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가지기가 어렵지, 갖고 나니 계속 이어지네요.
속리산 문장대 아래에 있던 '잃어버린 도시S'에 대한 단서를 더 찾았습니다. .
도시의 전모를 조금 더 내밀하게,
그리고 언제 도시가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9월 26일 속리산에 있었다는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가 봅니다.,
지금은 숲속에 묻혀 버렸지만, 6,70년대만 해도 속리산정에는 번성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전설로도 자리잡지 못하고, 오직 바람만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통신대가 저리 있었다면, 트럭이 다닐 도로도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데요. 추후 밝혀지겠죠^^

위의 사진을 건물 중심으로 집중했는데요.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몇년 사이에 얼마나 변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책자를 준비하는데는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68-72년 모습이라고 하면 될 듯 합니다.

1을 보시면, 문짝이 규칙적으로 있는 걸 보면 여관이 확실합니다.
상호가 '산장 별관'이라고 적힌 걸 아래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 이때까지만 해도 여기에는 건물이 없네요. 위의 사진에는 별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아래 새로 발굴한 사진 2장 중 첫번째는 3 쪽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컬러 사진에서 3 부분을 확대해 보았더니...
아래 에는 기둥을 세워 올려 건물을 올린게 금강산 표훈사의 보덕암 재현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술집 같습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아래 사진을 통해 보겠습니다.

위에 있는 공간은 무료 휴식소라고 적혀 있군요.
무료라고 '유혹^^'을 하는 이유는 등산로에서 제일 왼쪽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겠죠.
당시 경제마인드로는 그냥두지 않았을 듯.
그 아래에는 아직까지는 건물이 없습니다만, 위의 사진을 보면 곧 술집이 생겨납니다.
좌측을 보면 서울식당이라고 있는데, 서울식당의 분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좌측하단에 서울 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이고...오른쪽에 산장별관이 보입니다.
서울식당 뒤에는 위에서 2라고 표시된 건물이 아직 없군요....~~~
그렇다면 문제는 이 전설의 도시가 언제 생겨났을까요?
시인 고은이 그 답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여행(1973 한국일보사)에는 시인 고은의 속리산 산행기겸 소개글이 있는데,
일부를 모셔옵니다.
나는 한때 속리산 법주사 주지를 맡을까 하다가 그만 둔 일이 있다.
그 뒤로 속리산에는 서너번 해제 사이의 순례로 삼고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운수납자로서의 여행이었다.
정확한건 더 알아보아야겠지만,
고은은 50년경 머리를 깍은 뒤 수행에 전념하다 10년 뒤 1960년 하산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속리산을 다닌 때는 1960년 전입니다.
충청도 양반 바위들에는 10여년 전 생식으로 지내는 지공당(知空堂)을 찾을까 하다가
'그 작자 아직 세상 뜨지 않았오?'라고 물었을 뿐,
문장대까지의 숨가뿐 바윗길을 올랐다.
세상에는!
문장대에 여관이 생긴 사실에 놀랐다.
고은은 이렇게 짧게만 탄식하듯 언급하고는 곧 이야기 물꼬를 돌립니다.
아마 동행객이 속리산에서 주석하던 '월산' 큰스님이 아니라 세속인이었다면,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여관에서 자게 되었을텐데, 그이야기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허나 문장대에 도시가 생겨난 건 1960년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진에서처럼 1970년대 초에도 계속 '공사중'이었고요.....
''''''''''''''''''''''''''''
그렇다면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 등을 통해 몇몇 자료들을 모셔옵니다.
제일먼저, 1966년 소설가이자 기자인 최일남의 기고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리길에는 마차가 다니는데 1인당 50원으로 조랑말이 끄는대로 끄덕끄덕 재미가 있다고 하네요.
여기서도 울울한 숲의 턴넬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복천암을 지나 경치좋은 문장대. 여관, 다방, 매점이 좀 지저분하다.
문장대를 오를 때 전에는 바위길이 아기자기 스릴과 스프펜스가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쇠다리를 만들어 놓고 10원씩 받고 있다.
산밑이라면 몰라도 산위에서까지 돈을 뜯기면 배가 좀 아프다.'

1970년 7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서해안'입니다.
속리산은 모기 뱀 칡덩굴이 없다는 이른바 삼무 피서지라고 하고 있군요.
문장대에도 여관이 있는데, 숙박비는 법주사 주변과 같다.
그렇다면 하루에 5,600원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휴가철에는 더 비쌌겠죠...~
그리고 1971년 4월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봄바람 선거바람 일렁이는 4월을 가다.- 행락 러쉬- 헐리는 속리산'이라는 제목입니다.
선거때문에 속리산이 헐린다는 건 대관절 무슨 뜻일까요?

69년 삼선개헌후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깐딱깐딱 김대중에게 이겼습니다.
'국립공원 면모에 먹칠, 산기슭엔 온통 술집, 하숙이다.'
대전에서부터 울퉁불퉁한 시골길은 속리산 입구 표지가 붙은 곳에서부터 아스팔트길이었다.
빨강파랑 울긋불긋한 지붕의 문화주택이 옛 초가집들을 대신해 근대화를 자랑한다.'

문화주택은 공짜가 아니었다. 빚으로 낸 27만원의 입주금을 갚기 위해 불법 하숙을 하였다.
젊은이들의 유흥문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탄식은 언제나 있어왔고요.
그 젊은이들은 지금 6,70대가 되었습니다그려.
버주사 경내에서도 '임아' 몸짓하며 소울을 불러대는 아가씨가 있더라니,
당시 사찰마다 '금연' 팻말을 부친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님아'라는 노래는 1968년 신중현 작곡, 배인순배인숙이 부른 '님아' 일 겁니다.(유투브)
물가에 점심상을 차려주던 등산입구 노점의 할아버지가 말하길,
'선거바람타고 국립공원이 헐려가요'라면서 산에 올라가 보라고 한다.

해발 1000미터의 문장대에 오르자, 산밑에 울긋불긋 모양없이 들어선
10 여채의 무허가 노점, 술집, 하숙, 산장들을 보고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들어선 것도 문제인데, 새집을 짓느라고 한창 법석
마치 산 위에 시장 모퉁이나 판자촌을 옮겨온 듯 볼품없이 떠들썩하다.
'지금부터 대목 한철만 넘기면 한밑천 잡겠죠.' 대전에서 원정왔다는 장사꾼은.....

엘리트 기자에게는 볼품없던 곳이었겠죠.
그러나 저는 입장이 약간 다릅니다.
모택동의 어록처럼 '산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였던 시절에는 말이죠.

신문에 삽입된 사진입니다.
문장대 주변이 아니라 오르는 등산로 주변의 계곡 같습니다.
지붕 처마를 더 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곳곳에 평상이 놓여져 있고, 먹고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속리산 넓은 품이 보여주는 너무 아름다운 한 시절 이야기입니다.
''''''''''''''''''''''''''''''''''''
1973년 10월 매일경제, 상가의 소재지인 경상북도 도지사의 발언입니다.

속리산 정상인 문장대 주변 9개의 간이 점포중 미관을 해치는 5개 점포는
연내로 철거, 조경사업을 실시하고 공중변소와 벤치 휴지통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민원이 적지 않았나 봅니다.....
아마 뜻있는 식자층과 점잖은 분들이 고발^^을 하는 거겠죠.
그렇다면 언제 사라졌을까요?
분명히 한날 한시에 사라졌기 쉬운데, 신문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속리산 문장대 휴게소 33년만에 철거 (쿠키뉴스 2008.11.02.
이곳 주변에는 1970년대 여관 13동 등 휴게소가 난립했으나
1976년 국립공원 지정으로 여관은 모두 철거되고 문장대 휴게소만 남아 있었다.
라고 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관 13동 등 휴게소가 난립했으나 -> 여관, 휴게소 등 13동이 난립했어나라고 해야할 듯 하고요.
속리산 국립공원 지정은 1970년인 걸보면 신뢰할 수 없을 기사입니다만,
1976년을 마지막으로 소멸한 건 거의 맞아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1976년 합법적인 '문장대 휴게소'가 세워졌다는 게 그 방증입니다.
그 도시의 마지막 정리는 대략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도 지난 6년간 경관을 저해하던 방치 시설물 30개소를 연차적으로 철거,개수해 속리산국립공원을 자연 상태로 되돌려놓고 있다.
특히 지난 2008년 속리산국립공원의 대표 봉우리인 문장대에 위치하여 음식물 쓰레기와 오수방출로 자연훼손의 주범이었던 문장대 휴게소 철거 및 식생복원은 '국립공원 환경개선사업'의 커다란 성과로 평가 받고 있다.
2011 충청일보
'방치 시설물'이라고 하고 있군요.
영업은 진작에 못하고 철거도 제대로 안된 건물들도 여기에 포함될 겁니다.
''''''''''''''''''''''''''''''''''''''''''''''
그렇다면 합법적으로 장사를 해온 문장대 휴게소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해보겠습니다.

문장대 휴게소입니다.
2008년 문장대 휴게소는 철거되는데, 이 운영주체 등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2008년 뉴스 에 의하면,
다시말해 1976년 문장대휴게소를 신축했다는 말은,
그무렵 문장대 근처에 있던 불법 비합법 도시를 철거했고,
등산객을 위한 대안으로 세워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2013 9월 뉴스 에 의하면,
보은 속리산 문장대(文藏臺)가 45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는다. 24일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사무소에 따르면 문장대(해발 1천54m) 주변 경관과 생태계 복원을 위해 이날 문장대 바위 절벽 옆에 자리 잡은 통신탑 관리실(71㎡)·발전실(15㎡)과 공중화장실(33㎡)을 철거했다.
그간 문장대 경관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은 통신용 시설은 1968년 건설된 것이다. 이날 철거로 문장대에 있던 인공 구조물은 45년 만에 모두 사라지게 됐다. 앞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08년 휴게소를 헐었고, 지난해에는 높이 44m의 통신용 철탑을 철거하는 등 문장대 복원 사업을 펼쳤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의 '국립공원내 정화(?)'를 회고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도 여기 관련한 구절이 있곘죠. 발견하는데로 업그레이드 하겠습니다.
'''''''''''''''''''''''''
속리산 문장대 바로 아래 있던 이 동네를 뭐라 불러야 좋을까요?
절아래를 사하촌 하듯이, 봉우리 아래는 봉하촌이 좋을 듯 하네요.
굿바이 봉하촌. 그동안 고마웠어...
이상 속리산 1000m 넘는 곳에 있던 한 도시의 이야기였습니다...
[ 출처 : 등산박물관-우리들의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