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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석 명절 하루 전날입니다. 추석이 하루 앞인데도 더위는 가시지 않고 무덥기만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하루 전날을 기다렸냐고요? 그것은 오늘, 우리와 떨어져 혼자 대전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가 내가 살고 있는 청주 외할아버지 댁에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내가 9살 때인 작년 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빠의 도박 때문이었어요. 아빠는 좋은 직장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만 도박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고, 결국은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엄마로부터도 버림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엄마가 자립할 때까지 외할아버지 댁에서 임시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빠는 신안이라는 먼 섬지역의 염전으로 가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서 들었어요. 도박에 빠지기 전의 아빠는 내겐 참으로 좋은 아빠였어요. 같이 공받기도 하고, 축구도 함께 하고, 게임도 같이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가버린 일들이지요.
그리고 1주일 전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어요. 집에서 키우는 개 해피가 나이가 들어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할아버지는 해피를 무명천으로 싸서 뒷마당의 감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주었는데,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내내 눈물을 흘렸어요. 할아버지는 명절이 지나고 나면 장에 가서 예쁜 강아지를 사주마고 나를 달래셨지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기다리는 엄마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기다리다 지친 나는 집을 나와 동네 어귀의 정자나무까지 나가 보았습니다. 나무 밑에 받쳐놓은 평상에는 명절연휴라 그런지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 쪽을 향해 앉아 있었지요. 잠시 후 마을버스가 들어와 손님들을 내려주었는데 거기에도 엄마는 끼어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훌쩍 넘었어요. 나는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어요. 방금 도착한 마을버스에서 엄마가 내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두 손에는 선물 보따리를 가득 들고서 말이에요. 나는 얼른 엄마에게 달려가 짐을 들어 드렸죠.
“엄마, 왜 이제 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래, 많이 기다렸지, 창훈아! 이리로 오기 직전에 일이 좀 생겨서 늦었어. 어서 할아버지 댁으로 가자꾸나.”
엄마와 나는 부지런히 걸어 집으로 갔어요.
“두 분 절 받으세요.” 엄마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래, 고생 많지? 식당일은 할 만 하니?”
“예, 손님이 많아 늘 바쁘답니다. 주인아줌마가 오늘도 일을 하자고 했지만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이리로 온 것이지요. 그리고 추석 보너스 받은 돈으로 두 분 가을 셔츠를 샀어요. 한 번 입어 보시고요, 창훈이는 그림 그리기 좋아하니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샀단다.”
“야, 엄마 최고! 마침 크레파스가 다 닳았는데 잘 되었네요. 바로 그림을 그려볼게요.”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받아들고 내 방으로 갔어요. 무엇을 그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사람 얼굴 네 개를 그렸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말이에요. 그런데 그리고 보니 어쩐지 허전했어요. 바로 내 곁에 있어야할 아빠가 빠진 것이었죠. 나는 그 자리를 살짝 비워두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그 그림을 들고 안방으로 가서 엄마에게 보여 드렸어요.
“잘 그렸구나. 그런데 네 곁에는 왜 빈자리로 남겨 두었지?”
“그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나는 대충 얼버무렸어요. 차마 헤어진 아빠의 자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어요.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지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어요.
“옆집 선미 엄마는 잘 지내나요? 조그만 선물을 사왔으니 가져다주고 올게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엄마가 방문을 나서자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창훈아,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네 아빠는 이제 도박도 하지 않는다는구나. 착실하게 살고 있대.”
“또 언제 도박을 할지 모르잖아요? 나는 아빠를 믿을 수 없어요. 절대로요.”
그리고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선미 엄마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죠. 선미도 나와 있었고요. 나는 괜스레 화가 나서 집밖으로 나와 버렸답니다. 도대체 내가 헤어진 아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어요.
그때 선미가 집 앞 골목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로 다가왔어요.
“너 화났니?”
“응, 아빠 이야기만 나오면 화가 나.”
“너는 그래도 헤어진 아빠라도 있잖아? 우리 아빠는 진작 저 세상으로 갔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는데..........”
“엄마와 나를 힘들게 한 아빠에 대한 미움이 아직도 가시지가 않아.”
“물론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만 이야기해. 저녁이 곧 되어 가는데도 날이 더우니 개울로 나가자.”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리는 동네 개울가로 갔습니다. 손으로 물을 움켜보니 햇볕에 달구어진 개울물은 시원하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올 여름은 참 유별납니다. 두 달이 넘게 무더위가 계속되고, 밤까지 열대야가 이어져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선풍기를 틀어 놓아도 더운 바람만 나옵니다. 이러다 우리나라도 열대지방이 될까 무서워요. 물속에서 헤엄치는 송사리 떼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힘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징검돌에 앉아 개울물에 발을 넣었습니다. 물이 미지근했지만 그래도 더운 것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 그렇게 30분쯤 앉아있었어요.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엄마 걱정하시겠다.” 선미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답니다.
집 앞 골목에 다다르자 우리 집에서 전 지지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들이 한데 어우러져 풍겨왔어요. 하지만 선미의 집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선미는 제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우리 집 부엌으로 들어가 할머니에게 선미에게 줄 전과 생선을 소쿠리에 조금 담아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죠.
“우리 창훈이가 벌써부터 선미를 챙기는구나, 고 녀석 참.”
“아이, 그런 것 아니에요. 할머니도 참.” 내가 아니라고 하자 엄마도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 웃으셨지요.
할머니는 소쿠리에 전 여섯 조각과 생선 세 마리를 담아서 내게 주셨어요. 나는 그것을 들고 잽싸게 선미네 집으로 갔지요.
“선미야, 이것 먹어.” 나는 가지고 간 소쿠리를 선미에게 건넸습니다. 선미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소쿠리를 받았습니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러고는 나는 지체 없이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저녁 식사 후에 마루방에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가 주머니칼로 차례상에 올릴 밤을 깎고 계셨어요. 할아버지의 칼날에 따라 밤의 속살이 하얗게 드러났습니다.
“너도 나이가 들면 밤을 깎아야 할 테니 미리 깎는 법을 익혀두렴.”
“예, 할아버지.”
“그리고 내가 네 뜻을 물어볼게 있는데............만일 엄마와 아빠가 다시 결합한다면 네 생각은 어떠니?”
“내 마음속의 아빠에 대한 미움이 아직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빠에 대한 믿음도 완전하지 않고요.”
“이 할아비가 이틀 전에 네 아빠와 통화를 해보았는데 이제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 하루 12시간씩 고된 염전 일을 스스로 할 정도로. 그리고 아빠를 파멸로 이끈 도박 같은 것은 다시는 하지 않겠대. 만일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엄마와 네 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겠다고 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다만 얼마나 빨리 그 실수에서 벗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용서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다. 내 생각에 이제는 네가 아빠를 받아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잠깐 제 방에 갔다가 올게요.”
나는 책상에 앉았어요. 그리고 생각에 잠겼죠. 할아버지 말씀이 다 맞는 것 같았어요. 아빠가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그것을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엄마의 뜻도 알고 싶어 부엌에 있는 엄마를 담장 밖으로 불러냈어요.
“엄마, 아빠와 다시 결합하려고 해?”
“누가 그래?”
“할아버지가.”
“이틀 전에 아빠가 할아버지와 내게 의사를 물어왔어. 그래서 오늘까지 답을 해주기로 했지. 네 뜻은 어떠니?”
“엄마의 뜻에 따를게. 그리고 할아버지의 뜻도 다 맞는 것 같아. 이제는 아빠를 용서해주기로 한다는 것 말이야.”
“내 뜻도 같아. 이제 새롭게 태어난 아빠를 한 번 믿어보자.”
나는 마루방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내 뜻을 말씀드렸어요.
“할아버지의 말씀도, 엄마의 말씀도 모두 다 맞아요. 이제 아빠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드릴게요. 우리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고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창훈이가 이제 어른이 다 되었네, 허허. 정말 기특하구나.”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했어요. 집으로 오시라고요.
아빠는 읍내 다방에서 하루 종일 엄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렸지요.
시간이 어느새 밤 9시가 되었어요. 마루에 앉아있는데 귀에 익은 아빠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 온 식구가 집으로 돌아온 아빠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아빠는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제법 큰 종이박스 하나를 손에 들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 속에서 ‘낑낑’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빠는 그 상자를 마루 한 쪽 구석에 내려놓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나도 아빠에게 절을 했고요.
“온 가족에게 괴로움을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잘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이 상자 안에는 어제 진도에 가서 분양 받아온 새끼 진돗개가 들어 있어요. 장인어른을 통해 해피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많이 상심했을 창훈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야, 아빠 최고! 정말 고마워요. 잘 키울게요.” 나는 아빠로부터 상자를 넘겨받아 묶어놓은 끈을 풀어보았어요. 상자 속에는 눈 같이 하얀 아기 진돗개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아빠, 이 강아지 암놈이에요, 수놈이에요?”
“수놈이란다. 이제 네가 이름을 지어주렴.”
“진똘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진짜로 똘똘하다’는 뜻이야?”
“예, 그리고 ‘진돗개 똘똘이’라는 뜻도 되죠.
“이제 너의 개가 되었으니 잘 키워보렴.”
밤이 깊어 갑니다.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잠이 들지 않습니다. 추석 하루 전날 그동안 헤어졌던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정담을 나누기 때문이죠. 내 가슴속에 남아있던 아빠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이제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용서의 미덕을 배웠기 때문이죠.
완전한 보름달은 아니지만 크고 둥그런 달이 하늘 높이 떠올라 온 천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달님에게까지 전해지는 듯 했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추석 전날의 풍경이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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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넣을 수 있어 다행이네요.
행복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잘보셨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창훈이가 애어른이군요.
존경하는 이시찬 선생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를 잘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동화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된다는데
제 글은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많은 지도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ㆍ이쁜 동화 많이쓰세요ㆍ문봄에선 수필 등단하셨는데 글을 다양하게 쓰시나 봅니다ㆍ
예, 다양하게 써보려고 노력중입니다.
격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