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9월 8일 금요일 맑음
“안개가 잔뜩 껴서 산이 캄캄혀. 그래도 약 주러 갈겨 ?” 장모님이 깨우신다.
“줘야죠. 때가 늦어가요”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바로 눈 앞도 침침하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이 펼쳐진 것 같다.
‘이런 날은 상승기류가 잘 발생하고, 밤나무 잎에 안개 이슬이 내려 앉아 분말의 활착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에 농약하기엔 적당한 날이다.’ 라이트를 켜야 10m 앞이 보이지만 그래도 익숙한 길이라 천천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살포기를 등에 지고 한 바퀴를 돌았다. 올 해 농약은 끝이다.
집에 오니 공사장 일군들이 벌써 와 있네. 이 안개 속을 뚫고서 대전, 천안에서 왔단다. 목숨 걸고 왔을 거다. 주말농장 시절 이른 아침에 금강 주변의 지독한 안개에 덮인 고속도로를 달리며 가슴 졸이던 때가 생각나더라.
‘먹고 살기가 저렇게 힘이 드는 거지’
두어 명의 일군들이 중국말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조선족 동포들 일거다.
요즈음은 공사판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외국 근로자들이 없이는 안 된다던데....
먼 타국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는 그들이 안 돼 보였다.
처자식과 일 주일만 떨어져도 눈에 삼삼한데 저들 마음은 어떨까 ?
농약을 조금 남겨와서 집 주위 콩밭에 뿌려대니 장모님 얼굴이 환해지신다.
“안녕하셨어요 ? 오랜만입니다.” 아침식사 후 광생리로 밤을 달리러 갔다.
해가 바뀌어 만나는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에이, 밤이 많지도 않고 좋지도 못해요” 밤 자루를 내밀었다.
“올밤은 다 그렇죠”하며 아쉬워하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런데 우리 농장에 멧돼지가 있어 밤을 먹어대는데 어떡해야죠 ?”
“멧돼지요. 여기저기 널려있어요. 막 떼로 몰려다니면서 밤도 큰 것만 골라 먹어요 ” 내 일만이 아니다. “그 것 말고 고라니도 밤을 먹어요” “예 ? 큰일이네” “멧돼지는 밤을 먹을 때 한쪽 입으로 먹으며 한쪽으로는 껍질을 뱉어내는데....” “예 그래요. 뱉어낸 껍질이 여기저기 널려있어요” “그럼 멧돼지가 맞네” “땅도 푹푹 파 놓던데요” “맞어 맞어 돼지여” “이 걸 어떡해야죠 ?”
“포수한테 부탁해야죠” “포수요 ?” “내가 아는 포수한테 얘기해 볼 게요” 사장님이 나서시며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59kg, 12만 팔천원이다. 작년보다 많이 적다. 멧돼지에게 빼앗긴 걸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늦밤이 떨어질 때면 나아지겠지.
‘멧돼지보다 한 발 먼저’를 구호로 정하고 서당골로 들어갔다.
이 놈이 건드리기 전에 먼저 주워야 한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그런데 밤이 떨어진 곳에는 가는 곳마다 돼지 발자욱이 먼저다. 어제는 없었던 곳에도 발자욱과 파 놓은 구덩이가 보인다. “끔찍한 놈 안 다닌 곳이 없네”
산 위까지 올라와 밤을 까먹은 껍질을 뱉어놓고 변까지 남겨 놓았네.
멧돼지 똥은 처음 보았다. 방금 생산한 싱싱한 모양으로 보아서, 이 놈은 내가 저 아래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느긋이 식사를 하고, 편안히 화장까지 한 것 같다. 내가 가까이 오면 슬그머니 사라지고....
‘이놈 보통 아니네.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관찰하고 있을 거 아닌가’
모처럼 돼지 입이 안 탄 밤나무를 찾았다. 밤이 벌겋게 흩어져 있다.
‘이래야 되는데....’ 속이 더 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