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 하느님 바까(Baka Brahma)의 전생이야기
니까야에 등장하는 하느님
초기경전을 보면 하느님 ‘바까’가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말한다. 부처님당시 브라만교 최고신이다. 브라만교에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최고신이다. 이 브라흐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에서와 같이 ‘범천(梵天)’으로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글에 따르면 니까야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신앙의 대상이라기 보다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라 하였다. 브라만교에서는 최고신일지 몰라도 불교에서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호적인 하느님도 있다. 사함빠띠가 대표적이다. 사함빠띠 하느님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한 수호자역할을 한다. 이는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과 ‘존중의 경(S6.2)’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하느님 중에는 망상적인 하느님도 있다. 우주적 수명에 고취되어 자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자라고 착각하는 하느님이다. 그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느님 바까의 경(S6.4)’이다.
망상적 하느님 바까
하느님 바까는 망상가형이다. 경에 따르면 하느님 바까에게 나쁜 견해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이다.(S6.4)”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어지는 문구에 따르면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이다.(S6.4)”라 하였다. 이렇게 착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 오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바까는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다.(ito ca pana??a? uttari? nissara?a? natth?)”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고 망상이다. 왜 그런가?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uttari? nissara?a? : 윤회에서 출리(出離)를 뜻한다. 영원주의 이외에 다른 윤회로부터의 출리는 없다는 것이다. Srp.I.208에 따르면, 전생에서 하느님 바까는 선정을 닦아 네 번째 선정의 경지에 해당하는 수명이 오백 겁인 ‘위대한 경지로 얻은 신들의 하느님 세계(광과천)’에 태어났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선정의 경지에 해당하는 수명이 60겁인 ‘영광으로 충만한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변정천)’에 태어났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수명이 8겁인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극광천)’에 태어났다. 그리고 나서 첫 번째 선정의 경지에 해당하는 수명이 일 겁인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났다. 그는 그렇게 윤회하면서도 그것을 잊고 영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1322번 각주, 전재성님)
하느님 바까는 계속 윤회하여 왔다. 선정수행을 한 공덕으로 색계 4선천에 해당되는 광과천에서 태어나 5백겁의 수명을 누렸다. 그 다음 부터는 계속 아래 세계로 내려간다. 마침내 수명이 고작 일겁에 해당되는 색계초선천에 이르렀다. 그곳을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마하브라흐마(Mahabrahma)라 하여 ‘대범천’이라 한다. 대범천에서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이 너무나 오래 살아서 과거 전생을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다.
신통변화는 황당한가?
고작 일겁을 살면서도 과거 전생을 잊어 버린 하느님 바까는 크게 착각하고 있다. 것은 우주를 자신이 창조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우주와 자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부처님이 하느님 바까를 찾아 갔다..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존께서 하느님 바까의 생각을 마음으로 알아채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팔을 굽히는 듯한 사이에, 제따 숲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S6.4)”라 되어 있다. 부처님이 ‘타심통 (他心通 , paracitta-vij?hana)’으로 남의 마음을 읽으시고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것처럼 묘사 되어 있다. 이런 묘사는 황당한 것이 아니다. 사선정에서는 천안통, 천이통 등 신통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하느님 바까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영원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이다.(S6.4)”라 하였다. 여기서 이것이란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하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Bakabrahmasutta-하느님 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6.4, 전재성님역)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무상함을 이야기 하였지만 바까는 항상하다고 하였다. 바까는 항상함, 불변함이 진리(Dhamma)라 한다.
부처님은 바까가 무명에 빠져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입니다 (nattha??a? uttari nissara?a)”라 하였다. 이 문구와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이것을 넘어선 다른 더 수승한 벗어남이란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re is no other escape superior to this.”라 하였다. 여기서 핵심어는 ‘nattha??a’이다. 이는 ‘nattha(lost)+a??a(highest knowledge)’의 뜻으로 ‘최상의 지혜를 잊어 버림’의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무명’이라고 번역한 것이라 본다. 각묵스님은 “이것을 넘어선 다른 더 수승한 벗어남이란 없다.”라 하였다. 대단히 난해한 번역이다. 영원주의를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은 없다라는 뜻이다. 빅쿠보디는 “There is no other escape superior to this.”라 하였는데, 이는 “이것을 능가하는 그 어떤 탈출도 없다”라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유사하다.
하느님 바까 말하기를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가 무명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과거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아와 우주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견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하느님 바까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지혜의 달인(knowledge-master)
번역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Ayamantim? vedag? brahmupapatti”구절이다. 전재성님은 “하느님으로서 최상의 삶은 베다로 인한 것이니”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지혜의 달인이여, 이것이 최상의 범천의 경지이니”라 하여 전혀 다른 번역처럼 보인다. 빅쿠보디는 “This, knowledge-master, is our final attainment of Brahma.”라 하여 각묵스님역과 유사하다.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역을 보면 ‘지혜의 달인(knowledge-master)’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vedag?의 번역이다. PCED194에 따르면 ‘one who has attained the highest knowledge(최상의 지식을 얻은 자)’라 되어 있다.
Ayamantim?는 Aya+mantim?형태로서 manti는 ‘A brahmin well versed in reading auspicious signs.’의 뜻이다. 이는 ‘베다 게송을 경외롭게 외는 브라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Ayamantim? vedag? brahmupapatti”라는 구절은 베다공부를 열심히 하여 범천의 세계에 태어난 것에 대한 찬탄이라 볼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
브라만교에서는 베다를 열심히 수학하면 범천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세상의 주재자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재자라 한 것은 Vasavattino를 번역한 것이다. Vasavatti의 뜻은 ‘wielding power; dominating.’의 의미이다. 주재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을 보면 알 수 있다.
브라흐마잘라경에 영원주의적 견해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마치 영원주의적 삿된 견해를 갖는 하느님 바까를 설명해 놓은 듯 하다. 주재자와 관련된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Eso hi bhikkhu brahm? mah?brahm? abhibh? anabhibh?to a??adatthudaso vasavatt? issaro katt? nimm?t? se??ho sajjit? vas? pit? bh?tabhavy?na?.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Brahmanimantanikasutta- 하느님의 초대의 경, 맛지마니까야 M49, 전재성님역)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다. 그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보는 자(a??adatthudaso), 전능자(vasavatt?), 지배자(issaro), 만드는 자(kata), 창조자(nimm?t?)라 하였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하느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느님 바까도 자신이 이와 같은 전지전능한 자로 알고 있었다.
하느님의 착각
그렇다면 하느님 바까는 왜 이렇게 착각하게 되었을까? 브라흐마잘라경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오 다른 뭇삶들이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만을 갖고 동요를 일으킨다. 그러자 다른 뭇삶들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그 뭇삶의 권속으로서의 하느님 궁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먼저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는 이와 같이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나중에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이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하느님(Brahma)는 윤회할 수밖에 없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위 천상에서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가장 먼저 출현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이 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과거전생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삿된견해를 갖게 되었다.
하느님도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
하느님 바까는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느님도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하느님 바까의 패배(The defeat of Baka)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하느님 바까에게 부처님이 하느님 바까의 전생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 바까의 수명은 주석에 따르면 일겁이라 하였다. 수명이 오백겁인 색계 사선천인 광과천에서 계속 강등되어 색계 초선천인 대범천에서 수명은 고작 일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래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수명에 대하여 ‘니랍부다’라 하였다.그런 하느님 바까의 수명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니랍부다’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십만 니랍부다’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A hundred thousand nirabbudas’라 하였다. 여기서 십만이라는 것은 ‘Sata?(A hundred) sahass?na?(a thousand)’의 번역이다. 백과 천을 곱하면 십만이 되는 것이다. 니랍부다라는 말은 인도인들이 좋아 하는 환상적인 엄청난 숫자를 말한다.
브라흐마(brahma)와 브라흐마나(br?hma?a)는 다르다
각묵스님역을 보면 brahma에 대하여 “바라문이여”라 하였다. 이는 명백한 ‘오역(誤譯)’이다. 전재성님은 “하느님이여”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원어 그대로 “0 Brahma”라 하였다.
바라문이라는 말은 브라흐마나나(br?hma?a)의 번역어이다. 이는 ‘a man of the Brahman caste’의 뜻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을 뜻한다. 영어로는 ‘브라흐민(Brahmin)’이라 한다. 범천은 브라흐마(brahma)의 번역이다. 이는 ‘the Creator’의 뜻이다. 브라흐마와 브라흐마나는 다른 말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를 보면 브라흐마나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경우 계급으로서 바라문과 사제로서 성직자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초불연의 경우 구분 없이 모두 바라문이라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초불연 게송에서 brahma에 대하여 “바라문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브라흐마와 브라흐마나를 구분하여 적용하지 못한 오류라 본다.
충격을 받은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수명이 있음을 알려 준다. 이는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에 하느님 바까는 충격을 받은 듯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바가와(bhagav?)에 대하여
가장 차이가 나는 번역이 있다. 그것은 bhagav?hamasmi이다. 전재성님은 “존자여”라 하였으나 각묵스님은 “세존이여”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0 Blessed one”이라 하였다.
바가와(bhagav?)는 세존으로 번역된다. 여래십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단지 존경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bhagav?는 어떤 뜻일까? PCED194에 따르면 ‘Worshipful, venerable, blessed, holy’의 뜻이다. 부연설명으로 ‘This word is generally used as an epithet or name of a Buddha, in particular, S?kyamuni’라 되어 있다. 바가와의 원뜻은 ‘존경의’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전재성님의 번역 “존자여”라고 번역한 것이 각묵스님의 번역 “세존이여”라고 한 것 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대괄호를 이용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이런 방식은 시어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빅쿠보디의 번역에서도 “0 Blessed one, [you say]:”라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의 번역 “세존이여, [당신은]… [라고 말합니다.]”와 일치한다.
하느님 바까의 전생이야기
하느님 바까는 점점 다급해 지는 것 같다. 부처님이 바까의 과거를 낱낱이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까는 스스로 영원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나 부처부처님부터 자신의 목숨이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듣고 놀랐다. 부처님이 전지(全智)한 것을 안 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바까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 준다. .
게송에서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라는 후렴구가 있다. 여기서 ‘잠에서 깨어난(Suttappabuddhova)’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참으로 깨어난 뜻으로 부처님이 된” 이라는 뜻이라 한다. 잠에서 깨어난 것을 부처가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 숙명통(宿命通, pubbeniv?sa-anussati)
부처님은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 이를 숙명통(宿命通, pubbeniv?sa-anussati)이라 한다. 이는 초월지로서 사선정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이와 같이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히면, 전생의 여러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한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천 번 태어나고 십만번 태어나고 수많은 파괴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의 발생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파괴와 세계 발생의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그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그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S51:12)”라 하였다.
이러한 숙명통은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과 누진통(漏盡通, ?savakkhaya-???a)과 함께 삼명이라 한다.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숙명통’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어 윤회하는 뭇삶을 보게 되었고(초야), ‘천안통’으로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지혜를 얻어 업과 과보를 보게 되었고(중야), ‘누진통’으로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여 깨달음을 이루었다(후야) 라고 경에 표기 되어 있다.
부처님은 숙명통으로 하느님 바까의 과거 전생을 알려 주었다. 그런 부처님은 전지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sabba??u)’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하지 않다. 하지만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자는 전지할 뿐만 아니라 전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일체지자일 뿐이다. 전능하다고 하는 것은 허구이다. 전능하다는 것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설명되는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전지하지만 전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망상에서 깨어난 하느님 바까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으로부터 자신의 과거 전생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영원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았다.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망상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에 하느님 바까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바까] “틀림없이 그대는 나의 생애를 바로 알고 있고. 또한 다른 것도 알고 있으니. 그대는 깨달은 님, 참으로 광휘로운 위력이 그야말로 하늘나라를 밝히고 있네.”
(Bakabrahmasutta-하느님 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6.4, 전재성님역)
하느님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
하느님 바까와 관련하여 노래가 있다. 남방 테라와다불교국가에서 수호경으로 불리우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th?)이다.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라고도 불리운다. 망상가형 하느님 바까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Dugg?ha-di??hi-bhujagena suda??ha-hattha? 둑가~하 딧티 부자게나 수닷타 핫탕 Brahma? visuddhi-jutim-iddhi-bak?bhidh?na? 브라흐망 위숫디 주띰 이디 바까-비다-낭 ????gadena vidhin? jitav? munindo 냐-나-가데나 위디나- 지따와- 무닌도 Ta?-tejas? bhavatu te jaya-ma?gal?ni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청정하고 빛나고 위력 있는 범천 바까가 (Jayama?gala G?th?-吉祥勝利偈, 8번 게송, 전재성님역)
자야망갈라가타 8번 게송, Imee Ooi창송
2015-05-06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