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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응우엔주 거리에서
데땀 거리 신 투어 여행사에 멈춘 버스, 우리는 어제처럼 다시 4번 버스를 타고 호치민의 1번지 동코이 거리로 향했다. 오후 반나절은 아직 안 본 유명 명소를 들를 참이다. 그런데 시간이 참 애매하다. 12시 30분, 제일 먼저 통일궁을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점심시간이라고 표를 안 판다. 알고 보니 11시부터 1시까지는 입장이 불가하다. 그러니까 좀 서둘러 빨리 왔다 해도 입장 시간을 맞출 수는 없었다. 서비스가 먼저인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사회주의는 가만 보면 고객의 입장 배려가 미숙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근접한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 마르세유 산 벽돌에 내부 창에 스테인드글라스는 샤르트르에서 수입해 왔다는 성당이다. 그 시대 어떻게 글라스를 먼 거리 운송했을까.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2개의 첨탑이 대칭을 이루어 안정감을 더한다. 치솟은 높이가 58미터 그 위에 6개의 동종이 걸려 있다고 했다. 실제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미사를 진행한다는데 아쉽게 오늘은 문이 닫혀있다. 성당 앞 대형 성모마리아상, 과거 2005년 무렵 마리아상 오른쪽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려 이 기적현상을 본다고 시내가 한바탕 마비가 된 적이 있다고 하던데 궁금하기 짝이 없다.
베트남은 90년대 개방화 정책으로 외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지만 공산주의 국가라는 영향력 때문인지 종교 활동은 제한되어 있다. 다른 공산국가들도 믿는 건 자유지만 선교가 금지된 국가들이 많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강한 나라로 공직자 혹은 그의 가족 중 한 명이라도 크리스천이 되면 해임된다. 2013년 9월 1일 한국에서 온 선교 방문 팀 6명과 한국인 선교사 6명, 그리고 현지인 스텝을 포함 총 13명이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람동성에 위치한 소수부족교회인 “까○ 남○문 교회”를 방문했다가 공안당국에 체포되었다. 베트남의 종교정책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단면이다. 종교의 자유가 바탕이 된 게 이 정도라는데 공산주의 시절에는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탄압을 받았을지 짐작이 간다. 혹여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리아상이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길옆 큰 건물로 향했다. 중앙우체국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지은 건축물로 웅장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기차역을 연상시키는 외형으로서도 돋보이지만, 이 우체국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건물 설계자의 이름이 바로 '구스타프 에펠이기 때문이다. 다들 다 아는 에펠, 이름만으로도 이미 유명해진 건물이다. 문 안에 들어섰다. 아치형 높은 천장, 쳐다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체국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물 안쪽에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우체국은 꽤 성업 중이다. 여행자들은 각 지역으로 우편과 소포 등을 보낼 수 있으며,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누가 봐도 베트남스럽지 않은 건물 안, 기념품 인형 악세서리, 엽서 등등이 밝은 조명 아래 괜스레 비싸게 보이니 화려한 건물 덕을 톡톡히 본다싶다. 김 이사가 걸려들었다. 인형 하나를 들고 나오는 데 무척 예쁘다. 동남아에서는 수공예 가격이 거의 거저나 다름없다. 10,500동이면 한국으로 엽서 한 장, 배달이오~하고 날아간다. 마무리는 호치민 우체국 앞, 노란 우체통! 그들의 우체통은 은행잎처럼 노랗다.
나는 아름다운 우체국을 또 하나 알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중앙우체국. 어찌 우체국이 이렇게 화려할 수 있단 말인가. 스페인 화가 고야가 1805년도쯤인가 우체국 동네 풍경(당시 나폴레옹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렸다는 그림으로 보아 벌써 그 무렵 우체국을 그런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 놓았다는 것이 자연 입증되기도 한다. 유럽의 기차역은 어디를 가든 중후하면서도 멋있다. 파리에서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꾸미기도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황금빛 벽면과 햇살 쏟아지는 아치형 유리 돔,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대형 시계. 한때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고가는 기차역이었을 그곳에 1층부터 5층까지 밀레의 ‘이삭 줍기’ ‘만종’,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 로댕의 ‘지옥의 문’, 고흐의 ‘화가의 방’ 등 그림으로 꽉 채워 놓았다.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머무름의 공간, 그것이 바로 오르세의 운명이었나 보다.
마드리드 중앙우체국
그 무렵의 문명의 상징이던 우체국과 기차역, 그와 더불어 근대화의 상징이던 기차는 이제 추억과 낭만, 향수라는 단어와 더 잘 어울린다. 빠르게 질주하는 고속열차 시대, 그와는 반대로 느릿느릿 붙잡고 싶은 이야기. 예술가의 감성을 자극한 기차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의 투박한 그 옛날의 기차다.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는 바로 철로를 달리는 기차소리를 음악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모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존재는 해돋이, 수련, 그의 연인 카미유뿐 만이 아니었다.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에 출품한 총 8점의 ‘생 라자르 역’ 연작을 보면 그러하다. 그는 생 라자르 역 인근에 작업실을 얻어 오랜 시간 역을 관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기차역을 스치는 찰나의 빛도, 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증기도 놓치지 않았다. 모네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 매료된 소설가 에밀 졸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훗날 증기기관차 기관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야수인간'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나 역시도 기차역만 보면 마음이 설렌다. 만남과 헤어짐, 그리움과 기다림, 설렘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곳.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했던 '해바라기'의 안토니오와 지오반나도, 한평생 시골 기차역을 지키는 '철도원'의 오토도, 기억을 지워도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기차역에서 극적인 순간을 맞는다.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도 마찬가지. 기차에서 만나 즉흥적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내린 두 사람은 하루 동안 도시를 여행하며 사랑과 이별, 결혼, 죽음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 스치는 만남이었지만 서로에게 끌린 그들은 6개월 후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헤어진다. 영화의 엔딩은 기차역이라는 공간을 통해 헤어짐과 동시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그렇게 기차역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연상과 더불어 설렘의 상상을 여실히 선사한다.
오르세 미술관
정말 배가 고프다. 혈당이 지극히 떨어진 모양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식당을 찾는다. 통일궁을 보아야 하니 멀리 갈수도 없다. 우리의 친절한 안내자 전 선생님도 마땅한 곳이 없는지 연실 두리번거린다. 큰 건물에 달라붙은 글자 텍사스 치킨, 던킨 도너츠. 이 광고물이라면 이 동네는 폼 나는 축에 속할 것이다. 어제 팍슨 사이공 쇼핑센터에서 파인애플을 살 때 4층에서 마주한 가게는 롯데리아 와 KFC였다. 간식에 가까운 음식이 비싼 쇼핑센터에 껴있다는 게 의아했다. GALAXY 삼성 간판이 바로 앞에 보인다. 초밥 집을 통과하자 길거리에 나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일행들은 뭐를 먹나하며 모두들 시선이 그쪽이다. 일명 월남 쌀국수. 하지만 아무리 출출해도 이것은 아니다 싶다. 음식이 아니라 환경조건을 말한다. 하루 만에 적응은 했다지만 밖은 너무 덥다. 아무렇지 않은 듯 길거리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우리에게는 역부족이다. 무조건 식당 안쪽을 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이 닫혀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시원함이 철철 넘친다. 8명이 웅성거리자 이미 식사중인 사람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주인이 반갑게 맞는다. 식탁에는 밀가루를 튀긴 재료가 벌써 안착해 있다. 누구든 이 식사를 할라치면 넣어서 마음대로 드시라는 무언의 표식 같아 보였다. 원래 맛있었던 것인지 순전히 냉방 덕인지 아니면 시장이 반이라 그런 것인지 지금도 정확하게 규명은 어렵지만 아무튼 바삐 먹었다. 제일 연장자인 도박사님의 강력한 주문으로 사이공이라는 맥주를 간식으로 삼아.
우리가 식당을 나온 시각은 얼추 2시 가까이. 다시 통일 궁으로 향한다. 이 근처 어딘가에 우리 영사관이 있다. 거리이름은 응우엔주. 앞서 응우엔 왕조를 말한 바 있다. 역사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베트남에는 ‘응우엔’이라는 말이 흔하다.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장씨 셋째 아들, 이씨 넷째 아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을 뜻한다. 중국에 두 성씨가 많다 보니 생긴 관용어다. 지난해 중국 과학원 조사를 보면, 이(중국 발음 ‘리’)씨는 전체 인구의 7.4%로 1위, 장씨는 6.8%로 3위다. 2위는 왕(王, 7.2%)씨다. 세 성을 쓰는 인구는 지구촌 전체로도 1~3위를 차지한다.
사실 성씨 편중은 우리나라가 훨씬 심하다. 행정자치부의 최근 주민등록 통계를 보면, 1위 김 씨는 인구의 21.5%인 1057만5천명에 이른다. 여기에 이씨 723만8천명(14.73%)과 박씨 415만5천명(8.45%)을 합치면 전체의 44.68%나 된다. ‘김삼이사’라는 표현이 왜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 이런 현상은 지구촌에서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영어권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스미스(Smith)는 영국에선 1% 남짓하고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선 그보다 적다. 독일 1위인 뮐러(Müller)는 1% 안팎이며, 일본 1위 사토(佐藤) 역시 1%대다. 프랑스 1위 마르탱(Martin)은 0.5%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에선 가르시아(Garcia)가 두드러지지만 그래 봐야 4%를 넘지 못한다.
아주 드문 예외가 베트남인데, 응우옌(Nguyen)이 40% 가까이를 차지한다. 응우옌은 앞서 말했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베트남 최후 왕조 이름이기도 하다. 같은 성을 쓴다고 해서 유전자 구조까지 같은 건 아니다. 다른 핏줄이 섞인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몇몇 성씨가 많아진 이유도 20세기 초반 새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많은 사람이 이들 성을 집중 선택한 데 있다. 이전까지는 국민 절 반 가량이 성이 없었다. 지금 인류에게 가장 많은 공통 유전자를 퍼뜨린 인물로는 칭기즈칸이 꼽힌다. 유전학자들은 대략 2천 만명 정도가 그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이 분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문인이다. 2015년에는 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우표까지 발행했었다. 그가 베트남 이두 문자에 해당하는 쯔놈으로 쓴 "쯔엔 끼에우"라는 시는 최근 세계기록협회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 기록을 보유한 문학작품으로 선정되었다. 현재까지 모두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2007년에는 이 끼에우 이야기가 SAIGON ECLIPSE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의 <국제시장> <쭈옌 끼에우(翹傳)> -응우옌 주 지음 안경환 역으로 출간되었다.
아직 안 읽어 보았는데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고 한다. <여주인공인 투이 끼에우가 온갖 산전수전을 겪다 원수들에게 복수하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고생길이 파란만장하다. 인신매매 당한 뒤 매춘굴에 팔려가고, 거기서 도망나와 살았나 싶더니 다시 잡혀가고.이번이 마지막이지! 하며 시집만 몇 번을 간다. "이 정도로 불우한 사람이 재기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다 엄청난 풍모의 사내 대장부랑 사랑에 빠져서 예전에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을 소집해서 한 큐에 복수를 하게 된다. 이 지난한 인생사(독서)에 한 줄기 카타르시스를 시원하게 내뿜어주는데, 꽤 살벌하다.>
이 이야기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재수가 더럽게 없는 것만 빼면 완벽에 가까운 투이 끼에우가 고생고생 하는 게 남일 같지 않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시대적으로 레에서 응우옌으로 왕조가 바뀌며 한 차례 몰락하는 고통을 겪은 응우옌 주의 개인사가 깊이 투영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응우옌 주의 아픔은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적어도 당대 베트남인들과 역사적 우연인지 그 후로도 꽤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던 베트남인들에게 특별한 위안이 되는 것이다.
1768년에 태어나 1820년에 죽은 응우옌 주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은 엄청난 혼란기였다. 앞서 살펴본 역사, 레 왕조가 실질적 힘을 잃고, 찐과 응우옌 가문이 북남으로 갈라서 대립했다. 그러다 떠이썬 반란이 일어나 전국이 한 차례 뒤집혔고, 1789년 청나라와도 전쟁을 벌였다. 그 후 응우옌 왕조가 들어섰지만 매우 불안정했다. 계속되는 전쟁에 추측건대 당시 민중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을 것이다. 남자들은 군대로 끌려갔을 것이고, 세금도 어마어마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닷길이 널리 이용되며 해적이나 지방 군벌 집단에 의한 가혹한 수탈과 인신매매 등도 적잖았을 것이다. 특히 남부의 경우 참파인과 캄보디아인, 그리고 새로 진출한 화교들에 바닷길을 이용한 말라카 뱃사람들과 서양인들 등등이 어울려 세기말적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 투이 끼에우는 당시 고난의 시기를 보낸 민초들의 삶의 파편들을 하나로 모아놓은 작품이 아닌가싶다. 어쨌든 이 작품이 더 생명력을 얻고 꾸준히 민중들에 의해 읽혀졌단 사실은, 애석하지만 그 뒤에도 베트남인들이 꽤나 고생했다는 반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지 싶다. 또 하나의 명작 영국의 작가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1891 발표) 테스가 또 같은 맥락이 아니었던가. 명작은 시대를 떠나 두고두고 읽히고 기억 속에 남는다. 사랑과 이별, 슬픔, 허망과 좌절은 인류에게서는 마음속에 전설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아무리 달라져도 불변의 진리로 영원한 이는 인문학이 갖는 특혜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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