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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달케 (Dr. Paul Dahlke; 1865-1928)
파울 달케 박사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의 김나지움(인문계 중고등학교에 해당)을 다녔고, 이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의사 국가고시를 합격한 후, 그의 재능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동종요법(同種療法)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유능한 의료인으로 명성 얻어
그렇다고 달케 박사가 단순히 치료나 하는 그런 평범한 의사는 아니었다. 그의 탁월한 치료 능력은 젊은 달케 박사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그 성과와 명성을 얻도록 했으며, 그가 개원했던 베를린을 벗어나 타지역에도 유능한 의료인으로 알려지게 했다.
그러나 달케 박사의 천재성은 의사로서의 치료행위에만 스스로를 국한시키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의 의료활동이라는 직업적인 영역을 벗어나, 깊은 사고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외과의사로서의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만물이 진짜 있는 그대로"라는 현실에 아주 드문 예리한 통찰력을 보였다.
달케 박사는 의학을 벗어난 다른 영역으로 관심을 기울여, 동양의 종교,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나 논문이 처음에는 영향을 주었으나, 곧 이를 넘어서 달케 박사 스스로 끊임없는 조사와 질문으로 계속 공부했다.
그는 불교를 처음 만났을 무렵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불교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어떤 감성적인 충격이나, 결정적인 사건의 모습은 아니다. 땅속에 뿌려진 씨앗 같이 천천히, 쉼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1898년에 와서 나는 나의 첫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가보고 싶었던 남태평양의 섬을 여행하고 귀국할 무렵 불교는 내 안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이듬해 즉시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분명한 목적지인 인도로 향했다. 그러나 단순히 인도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불교를 보기 위함이었다."
달케 박사는 다음과 같은 회상도 더듬고 있다.
"1900년 봄에 콜롬보에 도착하여, 나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단번에 만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내가 불교와 그 가르침에 정식으로 입문한 때는 바로 1900년이었다. 그후 나는 인도와 나의 조국 독일을 꾸준히 계속 다니게 되었다. 당시 나는 전혀 다른 기후와 피곤함으로 줄곧 아파야 했다."
이런 고행 속에서 법(法)에 대한 내적 자각의 결과는 바로 수많은 저술로 나타났다. 서구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의 주요 저서 대부분은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중 몇 권은 네덜란드어와 일본어로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1914년까지 달케 박사는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다. 당시 그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을 휘젓는 혜성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평생 그에게 가장 강한 관심과 매력을 끈 것은 다름 아닌 고대 불교 문화가 있었던 여러 장소였다. 그 중에서도 스리랑카는 그가 특별히 자주 찾던 곳의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독일로 돌아와서 전운이 감도는 불안한 상황을 보고, 더 이상 조국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의사로서 다시 병원을 여는 것이었으며,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사로서의 소명을 다했다. 곧 그의 옛날 환자고객들에게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그의 유명한 의학 지식과 치료법을 다시 베풀고 나눌 수 있는 기쁨을 느꼈다.
환자들에게 불교교리 가르쳐
한편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알리는데 정열을 기울였다. 당시 서구인들은 불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요구가 점차 커지는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한 달케 박사는 기존의 입문서에다 이제는 신뢰할 만한 불경의 독일어 번역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미 팔리 경전의 독일어 번역 등 많이 있었지만, 대개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외국적인 것과 혼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달케 박사의 법구경 번역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번역이 아니라, 달케 박사 개인의 20여 년의 경험과 공부의 결과가 구체화된 상세한 설명, 각주가 붙은 원론적인 가르침이었다. 그 당시 달케 박사는 계간 「신불교(Neo-Buddhistischen Zeitschrift)」를 거의 혼자 힘으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독창적이고 신선한 방법으로 불교가 삶의 모든 문제 해결에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를 잘 기술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알고 실천하는 문제는 불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저술 활동만으로는 여전히 미흡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불교의 집(Das Buddhistische Haus)'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기독교 모태신앙과 더 이상 맞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물질주의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을 구상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수년 후 독일 화폐의 인플레이션이 최고조에 도달하여 매우 어려울 때, 베를린 북동부 교외에 위치한 프로나우(Frohnau)의 숲으로 둘러진 약 9ha의 땅을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그래서 달케 박사는 독일에 불교를 위한 확고한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그의 큰 뜻을 실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천천히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문제는 건축비였는데, 매일 매일 낮 시간은 의사로서 일하면서 불교의 집 건축비를 벌고 밤에는 불경 번역과 집필로 매우 힘겨운 생활을 했다.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며, 그의 계획을 완수하는데 심혈을 기울임에 따라 마침내 1924년 8월에 달케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불교의 집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생생한 표현이자, 기념물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의도였다. 이 불교의 집은 법당, 거주 공간, 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회합실이 따로 지어졌으며, 조용히 수련하거나, 불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사채와 객실이 있다.
오계 지키며 수행자 삶 지향
이 불교의 집은 내적 정화, 순화의 장소로 자리 매김되었으며, 불교 승려의 삶과 서구의 생활 조건의 적절히 조화된 곳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요구 조건 둘 다 모자라기 때문에 이 곳은 절로서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곳은 절과 일반 신도의 습관의 중도적 해결책의 모습이었다. 이곳 거주자는 기본적인 5계를 지켜야하며, 내적인 평안과 집중을 위한 노력은 바로 이 곳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어려움은 서구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탐욕과 생존의 무자비한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달케 박사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제자들의 이런 대담한 시도는, 마치 망망대해의 산더미 같은 험난한 파도에 직면한 조그마한 돛단배처럼 처절한 사투를 벌어야 했다.
마지막 수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불교의 집을 운영하면서 피로의 누적으로 심장병에 걸렸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또 다른 프로젝트인 북해의 질트섬에 수련의 집을 세우는 일을 추진했다. 결국
주요 저서
1903년 「불교 이해 요약」
1904년 「불교 이야기」
1912년 「세계관으로서의 불교」
1913년 「부처님 품으로부터」
1914년 「종교와 도덕으로서의 불교」
1919-1922 「팔리 경전에 관해」
1926년 「불교 : 인류의 정신적 삶에서의 위치」
1928년 「현실의 가르침과 삶의 길로서의 불교」
1918년 이후 「신불교 잡지」<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1868-1945)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박사는
그러나 갈수록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 결국 다시 법학을 공부하게 됐다. 성공적으로 법학 공부를 마친 그는 법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고 법조계의 판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판사라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들보다는 수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지식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아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서 출생
쇼펜하우어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칼 오이겐 노이만이 번역한 불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불교의 깊은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후 주법원 판사인 그림 박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작은 불교연구 및 신행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기독교도들간의 전쟁은 이렇게 그림 박사로 하여금 평화의 철학이자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림 박사가 불교활동을 본격화할 당시 북부 베를린에서는 파올 달케 박사가 활발한 불교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 박사는 파울 달케 박사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신교인 루터 복음교도였던 달케 박사와는 달리 그림 박사는 로마 가톨릭신자였으며, 달케박사는 동프로이센 출신이였지만 그림 박사는 남부 바이에른 출신이었다.
또 달케 박사가 자연과학도(의학)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과는 달리 그림박사는 정신/인문학인 신학도였다는 점도 하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불교 단체는 2차대전이 끝난 뒤인
그림 박사는 중년이후 천식을 앓고 있어서 53의 나이로 조기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불교연구 및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불교적 세계조명(Buddhistischer Weltspigel)」이란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때 자이덴슈테커가 편집인, 발행인 겸 기고가로 함께 동참했으나 1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정권동안에 고불교회의 활동이 금지되고 심지어 그림 박사의 활동도 매우 엄격히 통제되고 관찰되었다. 그가 쓴 글은 물론 출간한 책이나 잡지들까지 모두 강제 몰수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모임의 활동도 완전 금지 당했다.
이런 까닭에 그림 박사는 답답한 뮌헨을 벗어나 풍광이 좋은 암머 호반가의 우팅(Utting am Ammersee)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를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독일불교의 선구자격인 칼 오이겐 노이만과 자이덴슈테커를 수년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대학에선 신학 공부에 전념
그러나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 후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되며, 이곳 그의 저택은 오늘날까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절친했던 동료 판사가 그를 일컬어 '바이에른의 가장 인자한 판사에게(Dem mildesten Richter Bayerns, 영역 Bavaria's most benevolent judge)'라고 애도한 추도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사후 고불교회는 프랑스인 루이 안시아노(Louis Ansiano 1893~1961)가 이끌었다.
그림박사의 딸인 마야 켈러-그림(Maya Keller-Grimm)과 그의 제자 중 여러 불교저작들로 잘 알려진 막스 호페(Max Hoppe, 법명 담마팔로)가 실제적으로 주도하다가 1951년 공식적으로 단체를 이끌게 됐다. 1977년 말 켈러-그림여사는 단체와 야나출판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고불교회는 1948년 이후 격월간 「야나」(Yana 乘수레라는 의미)를 오늘날까지 꾸준히 발행해 오고 있다.
그림 박사는 달케 박사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글 솜씨가 있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해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추려서 번역하기도 했다. 일생동안 수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총 10권의 책을 썼다.
「삼사로 Der Samsaro 윤회」(1935년초판, 1960년 재발행), 「행복 Das Glueck」(1933년 초판, 1979년 재발행), 「당신을 위한 불도(佛道) Der Buddhaweg fuer dich」(1935년 초판, 1974년 재발행)와 「불교의 과학Die Wissenschaft des Buddhismus」(1923년 초판, 1978년 재발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이성의 종교(Die Lehre des Buddho, die Religion der Vernunft)」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1915년 뮌헨의 피퍼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출판됐으며, 1957년 15판이 발행되면서 더욱 내용이 보강됐다. 그리고 1979년에는 18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주저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국제적으로도 영어, 불어, 심지어 베트남어로도 번역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그 자신이 불법을 공부하고 실제 수련한 것을 바탕으로 잔잔히 썼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도반이었던 자이덴슈테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서 10권 저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심오하게 적합하게 표현한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여태껏 보지 못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초월적인 주체에 대한 긍정과 강조는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네…'
그림 박사의 저작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발행되고 미발표 글들은 「야나」를 통해 소개됐다. 그리고 그의 딸 마야 켈러-그림 여사와 막스 호페의 주도로 그림 박사의 평소 생각과 사상을 정리해 「위인의 빛 속에서- 질의 응답으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불교 교리서를 1979년 발행했다. 그리고 마야 켈러-그림 여사도 아버지 못지 않게 불교 공부와 활동을 하면서 1977년과 1979년에 「부처님의 영토에서」란 불교 서사시를 두 권으로 발행하여 널리 알려 지게 된다.
그가 남긴 저작과 가르침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를 중심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고불교회 지부를 결성하여 공부하도록 했다.
평화롭고 잔잔한 남부 독일 암머호반가의 우틴에는 매년 두 차례 막스 호페가 중심이 된 세미나가 열리고 있으며, 일요일마다 불교 강연, 법회, 단체 수련, 참선, 그리고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
크리스마스 험프리(Christmas Humphreys, 1901∼1983 )
일반적으로 법에 미친 종교의 영향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인류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와 법은 가시적으로 확연히 구별할 수 없다. 금세기까지도 이러한 관계는 비교적 밀접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불문법(common law)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교구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 영미법은 어느 정도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저명한 법학자 집안서 출생
그러면 한 개인인 판사의 종교가 어떻게 법적인 사고와 해석, 접근에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문제의 답은 판사의 정치적 신념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판사 개인의 종교가 판결에 미치는 정도는 그가 얼마나 신행활동을 하고 있느냐의 정도와 밀접하리라 생각된다.
아시아권 바깥의 경우, 특히 서구에서의 불교신자인 판사의 법적 사고와 판결에 미치는 불교의 영향은 놀랄만하다. 지난번 독일의 게오르그 그림 판사를 두고 동료 판사가 말한 '바이에른의 가장 인자한 판사'라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 소개하는 크리스마스 험프리 판사는 영국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서구에는 다수의 불교 신자인 판사들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그 수가 훨씬 더 많다.
판사 크리스마스 험프리는 저명한 법학자 트라버스 험프리 경(卿)(Sir Travers Humphrey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법원 판사로도 봉직했으며, 그의 어머니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사법재판소의 판사로 활동한 명문가였다.
미국과 서구에서 크리스마스 험프리는 지칠 줄 모르는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불교 신자들의 리더 역할을 한 사람으로 매우 널리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법조계에서의 명성과 성과는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단독으로 혹은 공저한 책이 무려 37권이 되는데, 그 중 3권만이 법률서적이고, 나머지 34권은 불교 관계 저술일 정도로 불교인으로 더 비중 있게 생활했음을 볼 수 있다.
『불교』 『불교탐구』 등 불서 34권 저술
이 세 권의 법률 서적도 흥미롭게도 주로 심각한 법률 연구보다는 '무엇이 진짜 범죄인가'라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1951년 출간된 『불교(Buddhism)』가 있으며, 『선, 삶의 길(Zen, a Way of Life)』, 『불교탐구(Exploring Buddhism)』 등이 있다.
캠브리지대 재학 중 불교에 심취
시간이 지날 수록 험프리는 더욱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홀에서 공부하는 동안 불교에 완전히 귀의하였다. 그의 형이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는데 이 엄청난 충격의 가족사가 험프리가 새로이 영성적인 추구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이런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고통스런 죽음과의 부딪힘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다.
1924년 최대 불교기구 '불교회' 창립
1924년 험프리는 최고의 법률가의 모임인 인너 템플의 정회원이 된다. 인너 템플(Inner Temple)이란, 4대 주요 법원 중 가장 오래되고, 부유하고, 가장 배타적으로 특별한 모임이다. 여기서 우리는 험프리의 엘리트적인 배경과 성장을 엿 볼 수 있다. 실제로 험프리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영국 주류사회바깥의 다른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영국 상류층 사회 계급의 전도 유망한 판사로 보였다.
공개강연-수련회-출판 불교 전파 주력
바로 이해 1924년, 험프리는 아시아권 바깥의 최고, 최대의 불교 단체인 불교회(the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게 된다. 이 불교 단체는 일반 불교 신자에게 어느 특정 종파에 치우치지 않으며, 공개 강연, 출판, 수련회 등을 통하여 영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중도(The Middle Way)」라는 계간지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와 같이 험프리는 형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를 연구,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욱 불교 연구를 더하게된다. 1934년 그는 '오울드 베일리(the Old Bailey)'라고 더 잘 알려진, 런던 중앙형사재판소(Central Criminal Court)의 검사가 된다.
1950년, 고등형사 재판소의 수석검사가 되었으며, 1955년 최고형사재판소의 정검사가 되었다. 1959년 왕립 재판소의 최고 검사가 되어 비단으로 된 법복을 입게 되었다. 이제는 형사 사건을 다룸에 더 이상 공격적인 역할이 아닌 변호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험프리는 검사로서의 역할에 많은 의문을 가져서 판사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2년부터 판사에 대한 관심이 있어 온 그의 희망이 오랜 검사 생활 후인 1968년 남들은 은퇴하고도 남은 68세에 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2년 험프리는 런던 중앙형사재판소장이 되었으며, 1968년 같은 재판소에서 종신 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법복을 벗은 1976년까지 판사로서 봉직하였다.
WFB 부회장-달라이라마 지원
법조인으로서 일생의 최고 중의 하나는 바로 2차 세계대전후 일본 도쿄에 설치된 도쿄전범재판소에서의 전범재판이었다. 재판 절차가 마무리되고,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많은 불교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인연이 된 불교 지도자들과의 교류와 협조는 그가 훗날 세계불교도 연맹(WFB)의 부회장으로 봉사할 수 있었으며, 달라이라마의 망명 정부를 지원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험프리에게는 그가 검사가 된 것도 업(Karma)라 생각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업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그가 판사가 된 것도 업이라고 스스로 보았다. 그가 종신판사직을 수락한 것도 당시 영국에서 사형제도의 폐지와 맞물려서 가능하였다고 한다. 판사로서 한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 반인륜적이며, 반인권적인 재판을 너무나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재판과 함께 불교 공부를 병행하며, 업보(karma)와 환생(reincarnation)에 대한 개념을 연구하여 책을 쓰기도 하였다. 물론 판사로서 그는 '점잖은 판사(gentle judge)'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그 범죄에 또 다른 제도적인 범죄를 더하며, 그 죄인의 가족, 친구, 지인들 모두에게 상황자체를 더욱더 나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였으며, 그가 판사로 죽을 때까지 봉사하려고 한 이유는 이러한 사형을 폐지하는데 이바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불교회 회장으로 활동도
그래서 험프리 판사는 중형, 사형선고를 하지 않고 관대한 처분을 하여서, 당시 검사들은 매우 흥분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
1976년, 너무 관대한 처분이 문제가 되는 가운데 그는 종신 판사직을 스스로 사직하게 된다. 그리고 불교 활동에 전념하고 그가 198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영국불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여, 오늘날 서구불교의 탄탄한 뿌리를 다지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험프리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불교 신자로서의 판사의 역할 모델로 본보기가 되며, 다른 법조인들에게도 신앙, 지혜, 그리고 자비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놀랄만하다. 그가 그의 주저인 『불교』(1951년)에서 밝힌 선(禪)에 관한 얘기를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자.
'선은 불교의 극치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진리의 성벽에의 폭격이며, 어떤 개념에 바탕을 두거나, 조각품을 이용하거나, 의식이나 절을 하지 않으며,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것이다.'
주요 저서와 활동
1924년 불교회 창립
1951년 『불교』(Buddhism)
『선, 삶의 길』(Zen, a Way of Life)
『불교탐구』(Exploring Buddhism)
1976년 영국 불교회 회장
1983년 불교회 활동하다 사망 <
냐나틸로카 스님(Nyanatiloka, 1878-1957)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불교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경전의 역경과 출판을 통해서였다. 불교인들의 목숨을 건 전법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말로 번역된 서적을 통해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여명기가 지나자 서구 불교에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시아 불교국가, 그리고 불교인들과의 접촉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서구 불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서구 불교의 첫 장을 열었던 저명한 불교인들은 아시아의 불교국가를 찾아 직접 불교 수행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학문과 수행을 겸비한 훌륭한 스승으로 불모지 서구에 불교의 싹을 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남방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이었다. 특히 태국은 미얀마 혁명으로 세계불교평의회(WBF)의 본부가 미얀마의 랑군에서 태국의 방콕으로 불가피하게 이전하게 된 후부터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다.
가톨릭 학교서 바이올린 연주
서구 불교를 이야기 할 때 1901년은 상당히 중요한 날이다. 유럽인이 최초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테이프를 끊은 인물은 바로 영국 출신 화학자인 앨런 베닛 맥그리거(Allan Bennett Mcgregor, 1872-1923)로 그는 다음해인 1902년 미얀마 아찹(Akyab)에서 비구계를 받고, 유럽을 통 털어 최초의 비구가 됐다. 이때 그가 받은 법명은 아난다 메떼야(Ananda Metteya)였다.
2년 후인, 1903년 9월, 이런 드문 예가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독일인 안톤 궤트(Anton W. F. Gueth). 가톨릭 학교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던 그가 미얀마에서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고 정식 불교 수행자가 된 것이다.
그의 1878년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지만 입적은 1957년 스리랑카에서 맞이했다. 어쩌면 그의 전생의 고향은 바로 스리랑카였을 것이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1세 한창 나이였던 1899년의 일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인간을 해탈시켜 신과 합일한다는 신지학 강의를 듣고 불교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신지학 수학 후 불교에 입문
그러나 그의 이런 변화는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떠나겠다는 꿈을 품었을 만큼 종교적이었던 그에게 불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또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수 차례 아시아 지역으로 연주회를 다녀온 것을 기회는 그는 적지 않게 불교를 접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의 출가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이뤄졌다. 1902년 그는 평생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았던 음악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불교 공부를 목표로 꿈을 안고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인도의 불교는 이미 사그라들어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스리랑카에서였다.
스리랑카를 방문한 그는 유럽 최초의 비구인 영국 출신의 스님인 아난다 메떼야의 소식을 접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얀마로 떠났다. 그리로 마침내 1904년 2월 비구계를 수지하고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불교 수행자가 됐다. 그의 법명은 냐나틸로카(Nyanatiloka). '三界삼계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팔리어를 열심히 공부했으며, 1905년에는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된 불경의 그의 손에 의해 출판됐다. 그리고 1906년에는 유명한 『부처님이 말씀』이 출판됐다. 그의 육성을 담은 첫 번째 출판물이었다. 이 책은 영국인 제자 실라카라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고, 이어서 러시아에서도 번역돼 출판됐다.
그는 1910년 유럽에 불교 사원을 건립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다시 돌아왔다. 9년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첫 번째 전법지로 정했던 곳은 스위스 남부 루가노 지방.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스위스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했다.
유럽에서의 불교 사원 건립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그는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 불교도들의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는 수행처가 마련됐는데 바로 뽈가스두와(Polgasduwa) 섬이다. 그는 이곳을 섬 토굴(Island Hermitage)이라 명명했는데, 15개의 수행 토굴을 갖추고 있으며, 프랑스 공학자 베르지에르(R.A. Bergier)가 기증한 것이다. 베르지에르는 그 후에도 인접한 작은 섬인 메티두바도 보시했다.
평화스럽게 수행에 전념하고 후학을 키우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14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인도양 해변에 가까운 도단두바 마을 부근에 15채의 스님용 토굴이 차근차근 들어서 있던 평화스러운 섬에 암운이 깔렸다.
인도양 해변에 스님용 토굴 조성
전쟁으로 인해 뽈가스두와에서 생활하던 독일인들이 모두 철조망에 갇히게 됐고,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강제 송환돼 전쟁 포로의 고통을 겪게 됐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시련은 있었지만, 그는 남방 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 체계를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이다.
수행자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에게 다행히 중립국으로의 여행이 허용됐다. 그는 1916년 중국으로 가서 중경(重慶충칭)의 한 절에 머물면서 앙굿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중국도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는 한카우에서 반(半) 포로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역경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그는 일본의 저명한 교학자 와타나베 교수를 만나게 됐고 다이쇼大正 대학교에서 팔리 경전 강의를 맡게 됐다. 그 후 그는 일본에서 수년간 강의와 역경 작업을 계속하면서 정진에 몰두했다.
1957년 가을 스리랑카에서 입적
1926년 그는 일본 생활을 끝내고 태국을 거쳐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12년 간 비웠던 토굴에 비로소 다시 귀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이곳에서 수행과 역경작업을 이어 갔으나 그리 오래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39년 유럽에서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스런 섬'의 수행처를 뒤로 한 채 또 다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기슭의 데라둔에서 24명의 독일인, 그러니까 냐나틸로카, 그의 수제자 냐나뽀니카(Nyanaponika), 라마 고빈다(Lama Govinda), 달라이 라마의 가정교사로 7년 간이나 티베트에 살았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티베트에서 7년간'이란 영화에 나오는 그 사람) 등이 함께 살게 된다. 이번에는 성직자로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강제 노동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들과 함께 하면서 냐나틸로카는 역경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스리랑카의 세나나야케 수상이 1946년 그와 제자 모두를 폴가스두와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냐나틸로카 스님은 스리랑카 시민권자로, 1957년 가을 입적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국장으로 성대한 예를 표했다.
1979년 그의 제자 냐나뽀니카와 위제세케라 교수(Prof. Wijesekera)는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냐나틸로카 100년사』를 발간했다. 그가 설립한 '섬 토굴'은 수 십 년 동안 계속 독일과 유럽출신 불교도들의 성지가 됐다. 지금도 서구인들에게 불교 수행의 좋은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스위스인 파울 뷔르츠(Paul Wirz)라는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인접한 파라뿌두와섬에 살며 1984년 비구니 선원을 설립했다. 섬 3개가 유럽인들의 불교 수행처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
알렉산드라 데이빗-닐(Alexandra David-Neel, 1868-1969)
'알렉산드라 데이빗-닐은 매우 독특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독립심이 강하며, 유럽인임에도 불구하고 산스크리트어와 불교 철학에 조예가 깊습니다. 또 티베트인들과 별 불편 없이 대화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티베트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여행자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라사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찬사 중에서〉
알렉산드라 데이빗-닐은
그녀의 다방면에 대한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즉 아나키스트, 문화인류학자, 언어학자, 불교학자, 여행가, 오페라 프리마돈나 등 실로 폭넓은 삶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중 그녀의 중반 이후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불교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 불교학자이자 불교신자로 불리길 원했고, 그렇게 나머지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녀는 한때 오페라의 여자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단순히 오페라를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는 여행에는 차츰 흥미를 잃어갔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의 틀을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녀는 관객들의 큰 박수소리에서 대자연의 메아리를 떠올렸고 그들의 칭찬 속에서 티베트 스님들의 법문을 갈망했다. 이런 가운데 그녀는 1890년부터 약 일년간 인도를 여행하게 된다.
티베트 불교 관련 책 저술
어릴 적 세례를 받을 때 맺어진 그녀의 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인도 전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여행은 그녀로 하여금 유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는 동양의 철학에 심취했고 인도 북부에서 우연히 들은 티베트 음악은 그녀를 깊은 감동으로 몰고 갔다. 히말라야 정상에서 경외감과 마력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불교적인 삶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36세 때인 1904년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서 우연히 만난 필립 닐과의 만남은 그녀가 불교답사 및 연구에 전념하도록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철도공학도였던 남편 필립의 후원으로 티베트와의 긴 인연을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남편의 이해와 후원을 기반으로 그녀는 평생소원이었던 티베트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남편에게 18개월간 티베트를 답사할 것을 약속하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끝이 아니라 동양으로의 긴 여정의 단편에 불과했다. 이해심 많던 필립도 결국 훗날 그녀가 티베트 용덴 라마를 양자로 입양하면서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 용덴 라마는 양모 알렉산드라와 함께 험난하고 위험천만한 티베트로의 여행을 떠난다. 특히 당시 방문 금지 지역인 영혼의 라사를 천신만고 끝에 방문하고 그 여행기를 1924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한 파리 여인의 라사여행』이란 책은 서양여성 최초의 라사 방문기라는 점뿐만 아니라 서구인들에게 신비의 땅 티베트를 상세히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티베트의 종교와 권력」 등 인도와 티베트, 중국에 대한 연구와 논문 발표, 책 저술 등으로 활발히 발간하며, 한때는 브뤼셀의 한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11년 프랑스 정부 후원으로 아시아 국가들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 실론, 미얀마, 중국, 조선, 일본 등을 여행하며 13년간 아시아에서 머물렀다. 이 여행초반기인 1912년 4월, 당시 인도 칼림퐁에 망명 중이던 제13세 달라이라마를 알현하고, 티베트 언어이해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티베트어 학습과 함께 티베트 불교연구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된다. 그녀는 티베트의 많은 사원을 일일이 다니며, 관련 불교 문헌을 꼼꼼히 읽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를 배웠다.
시킴의 한 사원에서 소년 승려 용덴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5세의 용덴은 데이빗-닐의 제자가 된 후 평생 그녀를 수행하며 아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그리고 1929년 정식으로 그녀의 양자가 된 용덴은 1955년 프랑스 남부의 디느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양모의 연구를 도왔다.
그녀는 1914년부터 1916년까지의 기간을 '완전한 고독이 내 영혼을 쉬게 한 시기'라 회고하고 있듯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1차대전으로 인해 그녀는 어쩔 수없이 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경험한 일본은 그녀가 경험한 히말라야의 웅대함과 경외함에 비추어 너무 초라한 것이었다. 이어 조선의 해인사, 금강산 유점사 등을 돌아보았으나 결국 그는 티베트에 대한 그리움으로 중국을 거쳐 라사에로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부처님이 고행을 위해 설산을 향해 갔듯 2600여 년 뒤 프랑스의 한 백인 여성이 그 길을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1923년 10월 중국 운남성을 출발해 다섯 달 뒤인 1924년 2월 기나긴 여정 끝에 마침내 신비에 쌓인 라사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1925년 귀국했을 때는 '봉쇄된 나라에 도달한 국민적 영웅'으로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한 파리여인의 라사여행』을 영어와 불어로 출판하게 됐고, 잇따른 강연 등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당시 프랑스 가스통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독자들의 속편 요청으로 『티베트 마법의 서』(1929), 『강도와 신사의 나라』(1933) 등도 발표했다.
달라이라마도 그녀 활동 격찬
오랫동안 후원해준 남편 필립과 결별한 그녀는 1928년 프랑스 동남부의 조그마한 읍인 디느에 안식과 수행을 위한 도량인 '삼텐 종(명상의 집)'을 짓고 이곳에 정착한다. 알프스 서남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이 곳에서 명상과 저술에 몰두해 『라마교 입문』과 최초의 소설인 『다섯 지혜를 가진 라마승』 등 많은 저술을 발표했다. 그리고 1937년, 69세 되던 해에 영원한 그리움의 땅 티베트 여행을 다시 계획한다. 이 때는 결별했던 필립이 다시 도움을 주어 마침내 티베트로의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여행 중인 1941년, 그녀의 남편인 필립 닐의 사망소식에 '평생의 친구를 잃었다'며 슬퍼했다. 1946년 일흔 여덟에 귀국해 『티베트 불교도의 비전』, 『티베트 미공개 문헌』 등 저작을 발표해 좋은 호응을 얻는다. 이런 가운데 1955년 11월, 40년 동안 함께 지내온 양아들 용덴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녀는 독서, 명상, 저술을 계속하다가
1982년과 1986년 달라이라마는 명상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업적과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금지된 도시 라사로 들어간 최초의 서양인이었던 그녀와 수행동반자였던 양자 용덴의 유골은
삼텐종은 알렉산드라 데이빗-닐의 기념관이 됐다. <
아난다 메테야(Ananda Metteya, 1872∼1923)
영국의 첫 비구인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영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를 전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5년 런던의 노동자 집안서 출생
오늘날 서구에서는 '서구 불교 교단의 친구들(The Friends of the Western Buddhists Order : FWBO)'은 불교가 서양으로 가서 그 문화에 맞게 모습을 바꾼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에게 맞는 불교를 새로 창조했다는 칭송이 자자한 단체이다.
이 단체를 세운 사람은 영국의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스님이다. 스님은 데니스 링우드(Dennis Lingwood)라는 이름으로 1925년 서남부 런던에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바로 영국 최초의 비구였던 앨런 베닛(Allan Bennett) 즉, 법명 아난다 메테야(Ananda Metteya)가 2년 전인 1923년에 입적한 곳에서부터 겨우 수백 야드 떨어진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이러한 인연을 두고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다.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본명이 찰스 헨리 앨런 베닛(Charles Henry Allan Bennett)로 영국의 신비주의자이며 '황금 새벽의 은둔자 모임(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이라는 중요한 핵심회원으로 알라이스트 크롤리(Aleister Crowley)가 바로 그의 스승이었다. 크롤리는 그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그의 제자 베닛를 가리켜 '내가 지금까지 만나서 알게 된 가장 고상하고 부드러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묘사하였다.
베닛은 공부를 하면서 처음에는 신비주의에 경도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늘 빈곤 속에서 살았으며 천식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주의를 넘어 불교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어 갔고,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그러한 모임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의 스승 크롤리는 베닛이 공중 부양하는 것도 보았다고 전한다.
베네트는 런던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며, 매쓔 매더스(S.L. Mathew Mathers) 에 입양되어 자랐다. 매쓔 매더스는 황금 새벽의 은둔자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서 그는 프라테르 레히 아우어(Frater Lehi Aour: 빛이 있어라는 뜻 let there be light) 불렸다.
베닛은 홀레슬라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잉글랜드 배스(Bath)에서 과학 연구에 매우 흥미를 갖고 연구하였다. 젊은이로서 그는 화학실험실에서 일했으며 곧 화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그러나 그의 양모는 카톨릭을 믿도록 강요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신비주의 모임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비주의 모임에 빠져 한때 이곳에서 열심히 수련했다.
청년기엔 신비주의에 심취
자기 마음의 반의식적이고 초규범적인 모습의 경계선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마약을 먹기도 할 정도로 점점 신비주의에 빠졌다. 그는 런던의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에드윈 아놀드 경(Sir Edwin Arnold)의 유명한 불교 저서인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을 탐독했다. 나이 스물 여덟에 그는 불교를 더 심도있게 공부하기 위하여 동쪽으로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 날씨가 온난한 아시아의 스리랑카에서 지병인 천식을 치료할 생각도 있었다. 가난한 그의 여행경비는 스승인 크롤리의 한때 애인이었던 어느 대령 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어 가능하였다.
1900년 베닛은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캄부루가무와(Kamburugamuwa)란 소읍에서 빨리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어서 수도 콜롬보로 옮겨와 유명한 요가 스승인 구루 쉬리 빠라난다의 문하로 들어가 하타 요가를 배우며 명상 기술을 전수 받게 된다. 그 후 미얀마에서
미얀마 스님인 탄우 박사로부터 스님이 되기 위한 수련 지도를 받는다. 일정기간 수행생활을 거친후
그 법명은 자애의 축복(bliss of loving kindness)이라는 뜻이다. 이 법명은 그에게 너무나 적절했는데 그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동정심과 연민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비와 진실의 불법을 서구에 뿌리내리고, 승가를 유럽에 새로이 만들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1903년 '국제 불교회(International Buddhist Society)'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애로운 전법과 인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6개월도 채 안되어서 다시 천식이 매우 악화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미얀마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천식으로 고생했음으로 그의 주치의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장도에 올랐으나, 곧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래서 영국에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런던에서 극작가 클리포드 백스(Clifford Bax)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영국에서 불교의 대의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불교평론(Buddhist Review)]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주치의의 권유인 캘리포니아는 삶에서 멀어지고 지병과 빈곤의 삶 속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한 연구와 전파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라 '아리안의 지혜(The Wisdom of the Aryas)'란 책을 1923년 런던에서 출판하고, 같은 해 3월 9일 런던 서남부에서 입적하게 된다. 사후 발행된 『미얀마의 종교(The Religion of Burma)』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아난다 메테야 스님은 출가이후 영국이나 서구 사회에 서양인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를 전파하는데 진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귀국 후 '국제불교회' 창립
여기서 잠깐 서양인중에서 과연 누가 최초로 스님이 되었냐고 하는 문제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유럽인으로 스님이 된 사람은 고든 더글러스(Gordon Douglas)로 스리랑카에서 아소카(Ashoka)란 법명으로 수계하였다. 일본인 두 사람으로부터 불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고 일본, 중국, 스리랑카를 여행하였다. 스리랑카에서 빨리어로 된 불교를 배우고 마힌다(Mahinda) 대학장이 되나 곧 1900년 4월 입적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아소카 사캬뿟타회(Ashoka Sakyaputta Society)'를 결성하고 회관과 도서관 그리고 학교도 건립하였다. 수계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기에 죽게 되자 비교적 덜 알려지고 그 중요성이 적은 것은 분명한 것 일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