈密,伊吾), 고창(까오창 : 투르판) , 우루무치, 알마아타를 거쳐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길을 톈산북로라 하였고, 옥문관에서 하미, 고창, 언기(옌치), 톰스크로 이어지는 길을 톈산남로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장이 돌아왔다는 옥문관에서 우전(코탄), 선선(미란)을 거쳐가는 길이 개척되므로써, 이 길을 서역남도라고 불렀는데, 이 서역남도가 톈산남로가 되었고, 톈산남로는 톈산북로가 되었으며, 원래의 톈산북로는 길이 멀고 험해서 자연적으로 이용이 없어지게 되었다.
톈산남 북로는 서쪽의 소륵에서 만나, 다시 서쪽으로 세 갈래로 갈라져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캬자흐스탄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전한 무제 때 하서(河西) 4군을 설치하고, 만리장성을 이곳까지 연장하였는데, 이곳의 장성은 흙으로 싼 토성이다. 이 하서 4군이 서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회랑(廻廊)지대인 동시에, 고비사막과 티베트고원의 중간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비사막에는 흉노를 비롯한 몽골제족이, 티베트 고원에는 강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이 있어서 이들간에 힘을 합치면 중국으로서는 그 처리가 여간 복잡해 지는게 아니다. 따라서 이 회랑지대의 중국지배는 서역 통로 이외에도 양대 유목세력의 결속을 막을 수 있는 이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파미르고원(Pamir Plat)은 해발고도 5,000m가 넘는 10여 갈래의 복잡한 주행(走行)을 보이는 산맥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 서 투르키스탄(Turkistan)을 좁은 뜻의 중앙아시아 지역이라고 한다.
동투르키스탄은 현재 중국의 신강위그루(新疆維吾爾) 자치구 지역이며, 서투르키스탄은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포함 된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진 곳이고, 여행의 기회도 많지 않으며, 교과서에도 약간 맛만 보일뿐 상세한 것은 없고, 선생님들께서도 이 단원의 수업은 대충 지나가는 것이 제 경험이며,지금 까지 수없이 치러온 대입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능시험에서도 출제된 적이 거의없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더 보태어 설명을 드리면,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동투르크스탄이라고 하고 서쪽을 서 투르크스탄이라고 부른다. 투르크는 우리와 같은 알타이어계의 유목민으로서 중국 사서(史書)에 수 없이 나오는 돌궐(突厥)이 그들이고, 스탄이란 땅을 의미하는 그들의 언어다.
그 후예들이 지금도 아나톨리아 고원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투르크 공화국을 비롯해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데, 많은 나라들 가운데 스탄이라는 글자가 끝에 붙여 있으면 이들의 후예거나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언어 중에 아리아계족들은 아, 안, 나, 란, 란트(랜드) 등을 끝에 붙이고, 투르크계 족들은 단, 탄, 스탄을 끝에 붙이고, 우리는 따, 따아, 땅 이라고 하여 끝에 붙인다. 그렇다면 어떤 연관이 있을 법 하다. 하지만 아직은 연구된 바가 없다.
학자들에 따라서 알타이어계의 3어군, 즉 몽골어와 투르크어, 그리고 만주 퉁구스어로 크게 분류하고 우리들은 언어적으로는 퉁구스에 근접하고, 인종적으로는 몽골에 근접. 그러나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어계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세 언어의 동질성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어서, 앞으로도 많은 논란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투르크스탄, 즉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이곳이, 사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지역은 인도유럽 인종, 또는 이란계 인종(이란의 인도유럽계 인종)의 거주지였으나, 동투르키스탄은 12세기 말경 완전히 투르크 화하였고, 서투르크스탄은 14세기 중엽부터 투르크화가 진행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는 아직도 이란 인이 남아 있고 소련 연방이 붕괴된 후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생존의 길을 찾고 있으며, 많은 세월이 흐르는 사이 새로운 풍토에 적응했거나 혼혈되어 순수한 투르크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투르크의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인종이 매우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파리르고원 동쪽 이른바 동투르크스탄에는 북쪽으로 평균 해발고도 3,600∼4,000 m. 길이 2,000 km, 너비 400 km 의 거대한 톈산산맥(天山山脈)이 키르기스스탄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고, 그 남쪽 즉 티베트 고원의 북쪽에는 길이 2,500 km의 쿤룬산맥(崑崙山脈/곤륜산맥)이 있어서 5,000 m를 넘는 높은 봉우리가 많다.
이 세 지점의 중앙에 타림분지(Tarim Basin)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면적이 약 70만 km2. 남북 길이 500 km. 동서 길이 1,500 km. 평균 해발고도 800∼1,200m.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남, 서, 북쪽은 높은 산지로 막혀 있고 그 동쪽만이 몽고의 고비사막과 이어진다.
이 타림분지 안에는 면적이 일본열도 크기만한 약37만 km2의 타클라마칸사막(Takla Makan Des)이 버티고 있어서, 높이 100 m 안팎의 크고 작은 사구(砂丘)가 이어지고, 사구가 바람에 파도처럼 밀려 거대한 모래 산이이리 저리 이동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유사(流砂)라 하여 교통의 큰 장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주는 봄철 황사가 이곳에서 발생하여, 중국의 화북을 거치면서 황토층을 이루어 황하를 만들고, 그 여진(餘塵)이 우리나라를 거쳐 멀리 미국의 동해안 까지 간다고 한다.
높은 산에 막힌 이곳은 어떤 저기압도 통과할 수 없으므로 비라고는 전혀 오지 않는 불모의 땅이다. 따라서 사람은 물론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은 곳이었으므로, 타클라마칸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말은 위구르어(語)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뜻이라고 한다.
화염산, 백룡퇴 등 손오공으로 더 잘 알려진 서유기(西遊記)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고, 이런 사막 기후는 그 후 사막을 계속 확장 시켜, 원래 사막의 주변에 있던 크고 작은 나라들이 모래에 묻혀 있다가, 오랜 세월을 지나 근년에 와서 발굴등을 통해서 다시 밝혀지게 되면서 이지역의 내력도 비교적 소상히 밝혀지게 되었다.
돈황석굴이라고 알려진 막고굴도 20세기 초 프랑스 사람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 것 역시 이 때부터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투르크스탄의 이러한 지형적인 자연조건은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지만, 톈산산맥과 쿤륜산맥의 봉우리에 쌓인 눈이 여름철의 강한 햇볕을 받아 녹으면, 계곡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삽시간에 큰 강을 이루기도하는데, 저녁이 되면 갑자기 물이 없어지고 강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곳을 처음 지나는사람들은 마치 도깨비에 흘린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오쯤에 산정의 눈이 녹기 시작해서 물이 계곡을 타고 내려와 저녁무렵이면 큰 강이 되었다가, 햇볕이 약해진 오후가 되면 눈이 녹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밤중이 되면, 물은 내려오지않고, 내려온 물은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는 건천(와디)이 되기때문이다.
이런 오지에도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없지만, 그 물을 이용하여 목축과 농경을 이루는 오아시스가 생겨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다가 기원 전 2세기 말 장건(張騫)의 서역 파견으로 비로소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오아시스 지역을 연결하는 길이 열리면서 동서간의 교역도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도 동서간의 교류는 이루어 지고 있었는데 그역할을 담당한 것이 이른바 초원 유목민들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스키타이 족과 흉노족이라고 한다.
나. 초원(草原)의 길(Steppe route)
스키타이(Scythian) 족.
사막한계와 건조한계 기후의 접점으로서 강수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교목이 자라지 못하고 관목이나 작은 풀이 늦은 봄부터 초가을까지 자라면서 광활한 초원을 만든다.
이 초원지대에는 선사시대부터 유목민들이 활발하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이 문자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정확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주변 국가들에 의해서 쓰여진 기록이나 이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 그 편린을 규명할 수 있고 이들 가운데 스키타이 족과 흉노 족이 그리스와 중국 측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타이(Scythian)족은 BC 6세기~ BC 3세기경 남부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기마유목 민족으로서, 항아리의 부조(浮彫)나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에 의하면 장신(長身)과 강건한 체구, 광대뼈가 나오고 털이 많은 것으로 보여지는 등 이란계 유럽인종으로 밝혀졌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그의 역사에서, 이들 스키타이를 왕후(王侯)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농민 스키타이, 농경 스키타이 등 4개의 집단으로 구분, 이 중 왕후 스키타이가 지배자로서 군림, 아조프해(海) 북쪽 연안에 궁전을 건립하고 돈강과 드네프르강 사이의 초원과 크림반도를 영역으로, 주변 유목민과 연맹 체를 형성하여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유로 인해서기원전 2세기경에는 멸망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흑해 연안의 그리스인 식민폴리스와 접촉하여 축산물, 우랄산 황금, 북방산 모피, 수탈한 곡물 등을 제공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유 및 각종 공예품 등을 사가는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와 같은 교역의 결과 이란적인 요소가 많았던 스키타이문화가 BC 4세기 이후 그리스 고전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독특한 스키타이 문화를 만들어 냈고 대표적인 것으로 동경(청동거울)과 단검, 청동 솥, 장대(竿頭/간두), 세 날개 화살촉, 주발형 흑색토기, 각종 장식판 등의 유물을 남기고 있으며, 입체적 또는 투조풍(透彫風)의 동물 의장(意匠)과 청동거울은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위쪽의 두 그림 중, 위에 것은 스키타이 왕 묘에서 출토된 펠트벽걸이로 생명의 나무를 들고 있는 여신을 묘사한 것이고 아래 것은스키타이 왕의 서임식을 묘사한 장식 판으로, 그리스의 장인들에 의해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25년 소련의 고고학자인 카졸로프(Kazlov :1863~1936)가 인솔한 러시아 지리학회 몽골 티베트 학술 탐험대가 외몽고의 하라(Zara)강 부근의 노인울라(Noin-ula)산에서 흉노의 고분을 발굴하여 나무로 만들어진 관 속에서 인골을 비롯하여 수 많은 부장품을 발견하였다.
그 가운데 각종 장식품과 모직물의 의복, 깔개 등은 동물 의장(Animal style)이 뚜렷한 스키타이 양식이다. 그 외 거울(銅鏡)을 비롯하여 수많은 황금 제 용기와 장신구는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에 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스키타이 족들도 그리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도 이루었는데, 이것이 동방의
여러 유목민족 사이에 확산되어 알타이 산지의 마이에미르의 쿠르간(고총/高塚) 문화와 왕소군의 묘가 있는 오르도스지방의 쑤이위
이 흉노 족에 의해서 전파된 스키타이 문화가, 전국시대의 중국문화에 영향을 끼쳤으며, 다시 한국과 일본에도 파급되었다고 보고 있다.
왼 쪽의 그림은 일제시대 경북 영천시 금호읍 어은동에서 출토된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로서, 우리나라 청동기 편년을 설정하는 중요한단서가 되고 있다. 동물 의장(Animal style)의 양식은 스키타이 계통이 뚜렷하고, 정교한 제작 기법과 사실적인 묘사는 사물을 형상화 한 중국의 청동기와는 여러 면에서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이 스키타이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흉노(匈奴) 스키타이가 그리스의 식민폴리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달리 기원전 3세기에서부터 1세기 동안, 고대 중국에서 흉노만큼 괴롭 힘을 준 이방인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한 없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진저리 나는 종족명을 흉노라고 붙였다. 보기에도 끔찍하고 흉칙한 종 놈들이란 뜻이다.
북방유목민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등장한 것은 흉노가 처음은 아니고 주(周)대의 험윤, 훈육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들이 흉노의 전신이라고 추정은 하지만 확증은 없고 흉노족의 기록상 등장은 전국시대 부터라고 한다.
전국시대가 되면 이들이 자주 중국의 북변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장성을 싸기 시작하였고,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도 안심이 안되는 것 역시 이들이었기 때문에 인류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할 수 있는 만리장성을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의 고조 자신이 이들의 토벌에 나섰다가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모돈선우의 비(처) 알씨에게 다량의 뇌물을 바치고 겨우 화의가 성립되어 풀려 나는 곤욕을 치루기도했었다(기원전198)
이것을 "백등의 포위"라고 역사에서는 이야기하는데, 화의가 성립되어 포위를 풀기 까지는 최대한의 유리한 조건들이 제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내용은 전하는 것이 없다.
이후 한은 흉노에 대해서 아주 소극적이었고, 흉노에서도 모돈선우 이후에 노상, 군신의 두 선우가 잇달아 군주가 되어 그 사업을 계승하였는데, 한에 보내는 국서에 "하늘에 선 대선우가 삼가 묻노니, 황제는 평안하신가?"라 할 정도로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한으로서는 이 흉급하고 사나운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다량의 비단과 귀중품을 보내고, 또한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 보내서 우호를 약속하는 등 고육지책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우(單于)라는 것은 칸 이전에 이들이 붙였던 군장의 호칭이고 그 비(妃)을 알(閼)씨라 했다.
한나라가 이렇게 겸손한 태도를 보여도 흉노는 변경에 자주 침범하여 백성을 사로잡고 곡물을 약탈하는 등 만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흉노란 한(漢)에 비하면 일개 현 정도의 인구도 안되는 미미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수 십 배의 덩치를 가진 한나라가 마냥 당할 수만은 없었다.
한 왕실이 그 지위가 튼튼해 지고 국고가 충실해 진 무제 때에 이르러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인 태도로 돌아서게 되었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머나먼 서역이 중국에 알려지고 교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새로이 개척된 교통로를 후세에 이르러 비단길이라 하였다.
위의 왼쪽의 그림은 스키타이 계통의 흉노 족의 소머리 형 청동 제 장식품이다. |
출처: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이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