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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수훈 (5-3)
진짜 배부름이란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토색, 불의, 간음하는 세리들과 자기들 사이에 구렁을 낸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것이 많은데 저들은 왜 저렇게 가진 것이 없어? 그게 구렁이다. / 주님은 그런 구렁을 만든 바리새인을 보고 의롭다고 하지 않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자신의 가난함을 토로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자랑하고 증명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 목마르고 배고픈 거지들은 자기 안에 자신을 치장하고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지덕지하고 받아먹는다. 그게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 세상의 부자들은 자기들의 특별함으로 거지들을 구별하여 밀어내어 버린다. 그게 구렁이다. 그런데 묵시 속으로 들어가니 그 상황이 완전히 돌변한다. 이 세상에서 주리고 목말랐던 자가 천국의 풍요에 참여해 있고, 이 세상에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자신을 자랑하고 살던 부자는 주리고 목이 말라 물 한 방울을 구걸하고 있다.
(눅 16:24~26)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 부자로 자신을 자랑하며 살던 자가 목마른 자가 되어 있다. 그들을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은 자’라 하고, 이 세상에서 정의를 외치며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자’라고 한다. / 고난받은 나사로는 모든 것을 가진 하늘의 부자로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진짜 배부른 자’라고 말씀하신다.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 존재하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은 이 세상에서 부자인 바리새인들이 만든 것이다. 난 저 세리와 달라, 난 저 창녀와 달라, 난 저 과부와 달라 등등 수많은 구렁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은 거룩한 자리에 구별시켜 놓은 것이 바리새인들이다. 그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구렁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구렁이 되었다. /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도덕성이나 됨됨이, 소유나 명예 등으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갖는 것이 의롭고 정당한 삶인 줄 알았는데 묵시 속에 들어가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부자가 묵시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회개를 외치는 것이다.
(성도는 믿음으로 묵시 속에 올라가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 부자가 묵시 속에 올라갔더니 자기가 거지이고, 자기가 목마른 자이다. 거기는 물 한 방울도 없다. 그런데 역사를 내려다 보니 형제들이 있다.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비유이다. 그래서 묵시 속에서 이 사람은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사로를 보내서 이 묵시를 증거하여 내 동생들이 회개하게 해 주세요. 착하게 살라고, 의를 쌓으라고, 제사 열심히 드리라고, 회개하라고 전해 주세요’ 했다. // ‘내 안에서는 나올 수 있는 의가 조금도 없으니 하나님 나를 찾아와 주세요.’가 회개이다.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배웠듯이 아버지가, 주인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눅 16:27~30)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묵시 속에서의 부자의 관심이 회개로 집중되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아무 의도 없는 나에게 찾아오심으로 죽어 마땅한 내가 살아나는’ 은혜의 구원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 부자는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 형제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정의를 위해 살라고 전하지도 않는다. 묵시의 현실을 증거하여 자기 형제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 묵시 속에 들어가 보니 그곳에서 산 자로 살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성도는 묵시 속에서 역사를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만 존재일 수 있고, 생명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며 그들이 진짜 배부른 천국의 백성들이다.
(이 세상에서 배부른 자로 사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물 한 방울 찍어 먹지 못하는 가난하고 가련한 자가 된다. 그래서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한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배부른 것이다. / ‘의를 많이 행하라, 착한 일 많이 해라. 그러면 너희들이 배부를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다. 지금 그렇게 배 안 불러도 괜찮다. 배부르다는 것은 나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만족스러우면 안 된다. / 잘하고 있어, 많이 발전하고 있어! 이게 배부른 것이다. 오히려 점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나중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다오.’라는 예수님이 40일 굶고 주리신 상태에서 하신 그런 신음을 토해내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부어지는 것이다.)
(시 103:8~17)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죄인으로 계속 폭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진토이고 티끌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기대하시겠어? 너희들에게 기대할 것 없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역사이고 인생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 중심의 주리고 목마른 참 신앙을 갖고 있는가?
// 아래는 강해 책에는 없고 동영상에만 있는 내용이다. 문장을 상당 부분 편집하였다.//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시편이 다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여호와의 ‘의’만이 영원한 것이고 그의 ‘의’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임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깨닫고 가면 된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대목을 구원받기 전의 사도바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성화를 매우 중요시하였고, 성화는 성도에게 사유될 수 있고 쌓일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대사도가 여전히 자기의 죄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그의 로마서 강해를 보면 이 부분에서 책 한두 권 분량의 설명이 아주 불편하다. 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한다’고 했는데, 구원받기 이전의 사람이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할 수 없다. -> 이것은 바울 사도가 사도직을 수행하는 중에 자각한 자기의 실체를 묘사한 것이다. 내 속에 예수가 들어와 계셔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데 그건 내가 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안 된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를 시체라고 한다. / ‘사망의 몸’ = 살인자가 죽인 시체를 살인자에게 꽁꽁 묶어 놓은 것 / 나는 ‘사망의 몸’이다 => 나는 시체이다. // ‘시체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어?’ 바울의 이 애통함이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는 위로로 이어진다. / ‘이 애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몇 가지 죄라도 해결해 봐야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위로가 아니다. 예수가 위로이다. 십자가가 위로이다.
창세 전에 신령한 복을 내려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애통이라는 필수과목을 이수케 하시는가? 하나님 백성들의 창조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복 받은 현실을 그들이 누리게 하는 데 있지 않다. / 하나님 나라의 목적은 ‘여러분이 받은 복, 구원, 그 천국의 현실을 여러분이 누리게 해 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내가 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찬송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그분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자구나!’라는 처음 자리 확인이 필연적이고 필수적이다. / 자신의 처음 자리가 어머니 자궁 속의 그 핏덩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산 존재로 부름받은 자신의 현실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현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어머니 자궁 속의 핏덩이는 자궁에 연결된 태가 끊어지면 그냥 고깃덩이, 살덩이, 죽은 것에 불과하다. (-> 자궁과 긍휼이 같은 단어이다.) / 우리의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 고깃덩어리의 자리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생명이 탄생 된다. 그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는 자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처음 자리 확인이다.
(시 30: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는 지금 저녁이라는 역사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료된 기쁨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가시적으로 임할 것이다.-> 이게 위로이다.
(시 30: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자신의 죄인 됨의 자각이 있는 자가 ‘하나님, 제가 무덤에 있는 자인데 하나님 제 피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며 유익이 되겠습니까? 진토인 제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이 ‘하나님 도와주세요.’이다. 이게 애통이다.
(시 30:10~12)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역사와 인생 사는 동안 하나님은 이 결론을 이끌어 내신다. 우리가 이 세상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에게서 박수 받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 우리의 목숨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된다고,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만날 주먹 불끈 쥐고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래? 누가 그걸 달라고 하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코를 잠깐만 막아버리면 여러분은 사라질 존재인데 그걸 하나님께 드려? 그건 하나님이 주신 것이야. 죽은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뭣에 쓰려고 받아? / 하나님께서 나를 써 주시면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자를 쓰십니까!” 하고 감사하게 쓰임을 받으면 된다. / 여러분의 고난이 주님께 무슨 도움이 되기에 주를 위해 고난을 받겠다고 해? 그냥 주님이 당신을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면 제자들처럼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도 주를 위한 고난을 허락하세요?” 이런 자리로 가는 게 성도이다. 이게 애통함이고,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 사도들이 옥에서 나오면서 “아! 어떻게 나 같은 자를 주를 위해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지!” 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친 것이 아니다. 올바른 성도의 자아 인식이 있으면 주를 위해서 고난이 오는 것도 기뻐지는 것이다. / 내가 감히 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그것은 아직도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목숨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데에서 나오는 오만이다. 그냥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가면서 살면 된다. 거기서 여러분에게 열심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격발시키시는 열심이다. 그런 ‘하나님이 시키는 열심’이 나오면 그땐 최선을 다해서 하라. 여러분의 의를 쌓기 위해 나오는 열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어 행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나? “아무것도 안 해야지” 하는 것도 행위이다. 자기의 행위가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안 해야지! /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료된 하늘의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성경 몇 군데를 찾아보자.
(사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완료되는 시점이다. 그전까지는 여러분에게 슬픔이 있어야 한다. 이게 51장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사 51:11~12) 11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12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다른 데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들의 위로는 나야 나! 난데 왜 딴 사람들 너희에게서 떠나간다고 슬퍼하고 애통하고 그래? 그런 것 버리고 나만 봐! 내가 위로야! / 그들은 위로 아니야! 걱정하지 마. 세상 것들 다 위로가 되지 않아! 나만 봐! 나만 위로야! 그런데 우리는 너무 걱정한다. 저게 나의 위로였는데 저게 나를 떠나가면 어떻게 하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끊어 내시는 것이다.
(계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묵시 속 현실은 여러분에게 이미 닥쳐 있다. 여러분의 처음 자리 확인이라는 이 역사와 인생을 살면서 이 묵시의 현실이 얼마나 면목 없고 감사한 것인지를 애통 속에서 배우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 그러면 된다. 딴 것 없다. 여러분이 찬송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 여러분의 실체를 위장하거나 감추지 말라. 애통하라. 슬퍼하라. /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애통이 다 해결되었음을 인해 위로를 받으라. 하나님은 구약 즉, 율법으로 성도를 애통케 하신 후에 신약 즉, 은혜로 성도를 위로하신다. 이게 역사이다.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다. / 그러한 삶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고 애통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지향성이 또 함께 격발된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자는 애통하게 만든다고 하셨다. -> 애통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이다. 성도는 절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다. 애통은 분투로 이어지게 되고 분투는 다시 애통이 될지언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위로의 현실이 성도를 계속 덮쳐온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근심 -> 애통케 하다. 슬프게 하다. / 하나님의 성령을 애통케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이미) 받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