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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산 의 역 사
울산은 신라 천 년의 외항이었으며, 1960년 이후 공업 생산의 중추도시다.
울산의 지형은 서쪽으로 가지산. 천황산. 능동산 등 1,000미터 이상의 산악들이 청도군. 밀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 신불산. 취서산. 천성산 등이 양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해안과 접해 있는 울산시는 대체로 구릉성 산지와 평야로 형성되어 있으나, 가운데에 국수봉과 문수산 등이 솟아 있으며 곳곳에 전설과 설화가 서려 있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다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치술령과 박제상의 두 딸이 어머니를 따라 죽어 그 넋이 새가 되어 숨어버렸다는 은을암이 국수봉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또 문수보살이 산세가 청량하고 아름다워 출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문수산이 있다.
울산 동해의 바닷가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난 자리인 강동면 정자리에 율포가 있으며, 역신을 쫓아 낸 처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깃든 처용암과 처용설화의 무대가 된 개운포가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에 있다.
울산 역사는 가장 오랜 시대인 상고시대부터 시작된다.
당시 한반도 한강이남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란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울산은 진한 땅에 속한 나라였다. 삼한시대에는 중구 다운동을 중심으로 주변에 굴아화촌(屈阿火村)이었는데, 경덕왕 때 하곡현으로 고치고 임관군(臨關郡 ; 지금의 경주시)의 속현으로 하였다. 탈해왕대에는 웅촌지방의 우시산국을 정복했고 이들 두 지방은 뒤에 우화현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도 울산의 남쪽에는 생서량군(生西良郡)이,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이 있었으며 언양지방은 본래 거지벌현이라 하였는데 경덕왕 때 헌양현으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하였다. 신라 말기에는 울산시 중구 학성동 반구동 지역에 하곡현의 영역안에 개지변(皆知邊)이라는 성읍이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지역은 하곡현에 이어 고려에 넘어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개지변을 한자식으로 고친 이름이 계변성(戒邊城)으로 곧 울산의 옛이름이다. 고려 태조때 울산지역의 모든 마을을 합쳐 홍례부를 두었고 이는 다시 공화현으로 바뀌었고 별호로 학성(鶴城)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공화현은 다시 울주(蔚州)로 개명됐고 울산(蔚山)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생겼다. 뒤에 울산군은 울산부가 되고 임진왜란 후 폐지되었던 언양현을 복구하였다. 근래에 와서 울산읍이 울산시로 승격되고, 언양과 주변의 강동면 등을 합쳐서 울산군을 이루었다가 1995년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어 울산시로 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은 광역시로 승격되었다.
<자료참조> http:www.metro.ulsan.kr
西生浦倭城
지정번호 :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시 대 : 조선시대
소 재 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일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쫒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는데, 남해안의 중요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한강 이남의 4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선조 26년(1593)에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서생포 사이에 30개의 왜성을 쌓았다. 서생포왜성은 부산왜성에 이어 3번째로 지은 석성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이 용이하여 전쟁기간동안 왜군의 중요거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서생포왜성은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1593)에 완성한 것으로 그 내부가 45,960평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이다.
현재 이 성의 형태로는 약 15도 가량 기울기를 가지는 성벽이 산정상을 향해 300m 정도 길게 뻗어 있어며, 진하바다를 바라보는 200m높이의 나즈막한 산정에 3단으로 겹을 두르고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6m가량 된다. 3단 가운데 가장 하단인 3지환(三之丸)은 마을이 조성되면서 거의 허물어지고 산정을 향한 성벽만이 거의 원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3지환 내에는 집과 밭이 들어서 있어 성안이라는 흔적 거의 찾아보기 힘드며, 성벽을 왼쪽으로 하고 정상을 향해 5분여 오르면 2지환에 들어서는 입구가 있다. 이 입구는 성벽이 양쪽에서 사선으로 길게 아래로 긋는 형태로 문을 만들고 있다.
본환(本換)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다시 성벽으로 둘러쳐지고 네모진 마당이 있다. 가등청정(가토오 기요마사)가 본부로 삼고 조선의 점령을 꿈꾸던 곳이다. 북쪽과 서쪽으로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장군수라는 우물 흔적도 있다. 장군이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누각도 있다고 전해진다. 성안은 네모지만 성벽이 둘러쳐진 모양은 마치 미로처럼 보인다. 승리를 나타내는 승(勝)자의 옛 전자를 묘사하여 쌓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지형적으로는 바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쪽 문루에 올라서면 진하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 문루에 올라서면 울산쪽이 내려다 보인다. 아래에서는 소나무 숲에 가려 성이 있는지를 잘 알 수 가 없다.
성안에 설치된 안내 표시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선조 25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가토오 기요마사)가 축성한 일본식 석성으로써 계단식으로 쌓았다.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겹으로 두르고 성벽은 기울기를 많이 가지는 특징이 있어 16세기 말기의 일본성곽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석축 성벽만 남아 있지만 비교적 완연하며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이다. 이 성은 기장왜성과 임랑포왜성,자성대왜성,동래왜성 및 울산왜성(학성)과 봉화로 서로 신호연락하였다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성터에는 당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신 애국지사를 모신 창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왜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1598) 명나라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정유재란때 왜군을 대파하고 탈환했다. 기록으로는 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고을 찾아와 가등청정(카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왜군의 어처구니 없는 제안으로 결렬되었고 마침내 명나라 마귀제독의 도움으로 서생왜성을 탈활한 것이다. 서생포왜성은 임진란때 왜군이 가장 오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왜성이기도 했다.
" 장군수와 천수각(天守閣)이 있는 내성" 현재 내성에는 장군수와 천수각이 있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도 이곳에 있다. 장군수는 옛날에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군 장수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성벽이 무너지면서 샘터 위로 돌들이 많이 덮여 우물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천수각(天守閣)은 이 왜성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망대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천수각의 건물과 흔적은 없지만 돌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 사방을 보면 산이 있는 서쪽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트여있어 아주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문(西門)은 왜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 역시 지금은 돌이 무너져 문의 형태만 있을 뿐이다. 기록을 보면 이 왜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北門)은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이 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해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 문 아래에는 성의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하수구(下水溝)를 만들어 놓고 있어 일본인들이 왜성 쌓기에 들인 공을 엿볼 수 있다.
" 3만평에 달하는 외성(外城) " 외성에는 현재 전답이 많고 또 주민들도 많이 살고 있다. 현재 성 전체 넓이가 4만5천여평이 괴는데 이중 외성이 차지하는 넓이는 3만평 정도가 된다. 이 면적을 소유자별로 보면 사유지가 1백47필지 그리고 국유지가 11필지로 모두 1백58필지이다. 현대 이곳에는 42가구가 있다. 외성에는 우물과 창표당이 있다. 우물은 농기계 보관 창고 바로 곁에 있고 지금도 물이 많이 고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이 너무 깨끗하고 맛이 좋아 광천수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지역에 인가가 많이 들어서고 또 이 마을에 상수도가 설치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대신 인성사 인근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마시고 있다. 대신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인근 농작물을 키우는데 이용되고 있다.
창표당은 이 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를 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 창표당에는 위패를 안치한 본당 들 건물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배 밭에 울산군에서 세워 놓은 표지판만 있다.
이 왜성의 하단부에는 동제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서생포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명나라 장군 마귀제독의 위패를 모시고 향배를 올리고 있다. 또 왜성 동문에는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던 명나라 출신의 편갈송 장군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것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기념비를 세워놓고 관리를 하고 있다.
이 왜성은 축성한 지 1년 여만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자들은 이런 거대한 성이 일년만에 완공이 되려면 돌을 가까운 곳에서 가져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라서 학자들은 이 왜성의 돌이 이곳에서 가까운 숙마섬과 수군만호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다.
" 사명대사와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회담... "
임진왜란 동안 이 왜성에서는 사명대사와 加藤?正(가토 기요마사) 사이에 휴전회담이 4번이나 열렸다. 당시 사명대사는 웅촌에 있는 운흥사에 머물면서 이 왜성으로 와서 회담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회담은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비록 실패를 했지만, 사명대사는 이 회담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 왜성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는 데는 당시 명나라 장수였던 마귀제독(麻貴提督)와 편갈송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왜성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유적들이 많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이 우리고장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면 지금도 이들 후손들이 서생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패배하여 퇴각하면서 조선인 서생포왜성의 축성자를 일본으로 포로로 데리고 갔고, 현재 일본에서 유명한 구마모토성을 석축하는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후손들이 구마모또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이 서생포 왜성을 방문하였다. 그들의 성씨는 “서생”이라고 한다.
주변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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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倭城 (鶴城)
종 류 : 문화재자료 제7호
소재지 : 울산시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
蔚山倭城은 宣祖30年(1597) 加藤淸正(가등청정)가 10월부터 1만 6천명을 동원하여 40여 일만에 蔚山邑城과 兵營城의 돌을 헐어다가 쌓은 일본식 성이다. 蔚山市 中區 鶴城洞 학성산에 축성한 것이고 독립구릉으로 형성된 야산으로 해발 50m정도이다.
鶴城은 신라의 계변성(戒邊城)이라 하던 성에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새로 축성 된 倭城인데 조선에서는 이를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러왔다. 이 성을 鶴城이라함은 신라말에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이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을 주장하였다 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鶴城)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이 왜성(倭城)의 규모(規模)는 다음과 같았다.
해발 50m인 산꼭대기에 본성(本城)을 두고, 본성 북쪽 아래에 제2성(第二城:해발 35m)을 두었으며, 그 아래 서북쪽에 제3성(第三城: 해발 25m)을 두었다.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300여m이고, 성벽의 높이는 10 ~15m였다. 또 성밖에 동 북 서쪽으로 2,400m의 목책(木柵)을 세워 2중 성곽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없다. 本城은 남쪽을 점령 높이 50m 동서 100여m 남북 600m이고, 제2 本城은 본성 북쪽 좀 낮은 곳, 동서 100m 남북 100m이고, 제3 本城은 二之丸 서북쪽, 동서 40m 남북 100m 석벽의 길이 1.300여m, 높이 10~15m 대로 성로(城櫓) 12개 외곽의 동 서 북 3면에 토제를 쌓고 그 위에 3중의 목책을 설치, 길이 2,400여m 남쪽은 태화강에 면해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울산왜성(蔚山倭城)의 전투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싸움은 선조 30년(1579) 12월 23 일부터 이듬해 1월 4일 까지 혈투가 벌여졌는데 이것이 제1차 싸움이었다. 선조 30년 12월 23일부터 있었던 울산왜성의 공방전은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울산왜성을 쳐서 전왜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23일과 24일 이틀동안 성을 공격, 마침 축성중이라 성밖에 야영하던 적을 섬멸하고 반구정의 적진과 태화강의 적 보루를 치니 이때 일대 결전이 벌어져 패한 적은 성안으로 달아나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이듬해 1월 3일까지 매일같이치 열한 화공을 퍼붓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에서 오는 적의 응원선단을 막으며 쳐 서 성채의 접근을 막고 별장 김응서(金應瑞)의 군은 성밖에서 적의식수원을 차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농성중 크게 굶주리게 하였다. 이러한 공성에도 적은 비오듯 총포를 쏘아 왜성에 오르지 못하게하여 조명군의 공격은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에 마침 날은 차고 비가와서 인마(人馬)의 동상이 속출하고 피아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떨어졌다. 더욱이 성중의 적은 물이 없어 오줌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빨며 벽지를 끓여먹는 등 아사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1월 4일 새벽부터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는 직접 칼을 들고 뒤처지는 자의 목을 베는 등 독전하여 최후의 총공격을 하니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돌진하였으나 퍼붓는 적의 총탄에 희생자만 속출하고 성에 기어오르는 자가 없었다.
이 때에 적의 응원군이 염포로부터 배로 접근하고 육로로도 몰려와서 형세가 급변하자 명장 양호는 「매일 우리가 공격해도 성이 워낙 험하고 군사가 많이 없어져 이를 뺏기 힘드는데 이 판에 왜군의 구원병이 많이 있 으니 철군 했다가 뒤에 다시 공격을 꾀하겠다」면서 경주로 철군하고 후속부대는 왜군의 추 격을 받아 큰 손실을 당하고 말았다.
도산성의 제1차 싸움이 끝난 다음 豊臣秀吉은 성의 재수를 명하여 방위시설을 강화한 후 加藤淸正의 주력군 1만으로 하여금 도산성을 고수하게 하였다. 한편 제독 마귀의 군은 선조 31년(1598) 3월 29일이후 경주에 집결하고 도산성의 재공격을 준비중에 있었는데 제2차 도 산성싸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동정군 제독 마귀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병 24,000여 조선군 별장 김응서(金應瑞) 병 5, 500여 합계 30,000명, 한편 왜군은 加藤淸正(가등청정)의 1만과 서생포왜성 수장 흑전장정(黑田長政) 5,000명 계15,000 전투의 경과를 살펴보면 경주에 집결하고 있던 명군은 부총병 해생(解生)을 선봉장으로 하여 9월 21일 울산을 향해서 발진 학성산(鶴城山)에 공격준비진을 쳤다. 한편 좌수영에 있던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동래온정(東萊溫井)의 적을 격파하여 적의 부산, 울산간의 연락로를 차단하였고 이날 해생(解生)은 직접 울산왜성의 적과 싸움을 걸어 성책 밖에 있던 천여의 적을 격파하였다. 제독 마귀는 22일 주력 2만군으로 성내의 적에 도전하니 淸正군이 성밖으로 나와 일대회전이 벌어져 이를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성의 외책을 탈취하는 한편 방옥(房屋) 군량 마량을 다 불태우고 아성(牙城)에 접근하였으나 성내로 물러난 적은 빗발같은 조총을 퍼부어 더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동정군을 유격전을 계속하였으나 명군이 대군임을 알고 1차전투처럼 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제독 마귀는 군사를 거두어 경주군 모화(毛火)로 물러나서 경주에 머물렀다 시월 6일 영천성(永川城)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豊臣秀吉이 죽은 뒤 철수령에 따라 加藤淸正은 11월 18일 울산왜성 성채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성을 시루를 엎은 것 같다하여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왜성이지만 전후에는 서생포왜성과 마찬가지로 우리 수군이 한동안 쓰고 있었다. 이 왜성은 그후 우리 수군이 한동안 쓰면서 1624년(인조 2년)~1654년(효종 5년)에는 전선창(군함 만드는 공장)을 두기도 했다. 임란때는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렀고 그후에는 학성(鶴城) 또는 시루성(甑城)으로도 불렀다.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많은 성벽이 소실되고, 태화강변 방향과 반구동 방향에는 아직도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봄이면 수백거루의 벗꽃이 절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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