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집착이며, 반야는 지식으로부터 해탈이다.>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감각적 자극(受)과 정서적 반응(想), 경험된 기억과 관념과 이미지의 총합(識)이다. 물론 아는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는 그는 그 무엇(대상)을 아는 것(인상과 기억)으로 변환하여 자기 의식체계 안에 저장한다. 이때 아는 주체와 아는 대상은 매 순간 변화하는 흐름 속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순간 인식주체가 대상에 주목하여 관찰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대상을 마치 스냅샷처럼, 순간 포착한 지각(想)과 인상(相)이다. 그래서 주관에 포착된 지각과 인상은 변화무쌍한 대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통 인식대상의 진면목은 인식주관에게 완전히 알려질 수 없으며, 일정한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만 알려진다. 그래서 이런 앎은 전체적인 앎, 결정론적인 앎이 아니라 부분적인 앎, 잠정적인 앎, 확률론적인 앎이다. 그런데 인식주관은 자기의 인식하는 방식에 너무 확신한 나머지 대상에 대한 기억에 근거한 지식으로 시간과 공간과 상황이 달라진 조건에 처한 대상을 덮어씌우려 한다. 이렇게 되면 눈앞에 생생히 살아있는 대상은 곧 기억 이란 색안경에 비친 대상의 변환된 값으로 경험된다. 기억된 앎이 현전의 대상을 만나 기존에 아는 대로, 익숙한 대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시 기억한다. 이렇게 안다는 행위는 기억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우리의 일상적 앎과 지식이란 게 대부분 인간 신체적 조건에 의존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역사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기도 하고, 모든 걸 알도록 허용되지도 않는다. 인간의 신체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알 수 있고, 사회에 속한 개인에게 알도록 허용된 것만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알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유를 향한 나래짓인 동시에 둥지를 벗어나지 못한 새의 실존적 한계이다.
자기의 기억을 획기적이거나 아니면 점진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한 기억은 되먹임되어 자기 기억의 구덩이에 빠진다. 자기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식의 한계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죄수가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현실로 착각하며 평생을 보내듯이.
우리가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사건인가?
나의 관심권에 들지 않던 것이 어떻게 갑자기 내 앞에 다가와 대상으로 나타나는가?
그 대상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가?
아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리고 그 앎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데 아는 주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을까?
알고자 하는 욕망, 앎을 추구하는 동기는 인간의 생존본능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에서 진화한 인간에게 위험을 피하고 먹이와 짝을 찾으려는 본능이 있어 자기 앞에 나타난 대상이 먹이로서 적합한지 아닌지, 동료인지 적인지, 혹은 짝이 될 만한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위험을 피하고 생존을 확보하며 먹이와 짝을 찾으려는 본능에서 ‘알려고 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알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며 능력이다. 지식욕으로 말미암아 인간 문명이 발달하였으니, 지식은 하늘에 이르는 날개다.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발로라 찬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을뿐더러,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순수한 앎은 없다. 앎에는 탐진치에 뿌리내리지 않는 앎과 탐진치에 뿌리내린 앎,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자기가 일으킨 지각과 판단이 탐진치에 뿌리박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에서 자기 생각을 다시 훑어보는 메타-인지가 요구된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다시 생각하는 자기 관찰이다. 평면적인 생각을 한 차원 높은 관점에서 다시 보는 것이다. 일종의 알아차림, 반성적 사유이다. 가령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나는 나에게 익숙한 대로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건 아닌가? 나는 어떻게 나의 인식과 판단에 정당성을 주장하는가? 나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일어났는가? 이렇게 생각이 떠돌아다니는 마음 상태를 똑바로 보면, 자유방임적으로 떠도는 생각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면서, 더 의미 있는 일에 다시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이런 메타인지를 불교에서는 사물과 사건을 바르게 본다(정견), 통찰한다고 한다. 그런 과정으로 습득된 마음의 능력을 통찰지(반야)라고 하며, 법을 보는 눈(법안)이 생겼다고 한다.
지식이란 결박이다. 반야는 앎으로부터 자유이다.
지식이란 아는 대상, 알려진 대상을 내 이익에 맞게 길들이고 통제하려는 욕이 깃들여져 있다. 자본주의자의 지식은 소유에 대한 집착과 영토화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개척사업을 보라. 그들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강탈하기 위해서 자연과 인문 지식을 동원하여 자원과 노동을 수탈했으며 결과적으로 전 세계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 재편했다. 그리고 부국강병을 꿈꾸는 모든 국가에서 軍-産-과학자 복합체가 지식을 넓히려고 광분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 너머 우주 끝까지 뻗어가는 인간의 지식욕은 절대로 멈출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중차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을 사용하는 정치지도자 및 최고 결정권자들의 의식이 지식을 창조적으로도 파괴적으로도 사용해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인간의 행복과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지식을 사용하게 이끌 수 있는가? 그리고 대중은 지식생산 과학자그룹과 정치지도자와 최고 결정권자들을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사유가 필요하다.
“현대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리석은 사람은 확신에 차 있고 지능적인 사람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버트런드 러셀
눈 밝은 사람에게 비친 세계는 어떠한가?
蜼螟眼睫起帝國, 초명안첩기제국,
欲界熾盛糞上蟲; 욕계치성분상충
一棒打倒物神像, 일방타도물신상
覺民提携同春生. 각민제휴동춘생
하루살이 눈썹에 제국을 세우는데
치성한 욕계가 똥 무더기 위에 벌레 같구나!
한 방망이 날려 물신주의 세계를 거꾸러뜨리고
깨달은 민중은 손을 잡고 봄의 생명을 함께 하고저.
2023년 계묘년 불법은 어떠한가?
癸卯佛法如何是, 계묘불법여하시
雪人墜落入溫泉; 설인추락입온천
三足飛翔遊無窮, 삼족비상유무궁
三才和諧泰平天. 삼재화해태평천
계묘년 불법은 어떠한가?
눈사람이 떨어져 온천탕에 들어가니
삼족오가 날아올라 무궁한 경지를 노닌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태평 시대 누리기를!
첫댓글 반야는 해탈이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