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1호 포석정, 그 곳에 전해지는 슬픈 이야기
흔히 남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서울 남산이죠.
서울N타워가 있는 이곳은 서울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또 한 곳의 남산이 경북 경주시에 있습니다. 서울 남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이곳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탑, 불상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남산 곳곳을 걷다 보면 길 위에서 만나는 불교 문화재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답니다.
한편 남산 서쪽 편에는 우리나라 사적 1호로 지정된 ‘이곳’이 있는데요. 우리에게 흔히 귀족들의 유흥지로 알려진 ‘이곳’. 조선의 제4대 임금이었던 세종은 신라가 이곳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답니다. 신라 말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경주 포석정지 ⓒ 김지수
오늘 소개할 ‘이곳’은 바로 경주 포석정지입니다. 1963년 국가지정 사적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 포석정은 어떤 곳인가?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나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오직 헌강왕에게만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포석정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셈인데 이를 통해 헌강왕의 재위 시기였던 875년~885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주 포석정지 입구 ⓒ 김지수
포석정지는 흔히 신라 지배층의 유흥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이곳에 물을 흐르게 해 놀이를 즐겼다는 석조 구조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상곡수라는 놀이가 행해졌던 곳입니다. 중국 동진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가 쓴 <<난정서>>에 처음 등장하는 이 놀이는 구불구불한 물길이 흐르는 곳에서 술잔을 띄워 자기 앞으로 그 술잔이 떠내려올 때까지 시를 읊었던 놀이입니다. 시를 알아야 했고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계층은 당시 사회에서 귀족들뿐이었으므로 유상곡수는 귀족들의 고급문화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포석정지는 신라 지배층의 유흥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99년, 이곳이 단순한 유흥지가 아니라 실제로는 제례를 위한 성스러운 공간이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포석정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포석정지 주변 발굴조사를 통해 거대한 건물터와 기와편에 포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 포석정지 ⓒ 김지수
2. 신라 말, 흔들리는 왕권과 경애왕의 죽음
포석정지는 기울어가는 신라왕조의 상황이 여실히 드러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8세기 말, 지방 호족들의 세력화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통일국가였던 신라는 분열을 거듭하게 됩니다. 처음 지방 군소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다 결국에는 옛 고구려를 계승한 후고구려와 옛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가 들어서며 200여 년 만에 한반도는 다시 삼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후 후고구려는 궁예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면서 국호를 고려로 바꾸게 됩니다.
고려가 세워질 당시 신라의 임금은 경애왕이었습니다. 후백제보다 신라에 훨씬 더 우호적이었던 고려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후백제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나라의 힘이 기울었던 경애왕 역시 고려의 도움 없이 나라를 보존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는 왕건에게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하게 됩니다.
경주 포석정지 ⓒ 김지수
두 나라에 의해 고립된 후백제는 신라를 급습해 세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927년, 견훤은 군사를 내어 경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과 왕비를 붙잡았습니다. 당시 경애왕과 왕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공격하니, 임금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령하여 굳센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경주를 습격하였다.
이때 임금은 왕비, 후궁 및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어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임금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여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벌벌 기면서 노비가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그의 병사들을 풀어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고, 궁궐에 들어앉아 측근들에게 임금을 찾도록 하였다. 임금이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오니, 견훤은 임금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
포석정에 있던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후궁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사로잡혀 자결하며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경애왕이 우리에게 무능한 왕이자 나라를 돌보지 않은 왕으로 알려진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는 후대인들이 그의 무능력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 포석정지 ⓒ 김지수
지방 호족들의 득세와 그로 인해 신라는 후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더 이상 스스로 나라의 힘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약해졌던 신라. 고려와의 연합을 추구했지만 후백제 견훤의 기습으로 경애왕은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9월 견훤이 공격했다는 고울부는 현재의 경북 영천군에 해당합니다. 영천에서 경주까지는 지척으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로 쳐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던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경주로 진격해 온 후백제군에 의해 경주는 초토화가 되고 말지요.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과연 경애왕이 여자와 놀이에 미쳐서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놀이가 아닌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구원병이 오기 전 까지 후백제군이 쳐들어오지 않기를. 아무런 희생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애왕의 죽음과 포석정 대해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기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음력 11월에 경주로 쳐들어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력으로는 12월~1월에 해당합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유상곡수를 하며 풍류를 즐겼을 가능성은 낮은거죠. 두 번째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포석정의 기록입니다.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진 처용랑 조에 보면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의 신을 만났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신이 만나는 곳은 유흥지 보다는 사당과 같은 제례의식이 행해졌던 곳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행해진 유상곡수가 원래 삼짇날 행해지는 민속놀이 중 하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유상곡수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놀이가 아니라 제례의식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경애왕릉 ⓒ 김지수
아무리 무능력한 왕이라고 하더라도 적이 코앞에 있는데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서는 왕은 없습니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인 것이 아니라 제례를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망에 처한 국가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서 당시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견훤의 칼이 경주까지 닥친 것이지요.
경주 남산 서쪽에 자리한 사적 1호 포석정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이곳에 대한 인식을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나라가 분열되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왕위에 오른 경애왕.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억울하게 후손들에게 무능한 왕으로 기록된 경애왕. 포석정에 대한 해석이 새로워질 때, 오명을 쓴 경애왕에 대한 평가 역시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청 기자단 김지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