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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명시감상
바다시금치
김도우
아이는 봄을 기다렸다
집나간 엄마를 기다렸고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렸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 짓고 동생을 돌보는
고사리 손이 얼고 부르텄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고
새끼 돌게와 놀았다
해풍이 거칠게 밀려올 때마다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흙을 파고들었다.
꼬부라진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
파랗게 질려
불그죽죽한 시금치
엄마의 젖처럼
깊고 달다
얼다 녹다 온몸이 붉어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미터 육상선수와 마라톤 선수의 몸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축구선수와 배구선수의 몸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제일급 시인의 시와 소설가의 글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성악가의 목소리와 무용수의 몸짓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천하절경의 소나무와 풍경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일등국가의 일등국민의 도덕과 법률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군더더기는 말 그대로 쓸모없는 것이며, 이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예술작품과도 같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그의 인생의 보증수표가 되고,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모든 사상과 미학의 기초가 되어준다.
사나운 비바람과 만고풍상의 삶은 고통의 존재 근거가 되고, 이 고통이야말로 모든 천재적인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외부의 고통이든, 내부의 고통이든 간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깊이 있게 괴로워하고 그 고통과 싸우는 자는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더욱더 가혹하고 혹독하게 훈련시키게 되고, 따라서 거기에는 더없이 나태하고 부도덕한 군더더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된다. 김도우 시인의 [바다시금치]처럼“파랗게 질려/ 불그죽죽한 시금치/ 엄마의 젖처럼/ 깊고”단 예술품 자체가 된 아이의 삶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집 나간 엄마와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짓고 동생을 돌보느라 고사리 손이 얼고 부르텄던 아이,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고 새끼 돌게와 놀았던 아이, 해풍이 거칠게 밀려올 때마다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흙을 파고들었던 아이, 그리하여 꼬부라진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 요컨대 이 어린아이 삶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삶이 시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고/새끼 돌게와 놀았다”는 시구는 어느 누구나 쓸 수 있는 시구가 아니며, 또한,“해풍이 거칠게 밀려올 때마다/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흙을 파고들었다/ 꼬부라진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던 아이”나“파랗게 질려/ 불그죽죽한 시금치/ 엄마의 젖처럼/ 깊고 달다/ 얼다 녹다 온몸이 붉어져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시구 역시도 어느 누구나 쓸 수 있는 시구가 아니다. 기다림은 손이 부르트고, 그리움은 하늘을 바다에 펼쳐놓는다. 새끼 돌게와 놀며 그 고통을 참고 견디던 아이는 사나운 비바람과 만고풍상의 삶 앞에서도 발톱에 피가 맺히도록 생존능력을 발휘하고, 그리하여 다랭이 밭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바다시금치]가 된 것이다. 바다시금치, 작고 모질지만 영양가가 풍부하고 가장 맛있는 바다시금치----. 김도우 시인의 [바다시금치]에는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그의 피와 땀이 배어 있고, 이처럼 천하제일의 명시가 저절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인에게는 고통의 귀와 고통의 코와 고통의 입과 고통의 눈이 있다. 그는 고통으로 보고 고통으로 숨쉬며, 고통으로 소리를 듣고 고통으로 말을 한다. 고통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고통은 영리하고 머나먼 과거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종합적인 시야를 지녔다. 김도우 시인의 [바다시금치]의 아름답고 멋진 시구들은 고통의 산물이며, 이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엄마의 젖’처럼 깊고 단 [바다시금치]가 탄생한 것이다. 집 나간 엄마와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소년 가장이 된 어린 아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바다시금치]가 된 것이다. 인간의 세계가 고통스럽게 할 때, 아니, 그가 그의 고통으로 숨을 쉬고 밥을 먹을 때, 그는 예술작품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통은 천하제일의 시인의 길이며, 모든 위대함의 뿌리는 고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는 그의 삶의 기록이자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낮잠 자는 사이
최도선
보랏빛 가지 곁에 방아깨비 여치 개미 논다
수박을 그렸는데 생쥐가 와서 파먹고
양귀비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나비에게 쫓겨난 뱀
외로운 맘 숨겨보려 풀벌레 불러놓고
따스한 햇살아래 맘껏 풀어 놓았더니
저 닭이 먼저 다가와 벌레들을 쪼아 먹네
꿈인가! 시에스타 HERMES 찻잔 그림
초충도가 분명한데 누구의 손길인가
보이지 않는 예술 혼 바람만이 스쳐간다
----{시터} 동인지에서
최도선 시인의 [낮잠 자는 사이]는 비몽사몽非夢似夢의 시이며, 우주적 몽상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비몽사몽이란 무엇이고, 몽상이란 무엇인가? 비몽사몽이란 완전히 잠이 든 상태도 아니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은 상태를 말하고, 몽상이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말한다. 최도선 시인의 [낮잠 자는 사이]는 현실과 꿈, 또는 꿈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며, 몽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이는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최도선 시인의 [낮잠 자는 사이]를 이해하는 두 열쇠말은 씨에스타와 HERMES라는 단어라고 할 수가 있다. 씨에스타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의 국가에서 낮잠을 자는 풍습을 말하고,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제우스의 심부름꾼(사신使神)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헤르메스는 상업의 신이자 도둑의 신이며, 인간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지만, 오늘날에는 헤르메스 접시, 헤르메스 신발, 헤르메스 팔찌, 헤르메스 목걸이와도 같은 명품 브랜드로 더욱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최도선 시인은 씨에스타, 즉, [낮잠 자는 사이]에서 헤르메스 찻잔의‘초충도’를 바라보며, 그 몽상적인 세계를 따라가 보고 있는 것이다.‘초충도’란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인데, 그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란 말인가? 보랏빛 가지 곁에 방아깨비, 여치, 개미가 놀고, 수박을 그렸는데 생쥐가 와서 파먹는다. 정욕의 대명사인 뱀은 양귀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나비에게 쫓겨나고, “외로운 맘 숨겨보려 풀벌레 불러놓고/ 따스한 햇살아래 맘껏 풀어 놓았더니”“닭이 먼저 다가와 풀벌레들을 쪼아”먹는다. 헤르메스 찻잔의 그림인 초충도는 그림이 아니라 우주이며, 이 우주 속에는 보랏빛 가지, 양귀비, 수박이 아주 싱싱하게 살아 있고, 또한, 방아깨비, 여치, 개미, 생쥐, 나비, 뱀, 닭, 풀벌레들이 제멋대로 뛰어놀며 먹이활동을 한다. 헤르메스 찻잔의 그림이 그림의 탈을 벗고 우주적인 몽상을 펼쳐보이며, 최도선 시인으로 하여금“보이지 않는 예술 혼 바람만이 스쳐간다”라고 저절로 감탄을 하게 한다.
이 세계, 이 우주는 몽상의 산물인가, 이성의 산물인가? 몽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지만, 그러나 이 헛된 생각이 상상력의 힘으로 초충도를 그려내고, 이 초충도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돌파해낸다. 이성은 현실이고 실현 가능한 일을 기획하고, 몽상, 즉, 비이성은 탈현실이고 실현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꿈꾼다. 하지만, 그러나 몽상은“수박을 그렸는데 생쥐가 와서 파먹고/ 양귀비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나비에게 쫓겨난 뱀”처럼, 또는“외로운 맘 숨겨보려 풀벌레 불러놓고/ 따스한 햇살아래 맘껏 풀어 놓았더니/ 저 닭이 먼저 다가와 벌레들을 쪼아 먹네”라는 시구처럼,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초충도’라는 우주적 세계를 구축해낸다. 몽상은 새로운 사유이며 멋진 신세계이고, 이 몽상이 있기 때문에 이성은 그 불가능성의 한계를 돌파해낸다. 물위를 달린다는 몽상, 하늘을 날겠다는 몽상, 별과 별 사이와 은하계와 은하계를 날아다니겠다는 몽상, 인간과 동식물과의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신세계를 창출해내겠다는 몽상----, 이 몽상의 헛된 사유를 구체화하고 실현시킨 것은 이성이지만,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돌파해낸 것은 몽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몽상이 인간의 이성과 사회적인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면, 이 세계,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빠른 힘의 소유자가 된다. 그는 헤르메스의 날개를 달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미래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초현실에서 탈현실로 그 어떤 장애도 없이 자유자재롭게 날아다닌다. 몽상은 진위의 장벽도 모르고, 이념과 이념의 장벽도 모른다. 인종과 인종의 장벽도 모르고, 종교와 종교의 장벽도 모른다. 남녀노소의 차이도 모르고, 뱀과 나비의 위계질서도 모른다. 이성과 몽상의 경계도 모르고, 은하계와 은하계의 시공간의 경계도 모른다.
최도선 시인의 [낮잠 자는 사이]는 몽상에 빠져들자마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이성의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펼쳐진다. 인간과 벌레, 벌레와 짐승, 풀과 벌레의 기존의 관계가 역전되고, 비현실적인 놀이와 몽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헤르메스의 찻잔과 초충도는 꿈이고 환영이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의 세계이고,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세계이다. 몽상은 사실보다, 이성보다 더 진실한 생각이고, 이성은 몽상보다, 꿈보다 더 헛된 생각이다. 몽상은 꿈을 꾸고 이성은 기획하고 실천한다. 몽상과 이성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무서운 짝패(원수형제)와도 같다.
이 상상, 이 몽상의 힘보다 더 큰것은 없고, 이 몽상의 힘이 모든 시와 문화의 근본적인 원동력----보이지 않는 예술혼----인 것이다.
통하는 법
최금녀
친구는 죽고 싶다고 한다. 남편과의 불화, 동생과의 갈등…… 들어보면 그 말이 그 말인데 그게 통한다. 불화가 통한다. 갈등이 통한다. 영화를 보는데 영화 속에서도 친구는 꼭 죽는다. 불화는 어디서든 통한다. 갈등은 어디서든 통한다. 통하지 않는 건 죽음뿐이다. 말이 씨가 되니 다시는 그런 말 마. 친구에게 당부하고 종일 친구의 전화를 기다린다.
친구가 입원했다. 병문안을 간다. 수술이 잘되어 정신도 말짱하다. 과일을 깎아 건넨다. 가스가 나오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위험하단다. 나를 가르친다. 통하는 게 많았다.
----{시터} 동인지에서
삶이란 수수께끼이며, 이 수수께끼는 전지전능한 신마저도 풀 수가 없다. 전지전능한 신이‘삶이란 수수께끼’를 풀면 이 세상의 삶이 없어지고, 모든 인간들이 개성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화석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벗겨도 벗겨도 그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양파와도 같으며, 이 본질이 없는 삶이 우리 인간들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 루카치의 말대로 본질은 찾아져야 하지만, 본질이 없는 삶을 상정할 때만이 시는 시간과 함께 형식이 주어진다.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 있는 것이지,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행복이 있기 때문에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화가 있기 때문에 화해가 있는 것이지, 화해가 있기 때문에 불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태초에 선과 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행복과 불행, 또는 불화와 화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태초에 인간의 탄생이 있었고, 그 다음에 삶, 즉, 생존이란 과제가 있었던 것이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화해와 불화 등은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가치판단과 그 심리적 감정들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악이다. 내가 만족하면 행복이고,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이다. 너와 나의 사이가 좋으면 화해이고, 너와 나의 사이가 나쁘면 불화이다. 이처럼 가장 원시적인 주체철학에서 공동체 사회의 인간의 철학으로 발전해온 것이 현대철학이라면 모든 철학은 우리 인간들의 삶이 장애를 만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 장애를 만났다는 것은 선보다는 악이 먼저 등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덕과 법률은 악의 토대에 기초해 있으며, 이 악을 하나 하나 근절시켜 나감으로써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행복보다는 불행이, 화해보다는 불화가 먼저이며, 이 악과 불행과 불화들을 근절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들의 삶이 그 의미를 얻게 된다. 선과 행복과 화해는 이상적인 본질이고 환영이 되고, 악과 불행과 불화는 구체적인 현상이고, 언제, 어디서나 살아 있다. 불화도 통하고, 갈등도 통한다. 왜냐하면 불화와 갈등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조건이며, 그 조건 속에서 선과 행복과 화해를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설이며, 이 개념들이 적정성을 얻는 것은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편리함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이 세상의 근본 의지는 삶의 의지이고, 이 삶의 의지에 반하는 것은 악이고, 그 의지에 호응하는 것은 선이다. 따라서 선과 악은 그 사람의 성격, 취향, 처지, 환경,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어떤 경우에는 화해할 수 없는 싸움으로 발전한다.“친구는 죽고 싶다고 한다. 남편과의 불화, 동생과의 갈등…… 들어보면 그 말이 그 말인데 그게 통한다.”“불화는 어디서든 통한다. 갈등은 어디서든 통한다. 통하지 않는 건 죽음뿐이다”라고 최금녀 시인은 말하지만, 그러나 그 말은 의례적인 반어, 즉, 죽고 싶다는 친구를 만류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말이 씨가 되니 다시는 그런 말 마”라는 조건반사적인 말은 오히려, 거꾸로 “죽고 싶다는 말”이 가장 잘 통한다는 것을 뜻한다.
서정시와 비극은 그 주인공의 비참한 생애에 맞닿아 있고, 서사시와 설화는 그 주인공의 행복한 삶에 맞닿아 있다. 서사시와 설화가 신화의 옷을 입은 영웅숭배와 관련이 있다면, 서정시와 비극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비참한 말로(패배)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불행한 인간이며, 불행하면 모두가 다 통한다. 이 통하는 마음으로 친구가 되고, 이 [통하는 법]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불행은 비극의 시작이자 비극의 종말이다. 불행이 없으면 삶도 없고, [통하는 법]도 없고, 친구도 없다.
“친구가 입원했다. 병문안을 간다. 수술이 잘되어 정신도 말짱하다. 과일을 깎아 건넨다. 가스가 나오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위험하단다. 나를 가르친다. 통하는 게 많았다.”
연리지몽
김윤이
사랑받고 컸는데 항상 외로웠다
자신의 바닥을 들여다보듯 좀처럼 깨지 못하는 꿈
안으로부터 당겨 닫는다
둘이 삐들삐들 말라 서로의 몸에 들어간 요기로운 기형이다
팔이 뻗고 다리가 뻗고 얼굴이 붙고 이내 붙들린다
제가끔 불붙는다 여자의 앗, 뜨거에 이어 악, 뜨거 남자가 말한다
말이 불붙고 불똥이 튀고 불길이 덮친다
화상이 된 회상이 남는다
나는 불 질러 남은 회상자국을 알고 있다
책에 무심코 엎어버린 커피자국처럼 시커멓게 살갗에 달라붙어
얇은 두 장을 붙여버린, 어느 장면에 대하여
나는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장면을 봉한다
너로 인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기억을 봉한다
네가 모든 걸 안다는 듯 나를 옭아맨다
다리가 붙고 팔이 붙고 몸통이 붙어버린 꿈에서
두 눈이 빠져버릴 것처럼 허우적대다 깨면
송연함에 흥건한 땀이 싸늘하게 식고 내 속으로 사라진다
너는 너무나 서슴없이 내 속으로 다시 들어선다
사람들은 이제 너를 나로 여길 판이다
너를 밀어내보지만 멀찍이서 하는 생각 같다
나무로 밀어내는 나무만 무성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지켜보는 것에 이골이 나 함께한다
네가 사는 내 꿈에서 나는 기생하는
연리지몽 夢이다 너를 붙잡는 손등에
늙은 나뭇결처럼 파란 정맥이 불끈 솟는다
연리지連理枝는 아주 특별하고, 이 특별한 것은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다. 희소성의 가치를 지닌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고귀하고 값이 비싸다. 연리지는 줄기와 줄기, 또는 가지와 가지가 붙어있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동종의 나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이종異種의 나무일 수도 있다.
연리지는 기형이며, 이 기형의 아름다움 때문에 만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것은 흔히 ‘사랑나무’라고 불린다. 나무와 나무, 또는 가지와 가지가 “삐들삐들 말라 서로의 몸에 들어간 요기로운 기형”이기 때문에, 식물적 존재가 인간적 존재로 찬양을 받게 된다. 연리지가 사랑하는 연인의 상징이 된 것이고, 그 요기로운 기형은 자유와 개성은 물론, 영원한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팔이 뻗고 다리가 뻗고 얼굴이 붙고 이내 붙들린다/ 제가끔 불붙는다 여자의 앗, 뜨거에 이어 악, 뜨거 남자가 말한다.” 네 꿈 속에는 내가 살고, 내 꿈 속에는 네가 산다. 너와 나는 자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희생시켜 ‘한마음—한뜻’의 일심동체가 된 것이고, 이 ‘연리지의 꿈’으로 아들과 딸들을 낳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나 ‘연리지몽’은 동상이몽이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그 사랑과 그 불장난만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말이 불붙고 불똥이 튀고 불길이” 덮쳐 너와 나는 크나큰 화상을 입게 된다. 추억, 기억, 회상은 “책에 무심코 엎어버린 커피자국처럼 시커멓게 살갗에 달라붙어” 화상자국(회상자국)을 남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너는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책임전가를 한다. “너로 인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기억을 봉”하고, “다리가 붙고 팔이 붙고 몸통이 붙어버린 꿈에서/ 두 눈이 빠져버릴 것처럼 허우적대다 깨면/ 송연함에 흥건한 땀이 싸늘하게 식고 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랑은 만인들을 불러모우고, 미움은 모든 사람들을 떠나가게 한다. 김윤이 시인의 [연리지몽]은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의 줄타기이며, 그 곡예의 아름다움으로 둘이서 하나가 된 것이다.
김윤이 시인의 [연리지몽]은 둘이서 하나가 되는 꿈이며, 모든 사랑의 원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원형이란 삶의 시작이고 삶의 끝이며, 모든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는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은 상류 중의 상류이고, 때묻지 않은 고향이며, 언제, 어느 때나 모천회귀의 높이뛰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형님과 형수의 사랑, 누님과 매형의 사랑, 영희와 철수의 사랑, 영식이와 순희의 사랑 등, 사랑은 언제, 어느 때나 서로가 서로를 불태우고, 서로가 서로를 그만큼 물어뜯고 비난한다. 사랑은 기형이고 아름다움이고 연리지이며, 모든 만남과 이별, 모든 즐거움과 고통이 시작되는 곳이다. 너는 너무나 서슴없이 내 속으로 다시 들어오고, 나는 너무나 서슴없이 네 속으로 들어간다. 어제도, 오늘도 “너를 밀어내 보지만” “사람들은 이제 너를 나로 여길 판이다.”
나를 밀어내는 너만 무성해지고, 너를 밀어내는 나만 무성해지고, 나무를 밀어내는 나무만 무성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지켜보는 것에 이골이 나 함께 살고, 내가 사는 네 꿈에 너는 기생하며 산다.
연리지의 꿈이다. “너를 붙잡는 손등에/ 늙은 나뭇결처럼 파란 정맥이 불끈 솟는다.”
아아, 사랑, 연리지의 꿈, 백년가약, 일심동체, 가정, 꿈, 행복 등에는 그 얼마나 찬양과 찬사가 바쳐졌던 것이며, 이 연리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얼마나 엄청난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쏟아부었단 말인가? 사랑은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고, 불이며 불장난이고, 사랑은 끝끝내 비극, 또는 잔혹극, 또는 대서사시의 장엄함으로 그 막을 내린다.
김윤이의 [연리지몽].
사랑은 변화이고 운동이며, 영원한 전진이다.
에튀드
김이듬
삐걱거리는 마루 위를 걸어갔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가 올 거니까
정원에는 새하얀 침대 카버가 마르고 있다
긴 장마가 끝났다
어제까지 흘린 눈물과 땀이 빈틈없이 사라지는 정오
다시 폭풍과 기근, 역병이 올 거라는 뉴스가 들렸다
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유리잔을 떨어뜨렸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
네가 올 거니까
숟가락으로 죽을 뜨며 할머니가 말한다
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살아 있으면 만난다고
흔한 말인데 오늘따라 웃음이 난다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연주할 곡을 고르는 동안
무한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되찾는 동안
더디게나마 네가 오고 있는 동안
‘에튀드’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에튀드란 피아노 연주자의 기술 향상을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하지만, 김이듬 시인의 [에튀드]란 그대를 기다리며, 그대와 함께 연주할 사랑의 노래를 뜻한다고 할 수가 있다. 계절은 긴 장마가 끝난 여름이고, 때는“어제까지 흘린 눈물과 땀이 빈틈없이 사라지는 정오”이며, 무대는“새하얀 침대 카버가 마르고”있는 한옥의 정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랑하는 그대를“네가 올 거니까”라고 그만큼 간절하고 애틋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와 그대는 연인이면서도 친구이고, 오랜 친구이면서도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부부 사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쩌다가 사랑하는 연인이면서도 친구이고, 오랜 친구이면서도 부부인 이 남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헤어져 이별의 아픔을 연주해야만 했던 것일까?“긴 장마가 끝났다”는 것은“어제까지 흘린 눈물과 땀이 빈틈없이 사라지는 정오”처럼 모든 이별의 아픔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고,“정원에는 새하얀 침대 카버가 마르고 있다”는 것은 이제 그대와 함께 아기를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다시 폭풍과 기근, 역병이 올 거라는 뉴스가 들렸”지만,“찬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유리잔을 떨어뜨렸지만/ 아무것도 깨지지”않은 것처럼, 우리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그 어떤 역경도 다 이겨낼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네가 올 거니까”라는 믿음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살아 있으면 만난다고”라는 시구에서처럼, 모든 불길한 징후와 예감을 말소해버리는 이 세상의 삶의 찬가가 된다.
김이듬 시인의‘에튀드의 시학’은‘사랑의 시학’이며, 그는 이‘사랑의 시학’을 연주하며 사랑의 천리길을 걸어간다. 그대와 함께라면 폭풍과 기근과 역병도 두렵지가 않고, 그대와 함께라면 그 어떠한 장애물도 희망의 날개를 달고 사뿐히 건너갈 수가 있다. 전쟁 중에도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듯이,“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웃음은 희망이고 환희이고 삶의 찬가이며, 우리는 이 웃음으로 늘 새롭고 행복한 사랑의 역사를 써나간다.
사랑의 꽃은 웃음이며,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 모든 것을 찬양한다. 사랑은 무한히 참고 인내하며, 그 어떤 장애물과 고통도 다 극복해낸다. 모든 축제는 사랑의 축제이고, 모든 문화도 사랑의 축제이다. 모든 시장도 사랑의 시장이고, 모든 역사도 사랑의 역사이다.
사랑은 만물의 아버지이자 만물의 기원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힘이 세고, 이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
숟가락으로 죽을 뜨며 할머니가 말한다
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살아 있으면 만난다고
흔한 말인데 오늘따라 웃음이 난다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연주할 곡을 고르는 동안
무한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되찾는 동안
더디게나마 네가 오고 있는 동안
히파티아
오 현 정
여성은 우주
철학자는 드물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가장 깊고 높은 철학이다
그림 속 유일한 여성 히파티아
마녀가 아닌 철학자로 오늘도 신플라톤주의를 설파하는 듯
당당하게 정면으로 관람객을 주시하고 있다
얘야, 아무 거침없이 나아가
부조리와 모순에서도 꽃을 피워야지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해도 이별의 날은 온다
그때 너는 무얼 할 수 있지
라파엘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테네 학당’을 그렸다
평화와 사랑은 언제까지나 미완성
르네상스 시대의 두 눈이었던 히파티아가 내게 속삭인다
사다리가 높을수록 네 안의 낮은 것들은 끓어오른다
앎의 무량함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란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히파티아(370년경~414년)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철학분야에서는 신플라톤주의를 완성했고, 수학분야에서는 디오판투스의 대수학(Diophantus' Arithmetica)을 완성했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하이드로미터Hydrometer와 수중 투시경Hydroscope을 발명했고,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교수이자 철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천구의(天球宜, Astrolabe)를 제작했다고 한다.
히파티아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된 이후, 이교도를 배척한 기독교의 광신도들에게 아주 갈갈이 찢겨지고 캐사리온 교회에서 불태워졌지만,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마리 퀴리와 쌍벽을 이루는 여성과학자라고 할 수가 있다. 히피티아는 아버지의 권유로 아테네 유학을 다녀왔고, 이집트로 돌아와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플라톤 아카데미’의 책임자로서 수학과 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나는 진리와 결혼했다’라는 말로 모든 결혼제의를 거절한 그녀의‘신플라톤주의’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짝 그 꽃을 피웠고, 로마와 그리스와 콘스탄티노플 등에서 수많은 청강생들이 몰려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히파티아는 어렵고 난해한 이론체계를 앞세우던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쉽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모든 이론과 현상들을 설명해나갔으며, 그 결과, 그녀의 명성은 전세계에 울려퍼졌고, 이것이 결국은 기독교도들에 의한 희생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이성과 문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문화유산은 모두 배척되었고,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즉, 그토록 길고 험난했던 중세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문예부흥운동이었고, 기독교의 탄압과 박해에 맞서서 인간의 자기 발견을 이룩해낸 세계적인 대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데카르트에 의한 인간의 자기발견(사유하는 인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갈릴레오에 의한 혁명적 우주관,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가마에 의한 새로운 지리적 발견 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로마 교황청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이른바‘라파엘로의 방’이라고 할 수가 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세계적인 거장이며, 이‘라파엘로의 방’에는‘아테네 학당’이라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세기에 라파엘로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스무 명의 철학자들을 엄선하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아테네 학당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이 그림 속에는 유일한 여성 철학자로서 히파티아가 소크라테스 바로 앞에 서있는 것이다. 다른 지역, 다른 문화, 다양한 역사와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는 그들의 단 하나의 신의 이름으로 너무나도 끔찍하고, 너무나도 잔인한 잔혹극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행했고, 그 결과,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몰락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현정 시인의 [히파티아]는 라파엘로의‘아테네 학당’을 보고 히파티아에게 바친 송가이며, 앎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여성은 우주”이고,“철학자는 드물지만/ 어머니라는 이름은 가장 깊고 높은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앎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고, 동서고금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만인의 심금을 사로잡는다. 히파티아는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우주를 포기하고 앎, 즉, 진리와 결혼한 철학자이며, 그녀가 역설한 신플라톤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아테네 학당’을 통해서 사랑과 평화의 노래로 울려퍼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양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의 총애를 받으면서,“얘야, 아무 거침없이 나아가/ 부조리와 모순에서도 꽃을 피워야지/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고 맹세해도 이별의 날은 온다/ 그때 너는 무얼 할 수 있지”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앎(진리, 지혜)은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역사의 종말, 또는 최후의 날을 맞이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게 한다.
앎은 희망이고 삶의 의지이고, 앎은 전인류의 양식이고 문예부흥의 영원한 등불이다. 이 세상의 기독교의 광신도들에게 그토록 처절하고 잔인하게 죽어간 히파티아가 오히려, 거꾸로“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안과 밖을”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철학자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동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앎과 사상으로 사랑과 평화의 꽃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철학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와 히파티아와 함께, 동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청춘의 삶을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죽어가지만, 시인은, 철학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하면 약속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지만, 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약속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다.
우리 한국인들은 학문 중의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백치같은 짓만을 되풀이 한다.
대선공약과 약속의 파기가 일상사이며, 거짓말과 사기로 밥을 먹고 산다.
푸른 화살
신혜진
사마귀 한 마리
화살나무 위에서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
시퍼런 톱날 다리로
노랑배허리노린재를 움켜잡고 씨름하고 있다, 아니
노랑배허리노린재가 뜯어먹히고 있다
머리가 사라지고
노란 몸통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력을 다 한 노랑배허리노린재 긴 다리가 파르르 사라진다
화살나무 잎이 붉게 흔들리고
11월이 흔들리고
내 발밑이 흔들리고
한 세계가 사라진다
송도공원
노랑배허리노린재는 푸른 화살을 맞은 것이다
화살나무는 노박덩굴과에 속한 낙엽관목이며, 줄기에 화살의 깃처럼 생긴 코르크의 날개가 길게 발달해 있다. 연한 초록색꽃이 5월경, 잎겨드랑이에서 취산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10월에 붉게 익으며, 키는 약 3미터 정도까지 자란다. 어린 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코르크의 날개는 말려서 약으로 쓰기도 한다. 화살나무는 산기슭이나 산허리의 암석지대에서 자라며, 우리나라와 일본과 중국과 사할린 등에 널리 분포해 있다.
화살나무란 다음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노박덩굴과에 속한 낙엽관목이며, 줄기에 화살의 깃처럼 생긴 코르크의 날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화살이란 그 옛날에 동물사냥을 하거나 적을 쏘아죽이던 무기를 말한다. 신혜진 시인의 [푸른 화살]은 우리가 흔히 아는 화살이 아니며, 약육강식의 일상성과 그 섬뜩함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약육강식은 자연의 이치이며, 천적관계, 또는 먹이사슬로도 설명할 수가 있지만, 섬뜩함은 그것이 생명이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도록 무섭고 끔찍한 행위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일상성이란 약육강식과 그 무섭고 끔찍한 행위가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신혜진 시인은 약육강식의 일상성과 그 섬뜩함에다가‘푸른 화살’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형체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푸른 화살]은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운 언어와 그 선율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약육강식의 일상성과 그 섬뜩함이라는 대반전의 드라마를 노래하게 된 것이다.“사마귀 한 마리/ 화살나무 위에서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은 사마귀 한 마리가 노랑배허리노린재를 사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시퍼런 톱날 다리로/ 노랑배허리노린재를 움켜잡고 씨름하고 있다”는 것은“노랑배허리노린재가 뜯어먹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노랑배허리노린재의“머리가 사라지고/ 노란 몸통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력을 다 한 노랑배허리노린재 긴 다리가 파르르”사라지게 된 것이다.
“화살나무 잎이 붉게 흔들리고/ 11월이 흔들리고/ 내 발밑이 흔들리고/ 한 세계가 사라진다.”노랑배허리노린재의 태양과 달이 사라진 것이고, 노랑배허리노린재의 별과 별들이 사라진 것이다. 하늘과 바다가 사라진 것이고, 모든 동식물들과 맑은 공기와 그가 숨쉬고 살았던 우주가 사라진 것이다. 신혜진 시인은 [푸른 화살]을 그토록 무섭고 끔찍한 사마귀로 변신시키고, 이 사마귀는 그 변신의 힘으로 푸른 화살이 되어‘노랑배허리노린재’의 우주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약육강식의 일상성과 그 섬뜩함, 모든 가치의 전복인 푸른 화살----.시인은 인간이 아닌 푸른 화살이다. 그는 한 생명의 세계와 우주를 초토화시킨 푸른 화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화살이고, 이 화살은 천하무적의 푸른 화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