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대속(代贖) : 예수가 희망이다!(벧전1:18-19)
2022.4.10 종려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몇 년 전에 EBS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다큐 영상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폼페이는 한 때는 로마제국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도시들 중의 하나였지만 AD 79년 8월에 있었던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폭발 때 멸망했다. 화산은 오후 1시 경에 갑자기 폭발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산이 폭발했고, 시속 160km 이상의 화쇄난류(화산분출물들이 폭풍처럼 지표면에 흘러가는 현상)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덮쳤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4m 이상의 화산재에 도시 전체를 덮어 버렸다. 이렇게 그들의 최후가 순식간에 갑자기 찾아올 것이라고는 화산폭발 직전까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처럼 예고 없는 최후의 순간은 우리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굳이 주님의 재림이나 거대한 지진이나 화산폭발 또는 핵전쟁 같은 전 지구적인 종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각종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인한 개인적인 최후의 날이 폼페이 최후의 날처럼 갑자기 한 순간에 반드시 닥친다. 그날은 피할 수 없고, 피한다고 해서 피해가지도 않는다. 앞으로 100년 후에도 지금 이 자리에 여전히 앉아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 폼페이 최우의 날 EBS 다큐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5gbmKGbIeL8
그런데 진짜 문제는 죽음 이후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죽어버리면 고통이 끝나는 줄 알고 극단적인 생각이나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힘들고 괴로우니까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 괴로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죽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어떤 사람이 가는가? 천국은 죄 없는 사람만 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옥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죄인들이 간다(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the lake of fire)에 던져지더라”(계20:15)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비교적 착해 보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죄인끼리 누가 누구의 죄를 깨끗하게 하겠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한다(롬6;23). 이 말씀들대로라면, 여러분들이나 저나 우리들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영원한 불못에 떨어 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지옥 사형수들과 같은 상태이다. 죄인들이 가는 지옥은 한 번 가면 다시 빠져나올 가능성은 1도 없는 절망(絶望)의 장소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절대가면 안 된다.
그렇다면 죄를 깨끗이 하고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을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몸이 아파서 죽어간다든지, 극한 고생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든지, 어디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그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가슴이 미어지고 뒤집어져서 눈에서 불이 날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녀들이 마귀 사탄의 미혹에 속아서 타락하고, 지옥불에 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불이 붙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설임 없이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들을 구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불타는 “사랑” 때문이었고(요3:16, 롬5:8), 성자 예수님은 그러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기꺼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기로 결정하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야만이 우리들이 죄로부터 정결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님의 죽음을 대속(代贖, 대신할 대, 속죄할 속)의 죽음이라고 한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빚을 대신해서 다 갚아줬다면, 나는 더 이상 갚을 필요가 없어진다.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이 대속이다. 이처럼 주님이 나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이것이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확실한 희망이 되시는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했다(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예전에 일산 근처의 어느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34살 된 청년에게 심방을 간적이 있었다. 그 청년은 큰 오토바이를 타는 취미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튼튼하고 건강한 청년이 어느 날 교통사고로 안면 뼈가 몇 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죽지 않고 산 것이 기적이었다. 병실에 그 청년을 만났을 때, 그의 얼굴과 머리뼈들은 마치 깨진 그릇을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붙이고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상태였다. 그때 그 청년에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셨습니다.”라고 말문을 열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다. 그 청년은 눈물이 펑펑 흘리면서 주님을 영접했다. 그날 그 청년은 절망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희망을 붙잡았다(좌측 사진은 내용과는 상관없음).
정호승 시인의 “내 인생의 힘이 되어준 한 마디”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늙은 악마가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사용했던 도구를 팔려고 시장에 내놓았다. “태만”, “의심”, “욕심”, “돈”, “괘락” 등 도구는 참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진열된 도구들 한쪽에 값을 매지기 않은 작은 쐐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래서 물건을 사러온 다른 악마가 ‘그것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늙은 악마가 대답했다.
“응, 그건 절망이라는 도구인데, 파는 게 아냐. 아무리 강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저걸로 틈을 벌린 후에 쓰러뜨리지. 그래서 다른 것은 다 팔아도 저것만은 팔 생각이 없다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이거든”
이 이야기에서처럼 마귀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귀 사탄은 절망이라는 쐐기로 우리의 틈을 벌리려고 시도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원한 불못에 함께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기에 이런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고,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절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담대히 믿음의 선포를 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000를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000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정말 그렇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대속의 보혈을 흘리게 하신 하나님이 무엇인들 아까워서 안주시겠는가? 그렇기에 예수가 내 영혼과 내 모든 삶의 희망이다. 돈 없고 빽 없는 것이 절망이 아니라 예수님을 놓치는 것은 절망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의 밭이라도 그리스도 안에 굳게 붙어 있으면, 얼마든지 인생의 이모작 삼모작에서는 풍년들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이생과 내생의 가장 확실한 희망이다. 우리는 비록 연약한 한 장의 종이 같은 존재지만, 믿음으로 십자가에 딱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은 내 능력이 되고, 주님의 보혈은 내 마음을 붉게 적시게 된다. 오늘 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해도 우리는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굳게 붙어 있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