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2.水. 날씨 생긴 분위기는 딱 비인데 빗방울이 안 보이누나
04월29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4.19혁명에 대한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5.16군사정변에 대한 기억은 몇 가지 또렷한 추억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해 3월초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나는 어엿한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국민학교 1학년짜리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웃사촌인 옆집 아이도 1학년이었고 길 건너편 집 아이도 1학년이었습니다. 그렇게 친구 또래가 대여섯 명가량 되었는데, 그 중 이웃사촌인 옆집 아이는 성姓도 같고 항렬行列도 같아 따져본다면 8촌은 넘어서겠지만 10촌 안팎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집과 그 아이 집 벽돌 담장에는 하늘색 작은 쪽문이 있어서 무시로 들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넓고 큰 기와집이었는데 나에게는 없는 예쁜 누나가 두 명이나 있어서 집안 분위기가 훨씬 좋은 듯했습니다. 그때야 어느 집이든지 마당 한켠에는 샘이나 두 팔로 켜는 뽐뿌가 있었고, 우리 집 뽐뿌물은 땅속으로 박혀있는 파이프 깊이가 낮았든지 물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그 아이 집 뽐뿌물은 아주 좋아서 물도 거의 그 아이 집에서 길러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집도 한옥이었으나 규모가 컸던지 1층 천장 위로 다락공간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이런 저런 물건들이 놓여있을 뿐이어서 우리들 놀이터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2층 다락 창으로 널찍한 마당과 화단을 내려다보는 풍경들은 내게 대단한 즐거움이었는데 어쩌면 그 아이 집에 놀러가는 이유가 숨어있는 2층 다락에 가기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 엄마께서는 성품이 아주 선善해서 우리들을 매우 예뻐해 주셨는데 우리 엄마와도 한 집안이라서 그랬든지 형님, 아우님 하면서 무척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라면 이 아이 집은 예수교 장로회 계통의 기독교 집안이라 어른들은 모두 장로고 권사였던 것 같았는데, 건축업을 하시는 그 아이 아빠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항상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께서는 볼 때마다 우리들더러 교회에 다녀야한다고 훈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 집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길 따라 하천이 길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여름날 장마 때면 그 하천에서 파랗고 노란 색종이로 접은 종이배를 띄우는 놀이도 하고, 어떤 때는 실제로 종이배에 개미를 실어서 띄워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았던 기억은 없는 것으로 보아 벌써 그 시기만 되어도 도시 복판을 흘러가는 소규모 하천에는 물고가 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진주처럼 빛나는 작고 아름답고 시시콜콜한 시간의 틈새들을 다 기억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참 뒤인 국민학교 5,6학년 때만해도 K시 복판을 흘러가는 K천에서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고, 초겨울이면 구루마로 날라 온 김장거리 폭배추를 포기 포기 씻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 교문과 현관에 하얀 모조지에 날렵한 붓글씨로 써 내린 혁명공약이라는 글이 붙어있었습니다. 1학년인 우리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아마 고학년들에게는 혁명공약 전문을 외우라고 했던지 그 내용을 자랑삼아 외우고 있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 후로 중학교에 가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보니 논산 훈련소에서는 외워야할 것들이 또 무어가 그리 많던지 훈련을 받으면서 무언가를 중얼중얼 외우고 다녔습니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집에서 더 먼 거리에 있던 학교였습니다. 집에서 이십 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가까운 학교가 있었지만 나는 통학시간이 그 두 배가 더 걸리는 규모가 크고 역사가 더 오래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벌써 오래전 흙으로 메워서 주택단지가 되어버린 경양방죽 가장자리를 따라 빙 돌아가서 기차가 지나다니는 굴다리 아래로 걸어 조그만 점빵과 식료품 가게와 만화가게와 문구점들이 있는 길을 지나면 학교 정문이 나왔습니다. 그 학교는 1학년 때는 11반이었고, K시로 다시 복귀했던 5학년 때는 2반이었고, 6학년 때는 1반이었던, 1학년 2학기부터 4학년까지 3년 반 동안의 틈새에 시골의 향기와 자연의 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입학과 졸업을 했던 국민학교였습니다. 1학년 담임 선생님과 6학년 담임 선생님의 성함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5학년 담임 선생님 성함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프로레슬러 역도산이나 김일이 알려지기 전이었고, 코미디언 구봉서나 서영춘보다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 중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속사포 대화중에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장에 소를 팔러 갔다가 태어났다고 해서 장소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말과 고추밭에서 일하다 낳은 딸이라고 해서 이름이 고춘자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야 하늘은 날마다 푸르렀고, 물은 맑았고, 사람들은 소박했고, 바람은 부드러워 끼니를 때워야할 식량이외에는 별로 근심걱정을 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4,5일 동안처럼 대기가 부옇게 미세먼지로 채워져 있어서 유리 창문을 도무지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꼭 감고 예전에 다녀온 적이 있던 히말라야나 뉴멕시코 주州의 라스크루세스 하늘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들어가 뉴멕시코 주州 라스크루세스라고 치면 여행기나 현지에 사는 분들의 블로그를 통해 라스크루세스 풍경風景과 경치景致를 담은 사진들이 주욱 올라오는데, 기억속의 청색 하늘이 또렷 또렷이 눈앞에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데다 근래에 보았던 미드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를 통해서 뉴멕시코 주州의 다른 도시인 앨버커키Albuquerque를 알게 되었는데,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마약을 만들어야하는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의 인생역경이 담긴 잘 짜인 줄거리도 재미있었지만 마약과 현금과 총을 통해 파악해가야 하는 실물 경제학의 선善과 악惡의 가치價値에 관한 이야기의 배경인 앨버커키와 시내 외곽 황무지와 벌판 등의 싯푸른 하늘과 새하얀 뭉게구름이 얼마나 내 마음을 어린 시절의 고향 하늘로 한달음에 이끌어주던지 그만 추억까지 시원해져버렸습니다. 앨버커키에서 가까운 산타페는 뉴멕시코 주州의 주도州都로 예술과 휴양의 도시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하늘 색깔이나 바람의 청아함도 라스크루세스나 앨버커키만한지 어떤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멕시코와 국경이 가까운 라스크루세스에서는 멕시컨 스타일 요리가 아닌 진짜 멕시코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데 가격이 대도시에 비해 너무 저렴해서 혹시 이 음식 가짜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우리 집은 지금도 그대로 있는데 아마도 그 근방은 재개발 지역으로 고시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 한옥은 ㄱ자 집으로 툇마루 한가운데 벽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추를 좌우로 흔들면서 매 시각마다 시각 숫자만큼 종을 데엥~ 데엥~ 울려주고 있었고, 안방 여닫이문 위편으로는 화가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들의 두 복제품이 걸려있었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이 밀레의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밀레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속에는 한국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감情感이랄까 서정抒情이 섞여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는 합니다. 학교가 파하면 집에 와서 친구들과 구슬을 치고, 딱지를 치고, 자치기를 하고, 팽이를 치고, 제기를 차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쌍둥이 배를 접어 하천위에 띄우면서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