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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龍樹菩薩略纂偈 南無華藏世界海 毘盧遮那眞法身
現在說法盧舍那 釋迦牟尼諸如來 過去現在未來世 十方一切諸大聖
根本華嚴轉法輪 海印三昧勢力故 普賢菩薩諸大衆 執金剛神身衆神
足行神衆道場神 主城神衆主地神 主山神衆主林神 主藥神衆主稼神
主河神衆主海神 主水神衆主火神 主風神衆主空神 主方神衆主夜神
主晝神衆阿修羅 迦樓羅王緊那羅 摩喉羅伽夜叉王 諸大龍王鳩槃茶
乾達婆王月天子 日天子衆兜利天 夜摩天王兜率天 化樂天王他化天
大梵天王光音天 遍淨天王廣果天 大自在王不可說 普賢文殊大菩薩
法慧功德金剛幢 金剛藏及金剛慧 光焰幢及須彌幢 大德聲聞舍利子
及與比丘海覺等 優婆塞長優婆夷 善財童子童男女 其數無量不可說
善財童子善知識 文殊舍利最第一 德雲海雲善住僧 彌伽解脫與海幢
休舍毘目瞿沙仙 勝熱婆羅慈行女 善見自在主童子 具足優婆明智士
法寶髻長與普眼 無厭足王大光王 不動優婆遍行外 優婆羅華長者人
婆施羅船無上勝 獅子嚬伸婆須密 毘瑟祗羅居士人 觀自在尊與正趣
大天安住主地神 婆珊婆演主夜神 普德淨光主夜神 喜目觀察衆生神
普救衆生妙德神 寂靜音海主夜神 守護一切主夜神 開敷樹華主夜神
大願精進力救護 妙德圓滿瞿婆女 摩耶夫人天主光 遍友童子衆藝覺
賢勝堅固解脫長 妙月長者無勝軍 最寂靜婆羅門者 德生童子有德女
彌勒菩薩文殊等 菩賢菩薩微塵衆 於此法會雲集來 常隨毘盧遮那佛
於蓮華藏世界海 造化莊嚴大法輪 十方虛空諸世界 亦復如是常說法
六六六四及與三 一十一一亦復一 世主妙嚴如來相 普賢三昧世界成
華藏世界盧舍那 如來名號四聖諦 光明覺品問明品 淨行賢首須彌頂
須彌頂上偈讚品 菩薩十住梵行品 發心功德明法品 佛昇夜摩天宮品
夜摩天宮偈讚品 十行品與無盡藏 佛昇兜率天宮品 兜率天宮偈讚品
十回向及十地品 十定十通十忍品 阿僧祗品與壽量 菩薩住處佛不思
如來十身相海品 如來隨好功德品 普賢行及如來出 離世間品入法界
是爲十萬偈頌經 三十九品圓滿敎 諷誦此經信受持 初發心時便正覺
安坐如是國土海 是名毘盧遮那佛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以陀羅尼無盡寶 藏嚴法界實寶殿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오늘 『화엄경』 본강의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강설 제37권 점안식을 하고 본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서문을 펴서 다 같이 마음을 담아서 천천히 한 번 우리가 읽고 살펴보는 것으로써 점안식을 대신하겠습니다.
서문
불자들이여, 보살은 이와 같은 삼매와 지혜의 힘을 얻고는 큰 방편으로 모든 일을 나타내 보입니다.
예컨대 보살은 비록 생사를 따라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함을 나타내 보이지마는 항상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처자권속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마는 그들과는 항상 멀리 떠나있기를 좋아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원력으로써 다른 중생들과 함께 삼계에 태어나지마는 세상 법에 물들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항상 참나, 참사람, 참마음의 적멸한 해탈열반의 경지를 누리고 있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방편의 힘으로 열렬하게 보살행을 불타듯이 펼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열렬함에 빠져 불에 타버리지는 않습니다.
보살은 또 비록 그 깨달은 지혜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를 수순하지만 소승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부처님의 경계를 얻었으나 마군들을 교화하느라고 마군의 경계에 머물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마군의 도를 초월했지마는 마군의 법을 버젓이 행하기도 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외도들의 행과 같이하지마는 부처님의 법을 버리지 아니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부러 중생을 위해 모든 세간을 따르지마는 일체 출세간법을 항상 행합니다.
보살은 또 비록 일체 장엄하는 일이 천신이나 제석천이나 범천왕과 사천왕이 가진 것보다 훨씬 지나가지마는 법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지혜방편입니다.
오늘 37권 서문이 보살이 세상에 어떻게 사는가? 우리가 불자들이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를 잘하고 또 불법수행을 하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치우치지 않고 대승적으로 잘 표현한 그런 내용이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걸 이제 중도적 삶이다 그렇게 말하거든요. 불교에서 그 불교적인 삶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은 중도적 삶이다 그래요. 중도적, 중도라고 하는 것은 양변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또 치우지지 아니하면서 다 수용하고 사는 것. 그것이 이제 중도적 삶이다 그렇게 합니다.
여기 이제 보살은 불교에서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사람, 불교가 꿈꾸는 사람, 유교로 말하면 선비 뭐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살을 다른 번역으로 대사(大士) 큰 선비 이렇게도 번역을 해요. 대사라고
그렇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선비다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불교적으로는 보살이다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불교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보살의 삶이다 이렇게 합니다.
그 보살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냐? 이걸 이제 우리 일상생활에다가 응용을 한다면은, 예를 들어서 남자로서 한 가정에 남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마는 때로는 여자의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뜻입니다. 남자네 하고 꼭 그 평소에 여자가 하던 일이 어떻게 해서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는데도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은 그거는 이제 불교인의 삶이 아니고 보살의 삶이 아니고 바람직한 융통성 있는 삶이 아니죠.
여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융통자재해야 돼요. 그러면서 각자의 위치에 돌아가서 자기 위치를 지킬 때는 또 충실히 지키는 것 이게 불자의 삶이고 가장 이상적인 삶이죠.
형광등이 나갔는데도 그거 하나 갈아넣을 줄 모르는 남자 많죠? 요즘. 그래서 그 집안에 보살이 그것을 갈아 넣는 경우도 있고 그래요. 보살은 참 자기 역할을 잘합니다. 남자의 역할도 하고 여자의 역할도 하고, 그런데 왜 남자는 회사에 가서 돈 좀 번다고 그거 하나 못 갈아 넣어요.
그게 이제 그 우리가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다듬어가고 좀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가고 고쳐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써 여기에 참 표현을 잘 했어요.
보살은 생사를 초월했지마는 우정 생사를 받아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대승불교는 외도니 뭐 성문이니 연각이니 하는 그런 그 소승인들을 사실은 크게 배척합니다. 하지만 또 때로는 성문도 되고 연각도 되고 때로는 외도도 되고, 그러면서 또 보살의 경지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고
예를 들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초등학생을 가르친다고 그 박사학위가 어디 손색이 있습니까? 손색없어요. 유치원생을 가르쳐도 자기의 그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분야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아~ 저분이야말로 참 박사라고 할 만하다. 아주 훌륭하다. 인격도 박사다. 학문만 박사가 아니라 인격도 박사다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간혹 어떤 그 편협한 생각을 가진 박사는 내가 박산데 해가지고 내가 어떻게 유치원생을 가르친단 말이냐. 내가 어떻게 초등학생을 가르친다는 말이냐. 혹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학문적으로는 그 분야의 박사일진 몰라도 인격은 박사가 못돼죠. 그건. 인간박사는 못돼는 거죠.
그러한 것을 여기서 참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 경전 안에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말하자면 지나치게 불교적인 그런 그 이야기로 구성이 됐지마는 이것을 이제 우리가 현대에 살면서 우리의 그 현대적인 삶과 잘 소화해 내고 설명해서 이해하는 거 이게 우리의 몫인데, 한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여기는 보면 보살은 외도도 되고 소승성문도 되고 그렇다고 해서 보살의 그런 그 위치를 버린 것이 아니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아주 잘해놨습니다. 이것이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사와 출세간사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지혜의 방편입니다 그랬습니다. 정말 제대로 철든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그 때로는 자기 위치 다 내려놓고 어떤 일도 할 수 있어야 그게 이제 인격적으로 훌륭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그 서문이 제가 읽어보니까 좋아서 그렇게 다 읽었지마는 중언부언 말씀 드립니다.
경전은 이렇게 우리들의 삶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하지 아니하면은 그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라고, 경전은 경전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생활이 그 그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그런 그 경우가 있습니다.
결코 부처님의 옛날 2600년 전의 말씀이라고 해서 이 시대에 뭐 어긋나거나 또 현대 사람들의 삶에 무슨 뭐 부조화를 이루는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해석을 해내지 못해서 그렇지 어찌 사람의 삶이 옛날하고 지금 하고 다르겠습니까? 사람의 삶이란 꼭 같고 결국은 사람의 삶에 아주 밝은 그런 그 교훈을 주는 그런 가르침이다 이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공부는 저기 90쪽 지난 시간에 이제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해가지고 아주 『화엄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고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내용이 신위도원공덕모라고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떤 선사들도 이 이야기를 들먹거리지 아니하는, 이야기하지 않는 선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이제 유명한 말씀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 종교적인 믿음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여기는 뭐 불교적인 색채가 많지마는, 사람과 사람관계 첫째 믿음이 무너졌다면은 그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그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그 입장이 되거든요. 서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그런 그 아주 삭막한 관계로 전락합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똑같습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꼭 불교적인 입장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반에 연관시켜서 생각하면 더욱 좋습니다.
오늘은
5. 信三寶
若常信奉於諸佛이면 則能持戒修學處니
若常持戒修學處면 則能具足諸功德이니라
戒能開發菩提本이요 學是勤修功德地니
於戒及學常順行이면 一切如來所稱美니라
若常信奉於諸佛이면 則能興集大供養이니
若能興集大供養이면 彼人信佛不思議니라
若常信奉於尊法이면 則聞佛法無厭足이니
若聞佛法無厭足이면 彼人信法不思議니라
若常信奉淸淨僧이면 則得信心不退轉이니
若得信心不退轉이면 彼人信力無能動이니라
信三寶
신삼보(信三寶) 그랬어요. 삼보를 믿는다.
그래 우리가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믿는 것은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신론』에는 사신(四信)이라고 해서 네 가지 믿음을 강조하고 있어요. 거기에 이제 삼보에 한 가지 더 더해서 신진여(信眞如)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말하자면 진여까지 우리 참사람, 참마음, 참마음의 경계, 참마음의 세계 말하자면 궁극적인 경지. 우리 현실적인 그런 경지말고 현실을 현실답게 엮어가는 근원자리, 궁극적인 경지 그것을 이제 참마음 또는 진여자성(眞如自性), 참사람 뭐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제 『기신론』에서는 신진여, 진여라고 하는 것도 믿어야 된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와 그리고 진여 이렇게 해서 네 가지를 믿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우선 이제 삼보를 이야기하고 있죠.
① 若常信奉於諸佛이면
만약에 항상 모든 부처님을 신봉(信奉)하면은, 그랬습니다. 모든 부처님, 여기서 이제 『화엄경』 특히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대원칙 있잖습니까? 그 대원칙을 늘 잊지 마시고 또 『화엄경』의 어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삼으시고 이해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래서 이 속에는, 제불(諸佛)이라고 하는 거 속에는 우리들 자신도 포함돼 있고, 우리가 비록 중생이라 하더라도 중생도 그 속에 포함돼 있고, 비록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까지도 그 속에 포함돼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則能持戒修學處니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말은, 신봉(信奉) 받들어 섬긴다라고 하는 말은 곧 지계(持戒) 질서와 윤리와 도덕과 어떤 그 기준과 진실과 이러한 것들을 지계라고 합니다. 무슨 뭐 그 오계(五戒)니, 십계(十戒)니, 팔계(八戒)니, 사십팔계(四十八戒)니,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니, 삼백사십팔계(三百四十八戒)니 등등 조목으로써 정해져 있는 계율도 물론 있습니다마는, 이런 대승불교에서는 꼭 조목으로 정해져 있는 그런 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진실 그다음에 질서, 윤리, 도덕 이것이 기본으로 돼있습니다. 그게 계예요. 사실은. 그것을 우리가 믿는 일이고 그다음에 또 수학(修學)하는, 배움을 닦는, 배움을 닦는 그런 그 처(處)라고 하는 것은 그런 삶이다 이런 뜻입니다.
계를 가지고 수학하는, 공부하는 그런 삶이다.
우리가 부처님 안 믿으면 우리가 여기 와서 『화엄경』 공부할 까닭이 있습니까? 아니 날씨도 좋고 봄도 왔는데, 뭐할라고 이렇게 와서 이야기 듣겠어요? 그 속에는 믿음이라고 하는 게 깔려 있습니다.
하~ 믿음은 법장(法藏)의 제일재(第一財)라. 우리들 가슴에 제일가는 재산이다. 지난 시간에 그랬죠. 참 멋진 말 아닙니까. 법의 창고에서, 진리의 창고에서 제일가는 재산이다. 아 얼마나 근사한 이야기.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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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변에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다 수용하고 사는 것. 그것이 중도적 삶이다.
信三寶 -- 佛法僧 三寶를 믿는 것은 근본으로 하는 삶.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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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藏 第一財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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